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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주의자 앨리스 May 26. 2023

희망을 잃은 나에게

작별 인사 by 김영하 감상문

 나는 어떻게 죽게 될까? 길을 가다 쓰러져 심장이 멎을까? 침대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 이어지던 며칠 밤낮을 보내고 나서야 편안한 안식에 들까? 심장이 멈추는 게 엄청 고통스럽다던데 많이 아플까? 

 죽음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매일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문득,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다가 문득 그렇게 내일이 없는 나를 그려본다. 그렇지만 죽음보다 살아내는 일이 더 처절하기 때문에 죽음이 억울하거나 아쉽지 않을 것 같다. 매일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살아있는 순간이 아쉽다. 

 죽는 순간을 상상하지만 죽음보다 죽는다는 사실,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게 자각되기 시작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세 시대를 넘어 150세 시대라고 하지만 자아를 잃지 않고 삶을 유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늘어난 흰머리와 주름, 거뭇해지고 탄력을 잃은 피부. 거울에 비친 늙은 여자가 나 자신이라는 게 무섭다. 거울 보기를 피한다. 외모만 변한 게 아니다. 세탁기를 생각하면서 냉장고라고 말할 때 가슴이 철렁한다. 현관을 나서면서 비밀번호를 되뇐다. 잃어버릴까 걱정되어 핸드폰을 없앨까 고민 중이다. 건망증에 대비하여 반복되는 일상은 습관으로 만들고 있다. 자동차 키와 안경은 늘 같은 자리에 둔다. 

 나이를 먹어가는 일은 미리 알지 못하고 대비할 수도 없는 일, 우산 없이 나간 산책에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피하는 것 같다.  급하게 뛰어가며 낯선 처마 밑에라도 숨어보지만 이미 흠뻑 젖어버린 뒤 같다. 그래도 한 번 젖으면 두 번 젖지 않으니 그냥 비 속을 걸어가도 이제는 아쉽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일까? 

 늙는 게 무서워서, 늙은 채 살아가는 게 겁이 나서 언젠가 일어날 나란 존재의 종말이 아쉽지 않기도 하다. 예정된 종말보다 살아갈 일이 더 시급하니까. 남은 시간 동안 나에게 일어나리라고 기대되는 설레는 미래는 없다. 이제 삶의 의외성은 노화나 질병, 갑작스러운 사건 사고로 인한 불행 말고 무엇이 있을까?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의욕이 생겨나지 않았다. 새로운 지식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이런 지금의 나에게 인류가 종말 하는 이야기, '작별 인사'는 낭만, 희미한 여운, 가슴이 아리고 눈이 시큰한, 소설 그 자체였다.  마지막 인류인 '선이'의 죽음을 지켜본 철이가 사라지는 장면이 그려진 듯했다. 끝이 하늘을 가리며 솟은 나무 사이에 쓰러져 짐승에게 뜯기는 철이, 쇠골 사이로 올라갔지만 누르지 않는 손. 희미해지는 철이 의식은 어떤 감정도,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완전한 침묵과 암흑이 자리하면서 의식 밖은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와 석양으로 물들어가는 숲의 정경.

 지구라는 푸른 별에 마지막 남은 인류는 복제 인간인 '선이'였고 그녀의 소멸을 지켜보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이성을 지닌 마지막 존재가 휴머노이드, 인간형 인공지능 로봇인 '철이'라니 인류의 쓸쓸한 퇴장이다. 

 이야기 속에서 철이는 인류 종말의 마지막 목격자이면서 자신도 소멸해 없어지지만 이야기 밖에 독자라는 목격자가 남아있다. 그 목격자로서 나는 이야기의 마지막이 아쉽고 쓸쓸하면서 아름답고 완전하다고 생각했다. 인류는 위대한 문명을 일구고 철학과 정치를 발전시키고 역사와 예술을 형성한 종족이었다.  역사를 잊고 문명을 쇠퇴시키고 철학을 잃어버리며 영원히 소멸했지만 놀랍고 위대한 종족이었다. 지금은 없고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닌 존재였다. 이런 감성에 젖게 하는 소설이었다. 젊은 날의 열기, 순수, 육체를 잃어버린 중년이 '저런 때가 있었지'하며 쓸쓸하게 그리는 마음, 잃어버린 것을 대하는 마음으로 이야기 속 인류 멸망을, 철이와 선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마음이 낭만과 닮았다고 생각해 버렸다. 

