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막: 영혼의 겨울
그 호텔에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비극의 씨앗은 그곳, 안온한 조명과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그리고 익명의 그림자들이 속삭이는 듯한 정적 속에 잉태되고 있었다. 어쩌면 그날 밤, 프랑크푸르트의 내 작은 아파트 창문을 두드리던 빗줄기의 음성에 좀 더 귀 기울였더라면, 그것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불길한 전조의 속삭임임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차가운 이성의 방벽 아래, 가슴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울리던 경고의 종소리, 그 불안한 떨림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모든 것의 경로가 달라졌을까.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란, 특히 지독한 외로움이라는 검은 안개가 영혼의 지평선을 온통 뒤덮을 때면, 가장 명백한 위험 신호조차 애써 외면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기묘하고도 연약한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어느덧 독일 땅에서의 열두 번째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라인강의 차가운 바람이 도시의 마천루 사이를 휘감아 돌며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서곡을 연주했다. 프랑크푸르트, 유럽 금융의 심장부에서 근무하는 한국계 투자 분석가. 서류상의 직함은 번지르르한 광택을 뽐냈지만, 그것은 실상 영혼 없는 숫자들과 복잡한 차트, 그리고 마감 시간에 쫓기는 끝없는 보고서 더미로 직조된 삶의 얇은 외피에 불과했다. 사십 대 중반이라는, 인생의 정오를 지나 서서히 황혼으로 접어드는 고갯마루에 선 지금, 내 삶은 마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조율된 스위스제 크로노그래프 시계처럼 정확하고 예측 가능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그 정교한 메커니즘 속에는 생명의 뜨거운 박동, 예측 불가능한 설렘과 열정 같은 것들이 실종된 지 오래였다. 정밀함은 있었으되, 생기는 없었다.
아파트 창문에 비친 마인강 건너편 도시의 불빛들이 내 지친 얼굴 위에 푸른빛의 기하학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손가락은 마치 의지가 없는 자동 기계처럼 스마트폰 화면을 무심하게 위아래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로망츠(Romanz)’. 관계의 가능성을 상품처럼 진열해 놓은, 현대인의 고독을 먹고 자라는 디지털 데이팅 앱. 그 화면 속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기대를 품은 얼굴들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상품들처럼. 매일 밤, 잠들기 전 치르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였다. 이 차가운 스크린 속에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내 메마른 마음속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적 판단과 용암처럼 들끓는 원초적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텅 빈 아파트,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이 방 안에서 하루하루 쪼그라드는 내 존재의 부피를 필사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절박한 마음. 누군가와의 물리적인 접촉, 살갗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 그리고 잠시나마 서로의 실존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그 짧고 강렬한 친밀함에 대한, 거의 병적인 갈망이었다.
메신저 알림 창에는 44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지난 몇 주간 내가 보낸 만남의 초대 혹은 관심의 표시는 마치 깊은 바다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몇 마디 형식적인 문장으로 포장된 차가운 거절로 되돌아왔다. 때로는 AI가 작성한 듯 기계적인 답변이, 더 자주 찾아오는 것은 완전한 침묵, 즉 무시였다. 화면 너머, 그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직은 검은색이 우세하지만, 관자놀이 부근에서 희끗한 가닥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머리카락, 오랜 데스크 워크로 인해 살짝 굽은 어깨, 만성 피로가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과 그늘진 눈가, 무력감에 살짝 처진 입꼬리. 동아시아인 특유의, 유럽인들 사이에서 유독 왜소해 보이는 체격에 과로와 스트레스가 조기 노화라는 낙인을 선명하게 찍어놓은 모습. 솔직히 인정해야 했다. 내가 여자라도 이런 남자와 선뜻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안에는 고독과 피로에 절어버린 중년 남자의 초라한 실루엣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 실비아(Silvia)는 달랐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혹은 잿빛 하늘에서 한 줄기 햇살을 본 듯, 그녀의 응답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도착했다.
"만날 수 있어요."
단 세 단어. 마침표로 간결하게 끝맺은 그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것은 내 마비된 심장에 뜨겁고 예리한 전류를 흘려보냈다. 얼어붙었던 혈관이 녹아내리는 듯한, 혹은 오랫동안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듯한 감각. 프로필 사진 속 그녀는 짙은 갈색 피부를 가진 흑인 여성이었다. 어두운 피부톤 위로, 마치 아프리카의 태양처럼 밝고 건강한 미소가 활짝 피어 있었다. 짧게 커트한 곱슬머리가 그녀의 갸름한 얼굴 윤곽을 생기 있게 감싸고 있었고, 깊고 따뜻해 보이는 눈매는 보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프로필 정보는 간결했다. 서른한 살, 키 165cm, 거주지는 뒤셀도르프. 짧은 결혼 생활을 했으나 이혼했고 아이는 없다고 적혀 있었다. 직업란은 비어 있었다. 그저 '자유로운 영혼(Freigeist)'이라는, 낭만적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모호한 설명만이 그녀를 규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뒤셀도르프행 ICE 고속열차 티켓을 예매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호텔도 예약했다. ‘로망츠’ 앱이 최근 야심 차게 론칭한 '럭셔리 호텔' 카테고리에서 눈에 띄는 곳 중 하나였다. 평소 출장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가격대의, 별 네 개짜리 부티크 호텔.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였다. 평소의 나라면 당연히 역 근처의 저렴하고 실용적인 비즈니스 호텔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라야 했다. 뭔가 달라야만 한다고, 내 안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마치 내 건조하고 단조로운 인생의 새로운 장을 펼치기 위한 신성한 의식처럼, 그 시작을 위한 공간은 일상과는 다른, 특별하고 화려하며 품격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지난 몇 년간 프랑크푸르트의 사무실과 텅 빈 아파트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어디에도 쓰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아둔 돈이 제법 있었다. 어쩌면 그 돈은 바로 이런 순간, 삶의 권태를 깨뜨리고 한순간의 환상이라도 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을 쓸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내 안의 이성은 경고했지만, 욕망은 이미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ICE 고속열차가 육중한 몸체를 움직여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의 플랫폼을 미끄러지듯 벗어나는 순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마치 내 인생의 낡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독일 특유의 잘 정돈된 작은 마을들과 겨울을 앞두고 마지막 초록빛을 뽐내는 들판, 그리고 짙은 갈색과 붉은색으로 물든 가을 숲의 잔해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으면서도 동시에 초조해 보였다.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고,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좌석 옆에 놓인 낡은 서류 가방 안에는 평소 출장 때와는 다른 내용물이 들어 있었다. 훨씬 공들여 고른, 다림질이 잘 된 흰색 셔츠와 짙은 네이비색 치노 팬츠,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스위스제 명품 시계. 사실 그것은 회사에서 10년 근속 기념으로 받은, 내 능력이나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물건이었지만, 오늘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성공한 비즈니스맨처럼 보이고 싶었다. 이 초라한 외양을 조금이라도 더 근사하게 포장하고 싶었다. 그 시계는 나의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작은 방패와도 같았다.
기차가 뒤셀도르프 중앙역(Hauptbahnhof)의 광활한 플랫폼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이미 가을의 짧은 해는 서둘러 서쪽 하늘 너머로 몸을 숨기고, 차가운 어둠이 도시를 빠르게 감싸고 있었다. 둔탁한 기차의 제동 소음과 하차하는 승객들의 부산한 발걸음 소리가 잦아들자마자, 마치 이 순간을 정확히 계산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 심장이 다시 한번 세차게 뛰었다.
"배고파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짧고, 에두르지 않고, 지극히 명료한 요구였다. 어쩌면 다른 상황, 다른 상대였다면 첫 만남의 서두로는 다소 무례하거나 불편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나에게는, 그 꾸밈없는 솔직함이 오히려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불필요한 탐색전이나 예의상의 수사를 건너뛰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
"어떤 종류의 음식을 좋아해요? 특별히 먹고 싶은 거라도?"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답장을 보냈다.
"아무거나요. 그냥 역 근처에 사람 많아 보이는 식당 아무 데나 가면 돼요. 너무 비싸지 않은 걸로."
"네, 알겠습니다. 곧 가져갈게요."
