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해 Mar 22. 2023

영어가 뭐라구

엄마생각2

아이도 나를 닮아 겁이 많다.

어미가 겁 많은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에 아이가 무서워하는 것은 강요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이나 야생의 고양이 간혹 동네 산책로에 나타나는 너구리 같은 동물을 무서워하진 않는다. 아이의 공포는 주로 스스로 신체조절을 능숙하게 할 수 없을 때였다. 정확히는 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상황에 겁을 냈다.     

 

5살이 되니 유치원 친구들 대부분 네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아이에게도 멋진 레드 자전거를 선물해 주었는데 도무지 발을 굴리지 못했다. 심장이 벌렁이는 공포심이 가득하니 페달 밟는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남편과 나는 한 주 내내 가르치다 ‘바보인가...’라는 자조적 농을 주고받으며 포기했다.


친구들이 네발을 타고 달릴 때 우리 아이는 그 뒤를 쫓아 뛰어다녔다. 항상 숨차고 땀에 젖어있어도 아이는 자전거를 타겠다 말하지 않았다.   

   

“힘들지 않아? 친구들 다 타는데 속상하지 않아?”


“아니 재밌어. 나 달리기 엄청 빨라”


“네가 괜찮음 됐어. 달리다 힘들면 물 마시러 와”   

  

그렇게 2년 넘게 새 자전거는 집 현관서 자리만 차지했다. 늦게 배우면 빨리 배운다더니 자전거도 그랬다. 7살 가을 드디어 네발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맛을 느끼니 두 발 자전거는 그래도 너~~~~무 늦진 않게 성공했다. 유치원보다 또래 많은 학교에 가보니 두발자전거로  날아다니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우리 집 아이처럼 겁 많은 친구들 혹은 운동신경이 더딘 친구들이 구성원에 여럿 있어 위안이 되긴 했다.

    

자전거는 이리 넘어갔는데 수영은 계속 거부했다. 한 번은 리조트 수영장을 이용하는데 아이는 구명조끼를 입고도 수영장 난간을 놓지 못했다. 그 모습에 고민 없이 수영 배우기는 밀쳐뒀다. 자라면 담대해지는 것을 알기에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 기다리다 올해 초6이 된 아이에게 수영을 다시 권했다. 사실 권하기 이전 작년 지인가족들과 수영장이 있는 펜션에 놀러 간 적 있다. 초1, 초4였던 지인 가족 아이들은 물개처럼 수영을 즐겼다. 그 모습이 자극되긴 했는지 아이 마음이 동하는 게 보여 서둘러 미끼도 던졌다. 토요일 오전 수영을 배우면 다녀와 영화 한 편 보기.      

서로 손해 날 일 없는 합의 후 지금은 아이가 수영을 배운 지 3개월째다.

그저께도 약속대로 아이가 원하는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를 함께 봤다.

한 참 보는데 아이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자막이 있어 내용 파악이 안 된 것도 아닌데 나와 남편은 조용했고 아이만 웃었다.      

궁금했다. 내가 무얼 놓친 건가.    

  

“왜 웃었어?”


"호프가 스콧에게 왜 늦게 나오냐고 물으니 스콧이 타고 다니는 개미 이름 짓느라 늦었다고

그래서 호프가 이름이 뭐냐고 하니 스콧이 ‘율리시스 S. 그래-앤트’라고 했어"


“음. 그게 왜 웃겨?”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미국 대통령 이름이잖아”     


아이 말에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북전쟁당시 북군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던 미국의 18대 대통령까지야 내 알바 아니다. 내 나라 역사도 뒤섞여 제대로 대답 못하는 판에 미국 역사까지 챙겨야 하나 싶지만 ‘화끈’은 상식이 아닌 괜스레 영어가 밀린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있었다.

뭐라 하는 이도 없는데 나는 그 같은 감정을 휘석 시켜보려 남편을 끌어들였다.      


“자기도 못 웃었지 큭큭큭큭”


          



엄마는 7남매 맏딸로 태어나셨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라더니 할아버지는 알뜰히도 살림에 엄마를 보태셨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몰래 치렀지만 할아버지의 허락까진 얻어내지 못하셨다. 학교 가야 할 동생들이 줄 줄인지라 깡 시골 맏딸은 식모도 돼야 했고 보모도 돼야 했다. 그리 산 세월에 한을 서려하진 않으셨다. 고운 얼굴에 인생의 굴곡하나 없어 보이셨다. 그만큼 엄마는 잘도 감추셨다.

