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_[모스크바 적응기: 어려도 힘들어]

모스크바의 눈은 뭉쳐지지 않는다.

by 글 쓰는 줄리아

평소처럼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가 내게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가족이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서 살 거라 했다. 아빠 회사 일로 가게 되었다고. 그때 나는 세 살 무렵이었다. '외국'이나 '러시아' 같은 단어들을 들어봤어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엄마한테 모스크바는 어떤 곳이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눈이 많이 오는 추운 도시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기뻤다. 겨울을 너무 좋아해서 평소 뽀로로가 사는 '눈 덮인 숲 속 마을'에 가고 싶어 할 정도였으니까. 단순히 러시아에 가면 눈사람을 많이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반년 먼저 모스크바에 가서 자리 잡았다. 엄마는 짐을 정리하고 러시아로 보냈다. 그리고는 곧 휴직을 하고 나를 데리고 러시아로 갔다. 인천 공항에서 셰레메티예보 공항까지의 비행시간은 10시간 가까이 되었다. 다른 승객들은 자느라 바빴지만 나는 비행 내내 깨어있었다.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것은 물론이고 해외에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구름 위를 바라보는 것도, 여러 영화를 골라보는 것도 전부 재미있었다. 대한항공에서 어린이 승객들에게 주는 색칠도구들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지루할 틈도 없이 도착할 때가 되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러시아에는 비행기가 착륙하면 박수치는 문화가 있다. 한국 항공사 비행기를 탔었는데도 러시아인 승객이 많아서인지 박수를 쳤던 것 같다.) 그때가 겨울이라 추울 거라는 것을 예상했다. 우리는 두꺼운 털옷과 외투를 단단히 입고 어그부츠를 신었다. 멀리서 마중 나온 아빠가 보였다. 패딩을 걸치고 군밤모자까지 눌러쓰고 있었다. 엄마는 아빠의 춥고 지친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하면서도 웃겨했다. 우리는 차를 타고 모스크바 시내에 갔다. 밤 시간대에 도착해 창문 밖이 캄캄했다. 도시의 전경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밝은 조명들이 비추는 건물들만큼은 크고 화려한 자태가 드러났다.


그렇게 나의 모스크바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무리 어릴 때 갔어도 해외생활이 쉽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낯선 언어와 문자, 크게만 느껴지는 건물들과 사람들은 모두 이질적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외출을 할 때는 부모님의 손을 꽉 잡으려고 애썼다. 혹시라도 인파 속에서 부모님을 놓친다면 영영 찾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컸다. 너무나도 거대한 이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도 무섭고 공허했다. 내가 '우울하다'라고 하니 엄마가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냐고 물어봤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확히 알고 말했던 것 같다. 텅 빈 가슴에 파도가 일렁이는 느낌은 우울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에 가고 꽤 오랜 기간 동안은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나만 한국인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매 순간 느꼈다. 지하철을 타도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러시아인들은 동양인 아이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인종차별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영미권 교포친구들에게 러시아는 다민족 국가이고 아시아인도 많아서 그런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민족 국가이고 아시아계 러시아인 소수민족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민족 자치공화국에 몰려 산다. (러시아는 한국처럼 단일 국가가 아닌, 여러 연방 주체들이 모인 연방 국가이다.) 모스크바에도 아시아인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중앙아시아 출신의 이민자들이다. 외모는 동아시아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이민 3,4세에 혼혈인 사람들도 많고 러시아어 원어민이기 때문에 직접 만나보면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무튼 모스크바에는 동아시아인이 거의 없고 한국인은 더욱 적었다. 당시에 한인교민 수는 2000명 안팎이었다.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유학생, 주재원을 포함한 수치이니 실질적으로 정착해 사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은 더 줄어들었다고 한다.) 천만 명이 넘게 사는 유럽 최대 도시에서 한국인의 비율은 0.01%에 불과하다. 솔직히 길을 가다가 우연히 동아시아인을 마주친 적도 없었다. 한인 수십 만 명이 몰려사는 영미권 대도시에 비하면 정말 적다. 다민족 국가라고 인종차별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미국, 호주도 다민족 국가이지만 인종차별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러시아는 동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이 상대적으로 적은 국가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여행 유튜버들이 러시아 여행하는 영상들을 봐도 같은 말을 한다. 더욱이 나는 어린아이인데다 여자라서 그런 차별을 겪지 않을 수 있던 것 같다. 러시아 문화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괴롭히는 행위를 비열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모스크바의 겨울은 눈이 정말 많이 내린다. 폭설이 온 날에는 이웃들이 아침부터 나와 눈을 치웠다. 아빠는 러시아의 제설기술이 세계 최고라고 했다. 수많은 인력이 제설작업에 투입된다. 하지만 아무리 치워도 곳곳에 여전히 눈이 쌓여있었다. 나는 바라던 대로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신이 나서 둥근 눈뭉치를 만드려고 했다. 그런데 전혀 뭉쳐지지 않았다. 한국에 내리는 습설과 달리 러시아의 눈은 건조한 가루 같았다. 쌓인 눈을 볼 때마다 눈사람을 만들려고 맨손으로 녹여가며 뭉쳤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나중에는 눈사람을 만드는 것을 포기했다. 아쉽게도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눈사람 하나 만들지 못했다. 현지인들도 눈을 뭉치기 어려운지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을 거의 못 봤다. 모스크바에서 본 눈사람은 식당 앞에 전시되어 있는 눈사람 하나가 유일했다. 그 눈사람을 발견했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 비결을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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