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4시 13분. 시간은 밤의 잔해와 새벽의 예고 사이, 그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어색한 경계선 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형사들은 언제나처럼, 도시가 가장 깊은 숨을 내쉬는 그 순간, 새벽의 축축한 어둠을 예리하게 가르며 도착했다. 만성적인 불면은 나에게 밤의 끝자락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부여했기에, 그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놀라움보다는 예정된 수순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래된 습관처럼 이미 깨어 있었고, 닳고 닳아 섬유의 결이 느껴지는 낡은 잠바를 무심하게 어깨에 걸쳤다. 어떤 저항도, 어떤 질문도 없이, 그저 묵묵히, 그림자처럼 그들의 뒤를 따랐다.
바깥으로 나서자, 도시의 새벽 공기는 단순한 차가움을 넘어선 어떤 형이상학적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존재 자체를 절단하려는 듯한, 보이지 않는 칼날의 감각으로 맨살을 파고들었다. 존재와 비존재, 의식과 망각 사이의 경계가 실은 이토록 얇고 투과적이라는 현실의 잔인한 메타포처럼. 나는 그 순간, 거의 무의식적인 반항의 발로로, 혹은 이 위선과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도시에 대한 나만의 은밀한 경멸의 표식으로, 입안에 고인 더럽고 끈적한 침을 잇새로 뱉어 아스팔트 바닥에 낙인처럼 찍었다. 그 작은 행위는 무력함 속에서 건져 올린 유일한 능동성이었다. 그리고 곧, 차갑고 단단한 금속 수갑이 손목을 조여오는 압박 아래, 나는 아무런 감흥 없는 물체처럼 경찰차 뒷좌석으로 무기력하게 몸을 던졌다.
창밖으로 속절없이 흘러가는 도시의 네온 풍경은 내 혼돈된 정신 상태를 비추는 거대한 만화경이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색을 뒤섞는 추상화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며 망막 위에서 명멸했다. 붉고, 푸르고, 노란 빛의 파편들이 어둠 속에서 피어났다 지기를 반복하며, 인공적인 별자리처럼 도시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시간의 감각은 고무줄처럼 늘어지거나 압축되었고, 공간의 좌표는 현실감을 잃고 뒤틀렸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왜곡된 시공간 속에 부유했는지, 혹은 내 망막에 정확히 어떤 이미지들이 새겨졌다가 사라졌는지, 나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불확실성과 혼돈의 와중에서도, 역설적으로, 단 하나의 감각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았다. 그것은 이 인공의 극치, 이 퇴폐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느끼는, 거부할 수 없는 경외감이었다.
도시의 네온 빛은 더 이상 단순한 광원의 집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인류의 집단적 무의식, 그 끝없는 욕망과 불안, 창조와 파괴의 에너지가 물질화되어 현현한 장엄한 스펙터클처럼 느껴졌다. 카오스 속에서 간신히 유지되는 질서,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 속에서 길어 올려지는 찰나의 의미, 철저한 인공성 안에 역설적으로 깃든 생명력—이 모든 모순들이 네온의 깜빡임 속에서 위태로운 공존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문득, 전기의 마법이 세상을 뒤덮기 이전의 세계를 상상했다. 그것은 단순히 빛이 부족했던 시대가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빛과 어둠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던 세계였을 것이다.
촛불의 미미한 흔들림, 횃불의 거친 포효, 그리고 밤하늘을 가득 메운 원초적인 별빛만이 인간의 밤을 밝히던 시대. 그곳에서 어둠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희미한 잔광의 상태가 아닌, 훨씬 더 깊고, 농밀하며, 신비롭고, 그리고 어쩌면 더 정직한 실체였을 것이다. 그 생각은 기묘하게도 현재의 내 처지와 맞물려 일종의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문명이라는 현란하고 거대한 가면 아래, 우리는 여전히 태초의 어둠과 맞닿아 있으며, 그 근원적인 공포와 신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냉정한 인식. 이 네온 불빛으로 반짝이는 부유하는 도시의 풍경 속에 나 자신이 하나의 미미한 점으로 파묻혀 있다는 사실은, 나의 뿌리 깊은 회의주의와 냉소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극적이면서도 절대적인 낭만의 감각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일깨웠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재창조되는 도시의 집요한 리듬은, 니체가 예언했던 '영원회귀'의 현대적이고도 잔혹한 구현처럼 느껴졌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도시는 우리에게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흔들리는 정체성을 위태롭게 재정립할 것을 강요한다. 이 거대한 혼돈의 미학 속에서, 나는 기이하게도 어떤 종류의 안정감을 발견했다. 그것은 변화만이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상수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오래된 지혜가, 네온사인의 무심한 깜빡임 속에서 섬광처럼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법의 이름으로 체포되어 알 수 없는 미지의 장소로 끌려가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도시의 거대한 심장박동 속에 나 자신을 기꺼이 용해시키고 있었다. 육체는 차가운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둘러싸여 감금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내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도시의 밤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취조실은 예상했던 대로, 건물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 마치 땅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지하의 미로 같은 공간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권력의 위계질서를 공간적으로 완벽하게 형상화한 설계였다. 