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아도, 나를 사랑할 수 있길.
밝은 밤,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이후 네 번째로 읽는 최은영 작가의 책이었다. 그리고 "애쓰지 않아도"는 최은영 작가의 글 중에 가장 좋았다. 어린 날 아팠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해주고 그런 나로부터 성장한 나를 또 한 번 바라보게 해줬다. 나를 아끼고 나를 사랑하고, 내 모든 일을 애쓰지 않고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는 이야기들이었다. 다 괜찮아 식의 위로가 아닌 참 많이 아팠구나 하는 공감을 줬다. 너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서인지 더 많이 울었고 아팠다. 다시금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힘을 준 이 이야기가 정말 소중하다.
애쓰지 않아도, 나를 사랑할 수 있길.
애를 써야만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애를 써야만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애를 써서 합리화를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전 약 2년의 시간 동안, 그는 나한테 그런 존재였다. 소설 속 ‘나’에게 ‘유나’같은 존재와 결은 달랐지만, 나는 애를 써서 더이상은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를 떠올렸고 애를 써서 다시는 생각하지 않겠다고 억지로 밀어냈다. 그리고 함께 했던 좋은 순간들은 애를 써 가며 마냥 좋은 것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상처받은 것에 대해선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처럼 생각해야만 했다. 다시 돌아가 그 때를 생각해보면 참 많이도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어쩌면 애쓰지 않아도 건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애쓰지 않아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고 나의 일을 지켜볼 수 있다는 의미일까.
<숲의 끝>, 82쪽.
솔직함도 마음이 강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탣인 것 같아. 내가 강한 사람이었다면 너의 눈을 보고 말했을 거야. 지호야, 너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한 친구야. 너는 나를 판단하지 않았어. 너와 함께 있으면 온전해지는 기분이 들었어. —— 이곳은 2년 가까운 시간을 살아도 내게 가까워지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너를 잃는 것이 아파. 나의 무능력과 약함 때문에 이곳에 홀로 설 수 없는 내가 밉고 부끄러워.
솔직한 게 약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혼자 가지고 있으면 너무 아프기 때문에 그래서 가지고 있을 용기가 없어 항상 솔직했던 나이기에. 마음이 강한 사람만이 솔직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나’의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단 한 번도 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혼자 간직하고 숨기고,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강하다고 생각했으니가. 난 너무나 약하고 누군가에게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어서 그랬던 건데. 어쩌면 남은 그렇게 생각지 않을 수도 있었겠구나.
이제 이해가 안되던 것들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왜 나에게 솔직하지 못했는지. 왜 나에게 너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어쩌면 넌 약한 너의 모습을 드러내기가 힘들었었나봐. 너와 정반대인 나를 보며 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너도 이 소설 속 ‘나’의 시선 속에서 지호를 바라보는 것처럼 나를 바라봤을까?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나날들. 내 감정을 직시하기 무서워 피하기만 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 피함으로써 생긴 공백을 채우고자 미친듯이 일만 했던 시간들. 지나고 다시 돌아 보기까지 많이 힘들고 아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했어야 만 하는 일이었다. 난 단지 솔직하지 못했고 비겁했고 피했던 거니까.
내 감정에 솔직하자. 누구보다 내가 제일 소중하다. 나에게 휴가를 꼭 주자. 온 맘 다해 사랑하자.
<송문>, 95쪽.
—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
송문은 유리의 방식이 좋았다. 유리는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을 모르며,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고 고백한 것이었지만 그 목록의 제목은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송문 또한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을 영영 배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자기 마음을 배울 수 없고, 그렇기에 제대로 알 수도 없는 채로 살아간다. 송문은 그 사실을 알았다.
<한남동 옥상 수영장>, 104쪽.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남들처럼 분명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끔은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고, 가끔은 머릿속이 따끔거리기도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지 못 했다. 마음이란 건 하도 걸어 물집투성이가 된 발바닥 같았다. 예쁜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이 아니라.
<저녁 산책>, 120쪽.
어릴 때 꾸는 꿈은 바뀌기 마련이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꺾인 꿈은 다른 의미일 것이었다. 그 상처가 어떤 것일지 해주는 짐작할 수 없었다.
<임보일기>, 181쪽.
윤주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와 함께할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은 아프지만, 행복한 헤어짐도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예감하면서.
<무급휴가> 228-229쪽.
현주는 미리에게 밀려들었고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사실상 부당할 정도로 과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미리는 현주가 어렵기도 했다. 미리에게 관계란 매 순간 상대의 시선으로 자신을 심판하며 최대한 자기 자신의 황폐함을 철저하게 감춰야 하는 노동이었으니까.
현주의 사랑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했을까.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이켜 보니 남은 것이라고는 일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오면서 누적되어온 피로였다. 진짜를 가질 자신이 없어서 늘 잃어도 상처 되지 않을 관계를 고르곤 했다. 어차피 실망하게 될 거, 진짜가 아닌 사람에게 실망하고 싶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으면 조각난 자기 자신을 복구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현주는 미리가 유일하게 위험을 감수하고 만나기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더 내게 와줘. 그 갈망은 너무나 내적인 것이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