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저녁의 나라

by 남킹

제1장: 칠흑의 탈출

동굴의 숨결은 차갑고 무거웠다. 열 해, 삼천육백오십일 하고도 몇 번의 윤일이 더 흘렀을까. 지수는 시간을 세는 것을 멈춘 지 오래였다. 이 태곳적 어둠 속에서 시간은 무의미한 강물처럼 흘러, 그의 존재를 침식하고 형태를 바꾸어 놓았다. 눈을 뜬 것은 새벽이라기보다는, 아직 밤의 가장 깊은 심연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각이었다. 의식은 마치 진흙 속에서 떠오르듯 느릿하고 혼탁하게 돌아왔다. 칠흑, 그것은 단순한 빛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게였고, 질감이었으며, 지난 십 년간 그의 유일한 벗이자 감시자였고, 또한 그의 가장 안전한 감옥이었다.

그의 동공은 훈련된 군인의 그것처럼 순식간에 확장되어, 희미한 윤곽조차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형태를 분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랜 적응의 결과였지만, 결코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바위벽에 땀에 젖은 손바닥을 짚었다. 벽에서는 영겁의 세월 동안 스며든 냉기와 지하수의 비릿한 냄새가 배어 나왔다. 몸을 일으키는 동작 하나하나가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고통스러웠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누워 보낸 밤은 그의 온몸의 근육과 관절을 돌처럼 굳게 만들었다. 뼈마디 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뻐근함.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익숙해진 통증이었지만, 길들여질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잠시 미동도 없이 서서, 동굴 내부를 흐르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것은 마치 눈먼 자의 지팡이처럼, 그의 피부에 와 닿는 감각으로 출구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었다. 수없이 반복된 탐색과 기억이 만들어낸 본능적인 나침반이었다. 공기의 미세한 떨림, 온도 변화, 습도의 차이. 이 모든 것이 어둠 속 그의 언어였다.

낡고 해진 가죽 배낭을 챙기는 그의 손길은 소리 없이 신중했다. 배낭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는 그의 남은 삶의 전부가 담겨 있었다. 손때 묻어 반질반질해진 오래된 사냥용 칼, 마모되었지만 여전히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부싯돌과 부시, 거의 바닥을 드러낸 딱딱한 건조식량 몇 조각. 그리고 그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매달린, 작고 낡은 로켓 목걸이. 뚜껑을 열면 누렇게 변색된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기 전, 따스했던 햇살 아래의 기억. 그것은 그의 유일한 부적이었고, 절망 속에서도 그를 붙잡아준 마지막 닻이었다.

"오늘이다." 그의 목소리는 동굴 벽에 부딪혀 메아리 없이 스러졌다. 오랫동안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 성대는 녹슨 경첩처럼 거칠었고, 입안은 사막처럼 말라 있었다. "더는... 더는 여기 있을 수 없어." 그의 속삭임은 자신을 향한 다짐이자, 오랜 망설임 끝에 내린 결연한 선언이었다.

출구로 향하는 길은 그의 손바닥 지문처럼 익숙했지만,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미로였다. 어둠 속에서 그는 손과 발, 온몸의 감각으로 길을 읽었다. 어떤 구간은 그의 어깨가 스칠 정도로 비좁아 숨을 참아야 했고, 어떤 곳은 갑자기 공간이 넓어져 방향 감각을 마비시키려 했다. 바닥에는 발목을 삘 수 있는 돌부리가 숨어 있었고, 벽에서는 날카로운 돌출부가 그의 옷을 찢거나 살갗을 할퀴었다. 그러나 지수는 이 길을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은 더듬었을 것이다. 그의 손끝과 발끝은 눈을 대신하여 동굴의 모든 굴곡과 모서리, 함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차가운 습기가 그의 손바닥을 적시고 소매 끝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동굴 공기는 폐 속까지 파고드는 묵직함과 답답함으로 가득했고, 곰팡이와 썩어가는 유기물의 냄새, 그리고 깊은 땅 속 광물의 비릿함이 뒤섞여 역겨움을 자아냈다. 정적을 깨는 유일한 소리는 천장에서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였다. 또르륵... 또르륵... 그 소리는 마치 영겁의 시간을 재는 시계추처럼 규칙적이었고, 지수는 때로 그 소리의 간격으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곤 했다. 그 단조로운 리듬은 때로는 위안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그의 고독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마침내,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늘구멍처럼 작은 점에 불과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점차 커져 원형의 형태로 변모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희망의 약속과도 같았다. 동굴의 입구. 그러나 그 희망의 문턱 앞에는 마지막 시련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버티고 있었다.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절벽이었다.

지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절벽 아래에 섰다. 올려다본 절벽은 어둠 속에서도 그 위압적인 높이를 짐작케 했다. 대략 15미터.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듯한 높이였다. 표면은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불규칙하게 깎여나갔고, 밤새 내린 이슬인지 혹은 스며 나온 지하수인지 모를 습기로 미끄러웠다. 그는 배낭을 다시 한번 고쳐 메고, 마른 침을 삼켰다.

첫 발을 내딛는 것은 언제나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벽에 몸을 밀착시키고, 손가락 끝의 감각을 곤두세워 작은 틈새나 돌출부를 찾아 더듬었다. 발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위의 가장 안정적인 부분을 찾아 조심스럽게 디뎠다. 그의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며, 중력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오르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시간은 극도로 느리게 흘렀고, 매 순간이 사투였다. 날카로운 바위 모서리는 장갑을 낀 손가락마저 파고들어 살갗을 베었고, 핏방울이 바위에 스며들었다. 발밑의 미끄러운 이끼는 여러 차례 그의 균형을 위협하며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몇 번이고 그는 아찔한 순간을 맞았다. 발이 헛디뎌지거나 손이 미끄러지며 아래로 추락할 뻔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다른 지지점을 찾아내거나 몸의 중심을 필사적으로 되찾았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시야를 가리고 눈을 따갑게 찔렀다. 팔과 다리의 근육은 이미 한계를 넘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목구멍에서 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기서... 여기서 무너질 순 없어." 어머니의 얼굴, 잃어버린 형제들의 모습, 그리고 '그날'의 참혹했던 기억이 그의 의지를 채찍질했다.

