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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 Dec 11. 2022

말로 먹고사는데, 말을 하지 말라니요

선생님, 아저씨 목소리 같아요 (보육교사의 고질병)


“혹시 이야기 많이 하는 직업이신가 봐요?”

“아, 네…”

“수술이 가능하기는 한데 수술 후에는 당분간 말씀하시면 안 돼요. 가능하시겠어요?”





언제부터인가 아슬아슬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컨트롤하기 어려워졌다. 공기의 진동으로 겨우 내뱉던 음성에서는 어느새 쇳소리까지 새어 나왔다.


"선생님, 아저씨 목소리 같아요."


여섯 살 아이의 대쪽 같은 발언은 놀랍지도 않았다.

술을 마신 다음 날 출근하면 "선생님한테서 우리 아빠 냄새나요~"라는 일화를 우스갯소리로 많이 들어왔던 터였다.


'은행업무 하나 보기 어려워 만기 된 통장 재발급도 반년 넘게 받지 못하는 퍽퍽한 직장인의 삶에 병원은 무슨 병원이야.' 꼰대 상사의 입에서나 나올법한 쓰디쓴 이야기를 속으로 꿀꺽 삼킨다.


그래, 이왕이면 아이에게 쇳소리 나는 아저씨 목소리보다는 상냥한 아줌마 목소리를 들려주는 편이 낫겠구나 싶다.

고마운 꼬맹이 덕분에 목에 통증까지 느끼면서도 미뤄왔던 병원 진료를 갔지만,

유감스럽게도 별 소득이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성대결절*이었다. 지속적으로 말을 해야 하는 직업에서 흔히 발생하는 질환인지라 의사도 환자인 나도 대수롭지 않았다. 그저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 간 뒤 짧은 진료가 끝났다. 수술을 해도 목소리를 계속 내면 쉽게 재발한다며 추천하지 않았고, 최대한 말을 아끼라는 의사 선생님의 당부는 진료실 문을 닫으며 그 안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


*성대결절은 지속적인 음성(목소리) 남용이나 무리한 발성에 의해 발생하는 성대의 양성 점막 질환이다.





고등학교 체육대회 때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고 난 뒤 며칠간 말도 못 하고 고생했던걸 생각하면 나는 태생적으로 나약한 성대를 가지고 태어난 게 분명했다. (이왕이면 성대가 아닌 뱃살 혹은 허벅지가 나약했으면 좋았을 것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웃기는 소리 같지만) 내가 성대의 올바른 사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전자제품 사용법도 안내책자를 몇 차례나 정독해야 이해를 할까 말까인데 내 몸 사용법 같은 건 단 한 번도 숙지하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으니까.

지식의 초록창에서 손 한 번만 까딱해도 방법은 줄줄 나왔다.


[성대결절의 치료 및 예방방법]

성대 점막에 손상이 가는 헛기침 금지
기침은 조용히 하기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말하는 습관 가지기
큰 소리 내지 않기
하루에 두세 번씩 20분간 침묵하는
습관 가지기
지나친 카페인과 음주 금지
물 자주 마시기
가능하면 목소리를 내지 않기

침묵하는 방법 외에는 꽤 해볼 만했다.




칙칙! 수분 충전하는 미스트처럼 병원에서 처방받은 목 스프레이를 아낌없이 분사했다.

? 이 배신감은 뭐지? 목구멍에 흩날리는 그것은 한층 더 강력해진 고통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성대를 거침없이 후려친다. 다행히 '악'소리를 내며 미간이 찌푸려지는 분노의 순간 뒤로 평온이 찾아왔다. (하마터면 처방받은 스프레이를 내동댕이칠 뻔했다.)


목캔디 하나를 입에 물고 쪽쪽 다 빨아먹으면 사라지는 것처럼 그 개운함은 짧고 굵게 사라졌다.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나름 소프라노(soprano)라고  자부했던 목소리의 영역이 이제는 누가 봐도 알토(alto) 임을 인정할 때다.


때때로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동요를 함께 부르다 고음에서 음이탈이 날 때, 동화를 읽어주는데 토끼 목소리가 곰 같을 때가 특히 그랬다.


하지만 고음에서 핏줄을 내세우며 노래 부르지 않아도 될 만큼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와 잘 어우러졌고,

깨 발랄한 토끼의 목소리도 우직한 곰이 될 수 있는 다양성을 존중하며 편견 없는 아이들로 자랐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나의 천사들로부터 매일같이 날아오는 편지들



성대결절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아이들을 향한 나의 사랑은 녹슬지 않았음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비록 여전히 아저씨 목소리를 가진 선생님이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받고 있음을 아이들은 알고 있다.  

중요한 건 마음으로 느껴지는 거니까.


오늘도 허스키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말한다.


“얘들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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