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밭 산책

by 이상역

가로수가 정갈하게 늘어선 길가에는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낙엽이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리를 배회한다.


낙엽이 생을 마감하고 갈 길을 서두르는 것은 자신을 탄생시킨 대지의 부름에 따르려는 자연의 순응이다.


낙엽은 생성과 소멸 자람과 퇴화라는 순환의 작용을 반복한다. 나무는 사계절 하루도 쉼 없이 폭풍우에 견디고 바람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고 모천인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소유의 날개를 달았다. 나뭇잎은 자양분의 희생이란 고통을 감내하며 사람에게 단풍이란 색깔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무릇 생명은 인내와 고통이란 지난한 과정을 겪고 나서야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글이란 존재의 집도 마찬가지다. 영혼의 고통을 견뎌내며 탄생한 글은 아름답다 못해 처연하다.


하이데거는 글을 존재의 집이라 갈파했다. 언어도 생성과 소멸, 버림과 선택, 갈등과 고민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태어난다.


작가가 쓴 글을 읽는 것은 행간에 숨어있는 숨결을 느끼려는 공감의 여행이다. 그 여행을 통해 슬픔과 고통과 기쁨을 발견하고 감정을 공유하고 정서를 나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쓰지 않는 사람이 부럽다.”라고 말했다. 매일 같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작가의 고뇌와 혼이 담긴 말이다. 최명희는 ‘혼불’의 씨앗 하나를 살리기 위해 17년이란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글을 썼다.


낙엽의 생명이 귀근(歸根)에 있듯이 글의 생명은 귀심(歸心)에 있다. 글의 모천은 사람의 마음자리다. 깊은 심연에서 우러나지 않은 글은 곧 사어(死語)가 되고 만다.


결국에 사람의 마음은 글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자신이 태어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시원이다.


아름다운 글에는 아름다운 마음이 깃든다. 그런 글을 만나면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고 반가움이 앞선다. 글에서 은은하게 솟아나는 맑은 마음을 만나는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다.


그런 날은 텅 빈 가슴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채웠다는 충만감에 마음도 풍성해진다. 더불어 가슴 한구석에는 가볍게 떨리는 물결이 잔잔하게 파도를 친다.


글의 진정한 가치는 감동과 마음의 공유다. 감동은 나를 돌아보는 반면의 스승이고, 공유는 나도 그런 경험을 해보았거나 다가갈 수 있다는 마음의 유대이자 정서다.


맑은 글에는 사람의 진정성과 순수함이 배어있다. 그런 글에는 사람의 마음을 소통시키는 연결 장치가 곳곳에 숨어있다.


글은 영혼의 빛을 발하여 쪼아 만든 마음의 피조물이다. 글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혼을 불어넣고자 하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다.


가끔 글을 읽다가 다듬어지지 않은 마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글을 만나면 그 사람의 열정과 진정성에 물음표를 던진다. 사과가 숙성되어야 맛과 향기가 우러나듯이 글도 마음의 여과라는 심연의 숙성을 거쳐야 진한 향기가 우러난다.


침묵이 때로는 표현보다 나을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한 번은 내면의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 전달해야 한다.


가을에 낙엽이 자양분의 희생을 통해 단풍으로 태어나듯이 글도 영혼의 고통과 인내라는 시련을 거쳐야 새롭게 소생한다. 때때로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고 생생하게 표현한 멋진 글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글을 만나면 내 마음도 맑아지고 기쁨이 마구 솟구친다.


게다가 글을 쓴 사람이 어떤 과정을 통해 글을 쓰게 된 것인지를 어렴풋이 아는 날은 글 밭을 서성이며 깊은 사유에 빠져든다.


글이 세상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누군가가 읽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읽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글은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낙엽이 지는 것은 쓸쓸함과 고독이지만, 글의 추락은 비참과 참담함이다. 글은 사람에 의해 명멸하는 존재다.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온전한 마음과 소멸을 불사하는 희생을 감수하며 글에 영혼을 새겨 넣어야 한다.


글 밭 사이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것은 적당한 여백과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작가의 숨결 때문이다. 그런 글에는 세월을 이겨낸 작가의 은은한 향기가 서려 있다. 그 향기는 시간이란 창고에서 숙성된 글 쓴 사람의 마음이자 영혼이다.


가을밤이 점점 깊어만 간다. 하루라는 일상도 밤이 되면 갈 곳을 잃는 계절이다. 하루의 일과를 제 자리로 돌리고 그날그날을 마감하는 존재는 어둠이다. 낮은 밤이 받쳐주고 밤은 낮이 비워준 자리를 채운다는 말이 있다.


어둠이 깊어가는 가을밤에 글의 뜰을 거닐면서 맑은 마음을 만나면 한없는 사유의 세계를 여행하게 된다. 그 여행에서 글의 향기에 취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면 낮이 비워준 밤은 점점 깊어가고 새로워진다.


글 밭 사이에 난 여백을 소슬한 마음으로 사색하며 산책하고 싶다. 더불어 깊어가는 가을밤에 향기가 새록새록 피어나는 글에 흠뻑 취해 이 밤이 다하도록 글 밭을 서성이며 그리움과 목마름의 갈증을 풀어내고 싶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