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마치 심술궂은 신의 장난처럼, 사정없이 거리를 내리쬐고 있었다. 그 빛줄기 아래 드러난 풍경은 오래된 흑백 영화의 필름처럼 빛바래고 낡아 있었으며, 쨍한 햇볕은 그 퇴락한 아름다움을 더욱 처연하게 부각시켰다. 폴란드의 어느 한적한 골목,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건물들 사이로 두 한국 남자가 땀을 훔치며 서 있었다.
“아이 러브 유? 거, 간판 한번 해괴망측하네.” 김 실장의 쉰 목소리가 찌는 듯한 대기 속에 낮게 깔렸다. 그는 마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내팽개쳐진 마른빨래처럼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린 채, 낡은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게요, 실장님.” 젊은 현수가 몸을 살짝 비틀며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김 실장의 말에 능글맞게 장단을 맞췄다. 그의 눈에도 간판은 기묘하게 비쳤다.
“도대체 뭘 하던 곳이었을까?” 김 실장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그들의 시선이 꽂힌 곳은 정사각형의 아담한 간판이었다. 그 위에는 어설픈 솜씨로 그려진, 마치 비뚤어진 입술처럼 생긴 붉은 하트 모양의 딸기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그 상단에는 혀 짧은 어린아이가 쓴 듯 뭉툭하고 투박한 글씨체로 'I Love You'라는, 어딘가 모르게 촌스럽고 어색한 영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 간판은 이국적인 폴란드 거리 풍경 속에서 유독 생뚱맞은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저의 명쾌한 뇌피셜에 의하면, 이곳은 틀림없이 비건 전문 식당이거나 아니면 유기농 전문 쇼핑몰이었을 겁니다. 저기 밑에 깨알같이 쓰인 글씨를 보십시오.” 현수는 마치 탐정이라도 된 양,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치며 손가락으로 간판 하단을 가리켰다.
과연, 간판 하단에는 ‘Eat Green, Live Clean’이라는 문구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알파벳에 대한 지식이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김 실장은, 그저 멍하니 간판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난감한 표정을 재빨리 포착한 눈치 빠른 현수가, 마치 원어민 강사라도 된 듯 유창한 영어 발음을 뽐내며 낭독했다.
“잇 그린, 립 클린! 직역하자면 푸르게 먹고 깨끗하게 살자, 뭐 대충 그런 심오한 뜻이겠네요.” 현수는 은근히 자신의 영어 실력을 과시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거참! 웃기는 짬뽕이네! 폴란드 한복판에서 영어 간판이 가당키나 한 소린가? 이럴 바에야 차라리 러시아어로라도 써 붙이지!” 한때 러시아에서 주방을 호령했던 경력이 있는 김 실장은, 못마땅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간판 주변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는 폴란드에서의 영어 사용은 불필요한 허세로 비쳤다.
현수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가 폴란드 땅을 밟은 지 어느덧 일 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이곳에서 영어가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경우는 고급 호텔이나 국제공항, 혹은 외국인들이 주로 찾는 카지노의 직원들을 상대할 때뿐이었다. 일상생활에서는 폴란드어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처참하게 망했겠죠!” 현수는 김 실장의 굳어진 표정을 살피며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정과 함께, 새로운 사업장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도 섞여 있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겉모습이 아니라 내부니까….”
김 실장은 중얼거리며, 오늘 아침 식당의 전 주인인 할머니 사장에게서 건네받은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는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감정하듯, 녹슬고 손때 묻은 열쇠들을 찬찬히 살피더니 그중 가장 그럴싸해 보이는 열쇠 하나를 집어 낡은 현관문에 꽂고 이리저리 돌렸다. 마치 낡은 오르골 태엽을 감듯, 그의 손목은 섬세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육중한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다른 열쇠를 집어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요지부동. 다시 다른 열쇠. 그것도 역시 무응답. 또 다른 열쇠.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불편함만이 그들을 맞이했다. 시간은 얄궂게 흘러갔고, 등줄기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마침내, 김 실장의 인내심은 킬라우에아 활화산처럼 장엄하게 폭발했다.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용광로처럼 뜨거워졌고, 억눌렸던 분노가 마침내 터져 나오며 그의 목소리는 한여름의 천둥처럼 우렁차게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씨팔! 이놈의 유럽 놈들은 당최 열쇠 하나 제대로 바꿀 생각을 안 해!"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심하게 으르렁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면 주변을 광적으로 둘러보는 것, 그것이 그의 전매특허였다.