그녀의 지극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법이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어쩌면 그녀도 나처럼, 관계를 시작할 때 거쳐야 하는 피곤하고 형식적인 사교 의례에 지쳐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이나 로맨스 같은 불확실하고 감정 소모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나의 외로움 해소와 그녀의 저녁 식사 해결)를 명확하게 충족시키는 순수하고 정직한 거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나는 그것이 오히려 더 명확하고, 덜 상처받을 수 있는 관계 형태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미 내 마음은 합리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II. 만남의 전주곡
역사를 빠져나오자,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독일 도시의 광장이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눈앞에 펼쳐졌다. 가을의 끝자락, 어스름한 황혼은 이미 짙은 남색의 장막으로 변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바퀴 달린 여행 가방들이 투박한 돌바닥 위를 긁으며 지나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간간이 들려오는 다양한 언어의 대화 소리들이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이방인들의 존재를 실감케 했다. 머리 위로는 구름 사이로 드물게 반짝이는 별들이 차갑고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이내 도시의 현란한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낡은 목재 벤치 몇 개와 텅 빈 자전거 거치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주변으로 담배 연기와 함께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 그리고 갓 구운 빵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뒤셀도르프. 비즈니스 출장으로 수십 번은 족히 방문했던 이 도시의 풍경이 오늘 밤 유독 새롭고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인 여행자라도 된 것처럼. 길가에 늘어선 레스토랑과 카페들의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불빛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고, 현대적인 유리 건물 외벽에는 주변의 불빛들이 어지럽게 반사되어 일렁였다. 그리고 그 불빛의 강물 아래를 오가는 수많은 얼굴들. 저마다 다른 목적지와 다른 이야기를 품고 스쳐 지나가는 익명의 군중 속에서,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인, 목적지를 가진 이방인이었다. 오늘 밤, 나의 목적지는 실비아였다.
그녀의 '아무거나 괜찮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너무 저렴하거나 성의 없어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만한 음식을 찾아야 했다. 독일 전통 음식인 슈니첼이나 부어스트는 너무 무겁고 식상할 것 같았다. 그녀의 프로필 사진 속 밝은 미소와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설명을 떠올리며, 조금 더 이국적이고 활기찬 느낌의 음식을 선택하기로 했다. 역 근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에서 제법 유명한 터키 케밥 체인점인 '알리바바 케밥(Alibaba Döner)'을 발견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회전하는 거대한 고기 기둥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모습이 활기차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양고기와 닭고기가 섞인 되너 케밥(Döner Kebab) 두 개와 콜라 두 병을 주문했다. 묵직하게 손에 들린 비닐봉지에서는 따뜻한 김과 함께 구운 고기의 고소한 풍미와 향신료의 자극적인 향기가 어둠 속에서도 진하게 퍼져 나왔다. 이것이 우리의 첫 만찬이 될 터였다.
호텔은 카르트 거리(Karthäuserstraße)의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비교적 조용한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다. 붉은 벽돌과 현대적인 유리 파사드가 조화를 이룬 건물 외관은 은은한 조명을 받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손에 들린 케밥 봉지가 갑자기 너무 가볍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마치 값비싼 보석 상자 안에 싸구려 유리 조각을 담아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좇고 있는 것은 혹시 쉽게 터져버릴 비누 거품 같은 덧없는 환상은 아닐까? 그러나 이미 상당한 금액의 호텔비를 지불했고, 기차표를 샀으며, 무엇보다 이 순간을 위해 정신적으로 지난 몇 주를 공들여 준비해왔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용기를 끌어모아 회전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묵직한 유리 자동문이 거의 소리 없이 스르륵 열리자,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그 공기 속에는 은은하면서도 남성적인 우디(Woody) 계열의 고급 향수 냄새와 희미한 가죽 냄새가 배어 있었다. 로비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천장이 높았으며,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높은 천장 중앙에는 수백 개의 크리스탈 조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샹들리에가 부드럽고 따스한 빛을 아래로 흩뿌리고 있었고, 광택이 나는 짙은 색 대리석 바닥은 방금 물청소를 마친 듯 티끌 하나 없이 반짝였다. 로비 한쪽에는 어두운 조명의 소규모 바(Bar)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말쑥한 차림의 비즈니스맨 몇몇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위스키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들은 짙은 회색과 자주색이 세련되게 조화를 이룬 단정한 유니폼 차림으로, 완벽하게 훈련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들의 미소는 지극히 전문적이고 친절했지만, 그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는 나 같은 동양인 남자가, 그것도 케밥 봉지를 들고 이런 곳에 나타난 것에 대한 미묘한 호기심과 어쩌면 숨겨진 판단의 눈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등을 조금 더 꼿꼿이 펴고, 최대한 당당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걸음걸이에 힘을 주었다.
로비 왼쪽 벽면에는 금속 프레임 안에 담긴 세계 주요 도시의 시간을 알리는 아날로그 시계들이 일렬로 나란히 걸려 있었다. 뉴욕, 런던, 파리, 도쿄, 베이징... 익숙한 도시들의 이름 사이에서, 서울(Seoul)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부재가 나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었다. 마치 이곳에서는 아무도 나의 구체적인 출신이나 배경을 궁금해하거나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약속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 나는 단지 아시아계 남성일 뿐, 특정한 국적이나 정체성으로 규정되지 않는 익명의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해방감인 동시에 서글픔이었다.
프런트에서 예약자 이름을 말하고 체크인을 마쳤다. 직원은 여전히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유지하며 내 여권과 신용카드를 확인한 후, 객실 카드 키를 건넸다. 카드 키를 받아 든 내 손에서는 긴장 때문인지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긴장일까, 아니면 주체할 수 없는 기대감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짧은 거리 동안, 내 심장은 마치 북소리처럼 세차게 울렸다. 엘리베이터 안은 사방이 반짝이는 거울로 되어 있었다. 출장 때 주로 묵었던 저렴한 비즈니스 호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치였다. 그 거울은 너무나 선명하고 무자비하게 내 현실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피곤함에 젖어 충혈된 눈, 그 아래 깊게 패인 주름, 스트레스로 인해 굳어진 미간, 살짝 구부정한 자세… 나는 재빨리 어깨를 펴고 넥타이(매지도 않았지만)를 고쳐 매는 시늉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녀를 로비에서 만나기 전, 마지막으로 호텔 앱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마치 작전 개시를 알리는 신호처럼.
"714호예요. 도착하면 로비에서 문자 주세요."
엘리베이터가 부드러운 진동과 함께 상승하는 동안, 그 미세한 움직임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마치 내 존재 자체가 위로 끌어올려지는 듯한 착각. 7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복도는 예상대로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두껍고 폭신한 카펫이 발소리를 완벽하게 흡수하여 유령처럼 걷는 기분이었다. 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액자들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화였다. 주로 푸른색과 갈색 톤의 색채가 뒤섞여 묘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 방인 714호를 찾아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나는 이 낯선 장소가 주는 기묘한 해방감을 만끽했다. 이곳에서 나는 누구도 아니었고, 동시에 누구든 될 수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하는 공간. 익명성이 주는 달콤하고 위험한 자유.
