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번뇌 (Pain and Anguish)

by 남킹


제1장: 존재의 희미한 각주(脚註)

그녀의 이름은… 그렇다, 그 이름은 실체라기보다는 하나의 현상에 가까웠다. 혀끝의 점막 위에서 부유하다가 이내 의미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지는 무정형의 음절들. 나는 찻잔 속에서 길을 잃고 소용돌이치는 찻잎의 군무(群舞)를 무심히, 그러나 집요하게 응시하며,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앞에 앉은 자, 세상은 그를 형사라 칭했으나 내게 그는 망각의 강을 건너온 자들의 죄업을 계량하는 저울, 혹은 카론의 뱃전에 앉아 노 대신 펜을 쥔 현대의 뱃사공에 다름 아니었다. 지독한 피로와 권태에 절어, 동공의 색채마저 탈색된 듯한 그의 눈동자만이, 심해의 압력을 견디며 발광하는 어느 기괴한 어류의 그것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 내 기억의 지층, 그 가장 깊고 어두운 심성암(深成岩)의 핵까지 굴착하려는 집요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지금은 그 누구도 연주법을 기억하지 못하는 고대 현악기의 이름 같기도 했고, 불에 타 소실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어느 서가에 꽂혀 있었을 법한, 해독 불가능한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난해한 구절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내 목소리는 눅눅한 지하실의 공기처럼 낮고 축축하게 내려앉았다. "입에 담는 순간, 그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 즉 그녀라는 인격체는 증발해 버리고, 의미소(sememe)보다는 음소(phoneme)의 낯선 파동만이 남아 고막의 미세한 뼈들을 공허하게 울리는… 그런 종류의 생소함이었습니다."

나는 헤르메스학파의 비의(祕儀)를 설명하듯, 혹은 카발라의 수비학적 암호를 해독하듯 그 이름을 해체하려 애썼다. 류(柳). 예(藝). 나(娜). 버드나무의 휘어진 가지, 그늘 아래의 정적,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글자. 기예와 심미, 그러나 동시에 인위와 기만을 암시하는 글자. 그리고 아리땁고 유약한 여성성을 상징하지만, 그 자체로는 어떠한 주체성도 갖지 못하고 타자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하는 나약한 글자. 이 세 개의 상형문자는 서로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며 기묘하게 결합되어, 그 어떤 명확한 상(像)을 맺기를 거부했다.

"류예나 씨, 말입니까?"

형사의 목소리. 거기에는 감정의 색채라고는 단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 확인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설계된, 거대한 관료주의적 기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내는 무미건조하고 서늘한 마찰음과 같았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서사의 빈칸을 나의 증언이라는 부품으로 채워 넣으려는 기능인에 불과해 보였다.

"네. 류. 예. 나." 나는 마치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혹은 외국어의 낯선 발음을 연습하는 이방인처럼, 한 음절씩 힘주어 발음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 소리는 내 구강 구조 안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이물질처럼 겉돌았다. 나는 멋쩍은, 그러나 보는 이로 하여금 어딘가 섬뜩함을 느끼게 할 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선천적으로 소리를 정확하게 모방하고 인지하는 데 결함이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모든 음성 정보는 제게 마치 수중(水中)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그 경계가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다가옵니다. 제 의도와는 무관하게, 제가 내뱉은 말들은 종종 공중에서 그 형태를 잃고 무의미한 음향으로 흩어지곤 했죠. 때문에 타인은 제 말을 오해하거나, 아예 해독 불가능한 소음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무표정한 가면 뒤에 숨겨진, 찰나의 조급함, 혹은 미세한 균열을 읽어내려 애썼다. 그는 내 말을 믿는 것일까, 혹은 이 모든 것을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는 교활한 수사(修辭)로 여기는 것일까.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타인의 말을 정확히 인지하는 능력 또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현상학적으로 말해, 타인의 음성이라는 '노에마(noema)'가 저의 의식이라는 '노에시스(noesis)' 작용을 거쳐 의미로 변환되는 과정에 치명적인 오류가 내재되어 있는 셈이죠. 세상의 소리들은 제게 마치 물에 번진 수채화처럼, 혹은 초점이 맞지 않는 낡은 사진처럼 다가왔습니다. 특히 그녀처럼…."