"이사 갈 때마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거리야! 녹슨 쇳덩어리가 한 무더기라고!" 그는 열쇠 꾸러미를 마치 마라카스처럼 격렬하게 흔들어댔고, 그의 눈에는 억울함과 분노로 눈물까지 핑 돌았다.
"스마트 도어락 있잖아! 현대인의 필수품! 문명의 이기! 응! 띠 또 띠 또! 비밀번호 네 자리만 꾹꾹 누르면 찰칵하고 열리는 거! 얼마나 삼빡하고 편리하고 좋으냐고! 21세기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그의 표정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속 인물처럼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씨팔! 빌어먹을 열쇠 구멍 맞추다 내 파란만장한 인생 다 가겠네! 안 그래? 씨팔! 안 그래도 세상에 맞춰야 할 구멍도 많은데…. 안 그러냐고?"
김 실장의 붉디붉은 얼굴과 격앙된 목소리를 옆에서 안타깝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현수는, 잽싸게 고개를 파블로프의 개처럼 끄덕이며 한없는 동조와 지지를 표시했다.
“그러게요! 실장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열쇠에 무슨 원수라도 졌는지, 환장한 인간들 같아요! 이 동네 사람들은….”
평소에는 느긋하고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인 척 코스프레를 하는 김 실장이지만, 이렇게 한 번씩 이성의 끈이 끊어지면 소싯적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은 버릇이 튀어나와 버럭 화를 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가까이에서 목격한 현수는, 수긍을 넘어 거의 숭배에 가까운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유럽인 전체를 싸잡아 욕하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사실, 김 실장은 틈만 나면 한국인 직원들을 불러 모아놓고, 거의 전설이나 설화에 가까운 자신의 파란만장하고 굴곡진 인생사를 마치 대하드라마처럼 장황하게 펼쳐놓고는 하였다. 그의 학창 시절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칭 ‘일진’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진짱을 충실히 보좌하는 핵심 중간 간부’라고 주장했지만, 날카롭고 예리한 현수가 관찰한 바로는 그저 따까리, 혹은 셔틀에 불과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허구한 날 수업을 땡땡이치고 동네 으슥한 골목에서 순진한 초등학생들의 푼돈이나 뜯는, 그런 부류의 양아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풋내기 김 실장이 어쩔 수 없이 험난한 요식업계로 발을 들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그의 가슴을 송두리째 뒤흔든 첫사랑, 인자가 옆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었다. 창가에 비친 그녀의 청초한 모습에 한눈에 쫄딱 반해버린 김 실장은, 그날부터 늘 그녀의 주변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며 말 한마디 건넬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았다. 건들건들하면서도 은근히 언변이 수려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났던 김 실장의 어설픈 매력이 싫지 않았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고, 두 사람은 친구보다 더 각별한 사이, 즉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관계의 길을 터 주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시도 때도 없이 붙어 다녔다.
