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디지털 심연 속의 메아리
제니아는 종종 사진을 보내왔다. 완벽하게 계산된 각도와 세심하게 조율된 빛 아래, 크림색 필터가 그녀의 얼굴 위로 향긋한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사진 속 그녀는 현실의 존재라기보다는 섬세하게 조각된 이상향에 가까웠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것은 흠결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 과장되게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미묘하게 조정된 입꼬리였다. 모든 픽셀에는 의도된 아름다움, 즉흥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치밀한 연출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액정 위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유리 아래 차가운 감촉만이 전해질 뿐, 온기는 없었다. 진짜 제니아는 이 디지털 가면 뒤 어디에 숨 쉬고 있을까. 그녀가 진심으로 웃을 때, 필터가 감추고 있는 보조개가 정말로 파이는지, 아니면 그마저도 그의 헛된 상상일 뿐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와의 소통은 늘 갈증과 허기로 점철되었다. 메시지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심장은 기대감에 부풀어 터질 듯 요동쳤지만, 화면에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짧고 건조한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마치 의미를 증발시킨 후 남은 껍데기 같은 문장들. 무심하게 던져진 그 말들은 그의 가슴팍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채기를 끊임없이 냈다. 대화는 언제나 표면을 맴돌았고, 깊이를 향한 그의 시도는 번번이 그녀의 간결함 앞에서 좌초했다. 만족감은 늘 저 멀리 아득한 신기루처럼 보였고, 허전함만이 대화의 끝에 짙게 내려앉았다.
새벽 세 시. 술기운이 용기라는 이름의 가면을 씌워주었다. 어둠과 알코올에 기댄 채, 그는 자판 위에 위태로운 질문을 올려놓았다.
"사랑해?"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말풍선은 선명한 파란색으로 빛나며 그의 심장 소리를 증폭시켰다. '읽음'. 그 두 글자가 뜨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7분. 그 찰나와도 같고 영원과도 같은 시간 동안, 그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수천 번 오가며 정신의 명멸을 거듭했다. 혹시 영원히 답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혹은 예상치 못한 냉담한 거절이 돌아오면 어쩌나.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마침내 도착한 답장.
"응"
그게 전부였다. 세상의 모든 복잡한 감정을 단 한 글자에 우겨넣은 듯한 압축. 그의 심장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지만, 눈앞의 화면은 여전히 공허했다. 한 글자의 무게가 그의 온 존재를 뒤흔드는 동시에, 그 간결함이 주는 불안감 또한 떨쳐낼 수 없었다.
"정말?"
확신을 갈망하는 목소리.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채, 그는 스크린 너머의 그녀에게 매달렸다.
"응"
기계적인 반복. 이전의 '응'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는 단음절. 그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이게 그녀만의 표현 방식일 뿐이야. 그녀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일 뿐이라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끊임없이 의심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얼마만큼?"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녀 마음의 크기를, 깊이를, 형태를 조금이라도 가늠하고 싶었다. 막연한 긍정 너머의 구체적인 무언가를 갈망했다.
"많이"
'많이'. 그 얼마나 모호하고 주관적인 단어인가. 그 '많이'는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의 별만큼일까,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만큼일까. 아니면 그저 흘러가는 일상의 작은 호감을 습관적으로 과장한 표현에 불과할까. 그는 가늠할 수 없는 그 '많이' 앞에서 또다시 길을 잃었다.
"언제까지?"
시간은 형태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는 영원이라는 환상에 기대고 싶었다. 변치 않을 약속, 시간의 무게를 견뎌낼 단단한 맹세를 듣고 싶었다.
"평생"
그 단어가 주는 순간적인 위안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평생. 얼마나 달콤하고 아름다운 약속인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허망하고 불확실한 개념인가. 그녀가 말하는 '평생'은 과연 그가 생각하는 '평생'과 같은 길이를 가질까. 오늘의 해가 질 때까지? 아니면 정말로 숨이 멎는 순간까지? 서로 다른 시간의 지평선 위에서, 그 약속은 얼마나 유효할까.
"정말이지?"
재차 확인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애처로운 집요함이 묻어났다.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싶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불신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디지털 화면 속 활자는 너무나 쉽게 부서질 수 있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
미세하게 달라진 어조. 어쩌면 그의 집요함에 조금 지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문장 끝에 찍힌 마침표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대화의 흐름을 끊으려는 듯한 단호함.