카드 키를 대고 문을 열자, '딸깍'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문이 안으로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세련된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창문 전체를 덮고 있는 헐렁한 질감의 짙은 회색 커튼이 천장에서 바닥까지 우아하게 늘어져 있었고, 그 두꺼운 커튼의 틈새로 뒤셀도르프 밤거리의 불빛이 은은하게 새어들어와 방 안을 희미하게 밝혔다. 왼쪽에는 순백의 시트가 깔끔하게 정돈된 킹사이즈 침대가 방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고, 오른쪽 창가에는 벨벳 소재의 작은 1인용 소파와 투명한 유리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욕실 문은 반투명한 젖빛 유리로 되어 있어,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실루엣이 마치 그림자 연극처럼 희미하게 비쳐 보일 정도였다. 방 안에는 인공적이지만 불쾌하지 않은, 은은한 플로럴 계열의 방향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케밥 봉지를 유리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며 방 안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잠시 후 그녀와 함께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벽에 걸린 대형 평면 TV 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그 검은 스크린 위로 내 불안한 얼굴이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침대 위에서, 이 소파에서, 이 방 안에서, 나와 비슷한 혹은 전혀 다른 종류의 기대와 불안, 욕망과 비밀을 품고 시간을 보냈을까. 그 헤아릴 수 없는 익명의 이야기들을 상상하자,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폐부를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고 질식할 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액정 화면에 뜬 발신자는 'Silvia'. 그녀의 메시지였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도착했어요. 로비에 있어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한번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심호흡을 한 뒤, 마치 사형장으로 향하는 죄수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III. 환상의 균열
로비에 다시 내려섰을 때, 처음에는 그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출입구 근처, 밝은 조명 아래 어색하게 서성이는 흑인 여성은 내가 ‘로망츠’ 앱의 프로필 사진을 통해 몇 번이고 훔쳐보며 상상했던 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사진 속에서 아프리카의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깊은 피로감과 어딘가 모르게 경계하는 듯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짧게 자른 곱슬머리는 사진에서처럼 생기 있게 정돈된 것이 아니라, 다소 푸석하고 헝클어진 채로 이마와 뺨을 스치고 있었다. 옷차림 역시 평범하다 못해 초라해 보였다. 색이 바랜 청바지와 목이 살짝 늘어난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 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얇은 검은색 롱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작은 핸드백은 가죽 표면이 닳아 있었고, 손에는 구형 모델로 보이는 스마트폰을 불안한 듯 꼭 쥐고 연신 화면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는 로비의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섬처럼 외롭게 떠 있는 존재처럼 보였다.
"실비아... 씨?"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낮고 불안하게 떨렸다. 그녀는 내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녀의 짙은 갈색 눈동자 속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실망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 역시, 앱 프로필 사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고 피곤에 절어 보이는 내 모습에 실망한 것일 테다. 서로가 서로의 환상을 배신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노련한 배우처럼, 혹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사람처럼, 그 찰나의 감정을 프로페셔널하게 연출된 희미한 미소 뒤로 재빨리 감추었다.
"아, 당신이 김 씨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는 영어로 말했지만, 그 발음에는 내가 예상했던 독일어나 프랑스어 악센트가 아닌, 어딘가 독특하고 리드미컬한 억양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프로필에 언급하지 않은, 아프리카 어딘가의 모국어에서 비롯된 악센트일 것이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기... 기다리실까 봐 음식을 좀 사 왔어요. 괜찮으시다면 방에 올라가서 같이 먹을까요?" 내 제안은 최대한 정중하게 들리도록 노력했다.
그녀는 잠시 대답 없이 로비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마치 이곳의 분위기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우리 사이에는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무겁고 관능적인 느낌의 향수 냄새였다. 야생화의 싱그러움과 머스크(Musk)의 동물적인 향취가 뒤섞인 듯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좁은 공간에 단둘이 남게 되자, 그 향기는 더욱 짙어졌고 그녀의 존재감이 갑자기 압도적으로 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올라가는 동안 그녀의 코트 자락이 내 팔에 살짝 스쳤다가 떨어졌다. 그 아주 짧고 우연한 접촉에도 내 심장은 통제 불능 상태로 미친 듯이 요동쳤다.
"독일에 오신 지 오래되었어요?"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녀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약간 허스키했지만, 부드러운 울림이 있었다.
"네, 한 12년 정도 됐네요.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혹시... 금융업 쪽?" 그녀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조금 놀라서 반문했다.
그녀는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힘없이 웃었다. 마치 지겨운 질문에 답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냥 느낌이요. 아시아에서 여기까지 와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IT 엔지니어 아니면 금융맨들이더라고요. 특히 프랑크푸르트라면 더 그렇죠."
그녀의 날카로운 관찰력, 혹은 일반화에 조금 놀랐다. 단순한 추측이었을 수도 있지만, 너무나 정확했다. 어쩌면 그녀는 나 같은 남자들을 여러 번 만나본 경험이 있는 것일까? 그런 불길한 생각이 스쳤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녀에 대해 더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7층에 도착해 부드럽게 멈춰 섰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태도는 로비에서보다 더욱 미묘하게 변했다. 이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했고, 시선은 불안하게 방 안의 가구들과 창밖을 번갈아 훑었다. 마치 이곳에 처음 와본 사람처럼, 혹은 무언가를 경계하는 동물처럼. 그녀는 말없이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쳤다. 코트 아래 드러난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는 몸에 꼭 달라붙는 디자인으로,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라인을 은근하게 드러냈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황급히 케밥 봉지로 눈을 돌렸다.
"여기, 음식 가져왔어요. 식기 전에 드세요."
내가 테이블 위에 놓인 비닐봉지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녀는 그제야 짧게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로비에서의 의례적인 미소와는 다른, 조금 더 진실되고 인간적인 표정처럼 보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걸터앉아, 내가 건넨 케밥 포장을 능숙하게 풀었다. 정말 배가 고팠던 것일까. 그녀는 다른 어떤 말도 없이, 주변을 의식하지도 않고 케밥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양파와 토마토, 요구르트가 섞인 하얀 소스가 그녀의 도톰한 입술가에 살짝 묻어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손등으로 무심하게 훔쳐낼 뿐이었다. 그 모습은 어딘가 처연하면서도 동시에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했다.
나는 유리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미니바에서 꺼낸 차가운 콜라를 천천히 마시며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방 안의 부드러운 간접 조명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로비에서보다 더욱 지쳐 보였다. 눈 밑에는 잠을 설친 듯 푸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입가와 눈가에는 서른한 살이라는 나이보다 더 깊어 보이는 미세한 주름들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프로필 사진 속의 완벽하게 연출된 미소보다, 지금 이 순간 고단한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짊어진 듯한 그녀의 지친 모습이 내게는 오히려 더 진실되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피로감 속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어떤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맛있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케밥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깨끗하게 먹어 치운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빈 포장지를 옆으로 밀어놓으며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네, 생각보다 괜찮네요.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그녀는 냅킨으로 손과 입가를 꼼꼼히 닦은 후,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어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거나, 혹은 시간이 흘러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 어색한 공기를 깨고 어떻게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가야 할지 몰라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저... 뒤셀도르프에는 오래 사셨어요?"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녀는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한 5년 정도요."
"아, 그러시군요. 원래 고향은 어디세요? 프로필에는 없어서..."
그녀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마치 숨기고 싶은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카메룬이요. 서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예요."
"아, 네. 들어본 적 있어요. 좋은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최대한 아는 척하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려 애썼다. "그럼… 독일에는 가족분들과 함께 살고 계신가요?"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요. 혼자예요. 가족들은 다 카메룬에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외로움과 함께 어떤 강한 방어기제가 느껴졌다.
더 이상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방어적인 태도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심리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려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그녀는 마치 위협을 느낀 고양이처럼 미세하게 몸을 뒤로 물리거나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은 테이블 위의 내 시계를 흘끗 쳐다봤다가, 다시 자신의 핸드폰 화면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마치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거나, 혹은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김 씨는 무슨 일 하세요?"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저요? 아, 저는 금융 분석가예요. 주로 기업 투자 관련 분석 업무를…" 내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끊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전과는 다른, 노골적인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와, 금융 분석가. 그럼 급여는 꽤 많이 받으시겠네요?"
그 너무나 직설적이고 물질적인 질문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심장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상황을 애써 긍정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 이 만남 자체를 나와 같은 감정적인 교류나 관계 형성이 아닌, 철저히 현실적인 필요에 기반한 순수한 거래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녀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라면…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최대한 침착하게, 그리고 약간은 과장해서 대답했다.
"네, 뭐… 나쁘지 않게 받는 편이라고 할 수 있죠."
내 대답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조금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기쁨이나 안도감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계산을 마친 듯한 미묘한 안도감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이 불편한 대화를 끝내고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만남의 본래 목적(?)으로 넘어가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가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며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려 몸을 숙였다. 그 순간, 그녀는 마치 스프링처럼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요."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다시 바로 앉으며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훨씬 부드럽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마치 오래 연습한 대사처럼 말을 이었다.
"저기… 정말 미안한데, 사실은… 제가 오늘 좀 급한 일이 생겨서 당장 돈이 좀 필요하게 됐어요. 혹시… 100유로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급해서 그래요."