일상의 햇빛, 자연의 빛이 결코 닿지 않는 그늘진 곳에, 진실이라는 이름의 고백을 추출하고 가공하는 방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차갑고 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나는 일종의 카프카적 여정을 체험했다. 분명 목적지를 향해 물리적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끝없이 나 자신의 내면 깊숙한 어둠 속으로 하강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 모든 발걸음은 메아리가 되어 복도의 벽을 때리고 되돌아왔고, 그 소리는 마치 내 존재의 공허함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마침내 복도가 막다른 벽에 부딪히는 지점에 이르러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그곳에 문제의 취조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은 물리적인 차원에서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협소하고 답답했으나, 심리적으로는 무한히 확장되고 수축하는 듯한 아이러니한 차원을 지니고 있었다. 네모반듯한, 아무런 개성도 없는 평범한 직육면체의 방.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 앞으로 펼쳐질 권력과 취약함, 집요한 질문과 완고한 침묵, 교묘하게 조작된 진실과 완강히 버티는 허구 사이의 끝없는 변증법적 투쟁을 예고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은 형사들—대략 예닐곱 명쯤 되어 보이는, 표정과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균일한 얼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마치 집단적 의식을 공유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광경은 마치 한 떼의 까마귀가 막 발견한 먹잇감을 앞에 두고 앞으로 벌어질 포식의 의례를 준비하며 불길한 춤을 추는 듯한, 기이하고도 음산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들의 짧은 협의는 곧 끝났고, 그들은 일제히, 마치 사전에 정교하게 안무가 짜여 있었던 것처럼, 단 한 사람만을 남겨두고 모두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형사가 자신의 의자를 끌어당기자, 그 소리는 단순한 물리적 마찰음을 넘어섰다. 그것은 이 공간의 음향적 본질, 이 방이 지닌 억압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다. 금속 다리와 거친 바닥의 마찰음이 사방의 벽에 부딪혀 증폭되고 불쾌하게 반향하며, 마치 방 자체가 살아있는 존재처럼 낮게 울부짖는 듯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습기를 무겁게 품고 있었고, 그 축축한 질감은 피부에 닿는 서늘하고 매끄러운 실크 같았다. 그러나 그 감촉은 부드러움보다는 불쾌함에 가까웠다. 벽면은 병적일 정도로 창백한 하얀색이었다—그것은 단순히 흰색이라는 색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의 완전한 부재, 혹은 동시에 모든 색의 가능성을 흡수하고 무화시키는 듯한 백색의 역설적인 공허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백색의 공허함 속에서, 유독 한쪽 벽면을 차지한 창문만이 과장된 존재감으로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창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시선, 혹은 내부에서는 밖을 볼 수 없지만 밖에서는 내부를 일방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매직미러, 즉 일방향 거울에 가까웠다.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근본적인 권력 불균형을 가장 노골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로 구현한 장치였다.
나는 그 반투명하고 차가운 표면에 비친, 아니 어쩌면 그 표면에 의해 교묘하게 왜곡된 나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다.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복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상황, 이 공간, 이 시스템이 나에게 강제로 부여한 새로운 정체성의 시각화처럼 보였다. 모든 생기와 개성을 거세당한 채, 회색빛 그림자로 환원된 인간. 거대한 제도적 기계의 한낱 부품으로 전락한 존재의 초상. 그 모습은 맥없이 침울했고, 영혼이 육체로부터 잠시 이탈이라도 한 듯한 깊은 공허함을 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분명 나였지만, 동시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사회적 낙인과 제도적 억압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공들여 창조해낸 새로운 페르소나였다.
취조실의 가구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교하게 계산된 레토릭을 구성하고 있었다. 내가 앉아야 할 의자는 인체공학적 고려 따위는 처음부터 완전히 배제한 채, 오로지 앉는 이에게 최대한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안겨주도록 설계된 듯했다. 등받이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꼿꼿했고, 좌판은 필요 이상으로 단단했다. 그것은 단단함을 넘어 거의 적대적인 느낌마저 주었으며, 그 의자에 앉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굴복, 권위에 대한 순응으로 읽히도록 유도했다. 반면, 형사가 앉을 책상은 기묘하게도 모든 모서리가 부드럽게 둥글게 처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날카로움의 부재가 오히려 더 교묘하고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역설. 그것은 마치 이 공간에서 행사될 폭력이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물리력의 형태가 아닌, 보다 세련되고 구조화된, 심리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으로 행사될 것임을 암시하는 듯한 불길한 예감을 주었다.
