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로 가는 비행기
어후, 당수 한 방에 골로 갈 뻔.
시나리오는 그럭저럭 잘 써졌다.
몽골 쪽 관계자들도 나를 퍽 마음에 들어 했는데, 정보에 대한 공유와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이 빨랐고 A안 B안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시도를 보여준 점들을 높이 산 듯했다.
처음엔 신인에게 큰 일을 맡기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박감독이 나의 포트폴리오를 근거로 들어 열렬히 지지를 해 주었고 신선한, 그놈의 신선한 영화를 만들기엔 나름 열정적인 신인의 패기가 필요했던 것도 같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원에 휴학계를 내고 돌아오는 길도 그리 무겁지 않았다.
박감독과 회의를 할 때마다 우리는 영화에 대한 열정과 희망, 곧 우리에게 쏟아질 영화계의 스포트라이트, 자본의 짜릿함 등에 대해 오두방정을 떨며 맞장구를 치곤 했다.
큰 키에 장발을 한,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온 박감독.
결코 잘 생기진 않았지만, 검은 뿔테에 하늘거리는 검은 정장만을 입고 다니던 센스는 암튼 프랑스다웠다.
박감독은 두 편의 영화를 나와 구상하는 동안, 머릿속이 꽉 막혀 리프레시가 필요할 때면 주로 낚시터나 바닷가에 가자고 했다. 낭만적인 둘만의 데이트는 전혀 아니었던 것이, 항상 누구누구와 함께 여럿이 동행하였기에 선뜻 즐겁게 따라나서곤 했다.
나를 포함해 몇몇이 마침 낚시를 좋아했고, 탁 트인 바닷가로 드라이브 삼아 가던 길도 참 좋았다. 밤을 새워 열심히 쓰고 서서히 동이 터오는 동쪽으로 가던 길이 지금도 생각난다.
칭기즈칸 이전에 박감독은 대단한 스케일의, 아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아본다. 어쨌든 지금 생각하면 제작비가 가당치도 않을 그런 엄청난 SF영화를 기획 중이었다. 우리는 <블레이드러너>를 추앙하며 철학과 과학이 공존하는, 뭔가 매니악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데에 격하게 공감했다.
나는 겉표지부터 지루한 철학사상 책들을 읽고, 비슷한 주제의 강의도 찾아서 들었다. SF 장르를 찾아 탐닉한 것이 그때부터인데, 후로도 생각에 잠기게 하는 화려한 공상과학 영화를 좋아한다.
그때 <서클>이라는 가제의 시놉을 정성스레 썼는데 기회가 되면 추억 삼아 브런치에 올려봐야겠다.
에고 부끄러워서,
되겠냐
다만, 나는 그때 밥값이나 술값 말고, 제대로 된 급여를 받았어야 했다.
계약서는 원고의 진행 정도에 따라 순차적으로 지급하게 돼 있었는데, 그 진행 정도라는 것에 다분히 갑과 을의 주관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미처 체크하지 못해다.
시놉 끝났으니까 돈 주세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신인 작가가 얼마나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제대로 된 급여를 받은 적이 없다.
제작사 사정까지 두루 살필 경력도 없었고, 물정도 몰랐기에 그건 넘어가기로 하자.
꿈에 부푼 신인 감독의 호기에 너무 깊게 빠져 무작정 한 배를 탔던 것이 문제였을까.
작가의 밥그릇은 어떻게 챙겨야 했을까?
어떻게?
까마득히 어린 후배가 극단에 들어갔는데 작년 한 해 받은 돈이 100만 원이란다.
이십여 년이 지나도 아직도 이러하다니 적잖이 놀랐다.
작품이 궁금해서 파일로 몽땅 보내달라고 했다. 공연에도 올린 작품이란다. 글자개수당 돈을 셈 할 수도 없는 급여다. 이 고물가 시대에 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얼른 돈 되는 글쓰기를 하라고 뼈를 때려 주었다.
크고 작은 공모전도 많고, 여기저기서 시행하는 지원사업도 꽤 있으니 부지런히 쓰고 실력을 검증받을 수 있도록 온 지구를 뒤져 가능한 수단들을 찾으라고 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봐 줄 이 없는 원고는 쌓인다.
어느 한 줄 경력칸에 쓸 수 없는 공인받지 못한 작업들은 그 마지노선을 틈틈이 가늠해야 한다.
사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선배의 꼰대스런 잔소리이다.
극단에서는 너의 꿈을 펼치고, 그리고 반드시 돈이 되는 글을 써. 글자 하나하나가 돈이 되는 삶을 살아.
그렇게 글을 잘 썼던 선후배 및 동기들,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고 영화 혹은 어느 매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중년의 나이에도 번번이 공모전에서 탈락을 하고 시나리오가 엎어지고, 상영직전까지 가다가 배급사 문제로 또 엎어지는 일들이 허다하다.
물론 나처럼 요란한 과정없이, 그리고 한 두 건의 실패는 습작의 기억으로 묻어두고는 소위 잘 나가는 작가 타이틀을 가진 이들도 굉장히 많다.
어려운 일이다. 나도 너무 많은 실패를 겪었고 그래도 또 도전했던, 내려놓기 쉽지 않은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걸 끈기라고, 존버가 답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 여전히 나는 모르겠다.
감히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인생이니 좌절감만 맛보지 말고 다른 영역에서라도 좀 누리고 살아보자는 말이다.
내가 빛날 수 있는 기회는, 찾다보면 반드시 온다.
아직도 술에 취하면 엎어진 시나리오를 붙잡고 엉엉 울다가 냉장고 문을 열고 오줌이나 갈긴다는 어느 선배의 일화처럼, 이제는 재밌지도 않고 치기로 보이지도 않을 폐허같은 삶은 좀 억울하지 않은가.
여권을 바로 만들어 이작가.
얼마나 멋진 초원일까 얼마나 근사한 광야일까.
몽골 쪽의 초대로 박감독과 나름 포함 몇몇이 한국을 떠나게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초대에 수락하면서도, 예정된 스케줄 이상으로 현지에서 집필도 하고 현장 답사도 할 겸 꽤나 긴 일정을 잡았다.
다음 편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