그 순간, 내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물론, 이런 종류의 만남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중 하나로 이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데이팅 앱을 통해 만난 낯선 외국인 여성이,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배경을 가진 여성이, 첫 만남에서 이런 금전적인 요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내가 순진하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그 상황이 현실로 닥치니,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듯한 배신감과 모멸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만나서 이런 이야기부터 하는 건 좀…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요?"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동요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목소리를 더욱 부드럽게 낮추고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안해요. 저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상황이 너무 급해서 그래요. 사정이 있어서… 혹시 도와주시면, 저도… 오늘 밤 당신에게 보답할게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녹슨 열쇠가 삐걱거리며 자물쇠를 돌리려 애쓰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정해 보였다.
"…대체 어떤 급한 일이기에 그렇죠?" 나는 아직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그녀에게 피치 못할 긴급한 사정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위기를 함께 넘기면, 그녀가 진심으로 나에게 마음을 열고 고마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밤, 돈이 아닌 진정한 감정을 나누며 함께 산책을 하고, 새벽녘의 라인강 변에서 커피를 마시고, 서로의 고독한 삶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터무니없고 순진한 환상이,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 미련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실… 집세가 몇 달 밀렸어요. 집주인이 오늘 당장 내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쫓아내겠다고 최후통첩을 했거든요." 그녀의 말투에는 절박함보다는 기계적인 익숙함이 더 짙게 묻어났다. 마치 수없이 반복해서 읊어온 대본의 한 구절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그 순간, 나는 모든 환상에서 깨어나 냉혹한 현실을 직시했다. 나는 그녀에게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생계 수단 중 하나, 이름도 얼굴도 중요하지 않은 수많은 익명의 '고객'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녀가 연기하는 100유로짜리 싸구려 연극의 호구 잡힌 관객. 깊고 쓰라린 허무함과 분노가 차가운 파도처럼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내 외로움은 결국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고 조롱당할 운명이었던가.
IV. 시간의 마모
그렇게 시작된 몇 시간은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기이하고 불쾌한 심리전이었다. 그녀는 내가 제시한 의심이나 거절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마치 미리 준비된 카드 패를 꺼내 보이듯, 하나의 이유가 설득력을 잃으면 곧바로 다른 이유를 능숙하게 꺼내 들었다. 처음에는 밀린 집세였고, 그다음은 갑자기 위독해지신 카메룬의 어머니 병원비였으며, 그것도 통하지 않자 독일에서 다니는 어학원의 다음 학기 학비, 심지어는 악덕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협박당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했다. 그녀의 레퍼토리는 다양했고, 각각의 이야기에는 눈물과 한숨, 그리고 절박한 표정 연기가 동반되었다. 그리고 모든 구차한 설명의 끝에는 어김없이, 암묵적이지만 노골적인 약속이 교묘하게 숨어 있었다. 만약 당신이 나를 이 곤경에서 구해주기만 한다면, 나는 오늘 밤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꺼이 '보답'하겠다는. 하지만 그 '보답'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채, 애매하고 퇴폐적인 미소와 눈빛으로 여지만 남겨둘 뿐이었다.
시간은 호텔 방 안의 답답한 공기처럼 느리고 무겁게 흘러갔다. 처음 느꼈던 설렘과 기대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내 안에서 꿈틀대던 원초적인 욕망은 서서히 차가운 분노와 깊은 모멸감으로 변질되어 갔다. 무언가에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다는 불쾌한 기분, 처음부터 속았다는 명백한 자각, 그리고 이 모든 비참하고 추악한 상황이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리고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씁쓸하고 불편한 깨달음. 그녀의 금전 요구는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수학 공식처럼 치밀하게 계산되어 움직였다. 처음에는 100유로라는 다소 큰 금액으로 시작해서, 나의 완강한 거절과 의심에 부딪히자 80유로로 내려왔고, 그것마저 거부당하자 잠시 침묵 끝에 50유로라는 최종 제안(?)을 내놓았다. 그녀는 마치 시장의 상인처럼, 내가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 즉 나의 인내심과 동정심, 그리고 어쩌면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약간의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의 최소 금액을 정확하게 찾아내려 필사적으로 탐색전을 벌이는 듯했다.
대화가 막히거나 내가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르듯 핸드폰 화면만 뚫어져라 들여다보거나, 혹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 틈으로 멍하니 밤의 도시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지치고 외로워 보였지만, 이제 나는 그 어떤 연민도 느낄 수 없었다. 밤은 소리 없이 깊어갔고, 창밖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잠들어가는 동안, 나의 덧없는 기대와 어리석은 환상도 그렇게 함께 사그라져 재가 되어갔다. 이제 이 넓고 고급스러운 호텔 방 안에는 로비에서 흘러나오던 감미로운 클래식 음악 대신, 숨 막힐 듯한 침묵과 서로에 대한 불신, 그리고 나의 깊어지는 절망감과 그녀의 집요한 욕망만이 끈적하게 감돌 뿐이었다.
"나는… 나는 당신과 정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이런 식은 아니었어요." 나의 목소리는 이제 분노마저 증발해버리고 기운을 완전히 잃은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뱉는 말조차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창가에 선 채로, 커튼을 살짝 젖히고 여전히 밖을 내다보며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 역시 지쳐 있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 조금만 이해해주면…"
허공으로 흩어지는 의미 없는 말들. 이제 그녀의 어떤 말에도, 어떤 표정에도 티끌만큼의 진실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명백히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나는 단지 돈을 얻어내야 할 대상일 뿐, 감정을 나눌 상대가 아니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은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미니바에서 꺼낸 작은 병의 위스키를 유리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씁쓸하고 독한 알코올이 타는 듯한 열기와 함께 목구멍을 넘어갔지만, 취기는 오르지 않았다. 나는 이 지긋지긋하고 모욕적인 상황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마지막으로 고민했다. 이대로 단호하게 그녀를 방에서 내보내야 할까? 아니면 구겨질 대로 구겨진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존엄성이라도 지키기 위해, 그녀가 원하는 돈을 끝까지 주지 않고 버텨야 할까?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녀의 끊임없고 집요한 요구와 나의 완고한 거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실랑이에 나 자신이 먼저 완전히 지쳐버렸다. 더 이상의 감정 소모는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지갑을 꺼내 주름진 50유로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그녀가 앉아 있던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툭 던졌다. 그 행위는 동정이나 선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굴복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싸울 힘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다는 완전한 항복 선언에 가까웠다.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돈으로 사서 끝내겠다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여기요. 이걸로 됐어요? 이제 그만 가도 좋아요." 내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그녀의 눈이 그 순간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빛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안도감과 승리감, 그리고 약간의 경멸이 뒤섞인 듯한 복잡한 빛이었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 위로 다가가 그 돈을 재빨리 집어 꾸깃꾸깃 접어 자신의 낡은 핸드백 안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 돈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안심한 듯,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훨씬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김 씨. 그리고 미안해요. 오늘은 내가… 몸도 마음도 너무 안 좋아서 그랬어요. 다음에… 다음에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정말 잘해줄게요. 약속해요."
또 하나의 공허하고 값싼 약속. 그러나 이번에는 나 역시 더 이상 그 약속에 속아 넘어갈 만큼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더 이상의 연기는 없었다. 그녀는 마치 임무를 완수한 후 긴장이 풀린 사람처럼, 혹은 연극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처럼, 핸드백을 옆에 내려놓고는 침대 위에 몸을 툭 던지듯 누웠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였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잠깐만… 아주 잠깐만 쉬었다 갈게요. 너무 피곤해서…"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정말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연기의 일부로 자는 척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대답 없이, 방 한가운데 놓인 딱딱한 의자에 다시 주저앉아 텅 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가슴 속에서는 여전히 모순된 감정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소용돌이쳤다. 그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묘한 연민,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희미한 욕망의 잔재와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깊은 혐오감,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굴욕적인 상황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은 나 자신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실망감과 자기혐오가 가장 컸다.