"그녀는 말이 무척 빨랐습니다." 기억의 편린들이 눈사태처럼 의식의 표면으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가파른 협곡을 따라 쏟아져 내리는 급류처럼, 수많은 단어의 편린들이 쉼 없이,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제 고막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녀가 쏟아내는 문장의 폭포수 속에서, 저는 익사 직전의 무력감에 휩싸이곤 했죠. 그래서 제가… 그녀의 말을, 아니 그녀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였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기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폐허 속에서, 부스러기처럼 흩어진 파편들을 되는대로 그러모아, 서투른 고고학자처럼 이야기를 엮어 나갔다. 형사의 미간에 옅게 드리워진 그림자, 그 미세한 근육의 수축을 의식하며, 그가 원하는 그림, 그가 납득할 만한 인과율의 사슬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나는 의도적으로 호흡을 고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은 더 많은, 더 깊은, 더 자극적인 진실을 요구하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어쩌면 그는 진실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이 지루한 오후를 견디게 해 줄, 한 편의 통속적인 치정극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제2장: 연금술사의 약국

그 약사, 류예나. 시간의 좌표를 더듬어 올라가면, 그녀와의 첫 만남은 태양이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대기의 먼지 속으로 나른하게 침잠하던 어느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낡고 퇴락한 회색 콘크리트 건물들이, 마치 신의 설계도가 부재했던 혼돈의 시대에 제멋대로 증식한 균사체처럼 무질서하게 뒤엉킨 도시의 변방. 그곳은 세 개의 전철 노선이 거대한 지네의 다리처럼 교차하며 지상과 지하를 넘나들고, 주기적으로 신경질적인 금속성 소음을 토해내는 지점이었다. 도시의 심장부에서 밀려난 자들의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자들의 저열한 욕망이 뒤섞여 기묘한 악취를 풍기는 곳. 시간의 먼지가 수십 년의 지층을 이루며 두텁게 내려앉은 그곳에, 마치 섬처럼, 혹은 시간의 흐름에서 완벽히 비껴난 듯한 작은 약국이 외따로이 존재했다.

'보생당(保生堂) 약국'. 낡은 아크릴 간판 위에는 붓으로 쓴 듯한 궁서체의 상호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생명을 보전하는 집이라. 그 거창하고 고풍스러운 이름이 자아내는 위화감은, 주변의 퇴락한 풍경과 맞물려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약국은 동네의 유일한 생명 유지 장치였고, 그 고립된 공간은 외부 세계와는 다른 밀도와 온도를 지닌 듯했다. 마치 오래된 사원의 법당 내부처럼, 혹은 연금술사의 비밀스러운 실험실처럼, 고요하면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감돌았다. 자동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깥세상의 소음과 악취는 거짓말처럼 차단되었고, 대신 장뇌(樟腦)와 정향(丁香)이 뒤섞인 듯한, 낯설고 아련한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낮고, 스스로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로 비아그라를 요구했다. 그 단어를 입 밖에 내는 순간, 나는 발가벗겨진 채 군중 앞에 내던져진 죄수처럼, 스스로의 초라함과 욕망의 무게를 동시에 느꼈다. 처방전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실데나필 시트르산염이라는 화학 물질이 제공하는 약리학적 효능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일시적인 활력, 회복 불가능하게 거세된 남성성에 대한 불안하고 처절한 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낡고 육중한, 수많은 사람들의 팔꿈치 자국으로 반들반들해진 마호가니 카운터 너머에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은 마치 진기한 곤충 표본을 관찰하는 곤충학자의 그것처럼,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없이 냉정하고 분석적이었다. 그 수정처럼 투명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는, 내가 예상했던 놀람이나 경멸, 혹은 도덕적 비난 대신,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한, 혹은 인간이라는 종의 어리석음을 관조하는 신(神)의 그것과 닮은 미묘한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혹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깊은 연민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하고 모호한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상냥함이나 친절함보다는 관조(觀照)에 가까웠고, 어딘가 세속의 희로애락을 초월한 듯한 느낌마저 자아냈다.

"처방전 있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말처럼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느리고 차분했다. 그러나 그 음색에는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부드러움과, 동시에 그 어떤 변명도 허락하지 않을 듯한 단호함이 공존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이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나의 입장을 대신했다. 그녀를, 혹은 이 세계의 엄격한 법과 제도를 납득시킬 만한 그 어떤 명분이나 자격도 내게는 부재했다. 나는 그저 욕망이라는 이름의 깊고 어두운 공허를, 화학의 힘을 빌려 잠시나마 메우려는,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일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스스로를 경멸하면서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천박하고 충동적인 바람둥이였다. 내게 있어 여자와의 관계란,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는 줄다리기이거나, 혹은 정복과 소유욕이라는 저열한 본능을 충족시키는 게임에 불과했다. 그녀들이 내게 마음의 빗장을 열고, 그들의 가장 연약하고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는 그 찰나의 순간, 그 덧없는 승리감 속에서 나는 무의미하고 파편화된 내 삶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듯한 도착적인 착각에 탐닉하곤 했다. 류예나, 그녀의 해독 불가능한 이름과 예측할 수 없는 심연의 눈빛, 그리고 처방전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은, 내게 기존과는 다른, 훨씬 더 복잡하고 위험한 종류의 도전 과제처럼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서, 내 안의 잠들어 있던 파괴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어떤 동질의 어둠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약사이자, 동시에 독(毒) 그 자체였다.

