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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릇하고 짓궂은 작가 연대기
저는 이제 무얼 하죠?
1-3. 날카로운 첫 영화의 추억
by
얼굴씨
Jul 12. 2023
무얼 하죠?
무얼하든 시작은 물 한 잔으로
유명해지지 않은 나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그 작품에 매달려 있었다.
아마 수정에 수정을 더하고 대략 39차 수정본쯤 되었을까.
주연 배우가 확정되고 막내 작가의 포지션으로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 유명 개그맨은 다소곳한 자세로 천천히, 한 폭의 수묵화처럼 밥을 먹었다.
하도 의욕이 없어 보이고 말도 별로 없어서 아 우리 대본 망했구나, 나도 망했구나 숟가락이 발발 떨렸던 시간이었다.
요즘 공중파에서 소식좌의 대명사로 종종 등장하는 걸 보면, 뭐 그때는 나름 열심히 맞춰줬던 듯하다.
이 정도로 착착 진행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대대적인 대본 수정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작자가 바뀌고 그들의 요구가 달라지고, 제작비가 변경되고 등등 오만오천 개의 이유를 달고 우리 시나리오는,
엎어졌다.
개그맨들이 주인공인 블랙코미디였는데, 그 주연들이 모두 다 가수로 대체되었다.
왕작가님의 원작만 유지한 채 작가팀도 전면 교체.
궁핍한 자들의 세계로 다시 들어갈 시간이었다.
물론 나는 작가팀에 있는 내내 가난했고, 작가 아르바이트를 위해 또 다른 일을 해야 했지만.
준비의 서사는 웅장하고 길었으나, 끝은
비명처럼 짧았다.
원작에 대한 지나친 애정과 끈질기게 붙어있는 나에 대한 의리였을까.
왕작가님은 원작의 소설화 작업을 내게 맡기겠노라 했다.
나는 또,
썼 다.
지난한 회의들을 또 수십 번 거치며 나는 결국 잘렸다. 아니 내가 잘랐나.
마지막 장면은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힙하지도 않고 구경삼아 가기도 별로인 7호선 부근으로 옮긴 작업실에서, 나는 사춘기 녀석처럼 삐딱하게 서서 네네네 만 중얼거리다가 문을 닫고 나왔다.
젠장.
그때 알았다. 수많은 영화 시나리오가 이렇게 여러 사람의 등에 빨대를 꽂고는 그냥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선배와 버터친구와 공대생처럼 나는 알았어야 했다.
그 숱한 빨대가 내 등에 꽂힐 거라는 걸,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도망쳤어야 했다는 걸!
다음편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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