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천영화제 기간 일부는 맹, 죤과 함께 갔는데, 오빠와 같이 살던 홍대 자취방에서 맹, 죤과 지내며 영화제를 보러 다녔다. 맹은 나보다 더 오랫동안 영화를 좋아해왔지만 죤은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귀한 여름방학에 서울까지 와서 서울구경도 안하고 부천까지 같이 출퇴근해주던 좋은 친구였다. 홍대 자취방은 방 2개에 작은 화장실과 부엌이 있는 다가구 주택이었다. 큰 방은 오빠 방이었지만 TV, 컴퓨터, 옷장이 거기 있어서 거실 같았다. 작은 방은 침대 옆으로 게걸음을 해야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여서 작은 내가 썼지만, 친구가 오면 오빠와 방을 바꿔 지냈다. 부천영화제는 7월에 하는 영화제여서, 여름방학을 맞은 친구들은 우리 집 큰방에서 선풍기 바람 쐬며 같이 먹고 자고 했다. 오빠는 제대 직후의 복학생이었고 계절 학기를 듣고 있었는데, 우리가 나갈 때 오빠 방을 들여다보면 겨울잠 자는 곰처럼 기절상태, 돌아와서 보면 이불은 인간의 윤곽만 남긴 채 비어있었다. 영화제에서 퇴근하고 온 우리들은 매일 밤 신나서 술을 마셨는데, 그때 인기였던 하이주를 주로 마셨다. 지금은 팔지 않는 하이주는, 과일소주의 인기와 더불어 나온 제품으로 과일 맛 탄산 술인데, 도수가 3~4도로 약했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은 소주 3병 원 샷이지만 주량은 소주 3잔도 겨우 마시는 우리 입맛에 최적화된 술이었다. 하이주 한 캔에 취해서 와글거리며 떠들고 있을라치면, 오빠는 집에 들어온 기척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오빠의 눈 뜬 모습을 궁금해 했고 인사하고 싶어 했지만 끝끝내 만날 수 없었다. 그런 오빠가 멀쩡히 학교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까지 하고 나니 ‘오빠가 멀쩡했구나. 일상생활 가능한 분이구나.’라며 친구들이 놀랐다. 오빠는 원래 그런 존재다.
부천영화제를 떠올리면 또 기억나는 것은 보드람 치킨. 그때는 둘둘 치킨처럼 짭짤하고 튀김옷이 얇은 치킨의 전성시대였는데, 7월의 청량한 저녁에 땡맹, 죤과 함께 야외에서 맥주와 먹는 보드람 치킨은 정말 맛있었다. 갓 튀겨내서 뜨끈뜨끈하고 짭짤하면서 기름지고 빡빡한 닭 가슴살을 입 안 가득 욱여넣고 삼키자마자 꽉 막힌 목구멍에 얼음생맥주를 콸콸콸 흘려보내면, 속까지 뻥 뚫리는 그 맛, 행복은 거기에 있었다. 심야상영을 위해 맥주를 두 잔으로 제한하니 아쉬운 감질 맛까지 더해져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때의 맛을 떠올리며 부천이 아닌 곳에서 보드람 치킨을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했고, 어따ᅠ간 치킨도 그 맛은 못 냈다. 감히 부천의 맛이라고 해본다.
이렇게 행복했던 부천영화제를 대학 이후에는 가지 못했다. 영화제가 없는 부천은 부천이 아니기에, 부천에도 간 적이 없다. 기괴한 상상력의 잔인한 영화들도 서서히 내 인생에서 사라져갔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으니 점잖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영화들을 봐야겠다고 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나이만큼 늘어난 금기를 과감하게 부숴줄 영화들에 대한 그리움도 깊어졌다. 언젠가 7월이 오면 피와 살점으로 가득 찬 영화의 도시에 가서 수많은 금기를 깨는 영화를 잔뜩 만나고 싶다. 부산영화제의 파도치는 바다도, 영화배우들 잔뜩 만나는 화려함도 없지만, 대신 피와 살점이 튀기고 닭들도 잔뜩 튀겨져 있었던 부천, 그 곳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