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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이다

2-3. 칭기즈칸을 잃고 나는 쓰네

by 얼굴씨


파국이다

마침, 미성년자관람불가




나는 운이 없는 편이다. 복권이나 추첨 이런 거 다 조작이라고 자위하던 시절,

동생이 향수 업체 이벤트에서 1등으로 당첨이 되어 공짜로 홍콩을 가면서

나는 내가 운이 더럽게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글을 쓰다 보면 가끔 오싹한 기운에 등이 갑자기 서늘해질 때가 있다.

점점 더 차가워진다.


이건 저번처럼 귀신이다, 나는 영혼을 보는 자이다. 기구한 운명이군!


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샤워하고 몸을 닦은 젖은 수건이 의자 등받이에 널려 있다.

등이 야무지게 축축하다.

이런 걸 기시감 혹은 예감이라고 믿는 그런 둔한 사람인 것도 인정.



실질적 급여를 정산받지 못한 것 빼고는 신인 작가의 패기와 노오력으로 하루하루 뿌듯한 시간들이었다.

몽골로 가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박감독과 나도 더 으쌰으쌰 파이팅, 친해졌다.

문제는, 나만 동료애였고 그는 시간이 갈수록 다른 마음을 먹었던 바로 그 지점이다.

그는 사랑을 시작했던가?

결코 아니다.

만약 그게 사랑이라고 느껴졌더라면 적어도 기분이 나쁘거나 치욕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몇 번, 내게 조악한 포장을 한 장신구를 건네기도 했는데, 그걸 담담히 사랑의 신호로 받아들였어야 했나?


돈이나 정산해 주세요


다시 돌려보내며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웃으며 말하지 말 걸 그랬나?




여권 사진을 찍고, 신청서를 내러 가는 전날, 박감독과 반주을 곁들인 식사를 하고 자축 겸 노래방엘 갔다. 거기서부터 나의 또 슬픈 실패기가 시작된다.

노래방을 가지 않았더라면? 언젠가 터질 일이었다.

박감독은 밀폐된 공간에서 내 어깨를 슬그머니 감쌌다. 손도 슬쩍 잡으며 흐느적거렸다.

나는 심히 불쾌하여 극존칭을 써가며 예의 바르게 정색을 하였는데 이미 이성을 잃은 자에게 먹힐 리 만무했다.

이래저래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야 이거 말로는 안 되겠네, 용감한 나는 귓방망이를 날리고 차지는 욕도 좀 해주고 마지막엔 걸쭉한 침까지 캭, 퉤, 뱉어주며 그 방을 나왔다.

한 대 맞았던가, 그 뒤로 맥주병이 날아왔던 건 소리로만 기억한다.

후에도 당했다고 말하지 않고 싸우고 나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로맨스의 끝도 아니요, 주사로 치부하기엔 도가 상당히 지나치고, 성추행 프레임을 씌우기엔 데이트 폭력이랄 수도 있겠는, 그런 총체적인 파국이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여지없이 막장비극인 인생이다.

심지어 다음날 나는


또 잘렸는데,


역시 준비의 서사는 지난하고 웅장하였으나 그 끝은 비명처럼 짧았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감독이 절대적 갑인 상황에서 계약서가 무슨 상관이랴. 나 따위의 신인 작가의 미래와 안위가 무슨 상관이랴.

나는 혼자서 화내는 것 말고는 어떤 방법도 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기력이 최선이었다.

영화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엎어졌고 감독은, 개명을 염두에 두고 인물 사진을 뒤져가며 찾아보곤 했지만 어디서 숨었는지 죽었는지 종적을 알 수가 없다.




다시 시간을 돌려 나에게 충고하겠다.

경계를 분명히 하라, 밀폐된 공간에서 둘이 작업하지 말라, 술을 먹지 말라, 세수도 하지 말고 모자 눌러쓰고 그냥 글만 써라.


얼룩말이 뛰어노는 세렝게티 초원에서, 완전 딱 홀로, 생수 한 병을 마시며 넝마를 걸쳐 입고 글을 써라


되겠냐


잘 가 칭기즈칸. 나는 또 실패했어.

그냥 운이 없었던 걸까?

가엾은 내 원고 빈집에 갇혔네.



다음 편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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