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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희 Sep 09. 2023

[책]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정세진)

I AM NOT THAT BAD: 정세진 단편집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p. 33

  그만하면 충분한 것 같았다. 들은 얘기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내가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니다. 나는 약속대로 아이의 위치를 알려줬고, 남자는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그 말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끝없는 자기 합리화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고, 난 쓰레기는 아니라는 그의 말이 역겨웠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생사를 앞에 둔 채 끊임없이 토로해야 하는 자신의 오점과 그와 함께 이어지는 변명. 글을 읽으며 불쾌함이라는 감정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슨 자격으로 합리화를 하는가.


어쩌면 운이 좋아 우연처럼

p. 76

  내가 시험 운이 좋아 능력에 비해 좋은 학교를 나왔으며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게 공정한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시험 성적만으로도 잠재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추려내고 평가할 수 있다는 획일적 방법이 이 사회에선 마치 공정한 잣대마냥 되어 있다. 나로선 운이 좋은 거지만 내가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p. 103

갑자기 딱딱하게 돌변한 태도에 그녀는 적잖이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눈빛에선 설핏 애절함도 느껴졌지만 난 냉정을 유지하며 차갑게 대했다. 이렇세 끝내는 건 괴로운 결정이어도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녀는 내게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니까.

내 안에 들어온 그녀는 내 삶에 가장 큰 행운이니까.
p. 104

연락처도 모르고 언제 어디로 떠날지 전혀 알 길이 없지만 우연인 듯 운명 앞에 나를 스스로 던져보기로 했다. 그녀의 집이 김해공항 근처라 했으니 비행기를 타고 갈 확률이 가장 높다. 혹은 지금의 집과 버스터미널이 가까우니 버스를 타고 갈 확률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가장 확률이 낮은 선택지라 할 수 있는 서울역 앞에서 그녀를 막연히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쩌면 운이 좋아 우연처럼 만날지도 모른다.

  언제나 행운이 따르는 남자. 그리고 그 행운 뒤엔 대가처럼 불행도 따른다. 행운 뒤엔 불행. 큰 행운 뒤엔 여지없이 뒤따르는 큰 불행. 그래서 그는 행운을 의도적으로 피해 살아간다. 그런 그 앞에 너무나도 큰 행운인 그녀가 찾아온다. 더 큰 불행이 내 뒤에 있을 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그녀를 피한다. 하지만, 그렇게 큰 행운을 그는 놓칠 수 없었다. 어떤 불행이 따르더라도 지금의 난 행운을 간절히 원한다. 우연이라는 행운이 또 한 번 나를 찾아오기를. 그녀라는 행운을 제발 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가지만 나의 시간은 멈췄다.

p. 243

어두컴컴한 방 안에 들리지도 않을 엄마의 혼잣말 같은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해 … "

나의 감정은 이상하리만치 묘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포근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서 나는 은은한 비누 냄새가 너무 좋았다. 나는 떠올렸다. 입양 오길 잘했다고. 그리고 나의 시간이 여기서 영원히 멈추길 간절히 빌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도덕을 버리고 만난 관계에서 서로는 사랑을 느꼈다. 아이와 아빠, 아이와 엄마는 그렇게 만났다. 미안함이라는 감정은 사랑에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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