"진짜지?"
불안은 끈질기게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미 충분히 물었다는 것을,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심장은 멈추지 않고 더 많은 확신을 갈구했다.
"그렇다니까."
이제는 짜증인지, 아니면 마지막 인내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어조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에게는 그녀와의 연결고리, 놓치고 싶지 않은 실낱같은 끈이었다. 그녀의 감정이 실린, 필터링되지 않은 날것의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맹세하는 거지?"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 모든 불안과 의심을 잠재울, 흔들리지 않는 확답. 이 밤의 대화가, 그녀의 감정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최종적인 증거. 그녀가 정말로,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절대적인 선언.
"잘자."
두 글자. 대화의 급작스러운 종결. 그것은 평화로운 밤의 인사일 수도 있었고, 더 이상의 질문을 거부하는 냉정한 차단일 수도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그 두 글자가 떠 있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커서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더 이상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새벽의 푸른빛이 스며드는 방 안에서, 그는 텅 빈 화면과 그보다 더 공허한 자신의 마음을 동시에 응시했다.
2. 침묵의 폭풍우, 그리고 적막
그녀의 마지막 답글 옆, 접속 시간이 '하루 전'이라는 회색 글씨로 바뀌던 바로 그날, 세상은 마치 종말을 예고하듯 격렬한 폭풍우에 휩싸였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재앙이었다. 사흘 밤낮으로 쉬지 않고 퍼붓는 비는 도시 전체를 거대한 물웅덩이로 만들었고, 천둥은 하늘을 찢을 듯 포효하며 땅을 뒤흔들었다. 번개는 밤을 대낮처럼 밝혔다가 순식간에 암흑으로 되돌리기를 반복하며 공포를 극대화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그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불길한 전주곡처럼 울려 퍼졌다. 그는 창가에 붙어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길가의 가로수들은 미친 듯이 몰아치는 바람에 맞서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결국 힘없이 부러져 나가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전신주들은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도시의 기반 시설이 자연의 압도적인 힘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광경이었다.
첫날, 폭풍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아? 여기 폭풍이 정말 심각해. 너 있는 곳은 어때?" 하지만 화면에는 그의 파란색 말풍선만 외롭게 떠 있을 뿐, '읽음' 표시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불안은 빗줄기처럼 거세졌다.
둘째 날, 뉴스는 도시의 절반 이상이 정전되었다고 보도했다. 암흑에 잠긴 지역 목록을 필사적으로 훑으며 그는 그녀가 사는 곳이 포함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길고 단조로운 신호음만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녀의 목소리 대신 들려오는 그 기계적인 소리는 절망의 다른 이름 같았다. 연결되지 않는 전화는 그녀와의 단절을 더욱 실감나게 했다.
셋째 날,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맹렬해졌다. 그는 거의 식음을 전폐한 채 창가에 붙어 앉아 있었다. 유리창을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빗물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습관처럼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새로고침했다. 변함없이 동그란 프레임 안에 갇힌, 필터로 보정된 그녀의 미소. 그 아래 마지막 접속 시간은 여전히 잔인하게도 '하루 전'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녀의 디지털 흔적과 미친 듯이 흘러가는 현실의 시간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거짓말처럼 비가 멈췄다. 마치 하늘의 거대한 수도꼭지를 누군가 단숨에 잠가버린 것처럼, 쏟아지던 모든 물방울이 동시에 증발했다. 귀를 먹먹하게 하던 폭우 소리가 사라지자, 도시는 숨 막히는 적막에 잠겼다.
하늘은 여전히 납덩이처럼 무거운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모든 것을 할퀴고 지나가던 광포한 바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웅장하고 위협적이었던 폭풍의 울부짖음 대신, 이제는 무겁고 축축한 침묵만이 도시 전체를 감쌌다. 거리는 온통 물에 잠겨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었고, 사람들은 파괴된 일상 앞에서 숨을 죽인 채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고요 속에서, 문득 아주 희미하게 작은 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물에 잠긴 나뭇가지 끝 어딘가에서, 폭풍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작은 생명체가 보내는 신호였다. 그 가냘픈 소리는 폐허가 된 세상에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를 던지는 듯했다. 그는 뻑뻑해진 창문을 힘겹게 열었다. 비에 젖은 흙냄새와 축축한 풀냄새가 뒤섞인, 무겁고 습한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비가 그친 후의 대지는 언제나 묘한 냄새를 풍겼다. 그것은 파괴된 것들의 잔해 냄새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예감케 하는 미묘한 생명의 냄새이기도 했다. 혹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말의 냄새일지도 몰랐다.