하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작고 폐쇄적인 중소 도시에, 그들의 풋풋하고 뜨거운 연모(戀慕) 행위는 삽시간에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주요 가십거리가 되었고, 이 소문은 결국 인자의 아버지 귀에까지 고스란히 접수되었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아버지 직업은 지역 사회의 질서를 수호하는 경찰서장. 김 실장의 불량한 과거와 현재의 일거수일투족을 부하 직원들을 통해 낱낱이 보고받은 아버지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뭐라!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쪽같은 외동딸이, 동네 깡패 새끼하고 붙어 다닌다고?”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대번에 인자에게는 외출 금족령이, 김 실장에게는 살벌한 협박이 들이닥쳤다. 결국, 비련의 주인공이 된 가련한 연인은 사람들의 감시의 눈과 귀를 피해, 쥐도 새도 모르게 동네 롯데리아 옆, 허름한 ‘떡데리아 방앗간’ 구석에서 애틋하고 비밀스러운 밀회를 나눌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방앗간 특유의 고소한 떡 냄새와 기계 돌아가는 소음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더욱 절절하게 익어갔다.
그러다 결국, 예기치 못한 사고를 치고 말았다. 김 실장이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쥔 그해 겨울, 찬 바람이 콧속을 꽁꽁 얼어붙게 할 정도로 매서운 강추위가 몰아치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 인자의 미묘한 신체적 변화, 특히 봉긋 솟아오르던 가슴 사이즈의 변화를 눈썰미 좋게 관찰하던 짓궂은 친구 녀석의 밀고로 인해, 인자의 아버지와 김 실장의 위태롭던 관계는 마침내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고 말았다.
“뭐, 뭐라고! 우리 집안의 보배, 금쪽같은 내 딸아이가 그 천하의 깡패 새끼의 아를 뱄다고? 당장 잡아다 능지처참을 해도 시원찮을 이노무 새끼를!”
서장의 포효는 경찰서 건물을 뒤흔들었고, 김 실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서울행 마지막 야간열차에 황망히 몸을 실었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멀어져 가는 고향의 희미한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김 실장은 뜨거운 닭똥 같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흘리며 속으로 절규했다.
‘인자야! 내 꼭 성공해서 네 곁으로 돌아오께! 그때까지만 눈 딱 감고 참아라! 알겠제! 내 진심으로 사랑한데이!’
하지만 막상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와 함께 서울역 플랫폼에 외롭게 도착하고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드는 징글징글한 추위와 뱃가죽이 등에 붙을 듯 끊임없이 아우성치는 지독한 허기, 그리고 텅 빈 역사에 뻥 뚫린 듯한 이질감과 황량함까지 더해져 그를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김 실장이 가진 것이라고는, 어머니가 눈물과 함께 쥐여준 얼마 되지 않는 쌈짓돈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기차표를 사는 데 절반 가까이 써버렸고, 이제 남은 돈으로는 고작 밥 몇 끼 사 먹으면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가 될 신세였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역사를 나선 김 실장은, 저 멀리 그저 아련하게 불빛이 보이는 쪽으로 정처 없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울은 중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 와보는 낯선 도시였다. 생소함이 온 세상을 뒤덮었고, 외로움이 거대한 해일처럼 그의 작은 몸을 덮쳤으며, 두고 온 인자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매서운 북서풍만큼이나 세차게 그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방울져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가 채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뜻밖에 그를 격하게 반기는 이들이 나타났다. 살을 에는 듯한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싸구려틱함과 선정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야시시한 반바지와 과도하게 부풀린 뽕 넣은 가슴, 그리고 떡칠한 화장으로 중무장한 화랑유녀(花娘遊女) 두 명이 쏜살같이 다가와 그의 양팔을 꽉 끼고는, 마치 황소 심줄보다 더 질긴 힘으로 그를 어둠 속으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아저씨! 날도 추운데, 우리랑 잠시 쉬었다 가! 응? 따뜻한 데서 몸 좀 녹이고 가셔.”