절벽 중간쯤, 손가락 하나 겨우 걸칠 수 있는 작은 턱에 매달려 그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동굴 바닥은 아득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보였다. 만약 떨어진다면, 그의 존재는 이 깊은 어둠 속에서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질 터였다. 그러나 그는 떨어질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있었고, 찾아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다시 살아야 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짰다. 손끝은 이미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상처투성이였고, 팔 근육은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뼘, 또 한 뼘.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고통스러운 전진이었다.

마침내, 그의 손끝이 절벽 꼭대기의 거친 흙과 마른 풀을 움켜쥐었다. 마지막 안간힘으로 몸을 끌어올리자, 전혀 다른 세상이 그를 맞이했다. 세상은 아직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동쪽 하늘 저편에서부터 지극히 희미한 여명의 기운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두꺼운 융단 같은 밤의 장막을 조심스럽게 찢고 스며드는, 가늘지만 분명한 희망의 빛줄기였다.

지수는 바위 위에 그대로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그의 가슴은 풀무처럼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타는 듯한 갈증으로 산소를 갈구했고,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듯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머리 위로 펼쳐진 밤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다. 하늘에는 아직 수억 개의 별들이 보석처럼 총총히 박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장엄하고, 아득하며, 순수한 아름다움이었다.

십 년.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 만에 처음으로, 그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온전히 열린 하늘을 마주하고 있었다. 동굴 속에서 때때로 입구를 통해 올려다보았던 하늘의 작은 조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끝없이 펼쳐진 별들의 바다. 그것은 그의 메마른 영혼을 압도하는 숭고한 광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광경을 잊고 살았는지, 혹은 갈망해왔는지 깨달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친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자,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애써 그 고통을 무시했다. 대신 그는 깊게, 아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동굴 밖의 공기는 놀라울 정도로 맑고 차가웠으며,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굴 속의 무겁고 탁한 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습기를 머금지 않은 상쾌한 공기 속에는 오래된 침엽수의 청량한 향기, 먼 들판에서 불어오는 마른 풀의 냄새, 그리고 새벽이슬에 젖은 촉촉한 대지의 향기가 오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자유의 향기였다.

그는 넋을 잃고 점점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너머로 번져 나오는 빛은 시시각각 그 색채를 바꾸고 있었다. 처음에는 잿빛 어둠을 밀어내는 희미한 보라색이었다가, 이내 깊고 부드러운 남색으로, 그리고 다시 핏빛처럼 강렬한 진홍색으로 물들었다. 마침내,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하늘은 눈부신 황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천상의 화가가 밤의 캔버스 위에 펼쳐 보이는 장엄하고 신비로운 그림과도 같았다.

지수는 거의 잊고 있었던, 혹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에 사로잡혔다. 경외감. 대자연의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웅장함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왜소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 거대한 우주의 일부라는 미묘한 연결감. 그는 자신이 이 폐허가 된 세상 속에서도 결코 완전히 홀로는 아님을 느꼈다. 비록 인간의 문명은 '아마겟돈'이라 불린 대재앙 이후 산산조각 나 붕괴되었을지라도, 자연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여전히 그 장엄한 순환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주변 지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가 올라선 곳은 바위투성이의 작은 고원이었고, 그 너머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아래로 내려가는 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언덕 아래에는 뒤틀리고 기형적인 모습이지만 꿋꿋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고, 그 숲 너머로는 아득한 지평선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평원이 보였다. 그 풍경은 처절하게 파괴된 문명의 잔해 위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야생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황폐하면서도 숨 막히게 아름다운, 모순적인 풍경이었다.

아마겟돈. 인류의 오만이 불러온 재앙 이후,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 한때 밤하늘을 밝혔던 도시들은 이제 방사능과 죽음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폐허로 남았고,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파더스(Fathers)'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의 감시와 공포 속에서 그림자처럼 숨어 살아가고 있었다. 자연은 이 혼돈 속에서도 서서히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지만, 그 회복의 과정은 마치 고통스러운 신음처럼 느리고 처절했다. 나무들은 방사능에 뒤틀린 기괴한 몸체로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었고, 꽃들은 예전의 화려함을 잃은 채 드물게 피어났으며, 한때 이 땅을 뛰놀던 야생동물들은 이제 전설 속 이야기처럼 희귀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느 길이 그를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미래의 희미한 가능성으로 인도할 것인가? 동굴 속에서 수없이 많은 계획을 세우고 지도를 머릿속에 그렸지만, 막상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 맨몸으로 서니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위태롭게 느껴졌다. 미지의 세계는 그의 발밑에서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는 안개 속에서도 등대처럼 분명했다. 그는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었다. '사피엔티아(Sapientia)'의 마지막 남은 형제 중 한 명으로서, 그에게는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었다. 세상을 파멸로 이끈 파더스의 부상을 막지 못했던 그날의 뼈아픈 실패는 여전히 그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회한과 자책감은 지난 십 년간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행동해야 했다. 어쩌면 아주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형제들도 어딘가에서 살아남아 이 폐허 속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수는 굳게 입술을 다물고 결연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의 눈빛에는 오랜 어둠의 그림자와 함께, 막 깨어난 새벽빛 같은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등에 짊어진 배낭의 끈을 단단히 조이고, 희미하게 밝아오는 동쪽 지평선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한 걸음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 그리고 아직 꺼지지 않은 희미한 희망의 불씨가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잃어버린 삶을 되찾기 위한, 그리고 어쩌면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을지 모를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마침내 동쪽 지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완전히 솟아올랐다. 강렬한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살았던 그의 눈은 갑작스러운 빛의 세례에 적응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멀어버릴 듯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햇빛을 가렸지만, 그 따스함은 그의 차갑고 메마른 피부를 부드럽게 감싸며 녹였다. 그것은 마치 수십 년 만에 만난 오랜 친구의 다정한 포옹과도 같이 느껴졌다. 위안과 동시에 낯선 감각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신선한 공기는 그의 몸과 마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망설임 없이 두 번째 발걸음을 내디뎠다. 발밑의 땅은 단단했고, 작은 돌멩이들과 마른 풀들이 그의 낡은 군화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감촉은 생소하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점차 속도를 높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더 자신감에 차 있었고,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앞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새로운 희망일 수도, 아니면 더 깊은 절망과 또 다른 시련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준비되어 있었다. 무엇이 닥쳐오든, 피하지 않고 맞설 준비가. 그의 고독한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제2장: 대지의 속삭임

세상의 종말을 목격한 자의 눈빛은 평범한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 지수의 눈동자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담겨 있었다. 한때는 총명함과 순수함으로 빛났을 그 눈빛에는 이제 삶의 잔혹한 무게와 죽음의 스산한 냄새, 그리고 십 년이라는 고독이 새겨놓은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눈빛은 주변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경계하며, 잠재된 위협을 탐색했다.