모든 것을 앗아가고 파괴할 것처럼 맹렬했던 폭풍우였지만, 결국 인간은 살아남았다. 삶의 온갖 고난과 부조리를 끈적하게 견뎌내며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이 정도의 자연재해는 어쩌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시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무너진 담장을 다시 세우고, 쓰러진 나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극심한 피로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흙탕물에 젖은 손은 멈추지 않고 묵묵히 움직였다. 삶을 이어가려는 본능적인 의지.
어쩌면, 앞으로 닥쳐올지 모를 더 큰 고난과 비교한다면, 이 폭풍은 차라리 애써 고마워해야 할 수준의 가벼운 빈정거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문득 생각했다. 폭풍은 지나갔다. 그리고 분명 더 가혹한 시련이 그의 삶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폭풍이 남기고 간 이 기묘한 고요와 잠시의 휴식은 그저 감사히 받아들여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닫힌 창밖, 물에 잠긴 도시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침묵은 이 고요와 닮아 있었다.
3. 혼돈의 물결, 무너진 허술함
도시의 혈관 역할을 하던 수로들은 이제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불어난 흙탕물을 쉴 새 없이 껄떡거리며 토해냈다. 며칠간 쏟아진 비는 도시의 배수 시스템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섰고, 갈색의 탁류는 낮은 지대를 모조리 집어삼키며 사방으로 넘실거렸다. 흙과 부러진 나뭇가지, 온갖 생활 쓰레기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도시의 잔해들이 뒤엉켜 혼돈의 물결을 이루었다. 그 위로 속이 빈 플라스틱 병들과 뼈대만 남은 채 뒤집힌 우산들이 정처 없이 떠다녔다. 마치 현대 문명의 허술함과 취약성을 조롱하는 듯한 풍경이었다.
폭풍에 대비한다며 임시방편으로 얼기설기 엮어 놓았던 모든 다리와 난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급하게 쌓아 올린 모래주머니 방벽, 널빤지를 덧대 만든 임시 통행로, 녹슨 철근으로 얼기설기 엮은 가드레일 같은 것들. 폭풍이 오기 전, 불안한 마음으로 급조했던 미봉책들은 자연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자리에는 오직 넘실거리는 흙탕물만이 남아 있었다. 목재와 철근으로 만든 임시 구조물들은 거센 물살에 종잇장처럼 찢겨나가 하류로 휩쓸려 갔다.
하지만 그 부실했던 구조물들의 소실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어차피 모두가 예견했던 재앙이었고, 그 임시 구조물들이 실제 위력을 가진 폭풍 앞에서 버텨내리라고 기대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누구도 그것들을 만드는 데 그다지 공을 들이거나 정성을 쏟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도시는 반복되는 기후 변화와 잦아지는 극한 기상 현상에 대비한다는 명목 아래, 늘 이런 식의 임시방편적인 조치들만을 되풀이해왔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는 당장의 위기만 넘기려는 안일함.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런 땜질식 처방으로는 진짜 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예산을 핑계 대거나,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거나, 혹은 그저 무관심했다.
