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만의 시간과 공간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어린이집 앞에 줄을 선 자동차로 길이 막혔다. 길은 반토막이 되었고 오가는 자동차가 마주 보고 꼼짝 못했다. 끝나지 않을 듯했던 대치는 한쪽의 양보로 싱겁게 해결되었지만 막힌 호스 마냥 자동차는 시원하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속도를 줄여 조심스레 좁은 틈을 비집고 지나자니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의 시선은 지나가는 차 뒷꽁무니를 쫓다가 찰나를 놓치지 않고 황급히 뒷자석 문을 열었다. 몸이 한참을 숙인 채 나오지 못하는 모양새가 카시트에 아이를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는 게 여의치 않은가 보다. 어쩌면 아이의 종알거리는 소리에 응, 응 하며 대답하느라 벨트 매기가 어려울 지도. 비상등이 깜빡거리며 서 있는 자동차는 종류도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양한데 사람들의 행동은 비슷비슷하다. 어른은 뒷자석에 아이가 타기를 기다렸다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조금은 지치고 고단해 보이는 어른의 표정에는 하루가 끝나간다는 안도감과 이제는 서둘러 귀가하여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워야 하는 부담감이 담겼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 쉴새없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걸음을 지체했고 어른은 잡은 손을 빠르게 잡아끌기도 했다. 어른의 시간과 아이의 시간은 속도가 다르게 흘러간다.
집에 가까이 다다라 열띤 바이올린 합주 소리와 굵고 강한 함성 소리를 들렸다.
바이올린 소리는 근처 복지관 건물을 뚫고 나왔다. 방과후 바이올린 교실 모집 공고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제법 윤곽있는 소리가 났다. 연주하는 아이들의 뿌듯한 성취감도 실려 나왔다. 아이들이 동기와 흥미를 잃지 않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 들인 노력도 묻어났다. 사춘기 소년소녀의 갈 곳 없는 갈망을 풀어낼 활동이 있다는 게 안심이 되었다.
함성 소리는 청년들의 고함 소리다. 주식회사 ooo 이라고 적힌 물류창고 앞 주차장에서 퇴근 시간을 넘겨 직원들이 족구를 하고 있었다. 흥에 겨워, 승부욕에 사로잡혀 외친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져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합은 계속 된다. 날 것 그대로의 열정, 길들여지지 않은 푸른 기운이 젊은 육체 안에서 꿈들거린다.
신기하게도 이 모든 소리는 해가 저물어 가며 썰물처럼 사라진다. 요란하게 뛰놀던 아이가 잠이 든 집 안처럼 어린이집 앞 혼잡과 바이올린 소리, 파이팅을 부르는 외침이 끝나고 고요가 찾아오는 것이다. 동네는 그 흔한 편의점 하나도 없고 배달 오토바이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집과 집 사이에 조각난 과수원이 예전 이곳은 광활한 귤밭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동네이다.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춘다. 내 안을 오가는 들숨과 날숨에 맞춰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가라앉기를 되풀이 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취향대로 고른 찻잔에 찻잎을 띄운다. 그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을 충만히 만끽한다.
처음부터 침묵에 잠겨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도원을 나서고 언니네 집에 얹혀 살던 첫 1년 이후에 나는 지금까지 이 침묵의 밤을 살았다. 그 시간 속에서 과거를 더듬으며 흐느꼈고 짧은 깨달음으로 과거를 보듬었다. 호기심이 꺼져가던 어린 시절이 안타까웠고 형체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도전하기를 포기한 결정들에 분노했다. 제도에 맞서지 못하는 힘없는 분노를 형식적으로 짊어졌던 청춘의 순간이 부끄러웠다. 자기 연민과 자기 혐오 속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었냐고, 목청껏 소리 질러대고 싶던 시끄러운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내 삶의 여정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고 그 여정이 동기는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모호했다. 지금도 그저 그런 시간들이 내 삶에 여전히 지나흘러가고 있다.
가끔 스스로 위축되는 기분이 들 때면 아무 상관 없는 침묵의 밤을 그려올린다. 그 밤은 늘 나와 함께 있다. 내게는 일이 있으며 친구를 새로 사귈 용기를 내었고 그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