그는 고원에서 완만하게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야생의 짐승처럼 조심스러웠고, 소리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좌우와 전방, 심지어 등 뒤까지 훑으며 주변 환경의 미세한 변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방심은 곧 죽음과 동의어였다. 그것은 그가 십 년의 고독 속에서 뼈저리게 체득한 생존의 제1원칙이었다.

계곡의 경사는 비교적 완만했지만, 방심하는 순간 여행자를 삼킬 듯한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마치 대지가 부르짖으며 뱉어낸 듯한 날카로운 바위들이 고대의 부러진 검처럼 땅 위로 불쑥 솟아 있었고, 그늘진 곳에 자라난 축축하고 미끄러운 이끼는 언제든 발밑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번은 그가 발을 헛디뎌 균형을 잃고 비탈길을 따라 몇 미터나 굴러떨어졌다. 그의 몸은 가시덤불과 날카로운 돌멩이에 부딪혀 여러 군데 긁히고 멍이 들었으며, 낡은 옷은 여기저기 찢어졌다. 그러나 그는 거의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삼켰다. 아픔은 이미 그의 오랜 친구였고, 불필요한 소리는 포식자를 불러들이는 초대장과 같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태양은 중천을 향해 서서히 이동하며 그의 등 뒤에서 작열했다. 땀이 온몸에서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끊임없이 솟아나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턱 끝에 매달렸다가 뚝뚝 떨어져 메마른 흙먼지를 적셨다. 어떤 땀방울은 눈썹을 타고 흘러 눈 안으로 들어가 따갑게 시야를 방해했고, 어떤 것은 입술 사이로 스며들어 짭짤하고 씁쓸한 맛을 남겼다. 그의 낡은 셔츠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무겁게 몸에 달라붙었고, 거친 천이 움직일 때마다 쓸린 피부가 따끔거렸다.

계곡 깊숙이 내려갈수록, 나무들이 점점 더 울창해지며 하늘을 가렸다. 마치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듯한 거대한 고목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의 뒤틀리고 굵은 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경쟁하듯 뻗어나가 빽빽한 초록색 지붕을 형성했고, 그 아래는 영원한 황혼처럼 희미하고 서늘한 빛만이 감돌았다. 햇빛이 거의 닿지 않는 이곳의 공기는 계곡 위쪽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늘진 숲 속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서늘한 바람이 그의 땀에 젖은 피부를 감싸며 오싹한 한기를 느끼게 했다. 그의 몸은 순간적으로 떨렸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이 야생에서 정지는 곧 먹잇감이 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움직임만이 그의 유일한 방어막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계곡의 바닥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던 물 흐르는 소리가, 그가 다가갈수록 점점 더 선명하고 또렷해졌다. 졸졸졸, 바위 사이를 흐르며 내는 그 청량한 소리는 마치 메마른 대지가 속삭이는 생명의 노래처럼, 혹은 지친 나그네를 부르는 정령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지독한 갈증이 그의 목을 강하게 조여왔다. 입안은 마치 바싹 마른 사막처럼 건조했고, 침을 삼키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목구멍은 불이라도 붙은 듯 타는 듯한 통증을 호소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물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편에서는 경계심이 날카롭게 고개를 들었다. 물가는 생명의 원천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하나였다. 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드는 굶주린 짐승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보다 더 교활하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들—다른 인간 생존자들—이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침내 나무들 사이로 작은 개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폭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은 놀라울 정도로 맑고 깨끗해 보였다. 물은 크고 작은 바위들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고 흐르며 작은 폭포와 소용돌이를 만들었고, 그 경쾌한 물소리는 주변의 적막함 속에서 유난히 평화롭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평화로움은 기만일 수 있었다.

지수는 마지막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바람의 방향, 동물이나 인간의 흔적, 매복하기 좋은 지형. 그의 눈은 숙련된 사냥꾼처럼 모든 세부 사항을 놓치지 않았다. 다행히 당장은 어떤 직접적인 위협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몸을 최대한 낮추고 소리 없이 물가로 접근했다. 그는 커다란 바위 뒤에 웅크리고 앉아 다시 한번 주변을 신중하게 확인한 후에야, 마침내 조심스럽게 개울가로 다가갔다.

물에 손을 담그자, 예상보다 훨씬 차가운 감촉에 그는 깜짝 놀랐다.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은 그의 손가락 감각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컵 모양으로 만들어 조심스럽게 물을 떠올렸다.

첫 모금의 물이 그의 입술을 적시고 메마른 입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한 액체가 아니었다. 마치 생명의 정수와도 같은 차갑고 순수한 물은 그의 타는 듯한 목구멍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가며, 그의 몸 구석구석 모든 세포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감각에 집중했다. 이것이 살아있다는 감각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 두 모금, 또 한 모금. 갈증은 끝없이 물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득, 그는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떠올렸다. 오랜 탈수 상태 후에 너무 많은 물을 한꺼번에 마시는 것은 쇼크를 유발하거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는 본능적인 욕구를 억누르며, 의식적으로 물을 마시는 속도를 늦추었다. 천천히, 몸이 적응할 시간을 주면서.

