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안에서 같은 행동을 무한루프 중이다. 이유를 따져보면 얼핏 다양해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확실한 게 좋아서, 때로는 귀찮아서, 때로는 안전하려고. 하지만 난 안다, 어떤 이유든 사실 선을 그은 것뿐. 어릴 적 짝꿍과 싸우고 그어놓은 책상의 금처럼 적당한 이유를 붙인 것이다.
선 밖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용기라는 마음뿐이겠지. 이 사소한 일에 용기라는 단어로 치장할 필요가 있겠냐 마는. 용기(勇氣)를 담는 용기(容器, 그릇)에 사이즈는 없는 것이겠지. 인연이 사랑한다는 짧은 한마디로 결정될 수 있는 것처럼 용기도 측량할 수 없는 무엇이니까.
내가 해운대에 온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해변을 걷노라면 하얀 모레를 보며 욕구가 일었다, 맨발로 해변을 한번 걸어볼까. 그렇지만 곧 투명한 선들이 파도에 딸려오는 포말처럼 딸려와 나를 묶었지. 옭아매며 속삭였지, 신발에 모레 들어갈 걸, 바닷물이 차가울 거야, 옷이 더러워져. 그래서 결국 어제도 난 같은 길로 뚜벅뚜벅 걷는다, 매일 똑같이 오가는 개미처럼.
거창하게 말하다 이런 말하면 우습지만 사실 이것도 나름 괜찮다. 삶을 안전을 가치 있게 여긴다면 이 또한 하나의 삶의 태도다.
인간의 뇌는 새로운 경험을 원한다고 한다. 머리를 자극하고 그것은 행복한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5년째 행복을 위한 독서모임을 한다는 사람이 용기를 내지 못해 경험을 미룬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겠지.
"맨발로 다 같이 해운대 바다를 걸어볼까요?"
반초의 이 말은 내게 방아쇠를 당기는 작은 검지 손가락이었다.
지금은 추워요, 사람이 많아요, 유리조각이 있을 수도 있어서 위험해요, 역시나 이런 생각이 들었고 실제 그런 말이 나왔다.
"그냥 해봐요."
어느 신발 광고가 생각나지만 그것이 지금까지도 먹히는 것은 실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해보는 것. 그래서 최근 나 혹은 해운대 독서살롱은 새로운 경험을 중시한다. 야간에 터트리는 폭죽놀이, 단체로 구경하는 태화강, 나이 든 우리가 함께 하는 닌텐도 게임, 별 것도 아니지만 하지 않았던 일들을 최근에 이어가는 것도 이런 생각에 적지 않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일 테다. 오늘도 나(마음)는 도망치려 했지만 그냥 해본다. 그냥 지른다.
<해운대 맨발로 걷는 밤산책 그리고 한 가지 생각과 한 가지 질문>
이라는 공지를 띄웠다.
라노벨 제목처럼 제목이 길어졌지만 나름 난 만족했다. 뭔가 내가 좋아하는 단어를 모두 모아놓았으니까.
그래도 명색이 독서모임인데 산책만 하는 것이 싫어 한 가지라도 얻어 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바다를 걸으며 이야기할 한 가지 생각(Q. 자신의 인생을 한 단어로 말해보면?)과
한 가지 질문(Q. 최근 가장 기뻤거나 감사했던 일은 무엇인가요?)였다. 12명이 모여서 2명이 짝을 이뤄 서로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물으며 바다를 걷자, 이 단출한 계획을 블로그에 올렸다.
시간이 되었다. 모두 양말을 벗고 신발을 들었다. 나는 달에 첫 발을 내딛는 암스트롱처럼 조심히 모레를 밟았다. 생각보다 부드럽고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함께 한다는 생각에 고양감이 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보다 느낌이 좋았다. 모레가 발을 감싸는 감촉은 대지에 내가 안기는 느낌을 받게 했다. 사르르 흩어지는 하얀 모레처럼 오늘 하루 있었던 검은색 감정들이 풀어진다. 하나하나 작은 모래알이 발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면서 간질간질하면서도 시원한 촉감이 느껴진다. 곧이어 한 번씩 크게 파도가 쳐서 넘쳐흐르는 바닷물이 둥둥 말아 올린 바지단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아 차가워. 시원해. 따스해로 이어지는 감정선의 변화는 나만의 착각일까.
준비한 질문과 생각을 나누며 바다를 걸었다.
두 명으로 조를 이뤘지만 어두워지는 바다의 평온함 때문인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넘실넘실 잘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