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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잉홍 Mar 23. 2024

선명하고도 불쾌한

꿈.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구체적인 것 까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들이 있다. 인지하기 전 사기임을 보여준 예지몽과(안타깝게도 난 이 경고를 무시하고 흔한 사기에 에피소드 하나를 더하게 되긴 했지만) 태어날 아기의 성정을 보여준 태몽이 그 중 대표적이다. 허나 지금 내가 쓰려는 건 그 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불쾌했고 남편은 억울해 했던 원에 대한 꿈 이야기다. 

    

원과 부부로 인연을 맺게 된 과정을 풀자니 사기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저런 투자에 관심을 두면서 지인 소개로 지역주택조합에 지분 투자를 했다. 몇 달을 지켜보다 지지부진한 사업에 가능성이 희박해 보여 투자금을 회수하는데 부동산 중개업자가 내 자금의 일부를 편취하고 잠적해 버렸다. 몇 년간 모은 몇 천의 돈이 그 놈과 함께 사라져 버리니 왜 그리 알뜰살뜰 살았을까 스스로가 미련스럽기만 했다. 이래도 한 생 저래도 한 생인데 하고 싶은 거나 하자 싶어 회사에 사표를 쓰고 통장에 남은 삼천만원을 들고 어학연수 갈 준비를 했다. 영어도 능숙해 지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며 그동안 버둥거리며 집착하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보고 싶었다. 그 결심을 실행하는 초입에 지금의 남편인 원이 동아줄이 되어 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잔고가 없긴 그도 마찬가지였으나 그의 시간은 가방끈 길게 전문지식으로 채워 넣었기에 나보다 늦은 시작이었으나 나보다 오래 써먹을 준비가 된 상태였다. 난 그의 구명줄을 아니 그의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결혼식만 하고 유학을 다녀오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사랑은 아직 이었지만 서로를 향한 오래된 호감이 있었다. 시간만 들이면 사랑하게 될 거란 확신이 있었고 그가 내 운명이란 종소리를 들었기에 우리의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빠를수록 이방인으로서 여행도 빨라지니 서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모든 게 뜻대로만 되던 가 결혼 준비 과정에서 가장 스피드하게 찾아온 소식은 임신이다. 아이가 알면 서운해 하겠지만 내 나이에 임신 되었다는 안도감과 왜 하필 지금인가 싶은 아쉬움이 반반이었기에 그때 내 표정은 정말 중립적이었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진 감정표현을 할 수 없는 중립. 사랑보다 운명이 먼저 왔고 연애보다 결혼이 우선되었고 둘만의 신혼은 건너뛰고 곧바로 엄마가 되었다. 내 인생의 페이지가 거침없이 휘리릭 넘어가 버렸다. 

     

원은 그러한 변화에 잘 적응하는 듯 했다. 우리에겐 아직 서로 받아야할 사랑과 주어야할 사랑이 빚처럼 남아있는데 그는 삼십년 원리금 상환 계약서에 사인한 대출자 마냥 여유 있어 보였다. 운명이라 하더라도 둘 사이 안정감이 처음부터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와 나 사이의 교감은 결혼증서 보다 얄팍해 입김에도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가벼웠다. 그에게 말한 적 없으나 난 그랬다. 오직 둘이서만 공유할 추억이 더 있어야했고 그를 더 알아야 했다. 

     

아니 그런 상태로 어찌 결혼의 청약과 승낙이 가능했냐고 물을 수 도 있다. 다른 어느 연애보다 면밀히 상대를 따져보지 않은 건 운명임은 알았다. 그건 헛되다 여겼던 지난 연애경험의 노고를 통해 얻은 노하우 덕이라 해두자. 허나 그렇다 해도 사랑은 금세 차오르는 게 아니다.

 

아이를 알아가듯 그를 알아가야 했고 아이를 사랑하듯 그를 향한 사랑을 키워가야 했으며 동시에 날 향한 그의 사랑도 갈구해야했다. 그는 언뜻 언뜻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긴 했으나 사랑은 귀로 듣는 것으론 채울 수가 없다. 심장에 녹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원과 내겐 그 시간이 부족했다. 사랑해서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책임을 다하는 것은 순조롭고 평안한 모습이지만 결혼해서 사랑하려던 우리 같은 상황에 아이에 대한 책임이 동시에 발생하면 사랑을 가려내기는 더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단기간에 폭우처럼 쏟아지는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느 정도 바라는지 아니 바라는 게 있는지 조차 파악 하지 못하는 듯 했다.

 

결핍된 상태로 적응해 가려니 그 부침이 고스란히 꿈으로 나타났다.

      

편안한 옷차림새의 여인(나)이 방에서 미닫이문을 열고 나간다. 귀가한 서방을 맞이하는 그녀는 들뜬 마음에 버선발로 마루로 나가니 서방은 그녀에게 야릇한 미소 한번 지어보이고 옆방에 든다. 여인은 서방 따라 옆방의 미닫이문을 살며시 여는데 그녀의 서방 품에 다른 여인이 안겨있다. 여인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소리치고 동시에, 난 잠에서 깬다. 