충분히 갈증을 해소한 후, 그는 배낭에서 낡은 군용 수통을 꺼내 개울물로 가득 채웠다. 이 맑은 물은 앞으로의 여정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원이었다. 다음번에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떤 상태의 물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수통에 물을 채우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그의 경계심은 한 치도 풀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의 나무 그림자와 바위틈을 훑었고, 귀는 나뭇잎 하나 바스락거리는 소리, 작은 벌레의 날갯짓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숲은 여전히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이 기묘한 고요함이 그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경험상, 자연은 결코 완벽하게 침묵하지 않았다. 어디선가는 새들이 지저귀고, 곤충들이 윙윙거리고, 작은 짐승들이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야 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라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 이 개울가 주변의 숲에는 오직 그가 마시는 물소리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인 듯한, 불길한 적막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서둘러 일어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온몸의 세포가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십 년간의 고독한 생존은 그에게 논리적인 분석을 넘어서는, 예리한 직감, 일종의 육감을 발달시켰다. 그리고 지금, 그의 육감은 보이지 않는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는 젖은 손을 바지에 닦으며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서둘러 물가를 떠났다. 이제 그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은밀해졌다. 그는 나무들 사이를 그림자처럼 조용히 이동하며, 끊임없이 주변을 주시했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찾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언제든 뽑아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숲은 여전히 섬뜩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침묵의 장막 너머에서 무언가를 어렴풋이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형체 없는 압박감, 마치 누군가가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끈적하고 불쾌한 느낌이었다. 그는 우뚝 멈추어 서서, 숨을 죽이고 천천히 주위를 360도로 살폈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흔들리는 나뭇잎과 깊은 그림자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뚝' 하고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것은 결코 큰 소리가 아니었지만, 이 숨 막히는 고요함 속에서는 마치 고막을 찢는 총성처럼 크고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지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며 가장 가까운 거대한 나무 뒤로 몸을 던졌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고, 손에 쥔 칼자루는 땀으로 미끄러울 정도였다. 그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숨소리마저 죽이며 기다렸다.

시간은 마치 멈춘 듯, 혹은 고무줄처럼 늘어져 느리게 흘러갔다. 1초가 1분처럼,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그의 모든 신경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쏠려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적막이 다시 숲을 지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긴장으로 뻣뻣해진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그는 나무 뒤에서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여전히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어쩌면 정말로 단순한 야생동물의 움직임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람쥐나 작은 새가 밟았을 수도 있다. 혹은, 그의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이 만들어낸 환청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고 있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특히 이런 외딴 곳에서 우연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었고, 모든 소리에는 근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근원을 확인해야만 했다.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은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지수는 소리가 들려왔던 방향으로, 극도의 경계심을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낙엽 위에서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랜 도피와 생존 과정에서 터득한 은신 기술이었다. 그는 마치 숲의 일부인 양, 혹은 숲을 떠도는 유령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마침내 그가 소리의 근원지로 추정되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움직임을 멈추고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그곳에는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작은 공터가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뿌리째 뽑힌 듯 쓰러져 누워 있었다. 나무는 아주 오래전에 쓰러진 듯, 두꺼운 이끼와 형형색색의 버섯들이 그 거대한 몸통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그는 공터 주변을 천천히 원을 그리며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땅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축축한 흙 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발자국. 여러 개가 불규칙하게 찍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짐승의 발자국이 아니었다. 크기와 형태로 보아, 그것은 명백히 인간의 발자국이었다. 낡았지만 분명 군화 형태의 신발 자국이었다.

지수의 심장이 다시 한번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인간. 이 단어는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절망적인 고독 속에서 만난 한 줄기 희망일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치명적인 위협일 수도 있었다. 이 황폐하고 무법적인 세상에서, 타인과의 조우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는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그들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도 있었지만,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소지품이나 목숨 그 자체를 빼앗으려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쪼그려 앉아 발자국을 자세히 살폈다. 흙의 상태와 자국의 선명도로 보아, 그것들은 비교적 신선했다. 아마도 몇 시간 이내, 어쩌면 한두 시간 전에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발자국들은 그가 온 방향과는 다른, 이 공터에서 시작되어 북쪽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북쪽.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동굴 속에서, 그는 때때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상상에 잠기곤 했다. 아주 오래전, 그가 아직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 북쪽에는 한때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고 했다. '고요한 저녁의 나라'라고 불렸던 곳. 아마겟돈 이전에는 수백만 명이 살았던 찬란하고 번화했던 도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대재앙 이후, 그곳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혹은 아직도 존재하기는 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폐허가 되었을까? 아니면 파더스의 요새가 되었을까?

그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 정체 모를 발자국을 따라 북쪽으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피해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인가? 그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 발자국의 주인이 적대적인 약탈자 무리라면, 그들을 뒤쫓는 것은 스스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그저 평범한 생존자들이거나, 혹은 잠재적인 동료가 될 수 있다면? 그들은 이 주변 지역이나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찾고 있는 다른 사피엔티아 형제들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고민 끝에, 그는 발자국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정보.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정보는 식량이나 물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귀중한 생존 자원이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동굴 속에 갇혀 있었다. 세상은 그가 숨어 있는 동안 얼마나 변했을까? 파더스는 여전히 절대적인 공포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까? 다른 사피엔티아의 형제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고독 속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가느니, 차라리 미지의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편이 나았다.

그는 다시 일어서서, 발자국이 향하는 북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이제 바늘 끝처럼 예리하게 곤두서 있었다. 그는 매 순간, 매 발걸음마다 예측 불가능한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칼자루 위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의 눈은 그림자 하나하나를 의심하며 훑었다.

그는 발자국을 쫓아 북쪽으로 향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이끌리듯,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집요했다. 그의 모든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져 주변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려 애썼다. 바람의 방향, 공기의 냄새,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 땅의 진동까지. 그는 매 순간 공격에 대비했다. 이 발자국의 주인이 외로운 생존자인지, 약탈자 무리인지, 아니면 그가 경계하는 '파더스'의 하수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것이 그가 살아남은 방식이었다.

