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심연으로의 부름
내행성 안전 총괄 책임자. 범태양계 비상 대책 위원회 위원장. 샘튼 시바트의 이름 앞에는 인류 문명이 그에게 부여한 가장 무거운 수식어들이 별자리처럼 따라붙었다. 그 직함들의 총합은 단순한 권력의 상징을 넘어, 태양계 규모의 위기 그 자체를 의미하는 바로미터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경고등이었고,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곧 인류의 존립 기반을 뒤흔들 수도 있는 중대 변수의 발생을 시사했다. 지금, 그는 극비리에 준비된 성간(星間) 수송선에 몸을 싣고 있었다. 목적지는 머나먼 고향 행성, 지구. 그중에서도 가장 적막하고 얼어붙은 심장부, 남극 대륙이었다. 수송선의 강화 크리스탈 창 너머로, 푸른빛과 흰 구름이 어우러진 지구가 서서히 거대한 생명의 구체로 다가올수록, 그의 내면에서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차가운 성운처럼 피어올랐다. 그에게 하달된 임무 지령은 단 한 줄, 지극히 간결했으나 그 함의는 심연처럼 깊었다: ‘현지 상황 직접 평가 및 전술 지휘권 인수’. 그러나 그 건조한 문장 너머에는, 감히 공식 문서에 담을 수 없는 종류의 심각성, 인류의 우주적 고독을 깨뜨릴지도 모르는 경이와 공포의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었다. 무엇이, 태양계 전체의 안위를 어깨에 짊어진 그를 머나먼 푸른 행성의 가장 외진 얼음 사막으로 이토록 다급히 불러들였는가. 그 질문 자체가 그의 신경 말단을 불길하게 자극했다.
남극 대륙의 빙원 위에 세워진 최첨단 임시 기지에 마침내 발을 내디뎠을 때, 샘튼을 맞이한 것은 살을 에는 듯한 영하 수십 도의 혹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기 중에 얼어붙은 듯한 무거운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의 입자 하나하나에 스며든 농밀한 긴장감이었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설원 위에 마치 미래에서 떨어진 파편처럼 이질적으로 자리 잡은 지휘 통제실은, 각종 최첨단 계측 장비들이 내뿜는 싸늘한 푸른 인광(燐光)과, 밤샘 연구와 충격으로 창백하게 질린 연구원들의 얼굴빛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현실감을 마비시키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방의 중앙에는 거대한 3차원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허공에 부유하며 미묘한 저음의 허밍과 함께 신비로운 빛을 발산하고 있었고, 그 투명한 공간 안에는 이성의 법칙을 조롱하는 듯한, 경악을 넘어선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키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 시야에 들어온 이미지는, 마치 초고해상도 인공위성으로 내려다본 광활한 빙원을 옅은 잿빛 필터로 덮어놓고, 그 위에 극도로 미세한 검은 모래알들을 무작위로 흩뿌려 놓은 듯한 추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샘튼이, 훈련된 군인답지 않게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인터페이스의 줌 스틱을 밀어 올리자, 시야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격히 확대되었고, 희미했던 점들은 압도적인 실체로 변모하며 그의 망막을 강타했다. 하나하나가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반구형(半球形)의 거대한 구조물, 바로 돔(Dome)이었다. 그들은 마치 태고적 신화 속 거인이 깊은 잠에 빠지기 전, 자신의 검은 진주들을 은밀히 감춰둔 것처럼, 광막하고 적막한 빙하의 밑바닥, 지구의 가장 깊은 속살 위에 장엄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 숫자는 어림짐작으로도 천 개에 육박하는 듯 보였고, 그 개별적인 규모는 인간이 세운 그 어떤 건축물의 위용도 초라하게 만들 만큼 거대했다.