내 맞은편, 그 둥근 모서리의 책상 뒤에 자리한 형사의 얼굴은 기이하게도 어떤 깊이감이 결여된 평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인간성에 대한 조잡하고 서툰 모방, 혹은 감정을 차단하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과도 같았다. 그의 얼굴과 몸에 두둑하게 붙은 살집은 단순한 비만의 결과라기보다는, 권력의 물질적 축적, 사회적 위계에서 오는 특권이 육체적으로 구현된 형태로 읽혔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표정에는 진정한 온기나 인간적인 감정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적 예의라는 형식의 기계적인 수행,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본격적인 권력 행사에 앞선 의례적인 전조와도 같았다.
그는 지극히 절차적이고 사무적인 태도로, 마치 오래되고 신성한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처럼, 피의자에게 고지해야 할 법적 요구사항들을 건조하고 기계적인 목소리로 낭독해 나갔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의 기복 없이 단조로웠으나, 그 단조로움 속에는 거스를 수 없는 제도적 권위의 무게가 묵직하게 실려 있었다. 이름, 생년월일, 주민등록번호, 현주소—이 모든 것들은 흩어져 있던 나의 존재를 국가라는 거대한 관리 시스템 안에 정확히 위치시키는 좌표점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형식적인 절차가 끝나고 그의 입이 닫히는 순간, 방 안의 공기의 밀도가 확연히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긴장이 응고되어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듯한 점성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 비로소 진정한 심문이 시작될 터였다—두 개의 고립된 의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상호침투,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와 그것을 캐내려는 자 사이의 복잡하고 미묘한 힘겨루기, 말해진 것과 의도적으로 침묵된 것 사이의 끝없는 변증법적 유희가. 앞으로 내게 던져질 각 질문은 단순한 언어적 구성체를 넘어, 내 의식의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까지 파고드는 정교하게 제작된 탐침과도 같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거대하고 비인격적인 제도적 장치 앞에 벌거벗겨진 듯 놓인 하나의 미세한 존재로서,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혹은 때로는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를 냉철하고 전략적으로 숙고하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와 침묵, 기억과 망각, 진실과 허구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심리전이 될 것이었다.
"전과가 있군요." 형사의 발언은 단순한 사실의 확인을 넘어선, 이 공간에서의 권력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낙인이었다. 그가 내 앞의 기록철을 한 장 넘기는 행위는 의도적으로 연출된 퍼포먼스처럼 느껴졌다. 마치 중세의 사제가 파문 대상자의 죄목을 나열하며 저주문을 낭독하는 엄숙하고도 위협적인 제스처처럼. 두껍고 빳빳한 종이가 만들어내는 '사락'하는 소리는, 막 인쇄기를 통과해 나온 듯 비정상적일 정도로 건조하고 날카로웠다. 그 차갑고 기계적인 울림은 마치 거대하고 냉혹한 운명의 톱니바퀴가 '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것은 내 존재가 이미 시스템 안에 완벽하게 기록되고 분류되어 있음을, 나의 모든 과거가 현재의 나를 규정하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작용함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미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전과자'라는 사회적 카테고리 안에 영구히 편입되어 있음을 선언하는 명백한 음향적 증거였다.
형사의 검은색 에나멜 구두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완벽하게 광택을 내고 있었다. 구두의 표면에 비친 형광등 불빛은 왜곡된 작은 태양처럼 반짝였다. 그 인공적인 반사면은 단순한 청결함이나 단정함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통제력, 그리고 더 나아가 혼돈스러운 세상을 명확한 질서 안에 편입시키고 분류하려는 강박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치였다. 경찰이라는 직업은 본질적으로 무질서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를 내포하며, 이 남자의 반짝이는 신발은 그 직업정신의 가장 가시적인 물질적 구현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 역시 구두의 표면과 마찬가지로 어떤 인공적인 광택을 띠며 반지르르했는데, 이는 마치 분노, 연민, 불안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의 질감이 오랜 직업적 단련을 통해 철저히 제거된 듯한, 혹은 그의 직업적 페르소나가 실제 피부와 완전히 일체화되어 버린 듯한 기이한 인상을 주었다.
그의 바지에서 풍겨 나오는 과도한 풀 먹인 냄새와 빳빳한 질감은 또 다른 종류의 비언어적 언어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발생하는 사각사각하는 마찰음은 유연성의 완전한 부재, 어떠한 타협도 불가능한 경직성을 암시했다. 그것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일종의 제복이었으며, 더 나아가 그가 대변하는 사회적 규범과 법의 엄격함이 물리적으로 현현한 것과도 같았다. 직물의 딱딱함은 법 조항의 경직성을, 그리고 그 엄격한 규범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제한된 자유와 선택의 폭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는 의자에 편안히 앉아 있다기보다는, 마치 보이지 않는 왕좌에 군림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약간 낮게 조절된 듯한 의자에 그의 육중한 몸이 푹 꺼지듯 기대어 있었지만, 그것은 긴장을 푼 편안함의 표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공간에 대한 완벽한 소유권과 이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과시하는 듯한 자세에 가까웠다. 그는 이곳의 주인이었고, 나는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일시적인 방문자, 혹은 더 정확히 말해 그의 심판대 위에 올려진 심문 대상이었다.
