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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공 Jul 26. 2024

M의 편승 - 1 -

단편소설 연재

    「그만둘래.」

뒷모습만 익숙한 사람들 사이의 틈을 걸었다. 아무런 표지도 없이 늘어진 버스 정류장에서 운명처럼 다가올 자신의 버스를 기다리는 자들, 단속을 피해 밤늦게 붙였던 호객 종이들을 떼어내느라 쪼그려 앉은 자들, 골목길에서 튀어나오려는 차보다 먼저 지나가기 위해 필사적인 자들, 관습처럼 자리 잡은 금연 구역의 흡연구역에서 막간의 끽연을 누리는 자들. 그들의 양쪽 날갯죽지로부터 뻗은 수많은 오늘들이 둥둥 떠다녔다. 나의 것은 뭐 어디 발뒤꿈치 같은 곳에 간신히 매달려 늘어져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이 길은 늘 나의 오늘들이 질질 끌려다닌 자국이 짙게 남아 있었다.


    「관두고 뭐 할 건데?」 H가 추궁했다. 횡단보도의 줄어드는 녹색 역삼각형도 답장을 채근했다. 그러는 사이 H는 미리 연구라도 해뒀는지 몇 개의 예상들을 현란하게 늘어놨다. 하루 견과 한 봉지를 한 달에 걸쳐 쪼개어 먹게 될 것, 냉난방비가 없어 온 동네 은행 로비를 전전하게 될 것, 집에서나 비밀리에 입을 넝마들이 외출복이 될 것. 의식주를 넘나드는 저주에 정신이 혼미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쌍디귿을 입력하기도 전에 H의 결재가 떨어졌다. 「반려야.」 입력돼 있던 어를 그대로 보내버렸다.


    「우리 셋은 고점에서 물린 거야.」 건물 정문에 들어설 때쯤 K가 말했다. 주식 얘긴 이제 신물이 난다 하니 그녀는 그게 아니라며 재빠르게 덧붙였다. 「여기 들어오긴 제일 힘들 때 들어왔는데 갈수록 하한가만 치고 있잖아!」 그러곤 무료 이모티콘으로 훌쩍거렸다. 고점 어쩌고 하는 절묘한 비유는 아마 본인의 경험에서 착안했을 터였다. 낯선 이름의 코인에 털어 넣은 전 재산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졌다며 한바탕 눈물 콧물을 짜댔던 그녀는 여간 볼썽사나운 게 아니었다. 인조 속눈썹이 눈물과 함께 손등에 딸려 나오자, H는 한 모금 정도 마신 커피를 몽땅 버리곤 황급히 도망치는 길을 택했었다. 당시 내가 끝까지 자릴 지켰던 건 새가슴이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제에 전재산을 탕진할 수 있었던, 어떻게든 될 용기의 출처가 궁금해서였다. 그게 나에게 있었다면. 엘리베이터의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K의 말을 정정해 줬다. 「이대로 가다간 하한가가 아니라 상장 폐지될 수도.」


    고점. 뭐 그랬다. 최근 급등한 코인처럼, 이곳의 주가가 연일 상한가였던 적이 있긴 있었다. 전공 불문의 예비 일꾼들이 앞다퉈 노량진으로 향했던 시기. 누군가는 나라가 망할 기류라 했고, 나란 놈은 그 기류에 올라타기 바빴다. 태어나 가장 자신 있는 게 편승이었다. 엄청난 마일리지가 최종 보상일 거라 여겼던, 대학교에서의 해묵은 편승. 그 4년간의 편승이 그저 또 다른 편승을 위한 경유에 불과했다는 비보를 인식할 겨를도 없었다. 1년간의 연장 편승에 모든 정신을 쏟았다. 그래서 다행히 안착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두 발은 허공에서 미친 듯이 허우적거렸다. 안도 착도 없었다. 영문을 몰랐다. 몰랐기에 언젠간 멈출 거라고, 온 힘을 다해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진짜 온 힘이 다해버렸다. 그리고 알아버렸다. 그때의 기류는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그럼에도 끝의 모습만큼은 선연하게 그려져 더욱 비극적인 난기류였다는 걸. 들어서야만 깨달을 수 있는, 되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다른 편승으로 향하는 틈마저도 안내되지 않는 완벽한 고립의 난기류. 그것에 둔해져 더 이상 허우적거리지 않게 됐을 때, 뉴스에서는 ‘MZ공무원 줄퇴사에 공직 비상’ 따위의 특집 기사를 쏟아내며 무분별했던 나의 편승을 비웃었다.


    허우적거림이 잦아들자 사색으로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았다. 이곳에 대한 고찰, 의문, 몽상, 기대, 실망, 상상, 좌절, 착각, 망상, 회의, 환멸. 그러한 사색들 대부분은 모호한 것들로부터 촉발되곤 했다. 이곳 자체, 이곳과 나 사이의 경계, 그 둘을 지배하는 제도나 패러다임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견지해야 할 신념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당위 같은 것들. 그 사색들은 어쩌면, 이곳에서 내가 ‘온전하게’ 아니면 적어도 ‘아무렇지 않게’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줄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호함에서 기어 나온 그 갈망들은 굉장히 모호하게, ‘그나마 최악은 아니잖아’나 ‘어딜 가나 똑같지’ 같은 자포자기의 과정으로, 이곳에 ‘어찌할 수 없어’ 존재해야만 한다는 회색빛 결론으로 흩어져버릴 뿐이었다.


