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 Aug 04. 2023

 한번쯤 ‘길고 오래’ 때리세요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멍 때리기’.

말 그대로 멍하니…가만히 있는 거다. 미국에 연수와서 정말이지 이 멍 때리기를 제대로 하고 있다. 싱글이라 가족도 없고, 오자마자 허리가 아파 맘대로 움직일 형편도 안 됐고, 인간관계에 지쳐 한국인 커뮤니티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대신 소파에서 통유리로 무작정 하늘을 보고, 동네 호숫가에 앉아 물을 쳐다보고, 나무를 벗 삼아 느릿느릿 산책하고…그런 시간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도시 채플힐 공터에 있는 호수. 시 소유의 땅이라는 경고문(?)이 있지만 낚시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앉아 있으려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멍 때리기 최고다.


무슨 태평한 소리냐, 누구 약 올리는 거냐, 그게 당장 가능하겠냐!!

수많은 힐난이 들리는 것 같다. 하하. 나 역시 주변 연수자들이 여기저기 다녀왔다, 단톡방에 사진을 올리고 자랑(?)할 때면 나만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하염없이 묵묵히 눈앞의 풍경만 바라보는 시간을 진심으로 즐겼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깨달은 건 우리에게 멍 때리는 시간은 그냥 필요한 게 아니라, 상당히 길게 필요하다는 거다. 잠깐 몇 분, 몇 시간이 아니라 최소한 수일, 수개월, 가능하면 1~2년 길게 있어야 진가를 발휘한다는 얘기다. 


과학자들은 멍 때리기를 하면 머릿속이 비워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 생산성이 올라간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멍하니 있는 건 그 자체로 모순이다. 내가 발견한 멍 때리기의 미덕은…지금까지 몰랐던 나,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발견하는 즐거움에 있다.  

다음은 내가 1년 가까이 멍 때리기를 하며 느낀 장점들이다.

      


여유가 생긴다. 뒤에 해야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조금 더 커지는 것 같다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하늘, 덧칠한 유화처럼 몇 시간째 꼼짝 않고 박혀 있는 요상한 구름, 바람에 꼭대기만 흔들리면서도 신비로운 소리를 내는 키 큰 나무들, 소리없이 미친 듯 내 주위를 돌아다니고 머리 위를 내려다보는 다람쥐와 사슴, 이름모들 새들…


이런 것들을 멍하니 바라볼 때면 식상하지만 사람도 자연의 일부구나, 하나의 거대한 시공 속에서 다른 모든 동식물처럼 우리도 우리가 지닌 능력과 행태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느끼게 된다.  

집 안팎에서 찍은 하늘 사진들

잠깐이라도 뭔갈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뒤처지는 것 같고, 작은 것 하나에 온통 신경을 쏟으며 실수하면 어쩌나, 손해보면 어쩌나 동동거리고 일희일비·아등바등하는 게 큰 의미없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대신에 ‘원래 사람이 뭔가를 하려면 이 정도 시간은 걸리는 게 당연하다’ ‘내가 오늘 목숨을 건 일이 내일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거나, 적어도 생각한 것만큼 결정적인 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작은 길들을 개척해 나갈 뿐, 큰길은 그저 묵묵히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이 밀려들며, 큰 심호흡을 하게 된다.      


새로운 관심에 눈 뜨고, 몰랐던 지식을 알게 된다

하루종일 별다른 일 없이 멍 때리며 오감을 집중하다 보면, 그동안 지나쳤던 것들이 문득 궁금해지고 알고 싶어 진다.

예를 들어 나는 나무나 꽃에 전혀 관심이 없고 아는 것도 없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데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성격 탓에, 사람들이 ‘어머 저 꽃 좀 봐’ ‘이 나무에 열매가 열렸네’ 해도 전혀 와닿지않았다.

자주 가는 산책로 중 한 곳. 작은 천이 흐른다.

