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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Jan 24. 2023

15. 찐 베이글 드셔본 적 있으신가요?

우당탕탕 무계획 제주여행(15) 논문, 그리고 찐 베이글(230123)

오늘은 침대에서 눈 뜨자마자 갤럭시 워치 대여 기간을 연장해야 하는 걸 기억해 냈다. 대여기간은 원칙적으로 15일이지만 대여만료일에 유선전화를 통해 15일을 추가로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전화로 워치 대여 기간을 연장하고 난 다음 눈을 감았다 뜨니 오후 12시였다. 정말 당황스러운 전개 같긴 한데(...) 그래도 일단 잠에서 깼으니 이제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도 보고 책도 보면서 뒹굴대다 보니 2시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배고픔을 모르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아서 나 스스로에게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이렇게 공복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건강에 좋지 않을 테니 부랴부랴 반찬을 꺼냈고 밥과 국을 데웠다. 이렇게 챙겨 먹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시니 훨씬 컨디션이 좋아진 듯했다.


내일까지는 연휴이고 모레까지는 제주에 강풍과 폭설이 온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밖에 나가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25일까지는 논문 한 파트를 무조건 끝내리라 결심했다. 제주에 여행을 오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한달살이고 나는 그 한 달을 충실히 살아내고 싶었다. 그러려면 내가 해오던 연구 역시 계속 진행하는 것이 맞았다.


결국 뭉그적대다가 논문을 열었다. 오늘은 이론적 배경 보강을 더욱 심도 깊게 진행할 차례였다. 이론적 배경은 모두 작성이 완료된 상황이었지만 연구절차나 결과와 같은 후속 내용들을 검토했을 때 조금 더 내용적 보완이 필요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제주도에 있는 상황이니 통계 결과를 기술하는 것보다 이론적 배경을 작성하는 게 조금 더 수월할 것이라 느꼈다. 통계 서적은 모두 서울에 두고 왔으니 제주도에서는 연구의 근거와 논리를 보강하는 데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렇게 전기장판 위에서 논문을 보고, 가끔씩은 책을 읽거나 놀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냉동실에 얼려둔 베이글이 생각났다. 오늘은 그걸 먹어볼 참이었다. 미리 반쪽으로 갈라둔 베이글을 꺼냈는데 이걸 어떻게 해동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전에 프라이팬에 구웠던 적이 있는데 그건 냉장이었을 때도 별로 맛이 좋지 않아서 프라이팬을 쓰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면서 폭풍 검색을 한 끝에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찜기로 베이글을 쪄내는 것. 블로그에는 끓는 물을 올린 냄비에 찜기를 놓고 냉동된 베이글을 4분 정도 찌면 된다고 했다. 베이글이라고 한다면 항상 겉바속촉한 베이글을 생각했는데 스팀기에 쪄 먹는 베이글이라니. 떡도 아니고 그렇게 먹을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일단 시도해 보기로 했다.

무심하게 덜어놓은 크림치즈. 그리고 4분간 찜기에 찐 베이글.


사진으로 보기엔 구운 베이글이나 찐 베이글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굳이 따지자면 테두리가 살짝 말려있다는 것 정도? 집게로 베이글을 건져 올렸을 때 뭔가 퐁실퐁실한 느낌이 들었다. 빵이 아닌 떡 덩어리를 건져내는 느낌이었는데 크림치즈를 발라 맛보니 프라이팬으로 구웠을 때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빵을 찐다는 접근 자체가 너무 신선해서 이걸 따라 해봐도 될까 고민이 많았는데 역시 시도해 보길 잘했다. 서울에 올라가서도 종종 쪄먹을 것 같다.


베이글을 다 먹고 난 뒤에는 계속 논문에 매진했다. 이번 주 안에 해결하고 싶은 내용은 내가 선택한 변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레퍼런스를 보강하고 싶은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모든 연구자들의 고민거리겠지만 연구주제가 너무 평범하면 레퍼런스를 따긴 쉽지만 이미 레드오션이기 때문에 다양한 변인들 간의 조합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변인들을 택하면 연구주체에 대한 참신함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그에 대한 레퍼런스가 상대적으로 빈약하기 때문에 연구 내의 논리성을 제시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의 경우는 후자를 택했다. 고작 학위 논문 하나로 세상을 뒤바꾸고 싶어서 연구주제를 끌어온 건 아니다. 그냥 이 주제로 논문을 쓰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쩌면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 PTSD 같은 이슈를 연구주제에 조금이라도 녹여냄으로써 나 스스로를 치유하고 싶었다. 그 당시의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지만 상황이 받쳐주지 않았기에 그 선택을 끝까지 개진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그것은 절대 나의 탓이 아니라고.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싶었다.


사실 모든 것이 처음이었을 성인들의 비합리적이고 미숙한 선택은 나를 여전히 괴롭힌다. 그러나 한 번도 상처받지 않고 사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어느 하나 비뚤어지지 않은 직선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마 내가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생채기겠지만 다시 한번 다짐하고 싶다. 성인 이후로 그래왔듯 이제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택은 내 스스로 내리겠다고.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내 연구 주제에 대해서도 조금은 버겁고 어렵지만 묵묵히 안고 가겠다고. 그렇게 내 인생의 모든 선택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의견에 귀를 기울여 결정하고 그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적어도 내 인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면 실수나 실패를 할지언정 후회할 일은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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