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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룹LOOP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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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안 Nov 10. 2022

룹(LOOP)

#10

  찢지 않고 뭉개지 않고 원형을 보존해서 살릴 수 있는, 그 시대의 존재성을 살리고 싶어. 닳아지는 사라지는 잊혀지는 이 모든 것을 살리는 게 관건이야. 조금 자신감이 붙은 나는 연수에게 작품 취지를 설명했다. 연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서사가 주제에 와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스토리를 어떻게 구현할지가 문제였다.

  작품을 시작하면서 나는 노인이 매번 거절당했던 극장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밤거리에는 레트로 풍의 가요가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극장 앞은 늘 그랬듯 조명이 눈부시고 화려했다. 2층의 금은방이 상가의 조명과 어울려 번쩍였다. 노인이 없는 거리는 북적거렸지만 그가 없는 빈자리가 밤의 여백을 따라 휘휘했다. 다시 생각의 꼬리는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여전히 그가 왜 입장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간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수도 없는 시간을 거절당했고 수많은 사람을 스쳐 보냈다. 노인이 간청했던 엑스트라 중에는 살아 있지 않은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만큼 긴 시간이었다. 노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과 극장 속으로 나란히 걸어 들어간 시간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떤 시점부터는 찢어진 티켓보다 온전한 두 장의 티켓이 수두룩했다. 노인이 거절당한 시간이었다.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시간,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그때가 노인의 기억 속에서는 매일 오롯이 되살아나게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났던 것일까. 내 눈앞에 사랑하는 이의 팔짱을 끼고 입장권을 손에 쥔 젊은 남녀의 표정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두 연인이 눈이 시리도록 함빡 웃으며 그렇게 지나가고 지나갔다.
  
  얇은 철판보다는 알루미늄판에 광석을 입힌 공간 지지대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만들었다. 입체각을 따라 몇천 장의 입장권을 카드 섹션처럼 입체 효과를 살리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입장권마다 녹은 마가린에 입수를 시켰다가 건져 내기를 반복해야 했다. 마가린만으로 향이 부족한 것 같아 풍미를 더한 버터도 겸해 향을 더했다. 사실 노인에게서 풍긴 향이 버터 향인지 마가린 향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이 작품의 색다른 위트라면 후각이었다. 길거리 토스터에서 나는 냄새는 싼 마가린이 대부분이었다. 안타까운 건 내가 맡은 향과 비슷해도 정확한 냄새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보면 시대를 아우르는 영화 입장권이지만 멀리서 보면 순간의 반짝임을 담고 싶었다. 입장권의 색깔이 다양했기에 빛이 반사되는 결정들에 입체적 음영을 포착해 담아냈다. 천장에 매단 기다란 두 줄을 따라 2미터 50센티미터의 다이아몬드 입체각을 세웠다. 아래 좌우는 거치대를 밑에서 쏘듯이 세워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는 팬을 타이머에 맞춰 돌아가게 했다. 입장권이 바람에 산들거리면 그럴 때마다 마가린의 풍미가 슬쩍슬쩍 풍겨 나왔다가 스러졌다. 부피를 떠나 광석의 무게가 흐르는 시간의 무게감을 대변했다. 입체각의 맨 아래에는 핸드폰을 붙였다. LOOP이라고 적힌 글자가 지워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간직하고 싶은 기억은 때로는 우리를 갇힌 시간으로 데려간다. 그 자리를 계속 헛돌다 보면 어느덧 선명했던 기억엔 반짝거리는 필터가 씌워진다.
  노인은 오늘도 여지없이 거절당하는 마임을 계속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금요일과 토요일에 극장을 찾았다. 거북목을 한 그가 입장권을 손에 쥐고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고 있었다. 네온사인 간판에는 〈여인의 향기〉 재방영을 알리는 포스터가 반짝였다. 영화를 검색하니 생각보다 별점이 높았다. 웬만한 고전 영화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저녁 첫 상영 시간이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여지없이 그는 나에게 극장표를 내밀었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걸어가는 그 순간만큼은 왜인지 모르게 슬로우를 건 것처럼, 노인의 모습이 천천히 다가왔다. 여지없이 그는 나에게 극장표를 내밀었다.
  아가씨, 티켓이 두 장인데 영화 같이 보실래요?
  네. 같이 보죠. 입장표 주실래요?
  네온사인의 불빛이 노인의 눈과 내 눈을 동시에 통과했다. 두 장의 입장권을 쥔 노인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한 장의 입장권만을 손에 쥔 채 남은 한 장의 입장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노인과 같이 극장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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