발자국은 그를 점점 더 깊고 어두운 숲 속으로 인도했다. 하늘을 빽빽하게 뒤덮은 나뭇가지들은 햇빛을 거의 차단했고, 숲 바닥은 영원한 황혼처럼 어둑했다. 나무들은 점점 더 기괴하고 거대해졌으며, 서로 뒤엉켜 마치 길을 막으려는 듯 보였다.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으며, 짙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숲 특유의 냄새—오랫동안 썩은 낙엽, 축축한 흙, 나무껍질에 핀 곰팡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야생의 비릿함—가 더욱 강하게 그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는 끈기 있게 발자국을 따라갔다. 때로는 낙엽이 두껍게 쌓여 있거나 단단한 바위 지대를 지나면서 발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게 희미해지기도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숙련된 추적자의 눈으로 흙의 미세한 눌림, 풀잎의 부자연스러운 구부러짐, 이끼가 살짝 긁힌 자국, 부러진 작은 가지 등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단서들을 찾아내며 끈질기게 추적을 이어갔다. 그의 집중력은 한계까지 치달았다.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갔다. 머리 위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빛의 각도와 색깔로 미루어 보아,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이제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오후가 깊어가고 있었다. 그의 몸은 지쳐갔지만, 정신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마침내, 그는 숲의 경계선, 나무들이 듬성해지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는 마지막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리고 그는 숨을 삼켰다. 그가 마주한 풍경은 그의 어렴풋한 예상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황량하며, 충격적이었다.

그의 발아래로는 거대한 분지 형태의 계곡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한때 장엄했을 도시의 잔해가 거대한 무덤처럼 누워 있었다. '고요한 저녁의 나라'.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던 그 이름의 실체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을 고층 건물들은 대부분 힘없이 무너져 내려 흉물스러운 콘크리트와 뒤틀린 철골 더미로 변해 있었다. 일부는 기적적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창문은 모두 깨져 검은 구멍을 드러내고 있었고, 마치 속이 텅 빈 유령처럼 공허하고 생명력 없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한때 도시의 혈관이었을 도로는 곳곳이 갈라지고 깊게 파였으며, 그 틈새로 끈질긴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강을 가로지르던 거대한 다리는 중간 부분이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고, 녹슨 철근들만이 앙상한 뼈대처럼 강물 위로 위태롭게 걸쳐 있었다.

이곳이 바로 '고요한 저녁의 나라'였다. 한때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꿈을 꾸고 사랑하며 살았던, 밤에도 불빛이 꺼지지 않았던 번화한 대도시. 그러나 이제는 죽음과 망각만이 내려앉은 거대한 폐허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곳을 지배하는 적막함은 너무나도 깊고 무거워서, 마치 소리 자체를 삼켜버리는 진공 상태 같았다. 심지어 폐허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마저도 이 죽음의 도시에서는 소리 없이 흐느끼는 듯했다.

지수는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도시의 잿빛 윤곽을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무너진 건물들 사이를 헤매다가, 마침내 한 지점에 멈추었다. 도시 중심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비교적 온전해 보이는 건물들 사이에서 가느다란 연기 기둥 하나가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가늘고 희미해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지만,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을 의미할 수 있었다: 사람. 아직 이곳에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의 가슴은 상반된 감정으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발자국의 주인을 마침내 찾은 것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생존자 그룹일까?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희망과 동시에 깊은 불안감이 그의 마음을 휘감았다.

그는 나무 그늘을 벗어나, 계곡 아래 폐허를 향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극도의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의 모든 움직임과 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도시의 잔해 속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파괴의 규모와 참혹함은 더욱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건물들은 단순히 노후되어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마치 거대한 힘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잔혹하게 파괴된 것처럼 보였다. 벽은 폭발에 의해 찢겨나가 속을 드러냈고, 창틀은 휘어지고 녹아내렸으며, 육중한 기둥들은 두 동강 나 있었다. 건물 외벽 곳곳에는 검게 그을린 화염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뒤틀린 금속 구조물들은 붉은 녹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곳에서는 문명의 종말을 증언하는 파괴의 상흔이 모든 곳에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물리적인 파괴보다 더욱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바로 인간 존재의 완전한 부재였다. 이 거대했던 도시는 마치 삶의 모든 흔적이 증발해 버린 듯, 텅 비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다. 수백만 명의 이름 없는 영혼들이 아직 안식하지 못한 채 떠도는, 거대한 무덤 그 자체였다. 스산한 바람 속에서 그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도시의 외곽, 한때는 번화한 거리였을 곳으로 들어섰다. 아스팔트 도로는 지진이라도 난 듯 갈라지고 뒤틀려 있었으며, 곳곳에는 뼈대만 남은 채 녹슨 자동차들과 폭발의 충격으로 쓰러진 표지판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과 날카로운 금속 파편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매 발걸음마다 신발 밑에서 부서지는 잔해 소리가 이 섬뜩한 침묵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릴까 두려웠다.

도시의 심장부를 향해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황폐함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건물들은 더욱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고, 도로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해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눈은 이 혼돈과 파괴 속에서도 어떤 불길한 패턴을 감지했다. 파괴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특정 목표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중요한 기반 시설, 통신탑, 정부 건물로 보이는 곳들이 유독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이것은 자연재해가 아닌, 의도적인 공격의 흔적이었다. 파더스의 소행일까?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한때 도시의 상징이었을 법한 웅장한 분수대의 잔해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아름다운 조각상들은 목이 부러지거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고, 물이 솟아나왔을 분수대 바닥에는 이제 물 대신 쓰레기와 먼지, 그리고 정체 모를 뼈 조각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황량한 분수대를 중심으로, 마치 고대의 원형 극장처럼 여러 채의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이 건물들은 광장 외곽의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파괴의 정도가 훨씬 덜했고, 일부는 놀라울 정도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어떤 보호막 안에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건물들 중 하나, 비교적 높아 보이는 아파트형 건물의 옥상 근처에서, 그는 아까 숲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목표 지점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그 건물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족히 10층은 넘어 보이는, 한때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였을 법한 건물이었다. 외벽은 군데군데 그을리고 파손되었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놀랍도록 견고해 보였다. 대부분의 창문 유리는 깨져나가 검은 구멍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몇몇 창문에는 널빤지나 양철판 같은 것으로 덧대어 막아놓은 흔적이 보였다. 건물 정면의 주 출입구에는 한때 화려했을 법한 회전문의 잔해가 있었지만, 이제는 유리 조각과 함께 엿가락처럼 휘어져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 옆의 보조 출입문은 육중한 철문이었는데, 한쪽 경첩이 떨어져 나가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여전히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기울어진 철문 틈새로 조용히 몸을 밀어 넣었다.