    일련의 흐리멍덩한 체념이 거듭되자, 모호한 사색 대신 명확한 탐구에 열을 올렸다. 명확한 것들 중 탐구하기에 민망한 것들, 예를 들면 삶을 영유하려면 경제 활동이 필요하다는 피곤한 사실, 그러기엔 이곳 경제활동의 대가가 너무나도 작고 소중하다는 절망 따위의 것들은 하나씩 열외로 했다. 그런 것들은 편승하기 전 주의를 기울였다면 충분히 모면할 수 있었던 것들이라 파고들어 봤자 스스로를 향한 책망만 짙어질 뿐이었다. 그렇게 하나 둘 제외하다 보면 남는 건 결국 사람이었다.


    수요 된 바 없어도 끊임없이 공급되는, 내 주변에 너무나도 명확하게 존재하는 자들. 무능력 출세주의자, 유능력 안일주의자, 몰염치 쾌락주의자, 목적 없는 호전론자, 무지해서 무례한 자, 알면서도 무례한 자, 자기애로 인류애를 말살시키는 자, 고집이 아집이 되어버린 오만방자한 자, 가면을 쓰고 칼을 꽂는 교묘한 자, 타인의 손으로 칼을 꽂는 더 교묘한 자, 남의 희생에 주저함이 없는 자, 타인의 비밀을 불허하는 의문스러운 자, 눈물의 임계점이 낮고 그걸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자, 악에게 빌붙는 악이 기약된 자. 군상들 속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탐구했으며, 가차 없이 경멸했다.


    그리고 경멸할 때마다 사직서를 썼다. 그냥 쓸 수는 없었다. 이곳이 만들어 둔 사직서 양식은 보면 볼수록 싸가지가 없었다. 들어올 땐 수백만 자의 책들을 학습하게 하고, 1,000자 분량의 자기소개서를 쓰게 하고, 각종 도형이 난무하는 종이들로 나도 모를 내 적성을 테스트하더니,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차 신체검사서를 통해 내 신체가 얼마나 볼품없는지를 상기시켰고, 가족관계증명서, 등본, 초본까지 제출케 하고 나서야 나에 대한 의문을 거뒀던 이곳이다. 그렇게 시달렸던 자가 토해낸 결심, 그 처연한 결단을 겨우 두 줄 남짓의 글로 파악하려 하다니. 예의 없다, 배려 없다, 재수 없다, 사려 없다, 수많은 ‘없는’ 말들로는 부족할 만큼 싸가지가 없었다.


    먼저 그 싸가지 없는 사직서의 ‘사유’ 칸을 경멸의 강도만큼 늘린다. 그래야 그들이 정의한 알량한 사유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사유가 가능하다. 칸의 맨 위에는 인물을 한마디로 정의한 표제를 볼드체로 입력하고 바로 아래에 인물의 기질과 습성을 탐구한 결과를 깔아 서문 비슷한 걸 작성한다. 여기엔 비유를 더하면 더할 나위가 없다. 본문이 될 곳에는 인물의 행적과 만행을 추측이 아닌 오로지 사실에 입각해 진술하고, 그것으로 인한 피해사례는 가명의 피해자별로 조목조목 나열한다. 가명이라고 해봤자 십중팔구는 나였다. 여기까지 적다 보면 가끔 악에 받칠 지경이 되기도 하는데, 그럼 동종의 인물이 관여된 다른 사회 이슈나 예술 매체에서 동종 인물을 다룬 사례를 인용해 경멸스러움을 재차 환기한다. 마지막으로 결문에서, 앞의 모든 것을 종합해 경멸스러운 자에게 파멸을 고한다. 그대는 그대를 만들어 낸 창조신의 할애비가 와도 구제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런 구제 불능인 그대에게 자멸하여 절대다수의 행복을 기릴 수 있는 기회를 하사하겠다고. 매몰차지만 관대하게.


    매번 심혈을 기울였다. 꼭 사직서를 쓰기 위해 취직한 사람 같았다. 물론 이 과정 역시 ‘온전하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용하지는 않았다. 이것에 몰두하다 보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곳에 존재하기 위함이라고 자조하다 보면, 이곳에 ‘어찌할 수 없어’ 존재해야 한다는 잿빛 오늘들이 아주아주 조금은 옅어지곤 했다. 경멸스러운 자는 경멸받아 마땅하니까, 나는 마땅하지 않은 곳에서 마땅한 경멸을 하고 있는 거니까. 벌써 열네 개가 되어가는 사직서들은 제출 날짜와 서명이 비워진 채 지방공무원보수규정.hwp 따위로 위장되어 겹겹이 쌓은 폴더 속에서 당사자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숨죽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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