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곤충을 만날 수 있는 올 해 마지막 동네 야간 채집. 나는 그저 채집통을 들었을 뿐.
비가 세차게 내린 후 기온이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 했다. 바람은 여름의 달큼함을 털어내고, 묵직하게 서늘해졌다. 아들과 나는, 이번이 마지막 야간 채집이 될 것이라고, 온몸에 오소소 돋은 소름으로 예감했고, 채집통은 서운하게 가벼웠다. 긴소매옷 위로 무턱대고 공격해 오는 모기떼는 더 이상 한여름만의 해충은 아닌 듯했다. 시간은, 계절은 또 가고 와 버렸다.
10월의 비 내린 가을밤은, 곤충의 생존 한계선을 아슬아슬 넘나드는 온도가 되었고 하루 사이에 먹잇감의 개체수는 우하향 직선을 그리며 곤두박질쳤다. 어제만 해도 쉽게 보이던 메뚜기는 그새 전멸을 했는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곤충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겨울이 가까워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폐허를 의미하는데, 다행히도 올겨울은 코코가 남긴 알들로 희망을 다잡을 수 있게 되었다. 곧 11월이 되면, 대부분의 곤충들은 생을 마감하거나 숨을 곳을 찾아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즈음이면 놀이터 풀숲엔 거름으로 변신하고 있는, 죽었지만 다른 모습으로 살 준비를 하는 다양한 생명체들만이 고요히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시끄럽던 꼬마들의 웃음소리, 싸우는 소리, 우는 소리도 하나둘씩 안으로 안으로 잠기게 되겠지. 아이들이 보여 준 다양한 반려 동물들도 한동안 추위를 피해 놀이터에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이번 생을 고요히 마감하고 있을 지도.
반려개구리 반려닭 반려장수풍뎅이(우화 전, 애벌레) 반려게 채집
그럼 아마존으로 가자 엄마.
응. 아니야
남미로 갈 수도 없는 일, 가더라도 집으로 데려올 수도 없는 일.
겨울이 되면 어떤 곤충을 관찰하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라도, 뭐 하나라도 있겠지. 파닥거리거나, 엄청 작고 다리가 많을 수도, 이상한 냄새가 날 수도, 아니면 코코의 수백 마리의 새끼 사마귀가 이른 부화를 하여 온 집안을 누비고 있을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됐든, 아들의 취미 생활 혹은 관심사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상 나는 아마도 곤충 집사로 당분간은 지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간과 곤충, 그리고 자연과 생태, 환경에 대해서.
그러한 거대 담론을 차치하더라도 사마귀 몇 마리가 내게 알려준 감사한 것들이 참 많다.
제일 먼저, 벌레공포증인 내가 사마귀, 곤충 이야기로 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고맙다. 스쳐 지나갔을 작은 생명에 대한 존중을 배웠고, 인간보다 빠르게 성장해 나가는 모습에 경외를 느꼈다. 사마귀의 탈피를 보며 신기했고, 녀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많은 곤충을 잡으러 다니는 바람에 만보기는 대부분 목표치를 달성했다. 덕분에 사계절 자연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끼며 지구에 감사했고, 늘 철없던 아들이 반려사마귀 덕분에 책임감을 갖게 되는 기특한 양육의 과정도 경험하였다. 각종 벌레가 집안을 헤집고 다녔고, 각 개체의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사체 조각들을 치우느라 소독제를 많이 사용해서 손이 제법 거칠해졌다. 사마귀에서 곤충, 곤충에서 동물, 그리고 자연까지, 관심 없던 분야의 검색이 늘어났고, 어느덧 사마귀와 대화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죽음에 슬펐고, 앞으로 태어날 수백 마리의 새끼들을 걱정하게 되었다.
당분간 우리 집엔 곤충 휴지기가 올 것이다. 우리 집에 최종적으로 남아 있는 코코도 두 번째 산란을 마쳤고, 아마도 한두 번 더 산란을 하게 되면 짧았던 충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집엔 럭키박스 같은 알집이 몇 개 남아 있어 이른 봄을 기쁘게 기다리게 해 줄 것이다. 한동안은 아들 방 청소를 덜 해도 되고, 만보기는 기록을 잠시 멈출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소소한 곤충에 관한 글도 쓰고, 책도 보면서 알쓸잡곤, 그러니까 알아두면 쓸데없는 잡다한 곤충 이야기를 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곤충 이전에, 나의 아들에게 감사하다. 아들을 낳고, 식상하고 지루하기만 했던 세상이 낯선 것들로 꽉 차 알아가는 기쁨이 그지없어 행복하다. 놀이터를 배회한 건 아들뿐이 아니었다. 옆구리에 노트북을 끼고, 꺄르륵 아이들의 소리가 나는 곳으로 나는 늘 두리번거렸고, 어느 곳보다 글이 잘 써졌다. 그렇게 귀를 열고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면 나도 모르게 보드라운 글자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우리 동네 꼬마들에게도 감사를!
그리고 어느 계절을 막론하고 모기에 참 많이도 물렸다.
모기가 문제다!
모기는 박멸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화분을 옮겨 식물 수정에 깊게 관여한다고 한다. 아 죽이지도 못하고, 싫다.
엄마, 다음 주에 샌프란시스코에 가자, 곤충 잡으러.
오늘은 대체 왜 샌프란시스코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의 나는 친환경이나 생태적 생활 등엔 거리가 먼 완전 도시적 삶을 추구했다. 그런데 아들과 함께 곤충을 키우면서 자연스레 그러한 것들에 관심이 생겼다. 바퀴벌레는 대체 왜 멸종하지 않는가. 인간의 농작물을 해치우는 메뚜기는 왜 박멸하지 못하는가. 풀숲에 사는 셀 수 없이 다양한 벌레들은 각자 이 지구에 지분이 있었다. 인간을 괴롭히는 해충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이유다.
메뚜기가 사라지면 주 포식자인 사마귀의 생존이 위험해진다. 사마귀가 멸종되면, 그 어린 새끼들을 잡아먹는 베짱이, 거미, 개미 등이 멸종 위기에 처하고, 그것들이 멸종되면상위 포식자가 위험해진다.
마찬가지로 바퀴벌레가 사라지면 지구 대재앙이 온다는 말이 있다. 대단한 단백질 공급원인 바퀴벌레가 사라지면 설치류의 생존이 불가하고, 그다음엔 새, 그다음엔 더 큰 동물 이런 식으로 연쇄적인 멸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끝, 멸종에는,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 있다.
그깟 벌레가 사라지면, 이럴 수가 재앙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사마귀 반려인이므로 잠시 이것들의 편에서 기특한 부분을 아니 짚을 수 없겠다. 최근, 메뚜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전 세계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만, 사마귀는 그만큼 늘어나지는 않았다. 사마귀의 끔찍하지만, 반대로 기특한 동족포식 때문에 자동 개체 조절이 가능한 것이다.
사마귀 만세!
그렇다고 생태 환경 운동가가 되려는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학생운동에 열중했던, 반미타도를 외치느라 콜라도 마시지 않고 청바지도 입지 않았던 선배들이 역시 면은 미제가 최고라며 극찬했던, 깔깔대던 중년의 모임을 기억한다. 자연을 소비하고 파괴하는데 열중했던 젊은 날의 사죄의 의미정도랄까.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사상은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과도 같은 것일까 아니면 변절자 혹은 회색분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