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무계획 제주여행(14) 정적 속 안부를 건네는 일(230122)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니 오늘은 설 당일이었다. 특별히 감흥이 있는 건 아니었다. 눈 뜨자마자 뒹굴대고 있자니 벌써 오후 1시였다. 떡국은 어제 먹어서 딱히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설인데 떡국떡으로 무언갈 해 먹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다 생각난 떡라면. 지금 숙소에는 신라면이랑 딱멘이 있는데 역시 나에겐 신라면이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딱멘은 뭐랄까, 약간 망한 새우탕이랄까? 차라리 새우탕을 먹는 게 더 맛있을 정도라 약간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남은 딱멘은 서울로 올라갈 때 가져가고 숙소에선 신라면을 먹어보기로 했다.
떡을 씻어서 끓는 물에 넣고 라면을 끓였다. 그런데 물이 부족해서 그런지 급하게 뜨거운 물을 부었다. 역시 요리실력 어디 안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요리는 뭐든 어렵지만 라면물을 제대로 맞춰서 끓이는 일은 제대로 성공해 본 적이 없다. 그나마 내가 제대로 된 독립생활을 시작할 때 라면물 눈금이 그어진 냄비를 주신 덕분에 이젠 그 눈금에 맞춰서 라면을 끓이긴 하지만 그 냄비가 없으면 라면은 거의 포기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인지 오늘 떡라면도 썩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차리리 짠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짜면 물을 부으면 된다지만 싱거울 땐 계속 끓일 수도 없다. 면이 다 퍼져버릴 테니까.
어쨌든 나름 사투(?) 끝에 떡라면을 겨우 먹을 수 있었다. 떡라면을 먹으며 유퀴즈를 봤다. 페퍼톤스는 의외의 게스트였다.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챙겨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그들의 음악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들의 말대로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 약처럼 꺼내 듣기 좋은 곡들이 있다. 그 곡들을 생각하며 토크를 보고 있자니 반갑고 다정한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었다. 나는 과연 타인에게 그랬던 적이 있던가.
떡국 대신 떡라면을 먹고 여기저기서 보내준 명절 인사에 느릿한 답을 보내기 시작했다. 명절이나 생일은 그간 연락이 뜸했던 사람들에게 연락하기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솔직히 나에겐 그런 연락이 약간 부담스럽다. 물론 나에게 오는 연락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고 고맙지만 내가 그리 다정한 사람이 되진 못해서 내가 연락을 먼저 하는 일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워낙 인간관계가 좁기도 하고 자주 연락하는 몇몇 빼고는 딱히 연락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편이다. '명절이야 알아서 각자 잘 보내겠지, 잘 쉬겠지 뭐.'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고 내게 건네준 고마운 연락들에게만 열심히 답장하는 편인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석사 시절, 나는 내 동기들과 두루두루 친했다. 다른 선생님들께서 모든 동기들이 이렇게 친한 경우는 별로 못 봤는데 우리는 참 신기하다고들 했다. 물론 그 안에서 더 친한, 혹은 덜 친한 동기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들 둥글게 둥글게 잘 지내는 편이었다. 그러다 나보다 언니였던 동기 한 명이 결혼을 하고 곧 출산을 했다. 그 당시, 나는 확고한 비혼을 고집하던 입장이라 언니의 중차대한 결정을 내리는 그 모든 순간들이 참 놀라웠다. '어떻게 한 사람과 평생을 약속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아닌 완벽한 타인을 평생 사랑하고 아껴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내 몸을 갈라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평생을 책임지겠다는 결심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나보다 한 살 많을 뿐인데 어떻게 그 어려운 결심을 하고 그 결심에 대한 책임을 꾸준히 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항상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그 언니에게 오랜만에 명절 안부 인사를 받았다.
아이는 많이 컸을 테지만 여전히 육아에 바쁜 삶을 살아내고 있을 텐데 나에게 건네준 그 인사가 어찌나 반갑고 고맙던지. 누구나 해줄 수 있는 인사지만 나보다 벌써 인생의 몇 걸음을 앞서 걸어가고 있는 언니에게 나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 존재였다는 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런 마음으로 기쁘게 서로의 안부를 나눈 뒤, 나도 오랜만에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정말 능력 있고 존경하는 언니가 생각났다. 언니가 걸어온 길 덕분에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한 힌트도 많이 얻은 만큼 언니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졌다. 고민 끝에 연락을 받았고 스윗한 답장도 들었다. 언니와 내 사이가 가깝다고 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명절이라는 포장지에 나의 존경과 고마움이 잘 전달되었길 바란다.
나름대로 훈훈한 설이었다. 이제 다이어리 정리하고 책 좀 보다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