퇴사 후, 일상
한동안 '퇴사를 하면'은 행복한 주문이었다.
여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상황은 상상만으로 천국이었다.
막상 그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자,
생각보다 시간이 많다는 게 아니, 시간만 많다는 건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걸 체감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돈은 늘 걸림돌이었다.
'굳이'라는 말로 욕구를 재웠다. 버킷리스트 개수는 점점 줄었다.
몇 개 안 남은 버킷리스트는 점점 '돈 안 드는'행위에 집중됐다. '돈을 못 써서..'라는 다소 초라할 수 있는 상황을 즐거운 일상으로 탈바꿈하는 방법은,
욕구보다 낭만을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소풍 가서 도시락 먹기"였다.
"이렇게 더울 수 있다고?"를 입에 달고 살던 여름을 지나,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면서 실내보다 야외로 나갔다. 청계산을 갔을 때, 어린이 대공원을 갔을 때, 한강 공원을 갔을 때 입버릇처럼 '여기 도시락 싸와서 먹으면 좋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릴 적 가족과 야외로놀러 가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던 시절 향수가 가을바람을 타고 코끝을 자극한 탓이다. 한 번쯤 그때처럼 도시락을 먹고 싶었다.
그리움이 짙어지면 때론 낭만이 된다.
미루고 미루다 야속할 만큼 짧은 가을이 다 지나가 버릴 것 같았다. 비가 멈추고 오래간만에 햇빛이 난 오후,드디어 마음이 동했다. 전날 비가 와서 아직 날이 쌀쌀해서 멀리는 못 가고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산책로로 목적지를 잡았다. 집 앞 작은 산 초입부에 산책로가 형성되어 있고, 곳곳에 테이블이 있다. 날씨 좋은 봄날, 이곳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는 분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오늘 소풍 가자!"
나보다 이런 낭만이 덜한 남편은 뜨듯 미지근한 눈빛과 반응을 보이지만,
상관없다. 오늘은 나도 고집 좀 부려보자!
반대의사가 나오기 전에 얼른 행동에 옮겼다.
오늘 메뉴는 유부초밥과 김치 조금, 뜨끈한 육수 조금, 요구르트 2개, 귤 2개. 믹스 커피는 보온병에..
마치 그 시절 엄마가 부랴부랴 도시락 챙기던 장면을 재현하듯.
돗자리를 들고 가긴 민망한 장소라, 모아둔 은빛 아이스팩을 챙겼다.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니 고맙다.
가방에 차곡차곡 도시락도 넣고, 커피도 넣고, 후식도 챙기고, 책 한 권과 노트 한 권을 챙기다 보니 소풍 가는 아이처럼 설렜다. 머릿속은 이미 나풀나풀거리는 봄바람 속에 꽃구경하며 도시락 먹는 환상이 펼쳐졌다
현실과 환상은 한 걸음 차이라고 했던가...
대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현실이었다. 바람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살짝 '이 날씨에 소풍 가는 게 맞나?'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들뜬 발걸음을 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멀리 가진 못하고 초입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평일 오후라 한산해서 좋았다.
"여기 좋네. 꺼내볼까?"
옛 추억 삼아 보자기에 싼 도시락을 꺼냈다. (사실 제대로 된 도시락 통이 없다.. )
한껏 기대에 부풀어 도시락을 올리고 보자기를 푸는데, 근처에 비둘기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우린 비둘기를 엄청, 많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싫어한다.
(조류의 눈을 무서워하는데 특히 비둘기 눈이 무섭고, 날갯짓할 때마다 온갖 먼지가 날리는 기분이 든다.)
아직 도시락을 풀지도 않았는데, 식초 냄새를 맡은 건지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몸은 경직되고, 시선은 내내 비둘기를 향한다.
"어어.. 옆에 온다.. 온다.. 어떻게 해.. 내 발밑에 온 거 아냐?"
"옮길까?"
"...... 아냐.. 이 자리가 좋지.. 그냥 먹자."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비둘기가 공격할 건 아니니까.‘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느껴질 리가 없다. 10분도 못 버티고 결국 장소를 옮겼다. 비둘기가 안 보이자 마음이 놓였다. 겨우 긴장을 풀고 풍경을 보면서 유부초밥을 한 입씩 먹었다.
겨우 소풍 분위기를 느끼려던 찰나, 익숙한 비둘기 한 마리가 다시 근처에 다가왔다. 아까 그 비둘기!!
옆 테이블을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바로 지나치더니 우리 테이블로 걸어온다. 눈치를 보는지 슬금슬금 걸음 속도를 늦추더니. 테이블 근처를 맴돌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긴장한 상황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까지 테이블 위를 걸어 다녔다.
"어어.. 여기 벌레 있다."
"여기 휴지."
벌레를 살짝 휴지로 잡아 날려 보냈면서 직감했다.
오늘 소풍은 이미 망쳤다고.
허탈한 표정으로 도시락을 주섬주섬 다시 쌌다.
산자락 아래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이미 이 모든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비둘기가 원망스럽다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람도 분다.
"집에 가자"
집으로 가는 길 애써 웃으며 말했다.
"밥은 집에서 먹어! 도시락은 실내에서만 먹는 거야. 도서관 휴게실에서나 먹어."
"우린 마음은 자연인인데, 몸이 도시인인가 보다."
그랬다. 자연은 좋은데, 비둘기가, 모기가, 벌이 무섭다. 그들도 결국 자연인데 말이다. 그래도 그들까진 사랑하진 못하겠다. 집에 도착해 남은 밥을 TV와 함께 먹었다. 편안했다.
언제나 낭만보다 현실의 힘이 강하다.
다음부턴 야외에선 밥을 사 먹기로 했다.
퇴사하기 전, 퇴사는 낭만이었다.
야외에서 도시락 먹는 상상은 낭만이었다.
이 정도면 낭만 깨기 프로젝트다.
역시, 낭만은 낭만으로 남아있을 때 더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