그의 전체적인 의상과 몸가짐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한 용의주도함과 강박적인 통제욕이 읽혔다. 그것은 단순히 깔끔한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존재 방식 전체, 세상을 대하는 그의 근본적인 태도가 투영된 하나의 캔버스와 같았다. 작은 주름 하나, 미세한 얼룩 하나 용납하지 않는 그의 복장은 세상을 향한 그의 태도를 명확하게 드러냈다. 그는 무질서를 병적으로 혐오하고, 모든 것을 명확한 범주 안에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서 안정감을 느끼며,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범죄 수사관으로서는 분명 강력한 장점이 될 수 있겠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타인과의 공감 능력이 결여된, 위험할 정도의 경직성을 암시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것은 단순한 바라봄이 아니라, 마치 해부대 위에 놓인 실험체를 대하듯 냉정하고 분석적인 검사와도 같았다. 그의 눈은 내 몸의 표면 위를 기술적이고 집요하게, 마치 스캐너처럼 훑어 내렸다. 그것은 인간적인 호기심이나 탐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탐닉—즉, 대상을 철저히 분석하고 분류하고 그 본질을 파악하는 데서 오는 직업적인 쾌감, 지적 우월감—에 가까워 보였다. 그의 시선은 내 외면의 초라함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내면, 나의 생각과 의도까지도 남김없이 투시하려는 듯한 강렬한 압력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그 집요한 시선 아래에서 마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한, 참을 수 없는 불편함과 모멸감을 느꼈다.
"단순 폭행, 문서 위조, 사기..." 그가 기록철을 보며 나열한 과거 범죄의 목록들은 지극히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어조로 발음되었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도덕적 판단과 가치 절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마치 내 존재 전체가 이 몇 개의 차가운 법률 용어들로 완벽하게 환원될 수 있다는 듯한, 존재론적 축소의 폭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단어들이 발화되는 동안 나를 향한 그의 시선은 이제 단순한 관찰이나 분석을 넘어, 일종의 원초적인 대면—죄를 지은 자와 그 죄를 심판하는 자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마주침—으로 변모해 있었다.
"네." 나의 대답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공기 중에서 거의 소멸될 듯 최소한의 음절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 짧은 한마디 안에는 실로 복잡하고 다층적인 감정의 지층이 격렬하게 압축되어 있었다. 과거의 사실에 대한 마지못한 인정과 동시에 현재의 나와 거리를 두려는 시도, 시스템의 권위 앞에서의 표면적인 순응과 동시에 그 이면에 숨겨진 미약한 저항, 스스로에 대한 깊은 자기비하와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변호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공존하는, 극도로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단음절이었다.
"집행유예 기간이군요." 그의 두 번째 관찰은 첫 번째 발언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직접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의 재확인이 아니라, 명백한 경고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상황의 위중함을 강조하는 일종의 위협과도 같았다. 집행유예라는 법적 상태는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구속 사이의 불안정한 리미널 스페이스, 언제든 사소한 실수 하나로 다시 자유가 박탈될 수 있는 극도로 취약한 위치를 의미했다. 그리고 그 짧은 문장 뒤에는 '당신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으며,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암묵적이고도 강력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다.
"네." 나의 두 번째 대답은 첫 번째와 동일한 음절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확연히 달랐다. 이제 그것은 단순한 사실 인정을 넘어,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수용, 혹은 더 깊은 체념의 그림자에 가까웠다. 이 짧고 메마른 단음절 속에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느끼는 나의 절대적인 취약함, 그리고 그 취약함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자의식이 응축되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발버둥 칠 수 없음을, 이미 그들의 논리 안에 포획되었음을 인정하는 무기력한 백기 투항과도 같았다.
"조심하셔야지." 형사의 이 마지막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걱정 어린 충고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 아래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교활한 권력 관계의 층위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의 입가에 다시 떠오른 희미한 미소는 진정한 온기나 인간적인 관심의 표현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승리한 권력자가 패배자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가면이었으며,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가올 본격적인 압박에 앞서 상대방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위협의 세련된 포장에 가까웠다.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듯한 그의 발화 방식은, 이 말이 공식적인 심문의 일부가 아니라, 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소통인 척 위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어떤 공식적인 발언보다 더 강력하고 위협적인 차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것은 친밀함을 가장한 위협이었다.