“현재까지 총 999개의 미확인 구조물 식별을 완료했습니다. 보시다시피, 규모는 제각각 상당한 편차를 보입니다만, 형태는 놀라울 정도로 균일한, 완벽한 반구형입니다.” 긴급 브리핑을 주재하는 이는 한닐 박사였다. 백발이 성성하고 깊은 주름이 지혜와 고뇌를 동시에 담고 있는 듯한 노학자. 그의 목소리는 오랜 시간 지속된 연구와 수면 부족, 그리고 어쩌면 이 발견 자체가 가져온 형언할 수 없는 중압감으로 인해 낮고 메말라 있었지만, 그 건조함 속에는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경외심과 함께, 지적 존재가 마주한 거대한 미지 앞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공포의 미세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 박사의 지치고 충혈된 눈동자는 홀로그램 속 검은 점들의 군집과,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소수의 최고위 관계자들 사이를 불안하게 오갔다. 그는 가느다란 레이저 포인터로 디스플레이 한쪽 구석에 명시된 ‘999’라는 숫자를 가리켰다. 그 숫자는 마치 어떤 비밀스러운 주문처럼 느껴졌다. “최초의 이상 중력파 및 지자기(地磁氣) 변동 신호를 감지한 이후 엿새 동안, 저희가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 – 심지층 투과 레이더(GPR), 고해상도 뮤온 단층 촬영(Muon Tomography), 중력 그래디언트 측정기(Gravity Gradiometer), 심지어 아직 실험 단계에 있던 양자 얽힘 기반 센서 네트워크까지 총동원하여 실시한 광범위 초정밀 스캔의 최종 집계 결과입니다.”
박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의 침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통제실 안에 유난히 크게 울리는 듯했다. 방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오직 저전력 상태로 대기 중인 각종 서버와 냉각 장치들이 내는 미세하고 지속적인 백색소음만이 그 완벽한 정적을 아주 희미하게 깨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앞서 개략적으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구조물은 기하학적으로 측정 오차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완벽한 반구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표면을 구성하는 재질은… 현재 저희의 분석 기술로는 그 성분조차 규명할 수 없는 미지의 물질입니다. 가시광선은 물론, X선, 감마선을 포함한 거의 모든 대역의 전자기파를 흡수하는 듯한, 마치 우주 공간의 암흑 물질을 압축해 놓은 듯한, 심연(深淵)과도 같은 칠흑의 검은색입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다음 정보의 무게를 가늠하는 듯했다. “크기는… 실로 경이롭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편차를 보입니다. 가장 작은 개체는 직경이 약 100미터 수준으로, 그 자체로도 이미 상당한 규모입니다만, 저희가 확인한 가장 거대한 것은… 그 직경이 무려 2킬로미터를 넘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직경 2킬로미터의 완벽한 반구형 구조물입니다. 마치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크고 작은 구슬들을 무작위로 던져 놓은 것 같으면서도, 그 배치에는 어떤 불가해한 수학적, 혹은 기하학적 질서가 숨겨져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현재까지… 그 어떤 형태의 출입구나 환기구, 동력 장치, 심지어는 구조물 간의 접합부나 용접 흔적으로 보이는 그 어떤 미세한 구조적 특징조차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완벽하게 봉인된, 그 자체로 완결된,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듯한 절대적인 고립체처럼 보입니다.”
샘튼은 저절로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명석하고 고도로 훈련된 두뇌는 방금 들은 정보의 파편들을 필사적으로 조합하려 애썼지만, 그 결과는 현실 감각을 뒤흔드는 거대한 혼돈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박사를 응시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박사님. 제가 지금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이… 이 믿을 수 없는 규모의 구조물들이 전부, 남극 대륙의 두껍고 단단한 빙하 아래, 그러니까 수백만 년 동안 쌓이고 압축된 얼음층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지휘관으로서의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불신과 경악, 그리고 어쩌면 희미한 공포감마저 뒤섞여 있었다. 빙하 아래 숨겨진 도시, 혹은 시설. 그것은 인류가 오랫동안 상상해 온 판타지의 영역이었지만, 눈앞의 홀로그램은 그것이 더 이상 상상이 아님을 냉혹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정확히 그렇습니다, 위원장님.” 한닐 박사는 지친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는 과학자로서의 냉철한 분석을 넘어선, 어떤 거대한 운명 앞에 선 인간의 체념과도 같은 담담함이 서려 있었다. “평균 빙하 두께 1.8킬로미터. 특정 지점에서는 빙하의 두께가 3킬로미터를 훨씬 상회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 구조물들은 그 장구한 시간 동안 쌓이고, 스스로의 무게로 압축되어 단단한 얼음 암석처럼 변한 빙하층 바로 아래, 지구의 가장 원시적인 지각, 즉 기반암(Bedrock) 위에 직접 건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백만 년에 걸친 빙하의 이동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 형태를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미스터리입니다. 그리고… 저희 연구팀 전체를 거의 패닉 상태에 빠뜨렸던, 더욱 놀라운 사실은…”
“1.8킬로미터, 혹은 그 이상의 두께를 가진 빙하 아래에… 이런 규모의 건축물을, 그것도 999개나 건설한다? 박사님,” 샘튼의 목소리는 이제 다급함을 넘어 절박하게 높아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인류 능력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보유한 최첨단 과학기술로든,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대의 잃어버린 기술로든… 도대체 가능한 일입니까? 상식적으로, 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현상입니까?” 그의 군사 공학적 지식과 전략적 판단 능력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빙하를 그 깊이까지 안정적으로 굴착하는 것 자체도 엄청난 난관이지만, 이런 초거대 구조물을 그 아래에 정밀하게 건설하고, 건설 과정에서 발생했을 천문학적인 양의 폐기물과 열에너지, 진동 등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이미 기술의 영역이 아닌, 마법이나 신의 영역에 가까웠다.