제3장: 부서진 인형

밤의 정적(靜寂)을, 마치 예리한 외과용 메스가 살아있는 육체를 가르듯,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가 잠의 가장 깊은 심연까지 파고들었다. 의식의 표면으로 부유하던 그 찰나, 나는 그것이 미처 다 꾸지 못한 꿈의 잔향이거나, 혹은 만성적인 불면이 만들어낸 환청일 것이라 애써 치부하려 했다. 그러나 곧이어, 더욱 집요하고 날카롭게 고막을 할퀴는 두 번째, 세 번째 벨 소리는 그것이 냉혹하고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임을 일깨웠다. 창밖은 여전히 타르나 잉크처럼 짙고 무거운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이 비현실적인 시간에 나를 찾아올 인간은, 이 행성 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 삶은 외부 세계와의 모든 교류가 거의 완벽하게 차단된, 고립된 섬, 혹은 나 스스로를 유폐시킨 감옥과 같았다. 아주 가끔, 익명의 택배 기사가 문 앞에 물건을 놓고 가며 무심하게 벨을 누르는 것이 세속과의 유일한 접점이었으나, 그마저도 최근에는 경비실에 맡기고 차가운 문자 메시지 하나만을 남긴 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땀으로 축축하고 서늘해진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잠시 망설였다. 이 무례한 불청객의 정체에 대한 희미한 호기심과, 중력의 법칙이 두 배는 더 강하게 작용하는 듯한 무거운 몸을 일으켜 현관까지 나아가야 하는 깊고 본능적인 귀찮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마치 내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다른 자아, 즉 현상 유지를 갈망하는 관성의 자아와 미지의 자극을 원하는 충동의 자아가 실랑이를 벌이는 듯했다.

‘똑. 똑.’

이번에는 벨 소리 대신, 문을 직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낡은 나무 문을 통해 전달되는 그 둔탁한 소리는, 전자음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내밀하게 공간의 고요를 침범했다. 그 소리에는 어떤 절박함, 혹은 차마 벨을 누르지 못하는 망설임 같은 것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 소리는 내 심장의 불규칙한 박동과 공명하며 불안을 증폭시켰다.

마침내 나는 체념의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벽의 스위치를 누르자, 별안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백색 형광등 불빛이,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무방비한 나의 동공을 날카롭게 찔렀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방의 조명은 언제나 병적일 정도로 지나치게 밝았다. 마치 수술실의 무영등(無影燈)처럼, 모든 사물의 그림자를 거세하고 그 존재의 윤곽을 적나라하고 가혹하게 드러냈다. 나는 이 냉정하고 폭력적인 광채에 당최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빛은 방 안의 모든 표면 – 군데군데 얼룩지고 벗겨진 낡은 벽지, 싸구려 합판으로 만들어진 가구, 시간의 때가 켜켜이 쌓인 비닐장판 바닥 – 에서 가차 없이 반사되어 공간을 날카롭고 비정한 입체감으로 부각시켰다. 나는 이처럼 모든 것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상태를 본능적으로 기피했다.

바위를 짊어진 듯한 극심한 피로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짓눌렀다. 머릿속은 뿌연 안개가 낀 듯 흐릿하고 정처 없었다. 매일 아침, 의식이 잠이라는 깊고 따뜻한 자궁에서 빠져나와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는 그 순간, 내가 보는 것은 어제보다 조금 더 열악하고 황폐해진 상태의 나 자신과 내 주변의 풍경이었다. 그런데도 이 지긋지긋한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헛된 몸부림, 의미 없는 만남, 부서진 유리 조각 같은 꿈들은, 마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라나는 종양처럼, 끊임없이 내 안에서 샘솟고 흘러넘쳐 나를 잠식하고 질식시켰다.

