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을 잃고 나는 쓰네
이번 생은 악한 것에 너를 잃지 않기 위한 고군분투
박감독이 제안한 영화는 스케일부터가 끝내줬다.
"한국 몽골 수교 기념작- 칭기즈칸"
제작 기념회였던가, 식당 전체를 빌려서 현수막도 걸었다.
제작진을 소개하고 각 분야의 담당자들과 실무도 논하는 자리였다.
우리 작품을 맡아 줄 작가를 소개합니다.
공들인 시놉시스를 낭독하며 아니, 이렇게 얼굴이 공개돼도 괜찮은지, 사진 찍히면 초상권은? 정장을 입고 머리를 좀 묶고 왔을 걸.
뭐 이런 깜찍한 생각을 하기도 했더랬다.
감독의 소개로 한국과 몽골의 몇몇 대학 교수 및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칭기즈칸에 관해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하고, 수많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전문적인 지식을 차곡차곡 담아서 쓴 시놉이었다.
뿐이랴. 우리나라에 출간된 관련책이며 영화들까지 내가 바로 칭기즈칸이다,라는 마음으로 영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
학부 전공인 소설을 쓰면서도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쓴 습작들은 완성도는 차치하더라도 만족도가 높았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쓰는 것이 글쓰기의 담백한 정답이지 않을까.
다만 혼자서만 계속 쓰지 말고 누가 됐든, 가능한 그래도 글 좀 쓴다거나 읽는 사람에게 중간 점검을 받으며 써보자고 스스로에게도 권하는 바.
어쨌든 중요한 건,
나는 심지어!
계약서를 썼다.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오는 날이면, 단골 구제샵에 가서 빳빳한 버버리 코트며 찢어진 청바지 등을 사 입던 나는, 철없는 거지였다. 아니, 사실 나는 조금 부유하기도 했는데,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학원 강사가 그렇게 유명세를 타서는, 꽤 짭짤한 돈을 벌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헛 돈이었다.
어려서부터 경제관념을 잡아줄 리 없는 환경에 놓인 나, 로부터 거지꼴 면치 못하는 서사가 시작된다.
사업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자냄새나는 정원이 넓은 집에서 살다가, 그야말로 쫄딱 망해서 숟가락만 갖고 거리로 나앉았던 슬픈 역사가 내 마음 한켠에 우울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경제 관련 서적을 읽으며, 어릴 때의 경제교육이 한 인간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끔찍하게 깨달았다. 성장호르몬을 체크하고, 성조숙증을 치료해 몸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르고 합리적인 경제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생각인데,
신체 유전자만큼 경제관념 유전자도 극복하기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 가슴 아프게 인정한다.
달콤한 돈의 맛을 알던 나는, 학부를 졸업하면 자본의 세계에 잠식당할 것이 뻔했으므로, 무작정 대학원에 들어갔다. 가난했지만 용감했던 나는 무려 현금서비스를 받아 등록금을 내 버렸다.
신체포기각서를 쓸 뻔했던 나의 금융실패기는 나중으로 하자.
쌀로 하실래요, 금으로 하실래요
무지한 채무자로 카드깡 업체에 자발적으로 끌려가서는 쌀 1200만 원어치 혹은 금붙이 1200만 원어치를 살 뻔한 얘기도 나중으로 하자.
내가 작가료로 받게 될 금액은 그 모든 빚을 탕감하고도 버버리 신상을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다음 편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