     

하루는 평소대로 동네 뒷산에 오르는데 한 세련된 아주머니가 말을 건네 오셨단다. 엄마의 고운 태가 맘에 드신다며 산에서 연락처를 주고받고 동네 친구사이가 되셨다. 외모만 고은 엄마와 달리 그분은 삶이 비단길이셨고 대학도 나오셨다.      


나이 들어 만난 친구라 그런지 학벌얘기 나올 일 없었고 삶의 경험치 두텁고 지혜가 있으셨으니 수다는 그럭저럭 잘 통하신 듯했다. 친분을 쌓아가던 날 그분은 당신의 모임에 엄마도 함께 가보자 권하셨다.      

그렇게 모임이 있던 날 엄마는 한껏 멋을 내셨다. 생글 웃으며 나가시는 모습은 영락없는 여고생처럼 보이셨다. 카페서 파스타 드시기로 했다는 엄마 말에 내가 가자할 땐 소화 안된다고 절레절레하시곤 했기에 섭섭하기까지 했었다.      


하얀색 원피스에 브로치 달고 목련처럼 우아하던 엄마 모습이 선명하다.

아마도 모임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의 얼굴색과 너무 대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색이 되다.

씁쓸하다.

난처하다.

아님 마음이 저리다.


     

그 복잡한 심경을 한 단어로 맞힐 수 있을까.     

엄마는 좋지 않으셨고 그 사연에 나는 슬펐다.      


카페는 집에서 멀지 않았다. 그 앞 추어탕집도 자주 갔었고 골목 돌아 위치한 순대국밥 집도 몇 번 갔었다.     

하지만 엄마는 카페를 찾지 못하셨다고 했다. 한 참을 가도 카페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셨다. 돌고 돌았고 언제 오냐는 재촉 전화에 당황스런 마음만 급해졌다 하셨다.  

    

엄마도 나도 생각지 못했다. 간판이 순 영어로만 되어 있을 줄.

엄마는 영어 까막눈이셨다. 친구분께 전달받은 약속장소는 엄마의 종이엔 한글로 적혀있었고 간판은 영어로 되어있었으니 이리보고 저리 봐도 모래알 속 보석 찾기 만큼 난감하셨을 테다.    

  

안 봐도 그려졌다. 그 예쁜 옷을 입고 점점 쳐지는 무력감에 놓였을 엄마가.

엄마보다 내 속이 쓰렸다. 아니 엄마가 더 쓰렸겠지만 엄마는 ‘에이’ 하며 고개를 흔들거린 표현이 다셨다. 어찌어찌해 겨우 찾아 들어간 카페서 차마 영어간판 못 읽어 늦었다는 말은 못 하셨다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선생을 자처했다.

공책에 알파벳을 크게 쓰고 엄마에게 읽고 따라 쓰도록 했다. 취학 전 한글을 엄마에게 배웠는데 그 방식 그대로 엄마에게 은혜 갚는 제비마냥 돌려드리려  애썼다.  

    

나도 그랬을까?


엄마의 익힘은 너무 더뎠다. 대문자를 천천히 떼고서 이제 끝났다 싶은 엄마에게 소문자를 들이밀었다. 카페 모임 후 집에 들어온 엄마의 표정을 다시금 봤다. 기겁하며 진심 당황하시던 모습. (나는 어찌나 엄마가 귀엽던지...)     


잔소리를 해도 엄마의 소문자는 내 아이 자전거만큼 더뎠다. 그 사이 엄마는 그 모임과 멀어지셨다. 아쉬움이 있으셨을지 아닐지는 상관없다.      


근래 김미경의 강연중 인상 깊게 들은 것이 있다. 어떤 이유로 헤어졌든 끊긴 인연에 대해 미련을 가질 필요 없다는 것이다. 끝난 인연은 그런대로 그때까지 서로에게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으며 연을 다한 것이니 자연스레 보내면 된다는 것이다.  

    

엄마에게 그 모임이 그랬다.

덕분에 알파벳은 마스터하게 되셨으니 분명 받을 것은 받아내셨다.



그럼 된 것 아닌가.

매거진의 이전글 겁 많던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