나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빛이 부재하는 상태에서 안식을 찾았다. 모든 색이 무채색으로 침잠하고, 모든 형태가 그 경계를 잃는 어스름 속에서만 비로소 평온을 느꼈다.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선명한 광채 없이 깊게 가라앉은 적막을 즐겼다. 직접적인 빛이 닿지 않는 그늘진 구석, 그곳에 스며든 사물들의 희미하고 은은한 흔적들 속에서만 나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흐릿하고 노이즈가 가득한 인터폰의 흑백 모니터 화면에, 한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 윤곽이 떠올랐다. 류예나였다. 이 시간에, 그녀가 왜.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뇌리를 스쳤다. 문을 열자, 새벽의 쓸쓸하고 차가운 미풍(微風)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와, 잠으로 달아오른 내 뺨을 날카롭게 스쳤다.

모니터 속 2차원의 픽셀 덩어리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지극히 평범했지만, 바로 그 평범함 속에 무수한 세월의 풍파가 남긴 흔적들이 복잡한 지층처럼 새겨져 있었다. 특히 눈가와 입가에 자글자글하게 잡힌 잔주름은, 마치 고목의 나이테처럼 그녀가 살아온 시간의 밀도와 깊이를 짐작케 했다. 어쩌면 그녀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나이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살아냈거나, 혹은 그 짧은 생애 동안 폭풍우처럼 파란만장한 시간을 통과해왔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몸에 꼭 맞는, 그러나 어딘가 그녀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 어색해 보이는, 봉긋한 실루엣의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옷자락 어딘가에, 축축하게 젖어 주변보다 더 짙은 색으로 얼룩진 자국이 눈에 띄었다. 술을 쏟은 것일까, 아니면 눈물 자국일까. 혹은, 그보다 더 끔찍한 어떤 액체의 흔적일까. 내 시선은 그 얼룩에 잠시 머물렀다.

그녀는 이미 심하게 취해 있었다. 비틀거리며 문지방을 넘는 그녀에게서 짙고 역한, 발효된 곡물과 화학적 향료가 뒤섞인 알코올 향이 풍겨왔다. 그녀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침대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등허리를 기대며, 마치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가쁘고 불규칙한 숨을 몰아쉬었다.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마스카라가 번져 생긴 희미한 눈물 자국 같은 것이 보였다. 마치 너무나 섬세하고 투명하여 작은 충격에도 깨지기 쉬운 크리스털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듯, 그녀의 존재 자체가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언제 산산조각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제4장: 뒤틀린 고백

그녀는 핸드백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위스키 병을 꺼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병째로 들이켰다. 이미 충분히 취한 듯 보였지만,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려는 듯, 혹은 고통을 마비시키려는 듯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술기운이 더욱 오르자, 그녀의 웃음소리는 잦아졌고, 때로는 그 웃음이 흐느낌처럼, 혹은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손동작은 과장되고 불안정하게 커졌다. 그녀의 취한 모습은 기이하게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의 흥미, 혹은 관음증적인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예측 불가능한 불안정성 속에는, 어떤 필사적인 절박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닿고 싶어 하는,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 하는 원초적인 갈망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려는 듯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혹은 태엽이 풀려 제멋대로 움직이는 고장 난 인형처럼.

때때로 그녀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굴었다. 나의 볼과 이마, 그리고 입술에, 마치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하려는 듯 보란 듯이 짙은 와인색 루주 자국을 남겼다. 장난스럽게 꼬집기도 했고, 가끔은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진 손톱으로 내 팔뚝을 할퀴어 가늘고 붉은 상처를 내기도 했다. 그 상처에서 배어 나온 미세한 핏방울을 보며 그녀는 아이처럼 웃었다. 그러한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장난이 이어지다가도, 갑자기 기억의 심연에서 떠오른 어떤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거나, 혹은 실성한 사람처럼 광적인 웃음을 터뜨리기를 반복했다.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변모했다가 다시 본래의 침잠된 모습으로 돌아오는 그 과정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급격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삶은, 내가 어렴풋이 짐작건대, 처음부터 뒤틀리고 헝클어진 실타래 그 자체였다. 술기운에 섞여, 문법적으로 완결되지 않은 채 단속적으로 흘러나온 그녀의 이야기 조각들을 통해, 나는 그녀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폭력이라는 거대하고 질긴 그물에 갇혀 살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주먹, 어머니의 언어폭력, 오빠의 성적인 학대, 심지어는 먼 친척과 어린 시절의 친구들, 동네의 이름 모를 건달들까지, 그녀의 삶에 연루된 거의 모든 인물들이 크고 작은 폭력의 직간접적인 가해자였다는 암시가 있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수많은 폭력이 남긴 상흔들로 가득한 오래된 지도와 같았다.