     

꿈이라지만 마음이 상하고 기운이 처진다. 출근 준비를 하는 원을 본다. 하얀 셔츠를 반듯하게 입고 앞코의 적은 먼지마저 털어내고 구두를 신는다. 그는 여전하다. 아니 다시 보니 결혼 전 보다 자신감이 올라있다. 내 머리는 이리저리 쏠려 가닥마다 방향을 달리하고 옷은 환자복만큼이나 헐렁하다. 마음이 더욱 좋지 않다. 그는 더 자라며 나긋이 말하고 볼을 살며시 꼬집고 나간다. 아기는 칭얼대며 깨고 난 꿈을 덮는다.       


그렇게 한 두주 보내고 나면 다시 꿈을 꿨다.      


머리를 올린 채 볼엔 연지곤지 찍고 호롱불에 고개 숙인 색시가 보인다. 밤늦도록 서방을 기다리던 색시는 갑자기 왈칵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서방을 보며 안도 한다. 그러나 눈에 술기운 가득한 서방은 색시를 밀치고 이내 소리쳐 한 여인을 부른다. 굴곡진 몸을 드러내고 하얀 피부의 요염한 여인이 들어와 색시를 본체만체 하며 그에게 안긴다. 분노가 차오른 색시의 불쾌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잠에서 깬다.     


원은 아직 내 옆에서 자는 중이다. 그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나의 뒤척임 때문인지 곤히 자던 아기가 칭얼댄다. 그가 깰까 아기를 안고 거실로 나오며 꿈을 덮는다.           

다시 한 두주가 흐르면 어김없이 꿈을 꿨다.      


건너 방에서 소리가 들린다. 나 아닌 다른 여인의 목소리다. 지난 꿈과 이어지는 내용이 아님에도 꿈에서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급하게 방문을 연다. 그는 벗은 몸이다. 그의 다른 여인도 마찬가지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가까스로 이혼해 라고 내뱉으며 잠에서 깬다.           


그가 옆에 없다. 샤워중이다. 출근 전 언제나 그렇듯이. 샤워를 마친 그는 시끄럽게 머리를 말리고 하얀 셔츠를 입고 구두를 신는다. 다녀오겠다며 인사하는 손에 반지가 없다. 하. 

꿈이 덮어지지가 않는다.     


그날 저녁 드디어 내 비밀스러운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떤 의도가 있진 않고 그저 불쾌함을 털고 싶기도 그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찡그리는 특유의 표정으로 ‘왜 남편을 나쁜 사람 만들어’ 한 줄 말하고 끝이었다. 내 심리 따윈 궁금해 하지도 않는 그에게 ‘반지 끼고 다녀’ 라고 응수한 게 전부다.       


이후로 그는 꽤 오랫동안 반지를 끼고 다녔고 그럼에도 나는 꽤 오랫동안 그가 바람난 꿈에 시달렸다. 한번은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한번은 소리치고 한번은 죽여 버리겠다고 달려들다 어느 날부터 그러든 말든 시크하게 대응했다. 무의식 세계에 나는 기특하게도 나름 진화하고 있었다.      


내 꿈 이야기를 들은 주변의 반응은 그렇게 좋으냐며 놀리곤 한다. 너무 사랑해 집착하는 아내로 비치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런 건가 곰곰 생각해 본 적 있다. 사기 당하기전 경고의 메시지와 같은 예지몽으로 해석하는 거 보다야 낫지 않은가.      


하지만 아니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아직 사랑까지 가지 못해서다. 나는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꿈이 아닌 그를 의심했다. 셔츠만큼이나 반듯한 그의 사회적 책임감은 믿을 만 했으나 그 안의 마음은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믿기 위해 필요한 건 그의 증명이 아니라 그를 향한 내 사랑이 자라나야 했다.      


해를 거듭해 그와 함께한 일들이, 추억이 겹겹이 쌓여 지층을 이루듯 견고해 지면서 꿈속의 나는 분노보단 차분함으로 진화했고 시간이 충분히 채워지고 나니 그의 꿈은 사그라졌다. 그사이 그를 향한 사랑이 심장 가득 피어났고 나보다 더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알았지만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 같은 것이라 난 늘 아낌없이 그에게 준다. 원아 사랑해 그리고 널 믿어 언제나 나보다 더. 라고 말이다. 그럼 원도 가만 받기만 하지는 않는다. 연아 나도 사랑해 하지만 널 믿진 않아. 라고.      

누구의 사랑이 더 큰지는 잴 수 없지만 무의미하다. 필요했던 시간이 채워졌고 내 사랑도 채워졌으니.      


이젠 오히려 귓가의 귀여운 간질거림을 종종 갈구하곤 한다. 그러나 원은 변함없이 내가 갈구하는 것을 알려 애쓰지 않으며 알게 된 들 원하는 만큼 주려 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한결같음 마저 사랑스럽게 받아들여지곤 하니 그가 나의 운명임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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