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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 Jul 15. 2023

나의 전남자친구에게

여전히 네가 보고 싶은 날에는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 아직 널 잊지 못한 것 같아."






10년을 연애했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고, 함께한 시간도 12년 차가 되었으니 길었던 나의 연애기간에서 이제야 조금 더 기울었다.


함께했던 시간과 마음은 과연 비례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두 달 만에 불타는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하기도, 10년을 넘게 만나고도 한순간 헤어지기도 하는 게 사람 마음이고 인연이니까.


의심과 걱정을 안고 살던 나의 뿌연 안개를 서서히 걷어주었던 건 그와 함께 차곡히 쌓아 올린 시간이었다. 






여느 사춘기 아이들처럼 호기심에 시작된 관계였다. 각자 다니던 남고와 여고의 중간지점에 있던 버스정류장만이 우리의 유일한 데이트장소였다.

 데이트라는 말이 무색하게 담벼락 뒤에 우두커니 서서 수줍게 웃기만 하다가 버스가 오면 손 흔들며 인사하고 헤어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종종 시장 골목 끝 새빨간 국물 떡볶이를 사 먹었고, 가끔은 크림수프가 곁들어 나오는 고급 돈가스를 먹었다.






성인이 된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먹는 메뉴는 다채로워졌고, 만나는 시간대 역시 그러했다. J의 자취방에서 서로의 생일을 소소하게 축하해 주었고, 데이트 후에는 기숙사 문 닫는 시간까지 버티고 버티다 눈물을 머금고 헤어져야 했다.



J는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네모난 벽돌처럼 크고 무거운 DSLR 카메라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나왔다. 체감상 하루에 백 장 정도는 찍어대는 느낌으로 시시때때로 셔터를 누르곤 했다. 셔터를 반쯤 눌러 첨을 맞출 때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리면 애써 외면하지 않고, 모르는 척 사진이 잘 나오는 각도로 고개를 움직였다.

카메라 화질이 어찌나 좋은지 애써 숨긴 모공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도 그저 좋았다.


누군가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롯이 집중해 준다는 것.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 

 사랑의 크기를 새삼 실감했다. 나를 향해 있던 카메라 렌즈 사이로 한쪽 눈을 찡그린 J의 모습이 선명하면서도 어렴풋하다.




어떤 날에는, 안도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한편에 차를 세웠다. 갑자기 차에서 내려보라던 그는 나의 손을 잡고 트렁크 앞에서 멈췄다. 쩍 벌어진 트렁크 안에는 형형색색 가득한 풍선, 장미와 안개  꽃다발이 보였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그의 손은 선물상자를 집어 나에게 내밀었고, 크렁크 문과 함께 내 얼굴이 박힌 현수막이 쪼르르 올라가며 바람에 날렸다.


평소 눈물이라고는 1도 없는 내가 조금은 무안해졌다. 드라마를 보면 꼭 이럴 때 여주인공은 눈물을 또르르 흘리면서 남주인공에게 안기던데 말이다.

한편으로는 눈물콧물 쓸어내리며 마스카라가 번지는 못볼꼴보다는 낫겠다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J는 바짝 마른 나의 얼굴만 유심히 도 살폈다.  날은 나의 생일이었고, 내 평생 이렇게 축하받은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리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날마다 녹초가 되었고, 끝도 없는 야근 터덜 터덜 걸어 나간 길에는 늘 J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데이트를 했고, 여름이면 손 꼭 잡고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우리는 10년을 함께했다.






첫사랑이었다.

J에게도 나에게도.


그렇게 우리의 첫사랑은 10년을 함께했고,

천천히 오랜 시간 서로에게 물들어갔다.


여전히 그리운 나의 첫사랑, 첫 남자친구.

유독 보고 싶은 날마다 그를 애써 떠올려보지만 그 시절 J의 얼굴과 음성은 점점 흐려져만 간다.






J는 이제 없다. 내 눈앞에 있는 건 오로지 남편이다.


몇 시간째 소파에 누워 휴대폰으로 빨려갈 듯 한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웃는 얼굴에  못 뱉는다'는 말이 있지만 가끔은 뱉고 싶은 날도 있다.


작년 생일에는 "이번 생일은 서로 퉁칠까?" (남편과 생일이 한 두 달 차이가 난다)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데 달려가 그 주둥이를 칠뻔했다.


오래간만에 차려입고 힘을 준 날에 센스 있게 알아서 사진 한 장 찍어주면 좋으련만 카메라 기능이 상실한 핸드폰을 쓰는 게 분명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야지 뭐.

사진을 찍어달라고 휴대폰을 건네보지만 나의 포즈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 찍었다며 폰을 다시 건네받는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나 이렇게 빨리 하지 그랬니.


(허구한 날 보는) 유튜브 캠핑 영상과 시어머니의 소중한 아들이 깔깔 거리는 소리가 섞여 나의 귀에 꽂혀 내린다. 오늘따라 왠지 심란해지는 마음이다.






지금 내가 어떤 글을 써 내려가는지도 모른 채 해맑은 저 사람은 10년이 넘도록 한결같다.



얄미운 남편휴대폰을 억지로 뺏는 건 유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대신 전화를 걸어 그의 흐름을 끊는다. (도무지 '유치하다'라는 기준이 뭔지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편의 휴대폰 사용이 길어질 때면 종종 사용하는 나의 필살기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남편이 있지만 잔소리를 내뱉기 전 옐로카드 정도로 경고를 주는 거다.


휴대폰 화면의 발신자 ‘내꺼’ 이름을 확인한 그는 나를 보며 코를 찡긋거린다. 역시 놀라지도 않고, 소름 끼치도록 태연하다. 


동갑내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 혼자만 세월의 풍파를 맞은 듯 액면상 연상이 된 모양새도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 중 하나다.

감정기복이 심한 나와는 정반대로 매사에 그러려니 웃어넘기는 성격 탓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억울함까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핸드폰 좀 그만해! 그럴 시간 있으면  남자친구  찾아줄래? 내가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운지 몰라." 그제야 고개를 들고 소리치는 아내의 얼굴을 슬쩍 살핀다.  


"자기 배고파? 밥 먹을래?"


나의 외침에도 남편은 그저 본인 몫을 해낼 뿐이다.

탄수화물을 먹어야만 상냥해지는 아내의 성향을 꿰뚫은 현명한 모습도, 밥 사준다는 말에 사르르 웃음이 새어 나와버린 내 모습도 정말이지 밉다 미워.

 


얄미운 남편을 흘겨보며 통화 종료버튼을 거칠게 누른다. 휴대폰 상단에 선명히 박힌 ‘전남친’ 그가 오늘따라 유독 더 그리운 날이다.




전남친이자 지금의 현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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