그가 기록철의 마지막 장을 향해 시선을 옮기는 행위는, 마치 연극의 한 막이 끝나고 다음 막이 시작됨을 알리는 무대 감독의 신호처럼, 일종의 명확한 전환점을 표시했다. 그의 시선이 과거의 기록에서 현재의 사건 파일로 옮겨가는 그 짧은 순간 속에는, 나의 과거와의 지리멸렬한 대면이 이제 끝났고, 이제부터는 현재 내가 이곳에 끌려온 이유, 즉 '413호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될 것이라는 차갑고도 암묵적인 선언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취조실이라는 밀폐된 미시적 권력 장치 안에서, 내게 극도로 제한적으로 부여된 주체성의 범위 내에서, 마치 체스판 위의 궁지에 몰린 킹처럼, 다가올 질문들의 예리한 칼날을 어떻게 피하거나 혹은 맞받아쳐야 할지를 필사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침묵 또한 강력한 발언이 될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왜 죽였나요?” 그의 목소리는 이전의 단조로움과는 다른, 어떤 확신에 찬 날카로움을 담고 있었다. 그는 방금까지 넘기던 과거 기록철을 책상 위에 사뿐히,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놓았다. 마치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일단락 짓는다는 듯이. 그리고는 옆에 놓여 있던, 두툼하고 낡아 보이는 다른 공책, 아마도 사건 수사 노트일 그것을 다시 집어 들었다. 공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누구를… 말씀이신지…?” 나는 최대한 시간을 벌며, 혼란스러운 척 되물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시잖아요. 모르는 척하지 마시고.”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연민과 유사한 감정이 희미하게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공감이라기보다는,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연민이었다. “413호. 김진아 씨.”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측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시선은 무겁고 끈적했다.
“죽었나요?”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되물었다. 내 목소리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 그녀가 죽었다는 가능성. 그것은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러나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던 현실이었다.
“단골이던데…. 아주 각별했던 모양이더군요.” 형사는 비대하게 살이 찐 몸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의자가 불편하다는 듯,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삐걱거리는 의자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왜 그랬어요? 혹시… 싸우기라도 했습니까?” 나는 그가 자세를 고쳐 앉는 그 짧은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그의 평정심을 흔들고, 조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특히 최근에 아주 자주 갔던데…. 기록을 보니,” 그는 공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손가락으로 짚어갔다. 그 행위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고문처럼 느껴졌다. “월요일, 그리고 그 주 금요일, 다음 주 월요일, 또 목요일… 거의 매주 만났군요.” 그의 목소리는 사실을 나열하는 것처럼 건조했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의혹과 비난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 여자, 창녀 치고는 글재주도 꽤 좋았나 봅니다.” 그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마치 아주 흥미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공책에 코를 박을 듯이 수그리고는, 깨알같이 적힌 무언가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는 다른, 약간은 희극적인 톤을 띠었다.
“...그는 나에게 남편 같다.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늘 존재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그런 사람. 오늘도 나는 창가에 기대어 그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가 나의 젖가슴을 어린아이처럼 정성스레 빨 때면, 나는 그 황홀한 순간에 이대로 숨이 멎어 죽어도 좋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허허, 뭐 이 정도면 거의 연인이구먼. 안 그렇습니까?” 그는 읽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빙그레 웃으며, 마치 동물원의 희귀한 동물을 보듯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그의 미소에는 조롱과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그녀가… 김진아가 그런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내면에 그런 섬세하고 깊은 감정의 세계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은 나에게 총격과도 같은 충격을 주었다.
“근데 왜 죽였어요?” 그의 목소리는 다시 원래의 냉정함으로 돌아왔다. “혹시… 그녀가 죽여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던가요?”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빈정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나를 꿰뚫어 보려는 듯 집요하게, 흔들림 없이 지켜봤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최대한 말을 아껴야 했다. 그를 조급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의 인내심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고, 감정의 동요로 인해 마르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거칠게 닦달하는 모습, 그 추한 민낯을 보고 싶었다. 그것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가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이자, 소극적인 복수였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취조실을 감쌌다. 오직 벽에 걸린 낡은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공간을 메웠다. 그는 여전히 나를 꿰뚫을 듯 보고 있었고,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지나쳐 하얀 벽으로 옮겼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텅 빈 벽. 결국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공허함으로 귀결되는 것. 나는 이미 오래전에 깨닫지 않았던가. 인간이란 그저 바람 속을 부유하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귀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닦달하는 저 인간 군상의 모습이 문득 지독하게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 측은함 속에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사는 더 이상 나에게서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듯, 잠시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책상 위에 놓인 다른 기록철들을 만지작거렸다. 여러 개의 파일 중에서 이윽고 하나를 신중하게 꺼내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는 마치 무거운 연극의 다음 막을 여는 배우처럼,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천천히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 톤 낮아져 있었다.
“당신 아내의 죽음…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거죠?” 형사는 기록철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차갑고 빛바랜 사진. 그녀의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했고, 눈은 영원히 감겨 있었다. 오래전 그 끔찍했던 날, 내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봉인해두었던 바로 그 얼굴. 그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시간은 뒤틀리고 과거의 상처가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되살아났다.
