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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미래 Oct 12. 2023

남편 생일날 양념소스를 샀다

생일상보다 메인 요리 하나면 OK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다. 어젯밤 12시에 생일 축하한다는 이모티콘 2개나 보냈고 그 즉시 땡큐라는 답장이 왔다. (아직은 딸이랑 같은 방에서 자고 남편은 밖에서 ^^;; 다들 그러시는 거 맞쥬?)

 남편은 지난 추석 연휴 끝나고 나서도 3일 동안 재택이었고 다시 시작된 3일 연휴 후 격일로 재택근무를 했다. 남편의 재택근무에 내 삶의 만족도가 급 하락했었다. 남편의 숨소리까지 거슬릴 뻔했었다.

그 와중에 다행히 오늘 아침에는 소리소문 없이 현장으로 새벽부터 일찍 사라진 남편이 고마울 뿐이다.

생일날 아침 미역국은 당연히 없다. 미역국은 국으로 생각하지 않은 남편이다. 찌개류와 탕류 마니아인 남편을 위해 미역국을 끓여봤자 먹지도 않는다. 괜히 나도 헛고생하는 기분이라 얼마 전부터는 매번 챙기지는 않는다.


매주 화, 목은 아이가 운동을 간다. 운동가는 시간이 오후 6시부터 7시 반이다. 시간이 참으로 애매하다. 퇴근한 남편과 함께 세 식구가 같이 저녁밥 먹기 어려운 시간이다. 퇴근하자마자 밥부터 찾는 남편은 절대 그 시간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화, 목 저녁에 아이 없이 둘이서 각자 어색하게 폰을 보면서 밥을 먹는 그 시간이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왠지 남편 생일날에는 오히려 나를 위해 밖에서 한 끼정도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아이 운동은 빠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남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어제저녁 외식을 강행했다. 덕분에 어제는 저녁 준비에서 해방되었다.  

어제 밖에서 외식을 했지만 정작 생일 당일 케이크만 먹으며 그냥 넘어가기는 생일 당사자에게 양심상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은 어릴 적 생일날에 엄마가 치킨을 사줬다고 했다. 속으로 오늘도 그냥 치킨이나 시키지 뭐! 이런 대답을 기다리면서 남편한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뭐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예의상 물어봤다.


"먹고 싶은 거?
닭볶음탕이지 알면서 뭘 물어봐"



얼큰하면서도 칼칼한 그 맛에 소주라도 한 잔 걸치고 싶었는지 남편은 치킨이 아닌 닭볶음탕을 요청했다. 매우 귀찮지만 귀찮지 않게 "응, 그래. 생일이니까" 인심 쓰듯 대답을 했다.



(자자~ 쉽게 가자!!!)

아까 동네 마트에 갔다. 포장된 닭을 한 마리 집어 정육코너 선반에 올렸다.

"여기요! 닭 볶음탕 할 거니까 껍질까지 싹 벗겨주세요"

손질이 완료되는 사이 시판 양념소스코너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오늘도 그 자리에서 나의 시선을 끄는 다* 닭볶음탕 소스를 구입했다. 다른 소스들은 이천 원 이하로 다 세일 중인데 이것만 3,500원이다. 왜 이것만 비싼 거야 혼자서 구시렁댔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고민 없이 즉시 집어 들었다. 넉넉하게 감자 3개를 2천 원에 담아서 나오려던 찰나, 아! 혹시나 해서 백만 년 만에 소주 한 병도 담았다.

(나는 소주를 못 마시지만 남편은 가끔씩 소주를 찾는다)


집에 와서 절단된 닭을 데친 후 닭볶음탕 양념소스와 감자, 대파를 넣고 끓이니 이번에도 이건 요리가 아니다. 필요한 건 단지 푹 익어가는 시간이다.

사실 이 양념 소스를 사는 이유는 바로 남편의 입맛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같은 요리를 하더라도 매번 같은 맛이 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 특히 닭볶음탕은 과거에 나한테 은근히 까다로운 메뉴였다. 남편은 닭볶음탕을 얘기하면서 매번 같은 맛을 상상한다. 하다못해 시어머님도 나이가 드시니 매번 음식 맛이 다르다고 남편이 나한테 가끔씩 얘기한 적도 있다. 물론 내 요리도 맛이 없으면 그 앞에서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는 밉상이다.

(데리고 살아주기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불만은 오지게 많은 JS 중 최고 JS지만 오늘은 생일이라서 봐준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 남편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 소스에 정착하지 못하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겨우 찾아낸 구세주인 이 소스가 오늘도 열일을 했다. 시판 소스의 도움으로 오후 시간이 남아돌았다. 안 끓이려고 다짐했던 미역국까지 집에 재료가 있어서 끓여버렸다. 이건 나와 아이가 반찬 없이 국에 밥 말아먹으면 된다. 여차하면 내일까지 먹을 수도 있다.


어느새 남편의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아이는 곧 운동을 가고 남편은 집으로 돌아온다. 글을 쓰는 시간에 닭볶음탕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찼다. 오늘만큼은 나도 옆에서 미역국과 함께 맛있게 닭다리 하나 뜯어봐야겠다.


남편! 생일 축하해, 진심으로 생일 축하하니까 내일도 출근할 거지?  
설마 내일도 재택근무 하는 거 아니지?



<남편을 위해 시판 소스로 만든 닭볶음탕과 생일 미역국 : 오늘 저녁 준비 끝!!>




사진출처 : 오늘 직접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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