비록 김 실장이 순박한 시골 출신이고 대도시 경험이 전무하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그녀들이 어떤 업종에 종사하는 여인들인 것 정도는 풍문으로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두 발을 아스팔트에 굳건히 박고 필사적으로 버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양실조로 비쩍 마른 몸매에 허우대만 멀쩡하게 큰 그가,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페셔널한 그녀들의 단련된 완력을 도저히 감당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으슥한 골목길 어딘가로 질질 끌려간 그는, 남은 쌈짓돈마저 속절없이 홀라당 탈탈 다 털리고 나서야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그곳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서울역에 만신창이가 된 지친 몸을 이끌고 그가 나타났을 때, 여전히 하늘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도로에는 출근길을 서두르는 인파와 차량 행렬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바쁜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 갈 곳을 잃은 김 실장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뒤를 말없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 그는 마침내 종로 거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연히 길가에 세워진 입간판 하나를 주목하고는, 홀린 듯 그곳 빌딩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그때 배가 무척이나 고팠거든….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어. 그래서 그냥 간판에 ‘요리학원’이라고 적힌 곳으로 홀린 듯이 올라갔지…. 그리고 정말 막무가내로 떼를 썼어! 여기서 재워주고 먹여만 주면, 어떤 허드렛일이라도 도맡아서 하겠다고…. 그렇게 해서 얼떨결에 요리학원생이 된 거야! 어때? 내 인생, 참 파란만장하고 재밌지 않냐?” 김 실장은 과거를 회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열세 번의 끈질긴 시도 끝에, 마침내 ‘I Love You’ 식당의 낡은 현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그리고 문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감탄사.
“와! 생각보다 엄청 넓은데요!”
김 실장과 현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안도와 만족감이 뒤섞인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불과 44초 전까지만 해도, 김 실장의 흉포하고 기괴하게 일그러졌던 얼굴은, 마치 봄바람에 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화하고 지극히 다정스러운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변화의 속도는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아무튼 이놈의 폴란드 놈들은 뭐든지 사이즈 하나는 커서 좋다니까…. 쇼핑몰도 무슨 공설 운동장만 하지, 도로도 큼직큼직해서 속이 다 시원하지, 하다못해 집도 봐봐! 밤새도록 데굴데굴 굴러다녀도 침대 끝에 닿지를 않아!” 김 실장은 과장 섞인 너스레를 떨었다.
“비약이 좀 심하신 것 같습니다, 실장님. 헤헤헤.” 현수는 어느새 김 실장 옆에 착 달라붙어 특유의 알랑방귀를 뀌기 시작했다. 그의 사회생활 생존 전략이었다.
“아냐! 현수야! 우리가 지금 짓고 있는 전기차 빠떼리 공장도 한번 봐봐! 더럽게 넓잖아! 거짓말 안 보태고 한 마을 전체가 다 우리 공장이잖아!” 김 실장은 팔을 휘저으며 그 거대함을 표현하려 애썼다.
“그러게요, 실장님. 정말 대단합니다. 이렇게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머나먼 폴란드까지 와서 이렇게 어마어마한 공장을 짓고 있으니, 국위선양도 이런 국위선양이 없습니다.” 현수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크기 하면 여기 폴란드 여자를 또 빠뜨릴 순 없지! 그렇지 않으냐? 헤헤헤.” 김 실장은 넓은 홀을 꼼꼼히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갑자기 눈빛이 가재눈처럼 변한 채 현수를 돌아보며 음흉하고도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실장님. 이쪽 슬라브족 여인네들이 대체로 발육 상태가 남다르긴 하죠. 사이즈가 좀 크고 아름답습니다. 헤헤헤.” 현수도 질세라 맞장구를 치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카! 그러게 말이야! 크아! 헤헤헤…. 그 풍만하고 빵빵한 젖탱이하며…. 묵직하고 탱글탱글한 방뎅이까지… 흐흐흐.” 갑자기 두 사람은 희대의 카사노바로 빙의라도 한 듯이 서로를 마주 쳐다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은 원초적인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하지만 이런 저급하고도 은밀한 분위기를 단칼에 깨부수는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실장님! 사장님 도착하셨어요!”
앳된 얼굴의 소피아가 자신보다 훨씬 더 큰 포장용 박스를 힘겹게 든 채, 황급히 홀 안으로 들어서며 경고성 멘트를 날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뭐? 벌써? 젠장! 그럼 이삿짐 트럭도 같이 도착했겠네?”