놀라운 것은, 그 끔찍하고 질식할 듯한 환경 속에서도 그녀는 절망이라는 심연에 완전히 침몰하지 않고, 마치 그것이 자신의 타고난 숙명인 양, 혹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듯 기묘하게 느긋하고 담담한 태도로 그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아주 먼 나라의 전설을 이야기하듯, 때로는 유머를 섞어가며 그 끔찍한 기억들을 나열했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져 내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역설적인 평온함, 혹은 체념과 너무나도 닮아 구별할 수 없는 무감각을 발견했는지도 몰랐다. 고통이 극에 달하면 감각이 마비되는 것처럼.

나는 나를 감싸는 혼란스럽고 뒤틀린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내뱉는 단어들은 공허한 소음에 불과했다. 내 정신의 모든 촉수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찔렀던 것처럼, 이성과 논리를 거부한 채 오롯이 그녀의 존재, 그 희미한 술 내음과 뒤섞인 그녀의 체취, 짙은 남색 드레스 아래 감춰진 육체의 부드러운 곡선, 불안하게 떨리는 긴 속눈썹에 도착적으로 꽂혀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내가 지껄이는 그 두서없고 의미 없는 말들 속에서, 기이한 종류의 평온함을 느끼는 듯했다. 혹은 평온함을 느끼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내 말의 내용보다는, 이 깊은 밤, 이 고립된 공간에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 그 시선의 무게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내 공허한 독백을, 마치 자장가처럼, 혹은 진혼곡처럼 듣고 있었다.

늘 무채색의, 단조롭고 기능적인 옷만을 고집하던 내가, 몇 가지 섬세한 장식과 여성스러운 곡선이 대담하게 가미된 그녀의 드레스 스타일의 옷을 보자, 내 안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혹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원초적인 성욕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수문이 거대한 압력에 의해 폭발적으로 열리듯, 온몸의 감각과 기능들이 하복부의 한 지점을 향해 격렬하게 응축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입고 있던 헐렁한 실내복이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 안의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생리적 현상을 넘어, 나의 전 존재를 뒤흔드는 거대한 충동이었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이성의 마지막 저지선을 넘었다. 거칠게, 그러나 계산된 움직임으로 그녀의 젖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 너머로, 예상보다 더 연약하고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그리고 그 아래에서 미세하게 박동하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술기운과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당혹감에 휩싸여, 거의 본능적인, 그러나 너무나 미약하고 혼곤한 저항으로 나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 저항은, 마치 폭풍우 앞의 촛불처럼 너무나 힘이 없었고, 오히려 내 안의 잠재되어 있던 파괴적인 충동을 더욱 거세게 부채질할 뿐이었다. 나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의 충족이 아니라, 이 위태로운 관계의 끝, 필연적으로 다가올 파멸의 고리, 그 자체라는 것을. 어쩌면 나는 그녀의 망가짐 속에서 나 자신의 망가짐을 확인하고, 그 동질감 속에서 기괴한 위안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순간, 그녀가, 약사가, 내 눈앞의 망가진 여자가, 거의 속삭이듯, 그러나 악마의 계시처럼 섬뜩할 정도로 명료하게 말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제5장: 파괴의 제의(祭儀)

그 목소리는 짙은 취기와 절망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마치 얼음 조각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그 말은 이 추악하고 욕망으로 들끓는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지독하게 신성 모독적인, 혹은 지독하게 아이러니한 선언이었다. 나는 그 말을, 그녀가 내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면죄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절대자에 대한 조롱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애써 그 말을 무시하며, 그녀의 몸을 더욱 세게 내게로 밀착시켰다. 생각보다 납작하고 마른 가슴이었지만, 그 미미한 압력과 체온은 분명하게 내 손바닥을 통해, 그리고 내 가슴을 통해 전해졌다. 얇은 천이 매개하는 유혹은, 노골적인 나체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강렬하며 뜨거웠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용암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며 단단하게 발기가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나의 걸음걸이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발정 난 성기를 좀 더 교묘하고 자연스럽게 감출 수 있도록 진화한, 이성 없는 짐승이었으면 좋겠다는 터무니없는 자조가 뇌리를 스쳤다.