한닐 박사는 샘튼의 동요하는 눈동자를 잠시 피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홀로그램 속, 심연처럼 검고 고요한 돔들을 향했다. 깊은 고뇌와 함께, 오랫동안 인류 지성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노학자가 마주한 거대한 미지 앞에서 느끼는 심오한 무력감이 그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졌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원장님… 현재 인류가 보유한 그 어떤 기술적 수단을 총동원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니, 감히 단언컨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빙하를 그토록 정밀하게, 광범위하게, 그리고 주변 빙하 구조에 어떠한 균열이나 변형, 융해도 유발하지 않고 수직으로 굴착하여 내려가, 이런 초거대 구조물을, 그것도 천 개에 가까운 숫자를 건설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존하는 모든 물리 법칙과 공학적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더구나 건설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했을 막대한 양의 폐빙(廢氷) 처리 문제, 동력 공급 문제, 건설 인력 및 장비의 이동 문제 등, 해결 불가능한 난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 대한 그 어떤 흔적조차, 미세한 지열 변화나 방사능 이상조차 전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것은 우리가 우주와 물질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요구하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이것들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샘튼의 목소리는 거의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누가… 언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왜 이런 불가해하고 압도적인 것들을 이곳, 지구의 가장 외지고 얼어붙은 땅 밑에, 마치 영원히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숨겨 놓았단 말입니까?” 그의 질문은 답을 찾지 못한 채 차가운 통제실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같은 질문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그 거대한 질문에 대한 추측조차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 침묵 자체가 미지의 존재가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였다.
“아직… 그 어떤 것도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릴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위원장님. 저희 연구팀은 지난 엿새 동안 문자 그대로 시간과 잠을 잊고 가능한 모든 분석과 시뮬레이션에 매달렸습니다만, 저희가 알아낸 사실보다는 밝혀내지 못한 미스터리의 영역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합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명백한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박사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첫째, 이것은 명백히 현생 인류 문명, 즉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의 그 어떤 문명의 산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초고도 기술력을 보유했던 고대 선행 문명(Precursor Civilization), 혹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생물학적, 기술적 진화 경로를 거친 외계 지성체(Extraterrestrial Intelligence)의 흔적일 가능성이 극도로 높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이것은 인류가 스스로 기록하고 이해해 온 모든 역사, 철학, 종교, 과학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나 다윈의 진화론 발견 이상의 충격적인 발견입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는 극도의 신중함과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진행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세대에서는 그 진실의 편린조차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박사의 목소리에는 과학자로서의 냉철한 분석과 함께, 인류라는 종의 지적 한계를 절감하는 듯한 깊은 피로감과, 미지의 존재 앞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경외와 두려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샘튼은 마른침을 힘겹게 삼켰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의 혈액이 얼어붙는 듯한 오싹한 감각. 그의 머릿속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수많은 가정과 최악의 시나리오들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단순한 유적일까? 아니면 아직 작동 중인 시설일까? 만약 후자라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인류에게 우호적일까, 아니면… 그는 애써 그 불길한 상념을 떨쳐내려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런 추가적인 단서도 없습니까? 이것들의 정체나 목적, 혹은 최소한의 기능에 대한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표면의 미세한 패턴이라든가, 에너지 방출 신호라든가… 무엇이든 좋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단서라고… 부를 만한 것이, 딱 하나 있기는 합니다.” 박사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마치 마지막 희망을 꺼내놓듯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의 눈빛에 희미하지만 분명한 지적 호기심의 빛이 다시 감돌았다.
