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에도 꼭 와줄꺼지?
언젠가부터 수요일만 되면 너와 괜스레 신경전을 펼치는 것 같아. 아마 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만 되면 우리 아파트 단지를 찾아오기 때문일 거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 혼자서 밀당을 하는 거지.
너로 인해 나의 손과 발이 편해진다면 기꺼이 달콤한 너의 유혹에 빠져들고 싶거든.
본격적으로 더워진 여름을 맞이하여 옴짝달싹도 하기 싫은 요즘, 슬슬 장마철이 시작되는지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습기가 차올라 1층인 우리 집에 거부할 수 없는 꿉꿉함이 제대로 올라오는 요즘,
초미풍 기능을 가진 선풍기를 단짝 친구 삼고 계곡을 상상하며 누워만 있고 싶어 지거든.
하지만 주부로서 그 시간을 하루 종일 만끽할 수는 없어.
아이가 학원 갔다 집에 오는 시간, 남의 편이 집에 올 시간이 가까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야 해.
오늘도 벌써 수요일이구나.
솔직히 고백해도 되지? 얼마 전 수요일 오전에는 말이야.
혹시나 오늘은 너를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살짝 걱정이 되더라고. 괜히 볼 일도 없는데 네가 왔나 일부러 나가봤어. 네가 온 걸 확인하기 위해서 그 근처를 서성거린 적도 있어. 네가 내 눈앞에 있는 걸 확인한 후 없는 가슴 쓸어내리며 안심 한 덩이 가슴에 담고 되돌아온 적도 있지. 숨겨둔 보험처럼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그리고 가끔은 너를 믿고 네가 오는 날이라서 오후 약속을 잡을 때도 있었어. 그만큼 몇 달 동안 너의 신뢰도는 급상승 했고 어느새 너는 나의 찐친이 된 느낌이야.
(주 1회 정도 만나면 우린 친구 아이가~~ 안 오면 보고 싶고 생각나고 그립고 마주하고 싶으니까 친구 맞제?)
오늘 아침에도 남의 편님이 출근할 때 '수요일이네?'라고 말하면서 너의 소식을 전했어.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은근히 남의 편님이 그 소식을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렸거든. 그렇다고 내가 먼저 호들갑 떨면서 너의 소식에 기뻐할 수는 없어. 양심상 그래도 '오늘은 그냥 패스하자' (내가 준비하지 뭐~ 이 말은 속으로만 생각하며...)라고 툭 내뱉었어.
여기서 잠깐! 남의 편님과 평소 짝짜꿍이 잘 맞는 우리 딸은 말해봤자 입만 아파.
매주 너 오는 날을 남의 편님보다 더 손꼽아 기다려. 다른 건 신경도 안쓰면서 나 몰래 달력에 체크라도 해놨는지 수요일은 절대 잊지 않더라고.
그렇게 둘이서 죽이 척척 맞아 좋아서 난리 치며 수요일만 되면 너를 기다리는데 나야 굳이 너를 거부할 필요가 있겠니? 너로 인해 내 두 손과 발이 편해지는데? 게다가 이렇게 더운 여름에는 서있기만 해도 땀이 나고 불 앞에서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면 돌아왔던 입맛도 뚝 떨어져.
(이게 주부 경력 15년차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내가 한 요리가 나조차도 맘에 안 들때도 종종 있고)
그런 와중에 네가 우리 앞에 딱 나타난다면?
저녁을 이미 배불리 먹었는데도,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되는구나.
하긴 너는 나보다 수천 배 아니 수만 배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으로 발산하는 매력은 그 누구도 헤어 나올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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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너의 치명적인 단점은....
다이어트하는 사람에게는 진짜로 적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냥 적 말고 강적!
그리고 지금에서야 말하는 데 요즘에는 네가 친구이기도 하지만 점점 경쟁자가 되어가는 느낌이야. 자꾸만 너의 인기는 높아지고 우리 집 식구들에게 나의 인기는 너 때문에 점점 낮아지고 있거든. 흥! 칫! 뿡!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도 너를 이기기 위해서 나는 불 앞에서 고군분투하느라 나름 애썼거든? 핏물 뺀 등갈비를 손질해서 김치찌개를 끓이고 로컬에서 공수한 완두콩을 싹싹 씻어서 어제부터 불려놓고 오늘 낮에 푹푹 끓여서 아주 부드러워진 곤드레와 함께 맛난 밥을 준비하기로 맘먹었지.
이렇게 열심히 저녁상을 준비해도 다 필요 없더라고ㅜㅜ
너에게 오늘도 난 의문의 1패를 당했어.
(평소 압력밥솥에 찜으로 했던 등갈비는 오늘 그냥 찌개로 냄비에 끓였더니 후루룩 살이 벗겨지지 않아서 먹기 불편하더라고. 우이씨! 더군다나 완두콩과 곤드레를 넣어서 물의 양을 확 줄여서 앉힌 쌀은 살짝 된 밥이 된 거야. 목 넘김이 평소보다 부드럽지 않더라고, 에라이~~)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너의 도움을 받아서 쉽고 빠르고 간단하게 갈 걸 그랬나 봐. 석연치 않은 저녁밥상을 마주한 후 나는 땅을 치고 후회했어.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너를 찾아갈걸...
다음 주에는 이런 고생 안 하고 너를 꼭 찾아갈게. 다음 주에도 변함없이 부릉부릉 안전 운전해서 우리 단지에 맛난 거 가득 싣고 또 와줄 거지? 남의 편님이 좋아하는 떡볶이와 순대, 딸이 좋아하는 슬러시 특히 많이 많이 준비해서 와야 해! 알았지?
잠시나마 널 경쟁상대로 말한 거 급 사과할게. 앞으로는 너를 영원한 나의 동반자로 생각할꺼야^^
(서로 윈윈하는 우리 사이, 너무너무 좋은 사이)
아이도 남의 편님도 너를 애타게 다시 기다리고 있거든. 그리고 잊으면 안 돼!
난 다른 건 몰라도 오징어와 새우튀김이야! 꼭 기억해야 해!
그럼 안녕! 다음 주에 만나자!
덧붙임) 혹시 그 친구가 누구인지 설마 눈치 못 채신 분 설마 없으시겠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