자연은 분노했고, 인간은 무심했다. 자연은 수 세기, 수천 년에 걸쳐 쌓아 올린 것들을 단 며칠 만에 거칠게 허물어뜨렸고, 인간은 그런 자연의 경고 앞에서도 여전히 허술하고 안일하게 대응했다. 이 끝없는 파괴와 임시 복구의 악순환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침묵을 떠올렸다. 그녀 역시 지금쯤 자신과 같은 폐허 속에서, 이 혼돈의 물결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녀가 사는 곳은 안전할까. 아니면 그녀는 이미 이 폭풍과 함께, 혹은 그 이전에, 그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로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흙탕물처럼 뒤엉킨 불안과 상념 속에서 그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4. 생명의 귀환, 인간의 은둔
마침내, 며칠 만에 햇살이 두꺼운 구름층을 비집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아주 가늘고 희미한 빛줄기 하나가 잿빛 하늘을 뚫고 내려와, 물에 잠긴 도시의 젖은 건물 지붕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마치 신의 손가락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점차, 더 많은 빛줄기들이 구름 사이의 틈을 찾아 쏟아져 내렸다. 그 빛은 폐허가 된 도시 곳곳을 공평하게 비추며, 물에 잠긴 거리와 부서진 건물들 위에 금빛 가루를 뿌리는 듯했다. 어둠과 공포가 물러간 자리에 따스함과 희망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물이 빠진 자리에는 놀라운 속도로 생명이 움트기 시작했다. 폭풍우가 쓸고 간 땅은 역설적이게도 더욱 비옥해진 듯, 풀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마음껏 자라났다. 도시 변두리의 공터와 방치되었던 공원의 잔디밭은 이전보다 훨씬 더 짙고 선명한 초록빛으로 빛났다. 흙탕물에 휩쓸려 온 씨앗들이 싹을 틔운 것인지, 아스팔트 도로의 갈라진 틈새에서도 노란 민들레와 이름 모를 잡초들이 꿋꿋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잊혀진 화단에서는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은 작은 야생화들이 빗물을 머금고 수줍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 연약한 꽃잎을 따라 부지런한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들었다.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형형색색의 나비들이 그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들의 날갯짓은 폐허 위에 그려진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나뭇가지에는 다시 새들이 돌아와 앉아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마치 폭풍우 속에서 겪었던 끔찍한 기억들을 서로에게 속삭이며 위로하는 듯 들렸다. 폭풍이 휩쓸고 간 파괴의 현장 위에, 이렇듯 새로운 생명들이 조용히, 그러나 왕성하게 깃들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이 완전히 리셋되어 다시 태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신선하고 생기 넘쳐 보였다.
파괴와 혼돈 뒤에 찾아온 것은 놀랍게도 무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와 아름다움이었다. 자연은 스스로를 치유하고 재편하며 놀라운 조화를 이루어냈다.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피어난 야생화, 물에 잠겼던 광장을 유유히 거니는 새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젖은 잎사귀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기묘하게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질서, 아름다움, 아늑함, 조화, 그리고 생명의 속삭임. 세상의 근원적인 요소들이 마치 완벽한 균형을 되찾은 듯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단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바로 인간의 부재였다. 폭풍 이전, 그토록 붐비던 거리, 자동차 경적과 사람들의 소음으로 가득 찼던 도심, 불야성을 이루던 상점가와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넘쳐나던 카페, 분주하게 돌아가던 사무실들. 그 모든 곳이 이제는 텅 빈 채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건물들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상점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인간은 마치 연기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숨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들은 폭풍우라는 자연재해보다 더 무서운 위협 앞에서 스스로를 격리했다. 거의 모든 시간을 각자의 집, 방 안에서만 머물렀다. 폭풍이 물러간 자리에 찾아온 것은 평화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재앙이었다. 물에 잠겼던 거리는 각종 오물과 세균의 온상이 되었고, 이는 곧 전염병의 급격한 확산을 불러왔다.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사람들은 또다시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세상은 집 안의 좁은 공간으로 축소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내리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점심때가 되면 냉장고를 열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가, 저녁이 되면 샤워를 하고, 잠시 TV를 보다가 다시 침대로 향하는 생활. 침대와 화장실, 샤워실과 부엌. 이 네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궤도를 그는 매일 쳇바퀴 돌 듯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방 안이라는 작은 우주 속에서, 그는 지극히 단조롭고 예측 가능한 루틴을 반복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하루에 딱 한 번, 최소한의 음식과 생필품을 사기 위해 그는 용기를 내어 외출을 감행했다. 두꺼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일회용 장갑을 끼고, 최대한 다른 사람들과의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그는 필요한 물건들만 빠르게 구매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짧은 외출의 순간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텅 빈 거리,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희소한 행인들 사이에서, 혹시 기적처럼 그녀의 모습이 눈에 띄지는 않을까 하는 헛되고 부질없는 기대를 품으며.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오직 황량한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눈에 서린 불안과 경계심뿐이었다.