김 실장과 현수는 방금 전까지의 추잡한 농담은 온데간데없이, 급작스레 프로페셔널하고 진지한 비즈니스 모드로 표정을 바꾸고는, 황급히 밖으로 나가 그들 공동의 폭군을 영접할 준비를 서둘렀다.
고향집 식당 할머니 사장. 폴란드 브로츠와프 한인 사회에서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어제저녁 비행기로 막 도착한 순진한 관광객들뿐일 터였다. 그녀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야말로 악녀 중의 악녀. 항간에 떠도는 그녀에 대한 흉흉한 소문과 별명들을 모두 수집하여 나열하자면…. 흉측한 노파, 사악한 마녀, 저주받은 할망구, 음험한 마귀할멈, 피도 눈물도 없는 흑마녀, 괴이한 저승 여왕, 걸어 다니는 살아있는 악몽, 등등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니 그녀의 식당 이름인 ‘고향집’이 주는 따뜻하고 정겨운 이미지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었다.
그녀가 머나먼 이국땅 폴란드에 발을 디딘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 이곳 브로츠와프 인근에 한국의 거대 대기업 전기차 배터리 공장이 들어선다는 고급 정보를 입수한 그녀는, 남들보다 한발 앞서 공사장 근처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한식당들 중 하나로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서 그야말로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고향집’은 공사 현장의 고된 노동에 지친 건설 근로자들에게 단순히 밥만 제공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잠자리와 출퇴근 차량, 그리고 기타 잡다한 부대 서비스까지 원스톱으로 제공하는, 일종의 종합 복지 센터와도 같았다.
고향집이 그야말로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무려 300명이 넘는 한국인 근로자를 수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장 건설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많은 근로자가 귀국하거나 다른 현장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50명 정도의 고정 고객은 고향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덕분에 할머니 사장은 여전히 떼돈을 벌어들이는 중이었다.
그녀는 주변 경쟁 밥집들 중 가장 많은 고객을 아직도 굳건히 확보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온갖 종류의 악담과 저주 속에서도 꿋꿋하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녀가 만들어내는 음식이 타지 생활에 지친 근로자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횡포와 독설을 견디다 못해 홧김에 다른 식당으로 옮겼던 몇몇 고객들은,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꼬리를 내리고 다시 고향집으로 슬그머니 돌아오곤 하였다. 그녀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바로 신선하고 질 좋은 고급 식자재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이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고된 기사 식당 주방에서 일하며 온몸으로 터득한 남다른 손맛과 경험이 거기에 결정적인 힘을 보탰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의 베일에 싸인 과거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최근 현수의 남다른 친화력과 정보력을 통해 몇몇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실들이 직원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퍼져나가곤 하였다.
할머니 사장은 유독 현수를 편애하고 아꼈다. 평생을 독신으로 외롭게 살아온 그녀가 손자뻘에 가까운 어리고 싹싹한 현수를 예뻐하는 거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평소 감정의 기복이 롤러코스터처럼 극심하고 한번 심술이 제대로 나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물불 가리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독설과 저주를 퍼붓는 그녀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패턴을 고려한다면, 현수에 대한 그녀의 한결같고 일관된 따뜻한 태도는 상당한 일탈행위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아무튼 늘 그녀의 서슬 퍼런 공포 정치 속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얼음판을 걷듯 살아가던 고향집 직원들은, 현수가 어느 날 술자리에서 슬쩍 흘린 정보, 즉 그녀가 뜻밖에도 서울의 모 명문 사립대학 출신이라는 주장에 다들 자신의 두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든 충격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으니….