내부는 예상대로 어둡고 음습했다. 빛은 오직 깨진 창문이나 벽의 구멍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스며들었고, 그마저도 이미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해 때문에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다. 그는 잠시 입구에 가만히 서서, 그의 눈이 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건물의 로비는 한때는 꽤 넓고 화려했을 법했지만, 지금은 전쟁터처럼 황폐했다. 고급 소파와 테이블은 부서지거나 불에 타 뼈대만 남아 있었고, 바닥에는 두껍게 쌓인 먼지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종이 뭉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물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널려 있었다. 벽면의 대리석 타일은 금이 가거나 떨어져 나갔고, 천장 곳곳에서는 물이 새어 나와 바닥에 검은 얼룩과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깨진 창문 틈으로 들어와 먼지 쌓인 커튼을 흔들며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는 부서진 가구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로비를 가로질러, 안쪽에 있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전력이 끊긴 지 오래되었을 테니 당연히 작동하지 않았다.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비상계단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까 맡았던, 희미하지만 분명한 연기 냄새와 함께, 이제는 무언가 요리하는 듯한 냄새가 위층 어딘가에서부터 흘러 내려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계단 통로는 좁고 어두웠으며,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한 손으로 차갑고 거친 콘크리트 벽을 짚으며 균형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칼자루 위에 얹은 채, 한 계단 한 계단 극도로 조심스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려 했지만, 오래되고 관리되지 않은 건물은 그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때때로 그의 무게 아래에서 삐걱거리거나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이 죽음 같은 적막 속에서 마치 폭발음처럼 크게 울려 퍼졌고, 그때마다 그는 심장이 멎는 듯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세 개 층을 올라갔을 때, 그는 좀 더 확실한 냄새를 맡았다. 음식 냄새. 그것은 희미했지만, 굶주린 그의 위장을 강하게 자극하는, 분명히 존재하는 냄새였다. 무언가를 불에 굽는 듯한, 약간은 탄내가 섞인 고소한 냄새가 그의 후각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그의 뱃속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꼬르르륵...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는지, 그저 생존을 위해 건조식량이나 풀뿌리 따위로 연명해 왔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냄새는 그가 올라갈수록 점점 더 강해졌고, 그의 입안에는 저절로 침이 고였다. 다섯 번째 층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냄새는 이 층 어딘가에서 가장 강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어두운 계단 통로에서 복도로 조심스럽게 나섰다. 복도는 길었고, 양옆으로 여러 개의 아파트 출입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일부는 문짝이 부서져 너덜거리거나 아예 없어져 내부가 들여다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복도 저 끝, 오른쪽 편에서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굳게 닫힌 문틈 아래로 새어 나오는 아주 희미한 불빛. 그리고 그 불빛과 함께, 아주 작고 조용한,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는 숨을 죽이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그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심장은 이제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그의 모든 감각은 문 너머의 상황에 극도로 집중되어 있었다. 문에 가까워질수록,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는 좀 더 명확해졌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문 바로 앞에 도착했다. 그것은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해 보이는 철제 아파트 문이었지만, 이 황량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그 문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엄청난 의미를 지녔다. 희망일 수도, 절망일 수도 있는 미지의 존재들. 그는 몇 초 동안 망설였다. 손을 뻗어 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될 것이었다. 그의 고독한 여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그는 알아야만 했다. 이 발자국의 주인은 누구이며, 이 죽음의 도시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그는 깊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 폐 속의 공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작은 노크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 즉시, 문 안에서 들려오던 모든 소리가 칼로 자른 듯 뚝 끊겼다.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다.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 거의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똑똑, 똑똑. "저기요, 안에 누구 계십니까?" 그는 최대한 위협적이지 않게,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칠고 낯설게 울렸다.

잠시 후, 그는 문 바로 뒤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 누군가가 렌즈 구멍이나 문틈으로 자신을 살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때, 육중한 철문이 아주 약간, 거의 눈 하나만 겨우 내밀 수 있을 정도로만 삐걱거리며 열렸다.

어두운 문틈 사이로, 한 쌍의 크고 동그란 눈동자가 그를 경계심 가득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어린 소년의 눈이었다. 겁에 질린 듯했지만, 동시에 강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대략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였다.

"누... 누구세요?" 소년이 물었다. 작은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수는 가능한 한 부드럽고 위협적이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적의가 없다는 표시였다. "내 이름은 지수라고 한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해치러 온 게 아니야. 그저... 도움이 좀 필요해서 왔다."

소년은 여전히 의심과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낡고 더러운 옷차림, 지친 기색,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살피는 듯했다. "어디서... 어디서 오셨어요?"

"먼 곳에서 왔다." 지수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동쪽에 있는 깊은 동굴에서 오랫동안 지냈어. 하지만 이제 다른 곳으로 가던 중이야."

"왜요? 왜 동굴에서 나왔어요?" 소년의 순수한 질문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수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이 낯선 아이와 보이지 않는 어른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고, 그렇다고 완전한 거짓말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찾고 있는 것이 있어서." 그는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떤 물건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소년은 대답 없이 그를 몇 초 동안 더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지만, 약간의 동요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그는 문 안쪽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밖에... 무기는 없어 보여요. 혼자인 것 같고."

"마을에서 온 사람인가?" 문 안쪽 깊숙한 곳에서 낮고 경계심 가득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 쌓인 피로와 불신이 묻어 있었다.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방인입니다."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혼자 여행하는 중입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문 안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의논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긴장된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문이 조금 더 열렸다. 이제 그는 문 뒤에 서 있는 여성의 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40대 초중반쯤으로 보였고, 고된 삶의 흔적이 역력한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지쳐 보였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강인함과 경계심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지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진 식량이 있소?"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목소리는 건조하고 딱딱했다.