천장의 매립등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조명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 위로 부드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놀랍게도 평화로워 보였다. 마치 앱 프로필 사진 속에서 보았던, 근심 걱정 없어 보이던 바로 그 모습처럼. 모든 거짓과 계산, 그리고 추악한 현실의 무게가 깊은 잠이라는 장막 뒤로 잠시 사라진 듯했다. 그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그녀의 진짜 삶이 궁금해졌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연과 상처를 안고 살아왔기에, 이런 방식으로 낯선 남자들을 만나 돈을 요구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그녀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인가, 아니면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몬 어쩔 수 없는 상황의 결과인가.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자기소개는 사실 지독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었을까.
나는 결국 뜬눈으로 길고 긴 밤을 지새웠다. 위스키를 몇 잔 더 마셨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귓가에는 내가 던져준 50유로를 그녀가 낚아채던 소리와 그녀의 거짓된 속삭임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모멸감과 허탈함,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뒤섞여 질척한 늪처럼 나를 잠식해 들어갔다. 창밖으로는 화려했던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힘을 잃고 어둠 속으로 스러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내 마음속에서 마지막까지 깜빡이던 희망의 불빛마저 완전히 사그라드는 순간과 같았다. 밤은 끝났지만, 내 안의 어둠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V. 폭발과 추락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 밤의 가장 깊고 차가운 시간이 흘러갈 무렵이었다. 창밖 커튼 틈새로 희미하고 차가운 푸른빛이 아주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을 때, 침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미세한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밤새 뜬눈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던 나는, 반쯤 감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실비아가 마치 그림자처럼 조용히 몸을 일으켜,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의 옷가지들을 챙겨 입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동작은 놀라울 정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혹은 오랜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숙련된 움직임처럼 보였다. 그녀는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심지어 침대 옆에 벗어두었던 신발조차 신지 않은 맨발 상태로, 숨소리마저 죽인 채 출입문 손잡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돈을 받았으니 이제 미련 없이 떠나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밤새 내 안에서 용암처럼 들끓으며 억눌려왔던 모든 감정들 – 분노, 모멸감, 배신감, 그리고 처절한 자기 연민 – 이 통제 불능의 상태로 한꺼번에 화산처럼 폭발했다. 내 마지막 남은 존엄성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의 파편들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나는 마치 용수철처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어딜 가!"
내 목소리는 분노와 격정으로 심하게 갈라져, 나 자신에게조차 낯설게 들렸다. 그녀가 전기에 감전된 듯 깜짝 놀라 황급히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크게 뜨인 눈에는 순간적인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스쳤지만, 그것은 이내 차갑고 계산적인 빛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 것인가를 빠르게 판단하려는 듯한. 나는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단 세 걸음 만에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 그녀의 가느다란 팔뚝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뿌리치려 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려 하자, 나는 완전히 눈이 뒤집힌 상태로 반사적으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짝!
살갗과 살갗이 부딪히는, 날카롭고 건조한 파열음이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그 소리는 마치 채찍 소리처럼, 혹은 유리가 깨지는 소리처럼 귀에 박혔다. 그녀의 왼쪽 뺨에, 내 손바닥 자국이 붉게, 선명하게 남았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순간, 등골을 타고 얼음처럼 차가운 공포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그저 내 손바닥과 그녀의 뺨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맞은 뺨을 왼손으로 감싸 쥐고, 잠시 고통과 충격으로 휘청거렸지만, 이내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 속에는 예상했던 분노나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무언가… 깊은 체념과 냉소, 그리고 경멸이 뒤섞인 듯한 복잡하고 차가운 표정이 어렸다. 마치 이런 종류의 폭력이나 모욕적인 상황이 그녀에게는 처음 겪는 일이 아니라는 듯이, 혹은 이런 수준의 남자에게 맞았다는 사실 자체가 더 모욕적이라는 듯이.
그녀는 잠시 나를 그렇게 쏘아보다가, 천천히 어깨에 멘 핸드백 지퍼를 열고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무기(칼이나 스프레이 같은)라도 꺼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온몸이 경직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내가 몇 시간 전에 침대 위로 던져주었던 그 꾸깃꾸깃한 50유로 지폐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 돈을 다시 침대 위, 내가 던졌던 바로 그 자리에 툭 던져 놓았다. 그 단순한 행동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종류의 품위 혹은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나는 고작 이 돈 때문에 당신 같은 남자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여자가 아니다’라고 온몸으로 항변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맨발인 채로 조용히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철컥’하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고 단호하게 울렸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 오른손은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는 듯했고, 손바닥에는 그녀의 부드러웠던 뺨에서 전해진 미약한 열기와 함께,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의 감각이 마치 불에 달군 낙인처럼 깊이 새겨져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멍하니 방 안에 앉아 창밖이 점점 밝아오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죄책감과 자기혐오, 그리고 여전히 식지 않은 분노와 모멸감이 뒤엉켜 머릿속을 헤집었다. 오전 시간이 거의 다 지나 체크아웃 시간이 임박했을 무렵, 갑자기 누군가가 방 문을 마치 부술 듯이 거칠고 요란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튕겨 일어나며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경찰일까? 아니면 호텔 보안팀? 혹은… 설마 그녀가 복수하러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일까?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망설임 끝에 문을 살짝 열자, 문 앞에는 예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어 서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흑인 남자 셋. 그들은 모두 값싸 보이는 스트릿 패션 – 후드티, 트레이닝 팬츠, 야구 모자 – 차림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날카롭고 위협적이었으며, 온몸에서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동물 같은 폭력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들의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과 마주치는 순간, 위장에서부터 차갑고 역한 공포가 물밀 듯이 치밀어 올랐다.
"네놈이 실비아를 건드렸나? 어?"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크고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영어나 독일어가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거친 아프리카 부족 언어와 프랑스어가 뒤섞인 듯한 말투로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내가 뭐라고 변명하거나 해명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방 안쪽으로 세차게 밀치고 우르르 들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오해입니다… 잠시만…"
내 가냘픈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거의 들리지 않게 공기 중에 희미하게 흩어졌다. 그들은 나를 방구석으로 몰아넣고는, 아무런 망설임이나 죄책감 없이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단단한 주먹과 운동화 앞코가 내 복부와 옆구리, 그리고 얼굴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날아들었다.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으며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렸다. 욱신거리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나는 이 고급스러운 호텔의 부드러운 카펫 위로 벌레처럼 구겨졌다. 방금 전 내가 실비아에게 가했던 폭력에 대한 즉각적이고 잔혹한 대가였다.
"감히 여자를 때려? 이런 개만도 못한 새끼!" 그들 중 다른 한 명이 내 배를 군홧발로 세게 걷어찼다. 숨이 턱 막히고 시야가 흐려졌다. 고통으로 온몸이 뒤틀리며 굽어졌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나를 내려다보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단순한 분노 이상의, 어떤 냉정함마저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귀찮지만 처리해야 할 일상적인 업무를 마주하는 듯한 무감각함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이런 종류의 폭력은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맞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 감각이 사라졌다. 다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벌레나 쓰레기를 보듯 경멸에 찬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던 그 시선만은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들 중 가장 건장했던 리더 격의 남자가 바닥에 더러운 침을 한 번 퉤 뱉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을 나섰다. 나머지 두 명도 묵묵히 그를 따라 나갔다. 문이 다시 한번 쾅, 하고 요란하게 닫혔다.
나는 한참 동안 그들이 떠난 방 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과 함께, 뼛속까지 깊숙이 스며든 지독한 치욕감을 힘겹게 감내하면서. 얼굴에서는 뜨겁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터진 입술과 눈가에서 흐르는 피인지, 아니면 고통과 굴욕감에 흘리는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내가 이 호텔을 예약하며 그렸던 달콤한 하룻밤의 환상적인 시나리오는 이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옥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른 후,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기어 들어갔다.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왼쪽 눈 주변은 심하게 부어올라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었다. 입술은 퉁퉁 부르트고 터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뺨과 턱에도 붉고 푸른 멍 자국들이 선명하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공들여 입었던 흰색 셔츠는 여기저기 찢어지고 구겨진 채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늙고 왜소한 동양인 남자. 거기에 끔찍하게 얻어맞아 엉망진창이 된 얼굴까지.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부어오른 눈두덩이 아래, 충혈된 눈동자 속의 눈빛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차갑게 식어 있었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하며 어두운 어떤 감정으로 응축되고 변모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복수심이었다. 그 단어가 마치 망치처럼 머릿속을 계속해서 내리쳤다. 그들이 나에게 가했던 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치욕을 그대로, 아니 몇 배로 되돌려주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 하지만 어떻게? 나는 힘없고 나약한 중년의 남자였고, 그들은 젊고 강인하며 폭력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나는 혼자였고, 그들은 셋이었다. 나는 이방인이었고, 그들은 어쩌면 이곳의 어둠 속에서 서로를 지켜주는 공동체의 일원일지도 몰랐다. 복수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이 오히려 내 안의 복수심을 더욱 강렬하게 불태웠다.
