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체력이 부족한 상태

40대에 겪는 변화들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닌 것 같아.

by 감정 PD 푸른뮤즈

“너 아프다던데 괜찮아?”

“건강이 최고야.”


40대가 되니 친구들과의 대화가 달라졌다. 건강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이제는 그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건강이라 하면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포함된다. 40대의 우울증, 40대의 사춘기 같은 말이 장르처럼 퍼진다. 종합해 보면, 40대부터는 몸도 마음도 노화가 시작된다. 인생의 첫 위기 아닌 위기를 맞는 시기. 아직 젊다고 하기엔 뭔가 버겁고, 늙었다고 하기엔 너무 애매한 나이. 젊지도 늙지도 않은, 이 어중간함이 40대였다.


문제는 물리적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체력도 서서히 바닥이 난다.


현실이 힘들고 괴로우면 여행을 떠올린다. 좋은 공기 마시고, 좋은 풍경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바람 쐬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풀린다.
그런데 막상 날짜를 잡고, 숙소를 고르고, 기차표를 예매하려 하면 벌써부터 지친다.

'누가 대신 다 해주면 좋겠다'


삐빅.

이 날짜가 좋음.

이 숙소가 가장 가성비가 좋음.

기차표 예매 완료.

출발만 하면 됨.


뭐 이런 거 없을까... 생각하면서 헛웃음을 짓는다.

막상 뭔가 다 정해져도 순순히 안 따를 거면서...


여행을 가고 싶은 사람의 태도가 맞는가...

한참 생각하다 알았다.
아, 지금 나는 여행조차 ‘일’처럼 느끼고 있구나.

여행 가기 전 설레는 과정들이 이제는 의무 같다. 숙소를 고르고, 기차 시간을 맞추고, 맛집을 찾아보는 일들. 대충 하자 해놓고도 결국 꼼꼼히 따진다. 애써 계획을 세워 떠나도, 돌아오는 길에는 똑같은 말을 하게 된다.
“집 나가면 고생이야.”


여행은 분명 휴식인데, 언제부턴가 나를 더 지치게 한다.

삶이 팍팍한데 여행까지 팍팍해지는 기분.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오는 여행 어때?”


맛집도, 관광지도 다 생략하는 여행.

컵라면 먹고, 바다만 보고, 커피 한 잔 하다 오는 여행.

그저 조금 덜 채우고, 조금 덜 욕심부리는 여행.


오히려 그런 여행이 지금 내게 맞는 휴식일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여행만 그런 게 아니다.

때론 응원의 말조차 벅찰 때가 있다.


“힘내자, 잘 될 거야.”


함께 '으쌰으쌰'하던 친구가 말했다.


“이상하지? 응원을 들으면 더 힘들 때가 있어.”
“맞아. 에너지 넘치는 말을 받아들일 때도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지금 그게 없잖아.

그 에너지가 있으면 굳이 억지로 힘낼 필요도 없는 건데"


그래서 나는 요즘 친구가 힘들다고 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괜찮을 거야’라는 위로조차 공허할 때가 있으니까.

그저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지만, 그것도 만나서 가능했다.

통화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어 답답하다.

겨우 내뱉는 말이 “그래, 그렇지…”일 때도 있다.


사람 만나는 일도 마찬가지다. 약속을 잡을 땐 설렌다. 어디서 만나서 뭘 먹을지 얘기하는 시간은 즐겁다. 그런데 막상 약속 당일이 되면 벌써 기운이 다 빠져 있다. 나가기 전부터 피곤하다. 괜히 아픈 데는 없는지 몸을 살피고, 오늘은 좀 쉬어야 하는 게 아닐까 변명을 찾는다. 꾸역꾸역 나가더라도,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귀가 시간을 세고 있다. 물론, 막상 나가면 또 좋다. 그러니 반복하는지도 모르겠다.


문자 하나 답장하는 것도 벅찰 때가 있다. 길게 쓰려다 이모티콘으로 대체할 때가 많다.

쉬려고 TV를 켜놓고도 줄거리 따라가기가 귀찮아 드라마는 금세 꺼버린다. 대신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예능이나 유튜브만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다. 분명 쉬고 있는 건데, 이상하게 쉰 것 같지가 않다.


아무래도 체력도, 정신도 예전 같지 않다.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정답은 모르겠지만, 최대한 내가 에너지가 언제 어떻게 채워지는지 세심히 살핀다.


가볍게 집 근처 산책을 하고,

드립 커피를 내리며 멍 때리고,

좋아하는 그림 에세이를 보고,

맛있는 주전부리를 늘어놓고 웹툰을 보는 시간.


결국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면서 좋아하는 것을 가볍게 즐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정신적 체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만족의 기준을 조금 낮추는 것.


그게 내가 찾은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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