신혼 첫날 밤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날 밤, 나는 화려한 조명과 두꺼운 화장이 걷힌 아내의 진짜 민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어두운 침실 조명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낯설었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느낌. 지나친 흥분과 기대감 뒤에 찾아온 것은 미묘한 서먹함과 어색한 침묵이었다.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이 뒤섞여 나를 감쌌다. 그것을 실망이라고 명명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내가 상상하고 기대했던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과 현실 사이의 예기치 못한 간극에 대한 당혹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특유의 소박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고, 나를 불안하게 했던 모든 감정들을 잠재우는 듯한 편안한 포용력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그것은 분명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그런 종류의 깊은 끌림, 영혼의 안식처와 같은 느낌이었다. 단지, 아내에 대한 그 첫 만남에서의 미묘한 이질감이, 마치 작은 돌멩이처럼, 내 기억의 어느 한구석에 자리매김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지금, 죽은 아내의 사진 앞에서, 그 잊고 있었던 이질감이 섬광처럼 다시 떠오른 것이다. 나는 아내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터뜨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어이없게도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바로 그 이질감, 그 거리감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망각 속에 묻어두었던 신혼 첫날 밤의 혼란스러움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슬픔이나 분노는 그 다음이었다. 그것뿐이었다. 시작도 그러했고, 끝도 그러했다. 모든 것은 결국, 비극적이고 허무하게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대한 우주의 농담처럼.
취조실 벽의 매직미러,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그 아주 작은 창이 외부의 빛 변화에 따라 붉게 물들었다가, 차갑게 푸르렀다가, 다시 모든 색을 잃고 투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시간과 공간은 마치 점성을 잃은 액체처럼 느릿느릿 흐느적거렸고,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첫 번째 형사는 이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눈 밑은 거무스름했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나 역시 숨을 가능한 한 얕게 쉬었다. 더 이상의 감정 소모를 피하고 싶었다. 머릿속은 마치 깊고 질척이는 늪에 빠진 것처럼 무겁고 혼란스러웠다. 삶을 이루는 온갖 기괴하고 뒤틀린 상상들이 펼쳐진 황량한 대지 위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홀로 서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속단할 수밖에 없는 곳까지 와버렸다는 자각이 엄습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나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 궤도로부터의 이탈에 순응했고, 금지된 여자와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고,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 앞에는 아직 걸어갈 수 있는 길들이 이렇게 펼쳐져 있지 않은가? 어쩌면 사람들이 그토록 신성시하는 그 '정상 궤도'라는 것조차, 결국은 온갖 탐욕과 사치를 향한 끝없는 욕망의 추구 행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깊고 음울한 허탈감이 납덩이처럼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존재의 무의미함에 대한 통찰은 때로 이렇게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13일 밤 이야기를 합시다.” 지쳐 보이던 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피로했지만, 여전히 집요함이 배어 있었다.
“그날은?…” 나는 마치 기억을 더듬는 척, 천천히 반문했다.
“그렇죠. 당신이 김진아를 만난 마지막 날이죠. 그렇죠?” 그의 말투는 단정적이었다. 더 이상의 부인은 무의미하다는 듯.
“네.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나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아마도가 아니라 확실합니다. 모든 증거가 이미 다 확보되었어요. 똑똑히 아시겠어요!” 그의 목소리에 짜증과 위협이 실렸다. 나는 가끔 육체적 욕망이 너무 강렬해져 다른 모든 감정을 추스를 수 없는 상황을 겪곤 하는데, 어쩌면 그날 밤이 바로 그러했다고, 나 자신을 합리화하려 애썼다. 그녀가 살던 낡은 아파트의 4층 복도를 오를 때, 실제로 나는 온갖 음흉하고 도착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금지된 쾌락의 언덕을 막 넘어선 듯한 강렬한 환상에 잠시 잡혔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주기적으로 사라졌어요? 기록을 보면, 한 달에 일주일 정도는 꼬박꼬박 자리를 비웠더군.” 형사가 다시 화제를 돌렸다.
“늘 그런 건 아닙니다. 불규칙했습니다.”
“뭐, 딱 떨어지게 규칙적이지는 않더라도 대충 그 정도 패턴이라는 겁니다. 한 달에 일주일 안팎. 맞죠?” 그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네. 얼추… 비슷합니다.” 나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일 때문에 그런 건 아니죠? 비즈니스 때문은?”
“네, 아닙니다. 그건 순전히 개인적인 용무였습니다.”
“그 개인적인 용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뭡니까?”
“귀농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시골에 내려가 살 준비를…”
“그래서, 그곳이 어딥니까? 준비한다는 곳이?”
“뭐 딱히 정해진 곳은 아직…”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뚱뚱한 형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무서운 기색으로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마치 복잡한 퍼즐 조각을 맞추려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 벽에 걸린 시계의 재깍거리는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확대되어 들렸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그리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길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때, 취조실 문이 열리며 다른 형사가 들어왔다.
