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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민석 Oct 03. 2023

아버지를 닮아있던, 2021년의 여름.

그 책임감을 느끼게 된 이유.


 2021년의 여름,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에 나는 자수맨이었다.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값비싼 라이더 자켓을 입히셨다. 천연 양 가죽이었던 멋들어진 옷을 입을 때의 감정이 기억에 남는다. 가죽 내음과 부드러운 감촉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기뻐했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집안의 환경은 그런 비싼 자켓을 입힐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을 팔고, 이곳저곳 전셋집을 전전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직장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는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받아 샘플을 제작한 뒤, 클라이언트와 하청 공장에 보내는 일을 했다. 별다르게 말하지 않아도 ‘OEM’이라는 단어로 설명이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디자인을 받으면, 총 4벌을 만들었다. 한 벌은 클라이언트에게, 한 벌은 공장에게, 한 벌은 회사에 나머지 한 벌은 예비용이었다. 우리 가족들이 입었던 옷들은 대게 예비용 옷들이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셨다. 퇴근 후 집에서도 도안을 보며 일을 준비하셨고, 연속극을 보면서도 자수 패치 뒷면의 얇은 종이를 벗겨내셨다. 중국에서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옮긴다는 회사의 결정과 인도네시아 이민을 고려했었던 아버지의 고민들까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열정이 이제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배신이었다고 할까. 그 이후로 아버지는 자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내가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로 자수맨을 한다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탐탁치 않아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수에 대한 질문을 하면 아버지는 수많은 노하우를 늘어뜨리며 이야기 하곤 했다. 아버지와 자식이 같은 일을 하면서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이 꽤나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그 때 깨닫곤 했다.




 당시 나의 하루 일과는 아주 단순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나는 연구소라고 불리는 공장에 출근했다. 자취하던 오피스텔의 5층이었다. 나는 4층에 살았으니, 출근길은 한 층을 오르는 게 전부였다. 9시 출근에 8시 50분에 일어나 5분 동안 양치와 세수를 하고, 56분에 공장에 도착하여 일과를 시작한 것이다.


 공장에 들어서면, 에어컨과 기계들을 켰다. 어제 작업한 내역에 맞춰서 기계를 돌린다. 1호기는 이불에 자수를 넣는다. 2호기와 3호기는 쿠션이나 커튼을 작업한다. 9시부터 1시까지 오전 일과를 마치면, 1시부터 2시까지 식사시간이다. 다른 직원들은 2층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지만, 나는 우다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 집에서 잠을 잤다. 다시 2시부터 6시까지는 오후 작업을 한다. 자수 기계에 실들을 모자르지 않게 넣어주고, 자수가 씹히거나 구멍 나면 메꾸고 푸르고, 도안을 뒤로 보내서 새로 작업했다.


 사람들은 친절했다. 주임과 선임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배려해주었다. 나도 일이 퍽 마음에 들었다. 짬짬이 돌아가는 기계들을 방치한 채로 1층 편의점에 가서 커피 한 잔과 담배를 태웠다. 원단을 옮기러 주임과 함께 외부에서 일을 할 때면 함께 담배를 태우며 땡땡이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권태였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는가. 노동이야 그런 것이겠지만, 반복되는 일상은 나를 지치게 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서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몇 편 보고 잠에 드는 것. 사무적인 대화 이외에는 말이 없었다. 네 평 남짓한 방에서 나는 수많은 시간들을 지극히 홀로 채웠다.




 권태로운 나날들을 보내다가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권태로운 일상을 아버지는 버티셨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기계들 앞에서 그는 무엇을 위해 일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도 넘게 고개를 숙여 밑실을 갈고, 손에 묻은 기름을 닦아내고, 원단을 제단하고, 검토하는 모든 손길 위에 권태가 묻어있지는 않았을까?


 ‘더럽게 시끄럽네.’ 묵중한 소리를 내며 한없이 돌아가는 기계를 말없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음은 나의 기억 저편에서 들어보았던 소리였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는 어느 토요일에,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회사에 가셨다. 아마 잔업이 남아서였을 것이다. 어둡고 오래된 사무실에 기억나는 것은 푸르딩딩한 빛깔과 귀를 막고 들어야 할 기계음이었다.


 회사 복도를 뛰기도 하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아버지의 일하시는 모습을 보기도 하면서 기다렸던 그 장면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아, 그도 이 권태를 겪어내시었구나. 이 소음을 견디며 살아내셨구나.


 중년과 노인의 그 사이에 있는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는 오늘도 권태를 겪어내겠지. 그는 왜 그토록 치열하게 권태를 이겨낼까. 


 이제 인생의 초입을 살아가는 내게 그는 대답할 것이다. ‘무슨 이유가 있겠나. 그냥 하는 거지.’  

 그러나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가 그렇게 겪어낸 이유는 그의 육신을 나누어 받은 이들 때문일 것이다.


 그 책임감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그의 육신을 나누어 받은 두 번째 사람인 나는 이제야 그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렇게 될 나의 곧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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