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을 내려야 할 때, 나는 늘 같은 선택지를 반복했다.
할까 말까.
항상 이분법이었다.
선택지는 둘 뿐이고, 그 하나에 인생 전체가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점점 더 무서웠다.
결정을 미루면 미룰수록 마음은 지쳐갔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크고 작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중에는 인생의 방향을 바꿔버릴 만큼 큰 결정도 있다.
30살이 되었을 때, 나는 그런 갈림길에 서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후회 없는 결정을 하고 싶었다.
막연히 '이 일을 계속할까 말까'에서 벗어나 다르게 접근해 보기로 했다.
처음 한 일은 검색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인터넷을 뒤졌다.
수많은 직업이 쏟아졌지만,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이제 시작하기 늦은 일
내가 하기엔 어려운 일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낸다면 더 멀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방향을 바꿨다.
선택하지 말고 먼저 지워보자.
지금 돌아보면, 뭐든 시작할 수 있었던 나이지만, 그때는 새 출발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생각을 바꿨다.
'할까, 말까'로 결정하지 말자.
일단 적어보자고.
1단계. 일단 적기
현실성은 잠시 접어두었다.
내가 어떤 걸 하고 싶은지 스스로도 몰랐기 때문이다.
일단 생각나는 모든 걸 적었다.
심지어 우주비행사도 적었다.
중요한 건, '될지 안 될지'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 뭐가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2단계. 보류 이름표 붙이기
정말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건 '보류' 딱지를 붙였다.
왜 불가능한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으면 그건 목록에서 제외.
그렇지 않으면 남겨둔다.
예: 우주비행사 (보류)- 이유: 너무 낯선 영역이라 새 출발이 어려움.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왜 보류하는 지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가'였다.
이유가 애매하면 남겨뒀다.
성급한 판단이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3단계. 확장 가능성 탐색.
'보류'라고 다 버릴 필요는 없다.
확장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살려본다.
우주비행사를 예로 들면,
우주 콘셉트 장난감이나, 우주 배경의 그림, SF 콘텐츠의 아이디어로 확장할 수 있다.
직업이 아니더라도 '내 관심이 머무는 지점'은 소중했다.
그건 언제든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으니까.
4단계, 묶기.
이제 항목들을 비슷한 성격끼리 묶는다.
-영화 시나리오, 드라마 대본, 에세이= 글쓰기
-풍경화, 이모티콘 만들기 = 그림
-목공, 가죽 공예= 손을 쓰는 작업
정리가 되니 머릿속이 조금 맑아졌다.
마구 뒤엉켜 있던 관심사들이 뚜렷한 덩어리로 나뉘기 시작했다.
5단계. 방법 정하기.
배울 수 있는 건 배우고,
그렇지 않으면 간접적으로라도 '접촉'해보는 데 의의가 있다.
기준은 단 하나,
시도했을 때, 내 마음이 어떤지.
예를 들어, 프리다이빙 강사가 궁금하다면
그 직업에 대한 다큐나 브이로그를 본다.
보고 나서도 여전히 호감이 간다면 학원비, 준비기간 등을 고려해 본다.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 따진다.
막연한 '해보고 싶다'는 실제 행동으로 연결될 때 의미가 생긴다.
6단계. 경험하기
선택지를 좁히고 나면 이제 실행이다.
영상, 책, 단기 수업, 체험 프로그램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활용했다.
실행은 간단해야 한다.
실패라는 단어를 만들지 않을 정도로.
7단계. 결론 도출.
경험한 것들을 다시 정리했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지워지는지를 판단했다.
재미가 없었다, 피로했다,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기록하고, 판단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 방식으로 첫 번째로 해본 건 조금 엉뚱하지만 '포토그래퍼'였다.
사진 자격증 책을 샀고, 핸드폰을 들고나갔다.
그런데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찍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책도 첫 페이지만 넘겼고,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냥 미련을 지우고 싶었을 뿐이구나'
그런 경험이 이후 몇 번 반복되고, 남은 것이 '글과 그림'이었다.
글쓰기를 우선순위로 정했다.
하지만 '글쓰기'역시 범위가 넓었다.
그래서 다시 잘게 쪼갰다.
어떤 장르를 쓰고 싶은가?
어떤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가?
내가 택한 건 '직접 공부'였다.
직장을 다니며 사이버 대학에 등록했고, 1년 동안 배웠다.
그 과정에서 확신이 생겼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여전히 작가라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알게 됐다.
선택의 핵심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을 지워내느냐에 있다.
막연한 열망과 어정쩡한 미련으로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하나씩 덜어내고 나서야
진짜 하고 싶은 게 또렷해졌다.
결정은,
애매한 것들을 모두 지우고 난 뒤에야 비로소 또렷해지는 법이다.
아직도 가끔 혼란스럽다.
글쓰기와 그림이라는 큰 영역 안에서 또다시 무수한 선택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확신이 있다.
나는 이 방향으로 걸어가도 괜찮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막연한 미련을 내려놓고 나니 삶도 조금은 정돈된 느낌이다.
결국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무엇을 할까 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까에서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걸 찾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걸 하나씩 지워가는 일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 맞는 방식이었다.
꿈을 이루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