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INF.E

리모델링 미

by 감정 PD 푸른뮤즈

점점 머릿속이 거미줄처럼 엉켜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안 하면 안 되는 일,

오늘 꼭 해야 할 일, 언젠가 해야 할 일까지..


생각들이 겹겹이 쌓이다 보니

To-do list를 한 장에 적는 것조차 버거워 조각조각 잘라 따로 적어야 할 지경이 됐다.


정리가 안되고, 체계가 잡히지 않고

머릿속이 늘 복잡한 상태가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루틴과 정리, 체계를 잘 다루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됐다.


img1.daumcdn.jpg

처음 계획이라는 개념을 인식한 건 초등학교 방학계획표를 만들던 때였다.

방학 첫날, 컴퍼스로 원을 그리고 알록달록 색을 칠하며 계획을 세웠다.


숙제를 밀리지 않고 끝내기

못 따라가던 과목 복습하기

책 읽기, 피아노 치기


계획표는 금세 색깔로 가득 찼고

그 자체만으로도 꽤 뿌듯했다.

하지만 늘 같은 지점에서 어긋났다.

기상시간.


늦잠으로 하루가 밀리면서 계획은 하나둘 무너졌고

일주일도 안돼 흐지부지됐다.


초등학생 때부터 20대 때까지.

나는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계획을 세워도 소용이 없는 사람이구나"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시간을 활용하는 법이 아니라,

계획을 세우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왜 계획이 필요한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시간을 쪼개 나열했을 뿐이었다.


실패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게 문제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계획을 멀리했다.


그 경험은 점점 하나의 정체성으로 굳어졌다.

'계획과 안 맞는 사람'

'계획대로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


계획과 루틴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막는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계획, 체계, 루틴.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었다.

나는 늘 즉흥적이었고, 그 즉흥성은 때론 낭만이었다.


예고 없이 여행을 떠나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삶.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내 인생의 한 장면 같았다.


"인생, 뭐 그렇게 딱딱하게 살아?"


그런 내가 변화를 느낀 건 마흔이 된 이후다.

시간에 쫓기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느슨하게 흘러가던 일상이 버거워졌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관리하지 못한 시간에 내가 쫓기기 시작하자 바로소 '시간을 관리하는 삶'의 필요성이 실감 났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나는 내 성향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가치관을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가치관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삶의 방향도 달라진다.


문제는 이미 가치관은 바뀌었는데 생활은 그대로였다는 점이다.

그 괴리가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시간관리, 루틴, 정리에 관한 책과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된다 안된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몸에 새기는 과정이 필요했다.


실패는 반복됐다.

작심삼일, 포기, 다시 작심삼일...


계획적인 삶이 정답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실패하는 나 자신이 어딘가 뒤처진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0 아니면 100이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


0 아니면 100이라는 이분법을 버리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을 찾는 것.


생각보다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요리를 레시피대로 하는 게 아니라

내 입맛과 재료에 맞게 조절하듯,

계획과 루틴도 그렇게 다루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방식을 하나씩 정리했다.


<문제>

루틴이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루를 시간으로 쪼갠 계획표는 맞지 않는다.

새벽 4시 기상은 비현실적이다.

아무 계획 없이 살면 하루가 증발한다.

주말과 여행도 무계획이면 아쉬움만 남는다.


<나에게 맞는 방식>

루틴이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 꼭 해야 하는 일, 오래 해야 할 일만 루틴으로 만든다.


시간단위 계획표는 안 맞는다.

: 시간단위 계획은 필요할 때만 임시로 짠다.

예를 들어, 약속시간까지 3시간이 남았을 때, 30분이 남았을 때

소요시간을 생각하며 대략 정해 본다.


새벽 4시는 포기

: 기상 후 2시간 확보하는 게 핵심.

시간대보다 집중이 중요하다.


계획 없으면 하루가 증발한다

: 너무 디테일하지 않게 오늘 꼭 해야 할 일만 일단 잡는다.


주말, 여행도 무계획이면 아쉬움만 남는다

: 큰 틀만 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리고 절대 무리한 계획을 짜지 않는다.

'전시보고, 근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오기' 정도.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면 만족도는 높아진다.


어느 날 남편에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P도, J도 아닌가 봐"


남편이 대답했다.


"그냥 효율적인 걸 좋아하는 거야"


효율성

그 단어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계획적이지 않아도 괜찮고,

즉흥적이지 않아도 괜찮은 삶.


체계도 아니고 즉흥도 아닌,

효율성을 쫓는 삶.

새로운 정체성.

그 이름을 붙이고 나니 앞으로 살아갈 방식이 조금 또렷해졌다.


나는 이제 내 멋대로 (effectiveness(효율)의 e )

INF.E 다.


매거진의 이전글'무엇을 할까 보다, 하지 않을까'가 필요했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