 '최강 야구'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있다. 한 때 최강의 프로 야구선수였고 스타 선수였던 은퇴 선수들이 모여 프로 2군, 대학 야구, 아마추어 야구단과 시합을 하는 프로그램인데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해지는 감동이 있다. 이 역시 잃어버린 것을 대하는 마음, 낭만이 있다.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휴머노이드인 철이가 겪는 갑작스러운 정체성 혼란은 새삼스럽다. 정체성 확립을 위한 이런 고민은 사람이 철학자를 가장 닮는 시기인 십 대에 주어지는 과제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은 없고 문제만 있은 화두들, 나를 나라고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육체인가, 의식인가? 인간 복제가 가능해진 과학의 시대에 어디까지를 인간이라 규정할 것인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숙고하는 사람에게 답이 필요하지 자신의 끝을 자각한 사람에게 답이 필요 없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움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 바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 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 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철이는 생의 유한함이 소설을 읽게 하고 영화를 보게 한다고 했지만 나는 생의 유한해서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게 하였다. '살 수도 있었던 삶'이 이제는 늙고 병든 미래뿐이니까. 새로운 것을 찾지 않으며 새로운 정보를 익히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에 좌절하지 않으려 외면한다. 흥미를 잃는다. 인류나 역사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난 제삼자의 시선을 가진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 욕망한다는 게 무엇인지, 선에 대한 갈망은 잊혔다. 나는 이제 뒤로 물러서야 할 기성세대, 현재를 나아지게 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벗어난 퇴직자, 전경보다 배경이 되어야 할 늙다리이다.  

 '철이'라는 이름은 철학에서 따 왔다지만 만화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생각나는 건 소설 속 심각한 고민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는 인생 주기에 속해 있기 때문일까? '선이'는 인류가 이룬 선, 착함, 윤리를 상징하는 인물이고 '민이' 세상 시류에 휘둘려 삶이 좌우되다 스스로 어쩌지 못하고 힘없이 생을 마감하는 대부분의 民, '달마'는 달마 대사가 생각나는 도, 초월 사상. 이들의 대화와 생각과 감정에 방청객처럼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자신을 본다. 그 논쟁에 뛰어들지 않는다.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다. 희망은 미래를 꿈꾸며 그 미래가 언젠가 오늘이 되는 현실을 맞이하리라는 기대를 가진 이가 품는다. 희망 없이는 삶이 없다. 

 소설이 인류에게, 그의 멸망 앞에 작별 인사를 보낸다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내가 포기하고 떠나보낸 것에 작별 인사를 보내고 있다, 석양에 물든 산과 나무와 하늘이 점점 빛을 잃고 어두워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좀 더 어렸다면 철이가 아빠에게 돌아가기를 염원했을 텐데, 안전한 아빠 품의 아이는 얼마나 평화로운지. 살면서 기쁜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철이는 앞으로 나아갔고 혼돈을 겪고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렸다. 육체를 잃고 의식으로 존재하는 무한의 생을 살지 않겠다고. 유한함으로 생겨나는 갈망을 품은 삶을 살았고 그 삶을 지속하는 존재로서 사라짐을 선택했다. 그는 생의 끝에서 허무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는 충만해졌다. 

 철이의 마지막 선택이 위로가 되었다. 육체의 허약함 앞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생의 유한함을 품을 용기를 주었다. 나의 끝이 충만해지기를 희망한다. 남은 날에 희망이 없지만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하며 여운에 젖을 낭만은 남았다. 늙고 병들어 약해진 선이 곁에서 살아가던 철이처럼, 늙고 병들어 약해지면서 자신을 지켜보면서 살아가고 끝을 맞이하고 싶다.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리고 앞으로 나아간 후에 충만한 끝을 맞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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