“각 돔의 최정상부 중앙, 정확히 기하학적 중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원반(Disc) 형태의 표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원반이라고요?” 샘튼의 굳어 있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모든 돔의 정확히 동일한 상대적 위치에, 직경 약 3미터 정도 되는 완벽한 원형의 판(板) 형태가, 어떤 것은 표면보다 미세하게 돌출된 양각(陽刻)으로, 어떤 것은 깊이 파인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처음 고해상도 이미지를 확보하여 분석하던 중, 저희 팀의 젊은 고고언어학 전공 연구원 하나가 거의 비명처럼 외쳤습니다. 마치… 에게 해 문명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인, 고대 크레타 섬에서 발견된 해독 불가능한 점토판, 파이스토스 원반(Phaistos Disc)을 보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수많은 독특한 상형 문자들이 나선형으로 빼곡하게 찍혀 있는 그 불가사의한 유물처럼 말입니다. 저희도 여러 가지 다른 표현을 고민해 보았습니다만, 현재로서는 그 비유가 이 원반의 시각적 특징과 그것이 주는 신비로운 인상을 가장 적절하게 전달하는 듯합니다.”
“파이스토스 원반…?” 샘튼은 자신의 방대하게 구축된 지식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인류학적, 고고학적 정보를 빠르게 검색했다. “기원전 2천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직까지도 그 문자의 의미는 물론이고 어떤 언어를 기록한 것인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수수께끼의 상징들이 나선형으로 배열된 그 고대 유물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자, 이쪽 화면을 자세히 보시지요.” 한닐 박사가 손짓하자,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의 이미지가 다시 한번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칠흑같이 검은 돔의 표면을 극도로 확대한 영상들이 숨 막힐 정도의 정밀함으로 차례차례 나타났다. 칠흑보다 더 깊고 순수한, 빛조차 삼켜버릴 듯한 검은색 바탕 위에, 마치 살아있는 불꽃이나 응고된 피처럼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고 강렬한 붉은색의 기호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새겨진 원반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그 기호들은 지구상의 어떤 문자 체계 – 상형문자, 표음문자, 표의문자 그 어떤 것과도 – 최소한의 유사성조차 찾을 수 없는, 완전히 낯설고 기묘하며, 어딘지 모르게 유기적인 느낌마저 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무질서한 낙서나 장식적인 문양이 아니었다. 어떤 엄격하고 지적인 규칙과 복잡한 문법 체계에 따라, 원반의 가장 중심부에서부터 시작하여 바깥쪽으로 빈틈없이 정교한 나선형(Spiral)을 그리며 배열되어 있었다. 파이스토스 원반과의 피상적인 유사성은 그 나선형 배열 구조뿐이었고, 그 기호의 복잡성, 기하학적 완벽성, 그리고 각각의 기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불가해하고 위압적인 에너지는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마치 심연 자체가 스스로의 언어를 기록해 놓은 듯,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과 함께 지적인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현재까지 총 30개의 돔에서 원반의 고해상도 입체 이미지 촬영 및 3차원 레이저 스캐닝 작업을 완료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저희가 분석한 30개의 원반에 새겨진 기호의 종류와 그 배열 순서, 조합 방식은 모두 다릅니다. 완전히 동일한 원반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치… 999개의 돔 하나하나에 고유한 식별 부호나, 개별적인 정보 패키지, 혹은 서로 다른 메시지가 부여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이 기호들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명백히 정보를 담고 있는 일종의 기록 체계임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현재 작업 속도와 가용 자원을 고려할 때, 앞으로 한 달 정도의 시간이면 999개 모든 돔의 원반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확보하고 초기 분석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샘튼은 숨을 죽인 채,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으로, 화면에 차례로 나타나는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그러나 동시에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게 만드는 붉은 기호들의 향연을 응시했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가장 깊은 비밀을 담고 있는 암호문, 혹은 인류가 아직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태고의 지혜나 경고를 담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느껴졌다. “이 원반들… 이 붉은 글자들… 도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요? 만약 이것이 일종의 언어라면… 어떤 내용을, 누구에게 전달하려는 걸까요?” 그의 목소리에는 갈망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아직은… 그 어떤 추측도 시기상조이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박사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앞에서 느끼는 지식인의 좌절감이 역력했다. “이미 지난 며칠간, 전 세계 최고 수준의 기호학자(Semiotician), 고대 언어학 전문가(Paleolinguist), 암호 해독가(Cryptanalyst), 수리논리학자(Mathematical Logician), 심지어는 인공지능 기반 패턴 인식 전문가들에게까지 극비리에 이 자료들을 전송하고 다각적인 자문을 구했습니다. MIT의 언어학 연구소, 칼텍의 정보과학부,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관련 분과들, 영국의 GCHQ, 미국의 NSA 내 극소수 전문가 그룹, 심지어는 바티칸 비밀 서고에 보관된 고문서 해독 전문가들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권위자들에게 접촉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돌아온 답변은 거의 동일했습니다. 