간신히 짐을 챙겨 호텔을 빠져나왔다. 체크아웃 절차도 제대로 밟지 못했다. 프런트 직원의 놀란 표정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깨진 렌즈의 선글라스를 간신히 걸치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힐끗거리는 시선이 등 뒤에 따갑게 느껴졌다. 내 상처투성이 얼굴과 구부정하게 걷는 자세가 이 모든 굴욕적인 사연을 소리 없이 말해주고 있었을 테니까. 뒤셀도르프 중앙역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도, 프랑크푸르트행 기차 안에서도, 나는 창가 자리에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앉아, 바깥 풍경이 아닌, 유리창에 비친 내 추하고 망가진 모습만을 끊임없이 노려보았다. 분노와 복수심이 내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후, 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후 며칠 동안, 멍든 얼굴과 상처 입은 몸을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숨긴 채, 어두운 방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회사에는 급성 독감에 걸렸다는 거짓말로 병가를 냈다. 출근은 물론 불가능했다. 문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두려웠다. 음식도 거의 먹지 못했다. 물 한 모금을 삼킬 때마다 얼굴 전체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듯 아파왔고, 매번 숨을 쉴 때마다 금이 갔을지도 모르는 갈비뼈 부근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육체적인 통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내 영혼 깊숙한 곳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치욕의 흔적이었다. 평생을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나였다. 논리와 이성, 대화와 타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어쩌면 오만했을지도 모르는 나였다. 그런 내가 생전 처음으로, 그것도 여성에게 손찌검이라는 폭력을 행사했고, 그 즉각적인 결과로 이렇게 처참한 보복 폭력을 당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긴 것을 넘어, 내가 평생 쌓아왔던 세계관 전체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VI. 복수의 그림자
어두운 방 안, 굳게 닫힌 커튼 틈새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 속에서, 나는 매일같이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안에 비친, 서서히 푸른 멍이 노랗게 변해가고 부기가 가라앉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육체의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아물어갔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 모든 굴욕적인 사건의 시작점이 무엇이었는지 끊임없이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것은 바로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그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내가 선택했던 어리석고 위험하며 잘못된 방법. 왜 나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진실된 인간관계를 쌓아나가는 대신, 돈과 익명성에 기대어 쉽고 빠른 해결책, 즉 인스턴트식 위안을 찾으려 했을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결코 살 수 없는 것 사이의 그 명백한 경계를 왜 그토록 무모하고 경솔하게 무너뜨리려 했을까?
그러나 이러한 자기 비판과 성찰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곧바로 방향을 틀어, 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 – 실비아와 그녀의 공범들 – 에 대한 들끓는 분노로 다시 변질되었다. 그래, 내가 어리석었을지언정, 내가 외로움에 몸부림쳤을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런 식의 기만과 폭력을 당해야 마땅했던 것인가? 그건 아니었다. 나는 단지 외로운 영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실비아와 그 남자들은 바로 그런 인간의 연약한 외로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돈을 뜯어내고 폭력을 행사하는, 영혼 없는 포식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나는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그저 열면 돈이 나오는 편리한 지갑, 혹은 잠시 가지고 놀다 버리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착취하고 이용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노는 마치 독버섯처럼 내 마음속에서 하루하루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자라났다. 거울에 비친 멍든 얼굴의 흔적이 희미해져 가는 만큼, 내 마음속에 깊게 팬 상처와 모멸감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고 단단해졌다. 복수. 그 두 글자가 검은 잉크처럼 내 머릿속을 온통 뒤덮고 떠나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도, 잠에서 깨어난 순간에도, 그 생각뿐이었다.
어느 날 밤, 평소에는 잘 마시지 않던 독한 위스키에 취해 비틀거리며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마치 홀린 사람처럼, 새로운 이메일 주소를 만들고, ‘로망츠’ 앱에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이름과 다른 프로필 사진으로 새로운 계정을 등록했다. 젊고, 다부진 체격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으며, 누가 봐도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보이는 백인 남성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신중하게 골랐다. 프로필 정보도 철저히 조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녀, 실비아를 그 앱 안에서 집요하게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프로필 사진은 그사이 몇 번 바뀌어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눈빛, 그 특유의 깊고 그늘진 눈매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속일 수 없는 그녀만의 표식이었다. 이번에 내가 사용할 가짜 이름은 '토마스 뮐러(Thomas Müller)'였다. 독일에서 가장 흔하고 평범한 이름 중 하나. 나이는 35세, 뒤셀도르프 출신의 성공한 IT 스타트업 창업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하여 경제적 자유를 얻었고, 현재는 사업을 확장하며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매력적이고 여유로운 미혼 남성. 내가 되고 싶었지만 결코 될 수 없었던, 바로 그런 이상적인 남성의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첫 메시지를 보내기 직전, 나는 잠시 망설였다. 키보드 위에 얹힌 손가락이 떨렸다.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내 안의 마지막 남은 이성이 희미하게 속삭였다. 아니, 물론 이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이것은 비겁하고 추악한 복수극의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내게는 그것이 뒤틀린 방식으로나마 실현되어야 할 '정의'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그저 힘없고 나약하며 돈이나 뜯기는 만만한 동양인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나 역시 그들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교활하고 두려우며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첫 메시지는 이전과는 달리, 매우 신중하고 계산적으로 작성했다. 너무 노골적이거나 가벼워 보이지 않게, 그러나 그녀의 흥미를 끌고 호감을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으로.
"안녕하세요, 실비아 씨. 우연히 프로필을 보게 되었는데, 당신의 아름다운 미소와 깊은 눈빛이 정말 인상적이네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이번 주말에 사업차 뒤셀도르프에 잠시 들르는데, 함께 저녁 식사라도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그녀의 답장은 놀랍도록 빨리 왔다. 이전의 나와 대화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신속하고 긍정적이었다.
"안녕하세요, 토마스 씨. 와, 당신 프로필도 정말 멋지네요! 사진보다 실물이 더 기대되는데요? 네, 좋아요. 저 주말에 시간 있어요. 언제든 환영이에요."
이전의 ‘김 씨’에게 보냈던 단답형의 건조하고 사무적인 말투와는 전혀 다른, 훨씬 친근하고 적극적이며 심지어 약간은 들뜬 듯한 어조였다. 그리고 더 이상의 불필요한 설명이나 탐색전 없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메시지에 덧붙였다. 이번에는 앱이라는 매개체를 벗어나 더욱 빠르고 직접적인 연락을 원한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내 미끼를 그녀가 확실하게 물었다는 증거였다.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복수의 첫 단계는 성공적이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우리는 주로 왓츠앱(WhatsApp)을 통해 꾸준히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완벽하게 ‘토마스’라는 다른 사람으로 빙의하여 연기했다. 항상 자신감 넘치고, 위트 있는 유머 감각을 갖추었으며,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은근히 과시하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매력적인 젊은 사업가. 그녀 역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다. ‘김 씨’ 앞에서 보였던 냉담하고 방어적이며 계산적인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밝고, 웃음이 많으며, 때로는 감성적이고 열정적인 매력을 가진 여성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때로는 자신의 힘들고 고단했던 과거 삶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나의 동정심과 연민을 자아내려 시도하기도 했다. 카메룬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더 나은 삶을 꿈꾸며 홀로 유럽으로 건너왔다는 이야기, 그리고 낯선 땅 독일에서 이방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인종 차별과 경제적인 어려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들.