그녀가 서슬 퍼런 전두환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의 핵심 주동자로 지명 수배를 받아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숨어 다니다 결국, 깊고 깊은 지리산 자락에 몸을 숨기고 겨우 자리를 잡은 어느 허름한 산채 식당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요식 업계로 발을 담그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에이! 뻥도 정도껏 쳐야지! 그럼 우리 사장님이 민주화 투사였다는 거여?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겨?” 김 실장은 현수를 황당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며 기가 차고 코가 막힌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른 한국인 직원들도 한결같이 믿을 수 없다는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현수는 그날, 할머니 사장이 무심코 내민 낡은 휴대폰 액정 속에서 똑똑히 보았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의 광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학우를 절박하게 부축하고 있는, 비쩍 마르고 앳된 모습의 여학생을….
“사장님, 여기 사진 속에 쓰러진 이 학생은 혹시…?” 현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맞다…. 불쌍한 우리 이한열 열사여….” 할머니 사장은 힘없이 대답했다. 어느새 그녀의 깊게 팬 눈가에는 촉촉한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악명 높은 마녀 할망구가 아닌,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한 인간의 슬픔이 느껴졌다.
“김 실장, 새로 옮길 식당은 좀 어때요? 둘러보니 괜찮던가요?” 검은색 고급 승용차에서 막 내린 할머니 사장이,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온 김 실장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날카롭게 물었다.
“아, 네, 사장님. 생각보다 홀이 넓어서 무척 마음에 듭니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잘 고르신 것 같습니다.” 김 실장은 두 손을 다소곳이 앞으로 모으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억지 미소를 애써 지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근데, 내가 슬쩍 보니 주방이 좀 작아 보이던데, 그거 정말 괜찮겠어요? 우리 식구들 다 들어가서 일하려면 비좁지 않겠냐고요.” 사장의 매서운 눈초리가 김 실장을 꿰뚫었다.
“네? 주방이요? 아, 아직 거긴 제대로….”
“뭐 했어요? 여태까지? 내가 진작에 출발하라고 일렀거늘…. 천하의 주방장이라는 사람이 식당에 오면 주방부터 먼저 살펴봐야지, 지금까지 빈둥거리며 뭐 하고 있었어요?” 사장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아, 아, 네, 그, 그게 그러니까…. 열쇠가 하도 많고 낡아서 잘 안 맞았습니다, 사장님.” 김 실장은 당황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표정으로 말을 더듬으며 쩔쩔매기 시작했다.
“에헤이! 이 양반아, 김 실장! 또 시작이네, 그 말 더듬는 버릇…. 내가 전에도 뭐라 캤어요! 열쇠 꾸러미 중에서 가장 뺀질뺀질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게 바로 현관문 열쇠라고 몇 번을 말했냐고요! 사람이 대가리를 좀 굴려야지,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니잖아요! 그 많은 열쇠 중에서 가장 많이 넣었다 뺐다 하는 게 뭐겠어요? 당연히 매일 드나드는 현관문이지! 그러니 그놈만 유독 닳아서 뺀질거릴 수밖에는 없는 거 아니냐고요!” 사장의 논리 정연한 질책에 김 실장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 네,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지금 그럼 당장 주방부터 꼼꼼히 보고 오겠습니다.”
김 실장은 사장의 따가운 시선과 숨 막히는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식당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순순히 그를 보내줄 사장이 아니었다.
“에헤이! 이 사람아, 김 실장! 그냥 맨몸으로 멀뚱히 들어가면 뭘 어쩌자는 거요! 뭐라도 하나 들고 가야지! 지금 눈에 안 보이는교? 저기 저 이삿짐 트럭에서 우리 직원들이 땀 뻘뻘 흘리면서 짐 나르고 있는 거? 어차피 저기 저 물건들 대부분이 다 주방용품이잖아! 안 그래요?”
결국 김 실장은 가장 가벼워 보이는 박스 하나를 들고 마지못해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도착한 그는 문을 열자마자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씨팔! 이게 대체 뭐야? 주방이 무슨 밴댕이 소갈딱지만 하네! 아이고, 시팔! 망했다! 이번 생은 망했어!”