5. 일 년의 침묵, 희미한 작별
모든 업무는 이제 원격으로 이루어졌다. 화상 회의 플랫폼의 네모난 창 속에서 동료들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수백 통의 이메일과 메신저 알림이 그의 시간을 잠식했다. 기술은 인간 사이의 물리적인 접촉 없이도 세상이 그럭저럭 굴러가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깊은 단절감과 소외감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화면 속 동료들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피로와 불안으로 흐릿해져 갔지만, 누구도 그 피로의 근원이나 마음속 불안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작은 상자, 즉 집이라는 고립된 공간 안에서, 마치 모든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연기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팬데믹이 다시 돌아왔다. 아니, 사실 그것은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 마치 교활한 포식자처럼, 잠시 인간의 경계심이 느슨해진 틈을 타 숨어 있다가, 더욱 강력하고 치명적인 형태로 다시 고개를 쳐들었을 뿐이었다. 변이된 바이러스는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그 위력 또한 예측 불가능했다.
두려움은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라 일상의 모든 감정을 뒤덮었다. TV 뉴스는 매일같이 급증하는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를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보도했고, 소셜 미디어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와 음모론, 그리고 원색적인 공포와 혐오로 들끓었다. 사람들은 이제 옆집 이웃의 기침 소리에도 신경을 곤두세웠고, 마스크 너머의 눈빛만으로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했다. '저 사람이 혹시 바이러스를 옮기는 매개체는 아닐까?' 하는 잠재적인 의심이 모든 인간관계를 좀먹어 들어갔다.
결국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 인류가 수 세기에 걸쳐 쌓아 올린 모든 과학적 성취와 문명의 발전은 때때로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다. 병원은 밀려드는 환자들로 포화 상태가 되었고, 밤낮없이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의료 시스템은 붕괴 직전의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백신 개발 소식은 간간이 들려왔지만, 그것이 언제쯤 완성되어 이 지긋지긋한 악몽을 끝내줄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내는 것.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열이나 기침 같은 의심 증상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하루도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했다는 사실에 지친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먼 미래를 계획하거나 꿈꾸지 않았다. 오직 예측 불가능한 현재, 바로 이 순간을 어떻게든 살아남는 데 모든 신경과 에너지를 집중했다.
그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의식처럼 그녀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그녀의 마지막 접속 시간은 그의 절망적인 기다림을 비웃듯,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과거로 멀어져 갔다. '일주일 전', '한 달 전', '세 달 전', '반년 전'... 숫자는 기계적으로 늘어났고, 그녀의 부재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현실처럼 굳어져 갔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녀의 마지막 답글 옆에는 '일 년 전'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정확히 365일. 그는 숫자가 박힌 그 작은 글씨를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응시했다. 일 년 전 그날 새벽, 술기운에 건넸던 서툰 고백과 그녀의 짧은 대답들, 그리고 마지막 인사. 그가 그녀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말은 '잘자'였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평범한 작별 인사가 어쩌면 영원한 이별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의 '잘자'는 정말로 영원한 잠을 의미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와의 관계에 대한 종언을 고하는 마지막 메시지였을까. 이제 와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창밖으로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 년 전의 그 폭풍우처럼 격렬하지 않았다. 마치 세상을 부드럽게 씻어내리려는 듯, 조용하고 차분한 정화의 비였다. 그는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차갑고 깨끗한 빗방울이 그의 손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안녕,"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인사가 정확히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그 자신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일 년 동안 침묵했던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일까? 아니면 미련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건네는 작별의 말일까? 혹은 이토록 낯설고 위태로워진 세상 전체를 향한 체념 섞인 인사일지도 몰랐다.
빗소리는 밤새도록 이어졌고, 도시는 다시 한번 서서히 물에 잠겨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깊고 차분한 평온함만이 그의 마음을 감쌌다. 그는 젖은 손을 거두고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에 몸을 누였다.
내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해는 뜰 것이고, 어제와 같은 단조로운 하루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주 미미하게나마 무언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가능성. 그녀의 답글 옆 시간이 다시 '오늘'로 바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 희미한 불씨마저 꺼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희망.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희망은 그를 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계속 숨 쉬고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끝없는 기다림과 불확실성이라는 가장 큰 고통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그녀의 미소였다. 필터가 걷힌, 꾸밈없는, 진짜 그녀의 미소를 그는 과연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을까? 기억은 안개처럼 흐릿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 기억의 방 안에서, 그녀는 언제나 그가 상상하는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영원히 미소 짓고 있을 테니까.
"잘자," 그는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 인사는 이제 그녀가 아닌, 길고 외로운 밤을 맞이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깊고 평온한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빗소리는 자장가처럼 그의 잠든 의식을 부드럽게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