물론 그 모든 이야기가 그녀가 꾸며낸 또 다른 거짓 시나리오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토마스’라는 먹잇감을 확실히 잡기 위한 고도의 연기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어딘가 미묘한 진실의 파편들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 톤,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들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실제 삶의 고단함과 상처의 흔적들. 혹시 그녀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이 가혹한 현실 속에서 필사적으로 생존하려 발버둥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거짓말 뒤에는 어쩌면 눈물겨운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내 안의 차갑고 단단했던 복수심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의식적으로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에 남았던 상처의 기억을 되새기거나, 그 호텔 방에서의 치욕적인 순간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동정심은 사치였다.
마침내, 우리는 다시 만날 약속 날짜를 잡았다. 이번에는 만남의 모든 주도권이 나, 즉 ‘토마스’에게 있었다. 만날 시간과 장소는 모두 내가 정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그 악몽의 장소, 카르트 거리의 그 럭셔리 호텔이었다. 복수의 무대는 바로 그곳이어야만 했다.
약속 당일, 나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해서 호텔 정문이 마주 보이는 길 건너편 작은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값비싼 브랜드의 옷 대신,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기 위해 짙은 색 야구 모자와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변장이라기보다는 위장에 가까웠다. 심장은 불안과 기대감으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 시간에 거의 맞춰 실비아가 택시에서 내려 호텔 입구에 나타났다. 이전 ‘김 씨’를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몸에 꼭 맞는 세련된 디자인의 붉은색 미니 원피스에 아찔하게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듯 윤기 나게 스타일링되어 있었다. 얼굴에는 정성스러운 화장이 더해져 훨씬 더 매력적이고 화려해 보였다.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과 살짝 상기된 표정에는 부유한 사업가 ‘토마스’와의 만남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이 명백하게 묻어났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자신이 당연히 이곳에 속한 사람이라는 듯 당당하게 호텔의 회전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호텔 로비 안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이내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밖으로 나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을 창밖으로 지켜보았다. 아마도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토마스’에게 연락을 시도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로비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망과 초조함이 그녀의 표정에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한 번, 두 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흘렀을 때, 그녀는 마침내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호텔을 벗어나 근처 트램(Tram) 정류장 쪽으로 힘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조용히 카페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마치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혹시라도 그녀가 갑자기 뒤돌아볼까 봐 가끔 길가의 차 뒤나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그녀가 올라탄 트램에 나도 눈에 띄지 않게 함께 올라탔고, 그녀가 내린 정류장에서 나 역시 시간차를 두고 함께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뒤를 밟는 수상한 그림자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트램 정류장에서 내려 익숙하다는 듯이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섰고, 이내 낡고 허름한 아파트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전체적으로 짙은 갈색 벽돌로 지어진, 지저분해 보이는 5층짜리 건물이었다. 외벽에는 군데군데 낙서가 되어 있었고, 창문 틀은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호텔의 화려함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풍경. 그녀는 열쇠를 꺼내 작은 철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모습을 삼켰다. 나는 길 건너편 어둠 속에 서서, 그 건물의 번호판과 주변 지형지물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비스마르크 거리(Bismarckstraße) 157번지. 그리고 그 주변의 작은 식료품 가게, 케밥집, 버스 정류장, 그리고 길 건너편에 있는 작고 황량한 공원까지. 그녀의 거처를 알아냈다. 복수의 다음 단계를 위한 중요한 정보를 확보한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마치 중독된 사람처럼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차를 몰고 그녀가 사는 동네를 찾았다. 때로는 차 안에서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때로는 길 건너편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몇 시간이고 비스마르크 거리 157번지, 그녀의 집 창문이 보이는 곳을 주시했다. 그렇게 끈질기게 지켜보는 동안, 천천히 그녀의 일상생활의 윤곽이 희미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장바구니를 들고 근처 할인 마트로 장을 보러 나가는 모습, 창가에 기대어 누군가와 핸드폰으로 통화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 그리고… 가끔씩 그녀의 집을 드나드는 그 남자들, 바로 나를 무자비하게 구타했던 그 세 명의 얼굴까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집처럼 스스럼없이 그녀의 아파트를 드나들었다. 그들은 그녀의 남자친구이거나, 혹은 보호자, 아니면 그녀와 어떤 복잡하고 불미스러운 관계로 얽혀 있는 공생 관계의 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특히 그들 중 리더 격으로 보였던, 가장 덩치가 컸던 남자는 다른 두 명보다 훨씬 더 자주 그녀의 집을 방문했고, 때로는 그녀와 함께 외출하거나 집 앞에서 다정하게(?) 포옹하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그는 종종 그녀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나오기도 했다.
나는 마치 사냥감을 추적하는 사냥꾼처럼, 혹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처럼,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작은 메모장에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집을 나서는 시간, 귀가하는 시간, 만나는 사람들, 방문하는 장소, 그녀의 활동 내용들. 날짜와 시간대별로 그녀의 생활 패턴을 분석하고,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의 인상착의와 특징, 그녀가 자주 이용하는 교통수단과 경로, 그녀가 자주 가는 가게나 장소들. 마치 치밀하게 거미줄을 치는 거미처럼, 나는 복수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며 필요한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 복수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의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계속 지켜볼수록, 나는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또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 일찍, 도시 외곽에 위치한 어떤 큰 건물로 출근하는 듯했다. 그곳의 분위기나 그녀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병원이나 요양 시설에서 청소부나 간병인 같은 저임금 육체노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항상 작은 책가방을 들고 시내 중심가의 어학원으로 보이는 건물로 향했다. 아마도 독일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언어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주말에는 가끔 동네의 작은 터키 식료품점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그녀의 실제 삶은 내가 ‘로망츠’ 앱 프로필이나 호텔에서의 만남을 통해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화려하거나 자유분방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되고 팍팍하며 불안정해 보였다. 복수를 위해 시작했던 나의 집요한 관찰은, 의도치 않게 그녀의 삶의 감춰진 이면들을 조금씩 들춰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안의 복수심에도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VII. 연민의 침투
관찰의 시간이 길어지고, 그녀의 삶의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면서, 내 마음속을 단단하게 지배하고 있던 복수심이라는 두꺼운 얼음 아래로 예기치 못한 감정의 균열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 나의 시선은 오로지 그녀의 허점이나 약점, 혹은 그녀와 그녀의 공범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결정적인 정보를 찾아내려는 냉정하고 계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차가운 시선 속에는 나도 모르게 다른 종류의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노나 경멸과는 다른, 어쩌면 연민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복잡하고 불편한 감정이었다.