교대였다. 이전 형사와는 인상이 확연히 달랐다. 짧았던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어졌고, 둥글고 후덕했던 턱선은 날카롭게 각이 져 있었다. 손에 들린 두꺼운 문서 뭉치는 여전했지만, 그는 추가로 가벼운 노트북과 휴대용 인쇄기를 가져와 내 앞의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그는 익숙한 듯 책상 옆의 간이 서랍을 벌컥 열었다. 형사는 그 안에서 A4용지 한 묶음을 꺼내 프린터기에 능숙하게 채워 넣었다. '탕'하는 금속성 소리와 함께 프린터기가 '그르렁'거리는 예열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짧은 침묵 뒤에 인쇄기는 다시 작동하며 하얀 종이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는 출력물이 나오는 동안 다시 자리를 잡아 앉더니, 아무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귓바퀴가 뭉툭하게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묘하게 생긴 귀가 유독 내 신경을 거슬렀다.
“13층에 사시죠?” 같은 질문이 또다시 이어진다. 이전 형사가 이미 확인했던 사실이었다.
나는 그의 표정이 인쇄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계속 진술을 이어가라는 것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형사의 목울대가 껄떡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의 따갑고 날카로운 시선이 나의 얼굴 어딘가, 아마도 눈이나 입 주변에 고정되었다. 나는 불안하게 그와 천장과 바닥, 그리고 사방의 하얀 벽을 번갈아 보았다.
사방은 여전히 병적인 백색으로 가득했고, 단순했으며, 초점을 맞추지 않은 나의 흐릿한 시선 속에서 그 백색은 마치 짙은 안개나 구름처럼 몽환적인 느낌마저 자아냈다. 두껍고 차가운 마음의 사슬이 진눈깨비처럼 무겁게 영혼 위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부터 무척이나 많은 것을 듣고, 또 그만큼 많은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리고 그가 속한 이 시스템은, 결코 나를 그냥 순순히 놔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내뱉는 모든 어휘 선택에 극도로 세심한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올가미가 될 수도, 혹은 방패가 될 수도 있었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가 입고 있는 셔츠가 그의 다부진 체격에 비해 좀 끼어 보였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살짝 움직여 불편한 자세를 바로잡았다.
“언제부터 살았나요?” 나는 본래 숫자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중요한 날짜보다는 그날의 날씨나 분위기 같은 감각적인 것들을 더 잘 기억한다. 그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아주 세차게 비가 내렸다는 기억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와 관계된 모든 날짜들을 거의 완벽하게, 마치 기계처럼 정확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반복 학습의 효과였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했고, 나는 그에 맞춰 대답해야 했다. 마치 그 모든 숫자들이 내 삶의 경로를 규정하고 조형하는, 무척이나 심오하고 뜻깊은 의미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은 내 기억 속에 날짜들을 새기고 또 새겨 넣었다.
“넉 달 전입니다. 정확히 4월 13일부터.” 그는 내 대답을 듣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무심한 듯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노트북 화면을 돌려 내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네 장의 사진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었다. 웃고 있는 네 명의 남녀. 그들의 미소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았다. 마치 영정 사진처럼.
“지난 13년 동안, 당신이 교도소를 들락날락했던 4년을 제외하고, 당신이 거주하는 곳 혹은 그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실종자들입니다.” 그는 이전 형사와는 달리, 나에게 확실하고 일관된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 점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 내 혐의에 대해 완전한 확신이 없는 건가? 아니면 예의라는 가면 뒤에 더 날카로운 칼을 숨기고 있는 것인가?
“이 얼굴들, 알고 있죠?”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이 담겨 있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죠?”
“작년에… 다른 사건으로 조사받을 때 이미…”
“아, 그때 말씀이시군요. 정말 용케도 잘 빠져나갔더군요. 여러 정황상 용의선상에 맨 처음 올랐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주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또 증인까지 나타났었죠, 아마…” 그는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명백히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때의 일은 간단했다. 나는 그들에게 두둑한 입막음 돈을 건넸다. 빳빳한 현찰 다발을 세며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탐욕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인간의 진화는 때로 이렇게 엉뚱하고 추악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돈이라는 탐욕이 정의, 진실, 양심과 같은 모든 고귀한 가치들을 너무나도 쉽게 덮어버리는 방향으로.
“참 대담한 거예요? 아니면 그냥 앞뒤 안 가리는 무모한 겁니까?” 형사가 다시 나를 직시하며 물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분석적이었다.
“네?” 나는 그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김진아가 실종되면, 과거 사건들과의 연관성 때문에 모든 의심의 화살이 당신에게로 향할 거라는 것쯤은 능히 짐작했을 텐데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오직 내가 준비된 것만을 지각할 뿐이다. 더 이상 무언가를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것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되는대로 내버려 두는 것 사이의 차이는, 나에게는 이제 그저 살고 죽는 것의 차이만큼이나 희미하고 빈약해져 버렸다.