뒤따라 들어온 현수도 눈앞의 광경에 입을 딱 벌리고 할 말을 잃었다.
“실장님…. 와! 이건 정말… 우리 식구들이 여기서 다 같이 움직이기에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무리가 있겠는데요?”
벽을 따라 길게 배치된 낡은 스테인리스 조리대 위에는, 누군가가 아무렇게나 쓰다 버린 듯한 무딘 칼과 이가 빠진 도마, 그리고 정체불명의 계량 도구들이 마치 그들의 절망을 조롱이라도 하듯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주방 중앙에는 성인 두 명이 겨우 작업할 수 있을 법한 작은 작업 테이블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으며, 한쪽 벽면에는 구식 가스레인지와 신식 인덕션이 부조화스럽게 공존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언제 마지막으로 닦았는지 모를 정도로 때가 새까맣게 눌어붙은 프라이팬과 냄비들이 을씨년스럽게 올려져 있었다. 육중한 무쇠솥도 한쪽 구석에 처량하게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컨벡션 오븐이 위태롭게 겹겹이 쌓여 있었다. 또 다른 쪽 구석에는 마치 괴물의 아가리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낡은 스팀 세척기가 새로운 주방 식구를 음흉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일단… 냉장고와 냉동고를 한번 살펴봐야겠다.”
김 실장은 가슴 깊이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 속에서도, 제발 냉장고만큼은 업무용 특대 사이즈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옆 칸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다행히 그들이 발견한 냉장고는 업소용 대형 사이즈로, 그 크기가 상당했다.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김 실장.
“어! 근데 이게 다 뭐야? 냉장고 바로 옆에 이건 또 뭐지?”
“아마도… 건식 저장고나 팬트리 같은 공간 같은데요? 실장님.”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문을 살짝 열고 목만 빼꼼히 안으로 집어넣은 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 사방을 꼼꼼히 살폈다. 선반에는 말린 허브나 향신료 따위가 담겨 있었을 법한 빈 병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면? 현수야? 대체… 냉동고는 어디 있는 거냐?” 김 실장의 목소리가 불안감에 떨려 나왔다.
갑자기 두 사람 사이로 싸늘하고도 불길한 기운이 섬뜩하게 휘몰아쳤다. 그들은 마치 카산드라의 비극적인 저주라도 받은 듯,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채, 필사적으로 냉동고를 찾아 주방 구석구석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들이 애타게 찾는 냉동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좆됐다! 씨발, 냉동고가 없다!”
김 실장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신음하는 바로 그 순간, 예고도 없이 사장이 불쑥 주방에 들이닥쳤다.
“아니, 김 실장님! 양반은 귀가 똥꼬에 달렸는가 보네! 내 말을 당최 귓등으로도 안 듣고, 응? 그것도 아니면 점심으로 까마귀고기라도 잡쉈나? 내가 아까 전에 분명히 뭐라 캤습니까? 2층에 대형 냉동고가 떡하니 있다고! 그것도 아주 크고 좋은 놈으로!” 사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좁은 주방을 가득 메웠다.
김 실장과 현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총알 탄 사나이처럼, 혹은 우사인 볼트가 빙의라도 한 듯한 경이로운 속도로 잽싸게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아니, 좀 더 솔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장님의 무시무시한 폭언과 잔소리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냅다 달아났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가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2층에 도착한 두 사람은, 먼지 쌓인 흐릿한 창을 통해 힘겹게 스며들어오는 희미한 자연광 속에 어렴풋이 비친 2층 내부 구조를 어림짐작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낡은 변소…. 오잉? 남녀 공용이네…. 젠장. 그리고 저쪽은 창고인 것 같고…. 그리고…. 오호라! 찾았다! 여기! 여기 냉동고다! 와! 와! 진짜 대형 냉동고다! 크다! 엄청나게 크다! 현수야!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냉동고가 여기 있다!” 김 실장은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며 환호했다.