비스마르크 거리 157번지에 위치한 그녀의 낡은 아파트는 그 자체로 그녀의 고단하고 불안정한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낡은 창문에는 언제 세탁했는지 모를 오래된 레이스 커튼이 힘없이 걸려 있었고, 가끔 커튼이 바람에 날려 열린 틈으로 얼핏 보이는 실내는 늘 어둡고 살림살이가 거의 없어 휑해 보였다. 그녀는 거의 매일 비슷한 시간에 녹초가 된 모습으로 집을 나섰고, 저녁 늦게 혹은 밤늦게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거의 항상 빨간색 로고가 찍힌 할인 마트(Aldi나 Lidl 같은)의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값싼 통조림이나 냉동식품, 마른 빵과 시들기 직전의 채소 같은 것들이 들어 있을 터였다. 한번은 그녀가 길을 걷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사과 하나를,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애처롭게 주워 담아 옷에 쓱쓱 닦는 모습을 멀리서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 초라하고 가슴 아픈 장면을 보는 순간, 얼마 전 고급 호텔 방에서 오만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50유로짜리 지폐를 경멸하듯 던져주던 내 자신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가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것으로 보였던 도시 외곽의 큰 건물은, 자세히 살펴보니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이나 재활 병원인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 되면, 그녀는 청소부나 간병인들이 입는 것으로 보이는 푸른색 유니폼 차림으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다른 외국인 이주민 여성 몇 명과 함께 건물 뒤편의 후미진 흡연 구역에 모여 담배를 피우며 잠시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곤 했다. 멀리서나마 보이는 그들의 얼굴에는 고된 육체노동으로 인한 깊은 피로와 함께, 낯선 타국 땅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으로서의 고독과 불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잠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그 웃음은 금세 공허하고 지친 표정으로 바뀌어 담배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지곤 했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 그녀가 향했던 '수업'은 예상대로 성인들을 위한 저녁 독일어 강좌인 듯했다. 그녀는 낡고 두꺼운 독일어 교재와 연습장을 옆구리에 낀 채, 수업 시간에 늦지 않으려 늘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한번은 갑자기 세찬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우산도 없이 정류장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버스를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싸구려 인조 가죽 재킷은 이미 흠뻑 젖어 몸에 축축하게 달라붙었고, 그녀는 늦가을의 차가운 비바람에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 비에 젖은 생쥐처럼 초라하고 처량한 모습은 더 이상 ‘로망츠’ 앱에서 나를 유혹하던 매력적인 ‘실비아’나, 호텔 방에서 돈을 요구하던 뻔뻔한 ‘사기꾼’ 실비아가 아니었다. 그저 낯설고 차가운 이국땅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하루하루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이름도 사연도 모를 수많은 이름 없는 이방인 여성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는 내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가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끔찍한 폭력을 가했던 그 세 명의 남자들과 그녀의 관계 역시, 처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해 보였다. 그들은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얽혀있는 공생 관계(어쩌면 기생 관계)였지만, 그 관계가 평등하거나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일방적인 보호나 따뜻한 애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때로는 그들이 그녀의 아파트 문 앞에서 언성을 높이며 격렬하게 다투는 소리가 길 건너편까지 희미하게 들려오기도 했다. 특히 그녀와 가장 가까워 보였던, 리더 격의 남자는 종종 그녀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무언가를 요구하거나(아마도 돈일 것이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끄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그녀는 그들 앞에서는 항상 불안하고 긴장한 듯 보였고,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주눅 든 태도를 보였다. 어쩌면 그녀 역시 그들에게 경제적으로든, 혹은 다른 방식으로든 착취당하고 이용당하고 있는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녀의 든든한 ‘가족’이나 다정한 ‘연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취약함과 불안정한 처지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기생하는 또 다른 종류의 포식자들처럼 보였다.
나의 복수 계획은 이미 상당히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세워져 있었다. 몇 주간의 끈질긴 관찰을 통해, 나는 그 남자들의 대략적인 동선과 활동 시간, 그들이 자주 어울리는 장소, 심지어 그들이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불법적인 활동(마약 거래나 소매치기 등)의 희미한 정황까지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익명으로 경찰에 그들의 수상한 행적을 신고하거나, 혹은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다른 이민자 그룹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흘려 그들 사이에 충돌을 유도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더 직접적으로, 그들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노려 또 다른 폭력적인 방식으로 기습적인 보복을 감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복수의 시나리오들이 어쩐지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그들에게 복수한다고 해서 무엇이 근본적으로 달라질까? 호텔 방에서 입었던 내 육체적, 정신적 상처가 깨끗이 치유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단지 또 다른 증오와 폭력의 악순환을 낳고, 예측 불가능한 더 큰 비극을 불러올 뿐이지 않을까? 내가 복수를 통해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 안의 복수심이 결정적으로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린 순간은, 어느 늦은 밤에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그날도 나는 평소처럼 차 안에 몸을 숨긴 채, 비스마르크 거리 157번지, 그녀의 아파트 3층 창문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집들이 불을 끄고 잠든 깊은 밤이었다. 그녀의 방 창문 역시 굳게 닫힌 커튼 뒤로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창문 너머 어둠 속에서 누군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뚫고 내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것은 밤바람 소리였을 수도 있고, 혹은 내 지친 신경이 만들어낸 환청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었다고 느낀 바로 그 순간, 나는 얼어붙은 듯 차 핸들 위에 이마를 기댄 채,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삶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고통스럽고 힘겹다는 것을. 내가 굳이 거기에 더 큰 불행과 고통의 무게를 보태줄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복수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결국 나 역시, 이 차갑고 낯선 독일 땅에서 지독한 외로움과 소외감 속에서 힘겹게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이방인이 아니던가. 그녀와 나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정도의 차이,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연약한 존재들이었다. 그녀가 선택한 생존 방식이 비록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고 뒤틀려 있을지라도, 그것이 그녀가 이 가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운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 호텔 방에서 나 자신이 그녀에게 가했던 명백한 폭력 – 그녀의 뺨을 때렸던 그 순간 – 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복수는 결국 나를, 내가 그토록 경멸했던 그 남자들과 똑같은 수준의 존재로 떨어뜨릴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 길을 갈 수 없었다.
VIII. 폐막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기 직전의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나는 비스마르크 거리 157번지를 마지막으로 다시 찾았다. 떠오르는 태양의 첫 빛줄기가 낡고 지저분한 갈색 벽돌 건물의 외벽을 따스한 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지만, 그 찰나의 아름다움 속에서도 여전히 그곳에 깃든 삶의 고단함과 무게는 지워지지 않고 배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차 안에서 그녀의 3층 창문을 주시하지 않았다. 대신, 차창 밖으로 천천히 펼쳐지기 시작하는 평범한 독일 도시의 아침 풍경을 잠시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둘러 출근하는 사람들, 재잘거리며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배달하는 노인. 그들 모두 각자의 크고 작은 이야기와 희망, 그리고 어쩌면 절망을 안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로 돌아가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토마스 뮐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두었던 가짜 ‘로망츠’ 프로필을 망설임 없이 삭제했다. 그녀와 ‘토마스’로서 주고받았던 수많은 달콤하고 거짓된 메시지 기록들도 모두 영구히 지워버렸다. 지난 몇 주간 그녀의 동선과 일상을 빼곡하게 기록했던 작은 메모장은 마치 부정한 증거물을 없애듯 갈기갈기 찢어 깊은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 모든 행위는 마치 오랫동안 내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더럽고 차가운 갑옷을 마침내 벗어 던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후련함이나 해방감보다는, 오히려 깊은 피로감과 설명할 수 없는 허탈함, 그리고 약간의 슬픔 같은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복수는 사라졌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복수라는 뜨거운 감정은 재처럼 식어버렸지만, 내 몸과 마음에 남겨진 상처는 그대로였다. 얼굴의 멍과 부기는 시간이 흘러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날 밤 호텔 방에서 겪었던 치욕과 모멸감,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깊은 혐오감은 쉽게 가시지 않고 여전히 내면 깊숙한 곳에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그 호텔에서의 악몽 같은 하룻밤. 돈을 요구하던 실비아의 차갑고 계산적인 눈빛. 나를 짐승처럼 구타했던 그 남자들의 경멸과 분노가 뒤섞인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이성을 잃고 그녀의 뺨을 향해 내 손이 올라갔던 바로 그 순간의 끔찍한 감각. 이 모든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은 아마도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서 오랫동안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두 번 다시 ‘로망츠’ 앱을 열지 않았다. 내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외로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곁에 머물렀지만, 이제 더 이상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위험하고 공허하며 자기 파괴적인 관계를 갈망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대신, 나는 용기를 내어 내 안의 깊고 어두운 황무지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다. 내가 왜 그토록 타인의 온기를 갈망하며 쉽게 상처받고 분노했는지, 내 안의 어떤 결핍과 불안이 나를 그 벼랑 끝으로 내몰았는지. 그 근원적인 답을 찾아 나서는 여정은 분명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쩌면 평생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파트 창밖으로는 여전히 프랑크푸르트의 거대한 스카이라인이 차갑고 무심하게 펼쳐져 있었다. 높이 솟은 유리와 강철의 빌딩 숲. 냉정하고 이성적인 도시. 나는 다시 그 도시의 아주 작은 부속품 중 하나로 돌아가야만 했다. 영혼 없는 숫자들과 복잡한 차트, 그리고 끝없는 경쟁 속으로. 하지만 이제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내가 되어 그곳에 서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나약함과 삶의 처절한 비참함, 그리고 폭력의 잔인함과 그 끝없는 허무함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으로서. 어쩌면 그것이, 내가 그 저주받을 호텔에서의 하룻밤을 통해 얻게 된 유일하고도 값비싼 교훈일지도 모른다. 그 호텔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곳을 거쳐 온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혹독한 경험이 남긴 상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이제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