그런데 거의 매일 숲길이나 나무가 늘어선 산책로를 여유롭게 걷자니 어딜가나 내 주위를 감싸는 존재들에 대해 친밀하고 반가운 애정이 생겼다. 핸드폰 덕에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으로 궁금한 걸 찾아볼 수 있는 세상이 얼마나 좋은지.


나무에 대해 일자무식이었던 나는 어느새 참나무·소나무·삼나무·자작나무·버드나무·풍나무 등을 구분할 줄 알게 됐다. 풍나무 중에서도 시카모어(sycamore)와 스위트검(sweetgum)의 열매가 어떻게 다른지 알고, 느티나무와 느릅나무 잎사귀를 비교할 줄 알고, 배롱나무 꽃과 박태기나무 꽃도 구별할 수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근처에 화려한 꽃이 핀 배롱나무.

안다. 재테크나 경력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지식들이다. 그러면 어떠랴. 평생을 모르고 살던, 하지만 그것들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에 대해 이제 막 통성명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것 만으로 기쁘다.  

   

이 밖에 멍 때리기와는 조금 다른 성격이지만, 나는 하루에 1~2가지 떠오르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훨씬 만족스럽게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었다.

하루는 발레 무용수들의 동작을 하나하나 뜯어 명칭을 찾아보고, 하루는 그리스 신화와 인간 영웅들의 가족 계보를 스토리를 뒤져가며 살펴보고, 하루는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사연들을 읽어보고, 하루는 미국 50개 주의 명칭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공부하고….

 

누가 보면 그렇게 게으른 생활이 어디에 있느냐, 그 시간에 책이라도 쓰고 주식공부, 영어공부라도 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 혀를 찰 거다. 하지만 알아야 해서가 아니라, 뭔가가 알고 싶어져서 움직이는 그 기분은 느리지만 진하게 흘러내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뜨끈하다.


나 철학자였어?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해지면서 작은 것 하나하나가 크게 느껴지고 모든 것이 의미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멍 때리기는 자극적이고 격렬한 상태와는 거리가 있다. 그 대신 평소에는 도저히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던 (역시 돈은 안 되는) 온갖 ‘잡생각’들이 스멀스멀 머릿속을 채운다. 그중에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아주 형이상학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이나 생각들도 있다. 사실 별 거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뭘까’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삶일까’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100년 뒤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미국은 (별거 없어 보이는데) 왜 이렇게 오랜세월 강대국일까’ ‘인간은 악한 존재일까 선한 존재일까’ ‘죽는 순간 나는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될까’ 등등.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수의 겨울 모습.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호수 근처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며 쓴 저서 『월든』으로 유명하다. 물이 유리처럼 맑다.

끝도 없고 답도 없지만,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각은 생각으로 이어진다. 어떤 때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흐지부지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사유(!)를 하는 것 자체가 의뢰로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아, 내가 호모 사피엔스구나, 이 질문에 그런 생각이 들다니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흥미로운 건 이렇게 멍 때리며 하는 잡생각들이 나를 괴롭히던 복잡한 문제나 심경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는 거다. 분명 고민하던 그 주제로 시작한 생각들이 아닌데,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어느새 ‘그래, 그건 그렇게 두는 게 낫겠다’ 식으로 조금은 정리가 되는 거다. 다른 누구의 조언이나 지시 없이도 멍 때리며 흘러가는 내 안의 수많은 감정·생각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셈이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멍 때리는 생활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단 걸 잘 안다. 하지만,,,,,

산도 좋고 강과 바다도 좋다. 사찰도 좋고 꽃밭도 좋고, 집이나 호텔방도 상관없다. 어디가 됐든 바뀌는 교통신호와 돌봐야 할 사람, 다음 일정을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면 된다.


중요한 건 시간이다. 부디 어렵더라도 살면서 한번쯤 휴가 기간 전체, 아니면 단 이틀·사흘이라도 오롯이 혼자 멍 때리는 시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작가의 이전글 미국에서 만난 잊지못할 싸.운.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