둘은 마치 18년 전에 전쟁통에 헤어진 혈육을 기적적으로 다시 만난 이산가족처럼, 벅찬 기쁨에 겨워 서로를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냉동고는, 일반 가정집의 작은 방 하나를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현수는 주체할 수 없는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이전에 일하던 낡은 식당에는 제대로 된 냉동고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동네 중고 가전제품 가게를 뒤져 슈퍼마켓에서나 주로 사용하는, 상단에 유리문이 달린 구식 수평형 냉동고 넉 대를 간신히 구해서 겨우겨우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 협소한 냉동고들에 항상 식자재가 터져 나갈 듯 꽉꽉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바닥 깊숙한 곳에 보관된 제품을 한번 꺼내려면, 위에 쌓인 모든 냉동식품을 전부 다 들어냈다가 다시 차곡차곡 정리해서 집어넣는, 그야말로 극한의 육체노동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고되고도 지긋지긋한 일은, 당연하게도 주방의 막내 셰프인 현수의 주된 담당 업무였다. 그러니 현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차갑고 딱딱한 냉동식품들을 뺐다 넣었다, 뺐다 넣었다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손은 늘 동상 직전이었다.
“김 실장님! 제 평생에 오늘같이 이렇게 감격스러운 날이 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 벅찬 감격에 겨운 현수의 인중에는 어느새 콧물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 현수야. 내 니 아픔, 니 서러움, 니 고통, 그간의 모든 설움을 다 안다, 다 알아….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제, 우리 착한 막내….”
김 실장은 근처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급히 가져와 현수의 콧물을 자상하게 닦아주며, 이 작지만 소중한 행복의 순간을 함께 나누었다. 그의 눈가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수야! 니가 영광스럽게도 이 새 냉동고의 첫 번째 문을 한번 힘차게 열어봐라!” 김 실장이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수는 벅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육중한 냉동고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잡고 온 힘을 다해 당겼다.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리자, 안쪽의 차가운 공기가 바깥으로 빠져나오고 바깥의 더운 공기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좋게 ‘쉭’ 하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처럼 천천히 냉동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냉기가 그들의 살갗을 기분 좋게 스치고, 꽉 막혔던 콧구멍을 시원하게 뻥 뚫더니, 목구멍을 지나 허파 깊숙한 곳까지 시원하게 파고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실 때마다, 마치 박하사탕 예닐곱 개쯤을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 넣은 듯한 상쾌하고 짜릿한 느낌이었다.
내부는 깨끗한 금속 선반들이 질서정연하게 잘 진열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다양한 크기의 아이스박스와 식자재 보관용 컨테이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현수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컨테이너 손잡이를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자, 김 실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기분 좋게 외쳤다.
“오호! 육류나 해산물 전용 보관 컨테이너도 종류별로 다 구비되어 있네…. 하하하, 이거야말로 퍼펙트 하구만! 아주 퍼펙트해!”
벽면에는 현재 냉동고 내부 온도를 나타내는 –23°C 라는 붉은색 LED 숫자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처럼 앙증맞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천장 가까이에는 거대한 냉각 팬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일정한 간격으로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팬이 힘차게 돌아갈 때마다 낮게 윙윙거리는 기계음이, 마치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처럼 평화롭고 안락하게 냉동고 안에 울려 퍼졌다.
“야! 오늘같이 이렇게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은, 여기서 그냥 이불 펴고 자도 되겠다! 헤헤헤.” 김 실장이 농담을 건넸다.
“그러게요, 실장님. 에어컨이 따로 필요 없겠습니다.” 현수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 순간 현수는, 전혀 주방장스럽지 않게 깡마르고 비쩍 마른 김 실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강원도 깊은 산골 황태 덕장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꾸덕꾸덕 맛있게 말라가는 명태 한 마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지금의 김 실장과 겹쳐 보였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이 냉동고가 그들에게 작은 낙원이 되어주길, 현수는 속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