지수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의 없습니다. 나 자신도 지금 몹시 배가 고픈 상태입니다."

여성은 그의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동정심일 수도, 혹은 실망감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잠시 더 생각에 잠긴 듯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오시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는데, 혹시 숨겨둔 무기라도 있다면, 문 앞에 전부 내려놓고 들어와야 할 거요."

지수는 순간 망설였다. 그의 생존에 필수적인 칼과, 아직 사용해보진 않았지만 최후의 수단이 될 수도 있는 낡은 권총을 포기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 부담이었다. 이 낯선 사람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대로 문전박대당한다면, 그는 다시 기약 없는 여정을 홀로 계속해야 할 터였다. 그는 천천히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칼집째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더 망설이다가, 품 안에 숨겨두었던 낡은 리볼버 권총도 꺼내 칼 옆에 나란히 놓았다.

여성의 시선이 바닥에 놓인 무기들, 특히 권총에 잠시 머물렀다.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거... 작동은 하는 거요?" 그녀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아마도." 지수는 짧게 대답했다. "오래전에 얻은 거라, 아직 시험해 보지는 못했소."

여성은 알겠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오시오." 그녀가 다시 한번 말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명심하시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려 하거나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이라면, 당신은 이 건물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라는 걸." 그녀의 경고는 빈말이 아닌 듯, 차갑고 단호했다.

지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어둡고 낯선 아파트 안으로 천천히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등 뒤로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

지수는 미나가 가리킨 구석, 먼지가 쌓였지만 비교적 깨끗하게 치워진 바닥에 놓인 낡은 담요 더미 위에 몸을 누였다. 담요는 얇고 해졌으며, 소독약인지 혹은 오래된 땀 냄새인지 모를 희미한 냄새가 배어 있었지만,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딱딱한 바위가 아닌 것에 등을 대는 감각은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락함을 선사했다. 그것은 마치 오랜 유배 생활 끝에 돌아온 고향의 문턱을 넘는 듯한, 그러나 여전히 낯설고 불안한 감각이었다. 그는 자신이 열 해라는 긴 시간 만에 처음으로 동굴의 축축한 어둠이 아닌, 비록 폐허일지언정 인간의 거주지 안에서 잠을 청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생각은 그의 지친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기쁨보다는 오히려 깊은 이질감과 어색함, 그리고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경계심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홀로였다. 인간의 온기, 목소리, 시선, 이 모든 것이 이제는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자극이 되어버렸다. 이 낯선 사람들과의 동거는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벽과 천장에 거미줄처럼 퍼져나간 굵은 균열들이 보였다. 그중 가장 큰 균열 사이로는, 마치 상처 사이로 드러난 속살처럼, 밤하늘의 검푸른 조각과 함께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 몇 개가 보였다. 저 별빛 아래, 그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가늠했다. 이 낯선 가족은 믿을 수 있을까? 그가 짊어진 비밀, 사피엔티아의 잔존자로서의 운명, 그리고 파더스에 대한 저항이라는 아득한 목표를 어떻게 이뤄나갈 수 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극도의 피로가 그의 의식을 무겁게 짓눌렀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주변의 희미한 소리들은 점차 멀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깊고 혼란스러운 꿈의 세계로 빠져들기 직전, 그는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감지했다. 그것은 건물의 어딘가, 혹은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듯한, 규칙적이면서도 불길한 발걸음 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지친 정신은 그 소리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깊은 잠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제3장: 강철의 불협화음

고요는 폭풍 전야의 숨 막히는 긴장감과 같았다. 지수의 잠은 깊지 않았다. 그의 몸은 쉬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경계 태세를 풀지 못한 채, 얕은 수면의 가장자리를 위태롭게 떠돌고 있었다. 오랜 생존 본능은 그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구했다.

새벽의 가장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을 무렵, 그가 어렴풋이 감지했던 불길한 소리가 현실이 되어 아파트 건물을 뒤흔들었다. 처음에는 건물의 아래층 어디선가 들려오는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마치 공성추로 성문을 부수는 듯한, 육중하고 반복적인 소리. 잠결에도 지수는 그 소리의 폭력적인 본질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의 온몸의 근육이 반사적으로 긴장하며, 그는 소리 없이 담요 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소리는..." 옆에서 쪽잠을 자던 정현 노인이 낮은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그의 눈에는 단순한 잠의 방해가 아닌, 깊은 공포가 서려 있었다.

"쉿!" 미나가 다급하게 속삭이며 아이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태호의 눈은 이미 공포로 동그래져 있었고, 서현은 막내 지호를 껴안은 채 숨을 죽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절망적인 체념이 떠올랐다.

쿵! 쿵! 쾅!

충격음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제는 바로 아래층, 혹은 이 층 복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벽과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거친 발걸음 소리와 금속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 명령인지 고함인지 모를 외침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마치 지옥의 오케스트라처럼 불길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며 복도를 따라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수는 이미 벽에 등을 기댄 채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며, 아파트 문 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손은 비어 있었지만, 그의 온몸은 이미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압축된 용수철처럼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십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그러나 결코 잊지 않았던 사피엔티아의 전투 훈련이 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고 있었다.

"파더스의 순찰대..." 미나가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떨렸다. "어떻게... 어떻게 여길..."

'나 때문인가?' 지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그가 남긴 흔적? 아니면 그저 불운?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지금 문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이었다.

쾅!!!

바로 그때, 아파트의 육중한 철문이 안쪽으로 터져나가듯 찢겨나갔다. 문을 잠갔던 빗장쇠가 튕겨나가 벽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파편과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문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검은 형체들이 어둠과 먼지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최소 네 명.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잿빛 강화 전투복으로 중무장하고 있었고, 얼굴은 시커먼 방독면과 붉은색 광학 렌즈로 가려져 인간적인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손에는 묵직한 자동소총이 들려 있었고, 총구에는 전술 조명이 부착되어 아파트 내부를 날카롭게 훑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파더스의 상징인, 눈동자 없는 감시탑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움직이지 마!" 방독면 필터를 통해 변조된, 기계처럼 차갑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모든 생존자는 즉시 바닥에 엎드려!"

