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하루를 비로 시작해서 비로 끝낸다. 가을에 비가 내리는 것은 좋은데 자주 내려서 걱정이다. 들녘의 과일과 곡식이 알차게 영글기 위해서는 빗물보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더 필요한 시기다.
추석부터 내리던 비가 아직도 진행형이다. 가을에 아침부터 비가 내리니 몸도 마음도 무겁고 날씨가 우중충하니 밖에 나가는 것도 꺼리게 된다.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얼마만큼의 삶을 내 가슴에 적셔왔는가
생각해 본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인가
언젠가 마음 한구석에 허전한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훌쩍 떠날 날이 오면 미련 없이 떠나버려도
좋을 만큼 살아왔는가
봄비는 가을을 위하여 있다지만
가을비는 무엇을 위하여 있는 것인가
싸늘한 감촉이 인생의 끝에서 서성이는 자들에게
가라는 신호인 듯한데
온몸을 적실만큼 가을비를 맞으면
그대는 무슨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내일을 가야 하는가(용혜원, "가을비를 맞으며")
가을에 비가 내리니 시인처럼 가을비를 맞아가며 온몸을 적시고 삶에 대한 무게를 생각해 보고 싶다. 시인의 시구처럼 봄비는 가을을 위해 내린다지만 가을비는 무엇을 위해서 내려야만 할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가을비의 무게만큼 내 삶도 진중하게 살아온 것일까. 가을비가 아침부터 내리니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우산을 받쳐 들고 구봉산에 등산을 갔다 왔더니 가슴에 차가운 기운만 들어찬다.
여름에 비가 내리면 빗물이 노랫소리로 들리더니 가을에는 비가 내리니 쓸쓸하고 처량한 노랫소리로 들려온다. 빗물이 삶을 빛나게 하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뒹구는 낙엽처럼 허접하고 허전하기만 하다.
가을날에 비가 내리니 인생의 지난 시절과 봄부터 가을까지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 마음에 길을 걷다 뒤를 돌아보니 텅 빈 가슴에 멍한 생각만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가로수는 나뭇잎을 물들이며 제 갈 길로 가는데 날씨는 단풍으로 물들지 않고 곡식과 과일이 가는 길을 방해하며 빗물만 추적추적 땅을 향해 떨군다.
오늘은 아침부터 바닥에 떨어진 노란 은행들이 이상한 냄새를 피우며 갈 길을 헤매게 한다. 마치 비가 계절을 거슬러 내리는 것처럼 바닥에 떨어진 은행들도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을 피해 어딘가로 달아나려는 것 같다.
긴 연휴 끝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차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들려온다. 도로에는 차만 보일 뿐 사람은 그림자조차 만날 수가 없다. 가을비가 앞 시야를 가리니 삶의 순서도 바뀌고 무언가 속 시원하게 털어낼 것도 없다.
비가 내려 약간 두꺼운 옷을 걸치고 나왔는데 빗물이 젖어들자 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옷의 무게만큼 몸이 무거운 것보다 마음이 더 무거운 것이 문제다.
가을은 몸보다 마음이 가벼워야 생각이 깊어진다. 사색의 계절 가을에 마음은 무거워지고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어딘가에 의지할 곳도 없다.
계절이 계절다워야 사람다운 생각을 하게 되는데 빗물이 더해지니 앞도 뒤도 옆도 빗물이 막으니 생각까지 멈춘다. 올해는 봄부터 가을까지 날씨가 갈 길을 자주 잃고 헤맨 것 같다.
봄에는 눈이 내려 계절이 가는 길을 막고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비가 내려 여름과 가을이 가는 길을 막아섰다. 눈과 빗물이 계절을 막는다고 가지 않을 계절이 아니지만 자꾸 막아서면 더불어 살아가는 뭇 생명이 피해를 보게 된다.
가을비가 오는 게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하고 계절을 덮어버릴 만큼 내린다. 사람이나 계절이나 적당하면 보약이 되는데 정도를 넘어 지나치면 해가 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가을비를 바라보니 들녘에서 들려오는 농부들의 풍년가와 바다에서 들려오는 어부들의 만선가가 그립기만 하다.
계절이 계절다운 노래로 가득해야 하는데 언제 비가 그치고 그리운 풍년가와 만선가를 들을 수 있을까. 바닷가와 들녘이 떠들썩해야 사람살이도 풍성해지는 것인데 그런 노래를 들은 지도 오래다.
젊은 사람은 도시의 불나방이 그리워서 정든 고향을 떠나가고 그늘 진 삶이 싫어서 힘든 일은 마다하는 세상살이다. 세상은 점점 몸으로 하는 일은 싫어하고 기계나 로봇이나 AI가 대신하는 것을 그리워한다.
어떤 일이든 몸으로 부딪혀봐야 이치나 도리를 깨우치거나 깨닫게 되는 것인데 기게나 로봇은 생각하는 기능이 없어 반복만 할 뿐이다.
어쩌면 오늘 아침에 내리는 비도 계절에 불편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번쯤 온몸으로 맞아가며 몸을 흠뻑 적셔보라는 의미는 아닐까. 온몸에 비를 맞으면 가을의 쓸쓸함이 아닌 자신의 삶이 진정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