나는 망설임 없이, 거의 폭력적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드레스의 등 뒤에 달린 지퍼를 내리자, 그녀의 창백한 등과 날카롭게 돌출된 견갑골이 형광등 불빛 아래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거친 나의 호흡 소리가 텅 빈 방 안, 창밖의 짙고 무거운 어둠을 향해 흩뿌려지듯 퍼져나갔다. 나의 난폭하고 이기적인 행위에 속수무책으로, 그러나 필사적으로 힘겹게 저항하는 그녀의 모습이, 지독하게 슬프면서도 동시에 그로테스크하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통제 불능의 욕정에 사로잡힌 채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고깃덩어리. 그것이 바로 거울이 있다면 비춰졌을 내 모습일 터였다. 약사는, 그녀는, 이제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신음과 함께, 날카롭고 저주에 찬 욕설을 간헐적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미친… 개새끼…!”

내 얼굴을 향해 파고드는 그녀의 확장된 동공에는, 순수한 증오와 경멸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는 추위 때문이 아닌, 극심한 공포로 인한 깨알 같은 소름이 돋아 있었다. 반사적인, 그러나 힘없는 손찌검이 몇 차례 오갔다. 그녀의 손톱이 내 뺨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나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힘의 불균형은 처음부터 너무나 명백했다. 그녀는 이제 극심한 공포에 질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짐승처럼 가늘고 처절하게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억눌렸던 모든 감정의 둑이 터진 듯, 가슴이 터져라 격렬하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울음소리는 방 안의 공기를 납덩이처럼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과 자기혐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알 수 없는 짜증을 억지로 삼켜냈다.

모든 삶은 결국 이런 식이다.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능이며, 들쭉날쭉하고, 때로는 이토록 추악하고 폭력적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성스러움과 더러움, 창조와 파괴가 기괴하게 뒤섞인 채,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갈 뿐이다. 나는 그녀의 울음 속에서, 그녀를 유린하는 내 행위 속에서, 어떤 형이상학적인 진실의 편린을 발견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것이 끝나고, 혹은 강제로 중단된 후, 그녀는 완전히 탈진하여 초췌하게 무너진 모습으로 내게서 간신히 물러섰다. 그녀의 터진 입가에는 검붉은 선혈이 엉겨 붙어 있었고,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해진 얼굴은 눈물과 땀, 그리고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전신에는 싸늘한 소름이 가시지 않은 채 돋아 있었다. 그녀는 침대 끝에 위태롭게 주저앉은 채, 격렬한 구토와 함께 속 안의 모든 것을 바닥에 게워냈다. 시큼하고 역한 위액과 덜 소화된 음식물, 그리고 독한 위스키 냄새가 뒤섞여 방 안에 진동했다. 마치 오랫동안 방치된 더러운 수챗구멍에서 올라오는 듯한, 참을 수 없는 악취였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듯, 힘없이 옆으로 나자빠졌다.

생기를 잃은 검은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얼룩덜룩한 곰팡이가 핀 천장의 어느 한 지점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의식의 희미한 불빛마저 꺼져버린 듯 보였다. 하지만 파르스름하게 질린 입술은 멈추지 않고,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혹은 마지막 유언을 남기려는 사람처럼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만 소리가 되지 못하는 듯, 혹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필사적으로 삼키려는 듯. 힘없이 늘어진 목덜미에는, 내가 남긴 이빨 자국과 손자국이, 막 곪기 시작한 종기처럼 붉고 푸른 멍으로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앙상하게 튀어나온 쇄골 아래, 그늘진 골짜기를 따라, 짙고 서늘하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의 강이 흐르는 듯했다.

문득, 어쩌면 이 세상은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불행하기에, 역설적으로 그다지 불행하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는 냉소적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각자의 고통이라는 깊고 어두운 우물에 너무 깊이 함몰되어, 타인의 불행을 돌아보거나 공감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 서로의 상처를 외면한 채 각자의 섬에 고립되어, 자신의 고통만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유일한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가는 곳.

그 순간, 짙고 무거우며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번뇌가, 마치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검고 불길한 연꽃처럼, 혹은 심연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거대한 검은 기둥처럼,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저항할 수 없이 쭉 뻗쳐 올랐다. 그것은 그녀의 고통인 동시에 나의 고통이었고, 더 나아가 이 지독하고 부조리한 삶 그 자체가 짊어진 원초적인 고통의 무게였다. 벗어날 수 없는,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고통과 번뇌의 그림자가 방 안을, 그리고 내 영혼을, 이 세계 전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나는 그 검은 기둥 앞에서, 한낱 미물에 불과했다. 형사의 얼굴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을, 이 추악한 고백의 종착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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