충격적일 정도로 일치된 결론이었습니다. 누구도 이 기호들의 기원은 물론이고, 이것이 어떤 종류의 정보 전달 체계(Information System)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것이 언어인지, 수학적 공식인지, 유전자 코드인지, 아니면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른 형태의 정보 표현 방식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다는 보고가 대부분입니다. 마치… 인류가 지난 수만 년간 축적해 온 모든 지식과 경험의 범주 밖에 존재하는, 완전히 이질적이고 ‘다른(Other)’ 무엇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돔의 내부는… 여전히 접근 불가능한 상태입니까? 스캔 기술을 더욱 개선하거나… 다른 물리적인 방법을 시도해 볼 여지는 없었는지… 예를 들어, 극저온 드릴링이나…” 샘튼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다시 질문했다. 외부의 기호가 해독 불가능하다면, 내부를 직접 조사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불가능했습니다.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박사의 목소리는 절망적일 정도로 단호하고 명료했다. “저희가 보유하고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비파괴 탐사 장비를 동원했습니다. 최신형 초음파 이미징 시스템, 지층 투과 레이더의 출력을 극한까지 높인 버전, 고에너지 중성자 빔 조사, 싱크로트론 방사광을 이용한 감마선 스캔… 현재 인류 과학이 구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비파괴 검사 기술이 이 정체불명의 검은 표면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어떤 유의미한 내부 구조 신호도 반사되거나 투과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내부에 아무것도 없거나, 혹은 내부에서 방출되는 모든 신호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구조인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위원장님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말씀드리자면, 극도의 보안 속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특정 돔의 극소 부위에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고출력 산업용 레이저를 집중 조사하고, 테르밋 반응을 이용한 국소 용융 시도, 그리고 소형 성형작약(Shaped Charge)을 이용한 통제된 폭파 시험까지 극비리에 진행했습니다만…” 박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전하듯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결과는 동일했습니다. 표면에 미세한 흠집이나 그을음, 아주 작은 변형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율표상의 어떤 원소나 합금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강도와 내구성, 그리고 어쩌면 자기 복원 능력까지 갖춘 미지의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박사는 잠시 침묵하며 다음 정보가 가져올 충격의 파장을 가늠하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더욱 깊고 어두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가장 충격적인 분석 결과를 꺼내놓았다. 그것은 이 모든 미스터리의 시간적 좌표를 규정하는, 인류의 존재 자체를 왜소하게 만드는 발견이었다. “그리고… 위원장님, 저희는 여러 개의 돔 구조물 주변을 직접적으로 감싸고 있는 가장 오래된 빙하 코어(Ice Core)를 여러 지점에서 심층 시추하여 채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세계 최고 수준의 연대 측정 연구소들 – 스위스 베른 대학, 미국 콜로라도 대학 볼더 연구소 등 – 에 극비리에 보내, 가장 정밀한 연대 측정법 중 하나인 방사성-크립톤-81(Krypton-81) 동위원소 연대 측정을 복수의 방법으로 교차 검증 방식으로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는… 그 결과는 저희 모두를 말 그대로 망연자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돔들이 현재의 위치에 존재하며 주변의 빙하가 그 위를 덮으며 쌓이기 시작한 시기는… 가장 보수적으로 추정한다고 하더라도, 최소 8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80만 년. 그 아득하고 까마득한 시간의 무게가 통제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숫자는 단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 문명의 전체 역사를 한순간의 점으로 만들어버리는, 우주적 시간의 심연이었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출현하기도 훨씬 이전, 네안데르탈인조차 아직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선사 시대. 