“박칠규 씨,” 형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보다 더 명백하고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또 있을까요? 사라진 네 명의 사람들. 당신 아내의 재판에서 당신 아내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했던 바로 그 증인들입니다. 그리고 아주 공교롭게도, 당신이 그 증인들 근처로 이사한 지 불과 몇 달 사이에,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렇게 적절한 시점에 맞추어 하나씩, 하나씩 사라졌더군요.”
형사의 말은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아내의 죽음. 억울한 죽음이었다. 끔찍한 살인이 일어났고, 내 사랑하는 아내가 희생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네 명의 결정적인 목격자 혹은 증인이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유력한 피의자가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재산과 사회적 권력을 소유한 자였고, 당연히 국내 최고의 변호사들을 선임했다. 이제 여러분은 여기에서 어떤 불길한 예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 당신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는 모든 혐의를 벗고 무죄로 풀려났고, 네 명의 증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맞춘 듯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거나 기존의 증언을 번복했다. 돈의 힘 앞에서 진실은 무력했고, 정의는 농락당했다. 그런 세상을 보며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런 인생은, 이런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가?
“자,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살짝 추어올리며, 그 너머의 길고 가는 눈썹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리고 나를 지긋이, 아주 오랫동안 쳐다봤다. 마치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려는 듯이.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여러 장의 문서들을 주섬주섬 꺼내 내 앞에 가지런히 놓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나의 과거 행적, 금융 기록, 통화 내역,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에 대한 진술서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수집된 지식의 단편들을 짜깁기하여, 그들 나름대로 ‘박칠규’라는, 그다지 사회의 규범에 순응적이지 못한 비정형의 인간을 규정하고 정의해놓았다. 그 서류 속의 나는, 실제의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들의 편견과 예단으로 왜곡된 허상에 불과했다.
“복수했군요.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치밀하고 잔혹한 계획에 따라서.”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방 안에는 바싹 마른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나의 건조하고 까슬한 목구멍을 자극하며 지나갔다. 어쩌면 사회는 나 같은 위법자들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시스템의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독소를 이용하여 자신의 면역 항체를 키우는 것처럼.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이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 안에서 바이러스와 같은 운명을 타고난 존재일지도 모른다. 제거되거나, 혹은 이용당하거나.
“네, 뭐… 그런 셈이죠.” 나는 더 이상 부인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덤덤하게 자백했다. 형사의 얼굴이 순간 보름달처럼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빛에 만족감과 흥분이 어렸다. 인간은 가끔,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역설적으로 자발적으로 행할 때가 있다. 너무나 피곤한데 억지로 깨어 있으려 한다든지, 깊은 고요를 원하면서도 시끄러운 음악의 볼륨을 높인다든지, 걷기조차 싫은 날 일부러 험한 등산을 하곤 한다. 이것은 일종의 고통의 수용이다. 그러다 보면 아주 가끔, 그 고통 자체가 반갑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반복되다 보면, 결국에는 고통에 중독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의 자백은 어쩌면 그런 종류의 자기 파괴적인 중독의 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치밀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덧붙였다. “정말로 치밀했다면, 제가 지금 여기 이렇게 앉아 있지도 않았겠죠.”
형사는 내 말에 잠시 놀란 듯하더니, 이내 크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그의 비쩍 마른 손바닥으로 ‘탁!’ 소리가 나게 책상을 내리쳤다.
“하하, 그건 또 모르는 일이죠.” 그의 웃음소리는 건조하고 공허하게 울렸다. “어쩌면 지금 이 자백조차도, 당신의 더 큰 계획의 일부분일 수도 있으니까. 당신은 그러고도 남을 만큼 영악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니까. 자, 그럼 이제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당신의 그 멋지고 끔찍한 살인 계획에 대해서 말입니다.”
“네. 좋습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살인은 아닙니다.”
“그럼 뭐죠?” 형사의 미간이 좁혀졌다.
“납치입니다.” 나는 대답하는 순간, 과거 그녀와 함께했던 어떤 순간들, 짧지만 강렬했던 행복감의 기억들이 조용한 속삭임처럼 귓가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납치라고? 그럼 그들은 살아있다는 겁니까?”
“네. 아직은… 살아있습니다.”
“아직은? 그게 무슨 뜻이죠?” 그의 목소리에 불안과 초조함이 섞이기 시작했다. 파멸이나 파국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지금도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죽게 될 겁니다.”
“어떻게? 당신이 손을 쓰지 않고 어떻게 죽는단 말입니까?” 그의 입술이 의혹으로 실룩거렸다. 나는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본래 장황한 이야기보다는,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는 미묘한 몸짓, 찰나의 행동, 어떤 형상이나 분위기, 혹은 덧없는 착시 같은 것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제가 여기 이렇게 갇혀있는 동안에….” 나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어수선하고 낯선 공기가 무겁게 취조실 안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서서히… 굶어서 죽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