미나와 아이들은 비명을 삼키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정현 노인 역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러나 지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그는 알았다. 순순히 따르는 것은 죽음을 조금 늦출 뿐이라는 것을.

그 순간, 가장 앞서 들어온 순찰대원의 전술 조명이 지수가 숨어 있는 구석을 비췄다. "거기 누구냐! 당장 나와!"

지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몸은 생각보다 먼저 반응했다. 그는 번개처럼 바닥을 박차고 뛰쳐나가며, 옆에 있던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의자는 순찰대원의 다리를 향해 날아가 그를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 지수는 이미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십 년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그는 순찰대원의 소총을 잡은 팔을 안쪽으로 꺾어 올리며 그의 몸을 방패 삼아 다른 대원들의 시야를 가렸다. 동시에 그의 팔꿈치가 방독면의 측면, 관자놀이 부위를 강하게 가격했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순찰대원이 비틀거렸다. 지수는 그의 소총을 빼앗아 돌아서며, 다른 두 명의 대원을 향해 짧고 정확한 점사를 날렸다.

타타탕! 타타탕!

총성은 좁은 아파트 공간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고, 화약 냄새가 비릿한 피 냄새와 뒤섞였다. 두 명의 순찰대원이 가슴과 머리에 총탄을 맞고 힘없이 쓰러졌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마지막 남은 네 번째 대원은 당황했지만, 훈련받은 대로 소총을 들어 지수를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타타타!

총알들이 지수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벽과 주변 가구들을 때리며 콘크리트 파편과 나무 조각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지수는 이미 몸을 날려 쓰러진 대원의 시체를 엄폐물 삼아 바닥에 엎드린 상태였다. 그는 빼앗은 소총의 탄창을 확인했다. 아직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태호야!" 지수가 낮고 다급하게 외쳤다. "내 칼이랑 총!"

소년은 잠시 얼어붙은 듯했지만, 지수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재빨리 기어가 문 밖에 떨어져 있던 지수의 칼과 권총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온 힘을 다해 지수가 있는 방향으로 미끄러뜨렸다.

"여기요!"

칼과 권총이 바닥을 미끄러져 와 지수의 손 닿는 곳에 멈췄다. 지수는 재빨리 권총을 집어 들었다. 낡았지만 묵직한 감촉이 손에 익었다. 동시에 마지막 순찰대원이 탄창을 교체하기 위해 잠시 사격을 멈춘 틈을 타, 그는 엄폐물 뒤에서 뛰쳐나왔다.

탕! 탕! 탕!

지수가 쏜 세 발의 권총탄이 정확하게 순찰대원의 방독면 렌즈와 목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순식간에 아파트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전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죽음과 폭력의 잔해가 남긴 무겁고 섬뜩한 침묵이었다.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자, 총탄 자국이 가득한 벽과 부서진 가구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지 않는 네 구의 시체가 드러났다. 지수는 가슴을 가쁘게 몰아쉬며 빼앗은 소총과 자신의 권총을 든 채 방 중앙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과 옷에는 먼지와 피가 뒤섞여 얼룩져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냉철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나와 그녀의 가족들은 넋이 나간 듯, 혹은 극도의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 대신, 방금 목격한 압도적인 폭력과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지수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지수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미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다. 정현 노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맙소사... 당신은 대체..."

지수는 대답 대신 쓰러진 순찰대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장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탄약, 통신 장비, 식량, 그리고 혹시 모를 지도나 정보가 담긴 데이터 패드. 그는 냉정하고 침착하게 필요한 물품들을 수습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이었고, 마치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그들이 또 올 겁니다." 지수가 수색을 마치고 일어서며 말했다. "이들과 연락이 끊기면, 더 많은 병력이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다니요?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미나가 마침내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안감과 함께 희미한 반항심이 섞여 있었다. "이곳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갈 곳이 없어요."

"숨어 지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수는 미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 단순한 생존자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파더스는 우리가 숨는 것을 원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흩어져 약해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강한 힘을 담아 울려 퍼졌다. "나는 사피엔티아의 형제입니다. 우리는 한때 세상을 이끌 지혜와 지식을 가졌었지만... 실패했습니다. 파더스의 부상을 막지 못했고, 세상이 이렇게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그의 얼굴에 깊은 고뇌와 자책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직접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는 미나와 정현, 그리고 태호와 서현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나는 더 이상 숨지 않을 겁니다. 나는 싸울 겁니다. 파더스에게 빼앗긴 우리의 미래를 되찾기 위해, 이 '고요한 저녁의 나라'를 죽음의 폐허가 아닌, 새로운 시작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싸울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료가 필요합니다. 우리처럼 숨어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서서 저항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의 말은 선언과도 같았다. 십 년의 침묵을 깨고 나온 그의 진정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미나는 지수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복잡하게 흔들렸다. 두려움, 의심, 그러나 동시에 아주 희미하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어떤 불씨. 그녀는 옆에 있는 아버지 정현을 보았다. 노인은 침묵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오랜 세월의 지혜와 함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희망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태호는 이미 지수를 영웅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을... 당신을 믿어도 될까요?" 미나가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수는 대답 대신, 손에 쥔 권총을 조용히 안전장치를 걸어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 미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거칠고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믿음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지수가 말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함께라면... 함께라면 우리는 이 칠흑 같은 밤을 끝내고, 진정한 '고요한 저녁'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시선은 지수의 내민 손과 그의 진지한 눈빛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결심한 듯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자신의 작고 떨리는 손을 내밀어 지수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단순한 악수가 아니었다.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약속이자, 절망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이들의 첫 번째 연대였다.

이제 그들의 앞에는 미지의 위험과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은 외로운 생존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저항의 첫 불씨가 될 터였다. '고요한 저녁의 나라'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조용히 움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이 건물의 다른 생존자들을 찾아 규합하고, 파더스의 눈을 피해 안전한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될 터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잃어버린 세상을 되찾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Generated Image October 18, 2025 - 8_12PM.png
바티칸의 최종 병기.jpg


keyword
이전 07화거미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