인류가 불을 다루고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기도 전의, 상상조차 하기 힘든 태고의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것들은…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는 ‘이 세상’, 즉 인류의 역사와 진화의 맥락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닐 박사의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그 어떤 천둥소리보다도 더 크고 무겁게 샘튼 시바트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하… 하아…” 샘튼은 신음인지 탄식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깊은 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통제실의 차갑고 기능적인 조명 패널들이 흐릿하게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어버리는 듯한 감각. 그는 내행성 안전 총괄 책임자였다. 그는 인류를 미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미래를 예비해야 할 궁극적인 책무를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는,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지식과 경험, 심지어 가장 대담한 상상력마저 아득히 초월하는, 그 존재 자체가 거대한 물음표이자 예측 불가능한 잠재적 위협일 수밖에 없는 불가해한 실체가 놓여 있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광막한 우주 속에 던져진 미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박사님의 최종적인 판단으로는… 현재로서는 이것들의 정체를 규명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이것들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태양계 최고위급 지휘관의 단호함 대신, 깊은 절망과 지독한 무력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한닐 박사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의 지친 눈은 다시 홀로그램 속, 나선형의 붉은 기호가 섬뜩하게 빛나는 원반의 확대 영상을 향했다. 그 기호들은 마치 살아있는 눈동자처럼 그들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결연한 의지를 다진 듯한, 혹은 마지막 남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어보려는 듯한 표정으로 샘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과는 다른,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제 개인적인, 그리고 수십 년간 과학에 몸담아 온 연구자로서의 직관에 의거한 소견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위원장님, 현재 우리 인류에게 남겨진 유일한 실마리, 어쩌면 이 모든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바로 저 원반에 새겨진 기호들을 해독하는 것뿐인 듯합니다. 저 붉은 글자들이야말로, 이 빙하 아래 잠든 거대한 존재들이 남긴 유일한 메시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이 인류에게 축복이 될지, 재앙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저것이야말로 이 모든 불가사의를 풀 수 있는,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르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열쇠일 것입니다.”
제2장: 메아리 없는 외침과 작은 속삭임
그로부터 숨 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남극 빙하 아래 묻힌 태고의 비밀은 여전히 지구상 최고 등급의 기밀로 분류되어, 철저하게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된 채 소수의 관계자들 사이에서만 공유되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는 인류의 지성이 전례 없는 규모로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국가 안보 연구 시설들과, 명문 대학들의 가장 뛰어난 두뇌들이 비밀리에 소집되었다. 양자 컴퓨터를 포함한 세계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들은 밤낮없이 가동되며 999개 원반에서 추출된 방대한 양의 기호 데이터 속에서 미세한 패턴과 통계적 유의미성을 찾기 위해 알고리즘을 반복 실행했다. 언어학, 기호학, 수학, 정보 이론, 인공지능, 심지어는 고대 신화학과 비교 종교학, 집단 무의식 연구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들까지 익명으로 자문 그룹에 참여하여 머리를 맞댔다. 그러나 999개의 원반은 마치 절대적인 고독과 완전한 무관심 속에 잠긴 듯,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강렬하고 매혹적인 붉은 기호들은 인간의 모든 지적 노력과 해석 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 어떤 의미의 실마리나 구조적 단서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마치 그것들은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해독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성과 없는 기다림 속에서 불안감은 차가운 안개처럼 범태양계 행정처의 최고위층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갔다. 결국, 더 이상 비밀 유지만으로는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고 판단한 범태양계 비상 대책 위원회는, 격렬한 논쟁 끝에 전례 없는, 그리고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통제된 방식의 제한적 정보 공개. 전 세계 모든 암호 관련 전문 웹사이트와 학술 데이터베이스, 주요 대학의 관련 학과 내부 네트워크, 그리고 극소수의 엄선된 민간 싱크탱크와 연구 포럼에, 총 999개의 돔 원반 고해상도 사진과 3D 스캔 데이터가 익명으로 공개되었다. 물론 그 기원과 발견 경위, 그리고 ‘돔’의 존재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철저히 삭제되고 위장된 채, ‘남극 빙하 심층부에서 발견된 미확인 고대 유물 표면에 새겨진 기호 체계 해독을 위한 국제적 학술 과제’라는 중립적이고 학술적인 명목 아래였다. 그러나 그 파장은 즉각적이고 폭발적이었다. 정보의 출처는 불분명했지만, 이미지 자체가 가진 압도적인 신비로움과 지적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복잡성은 순식간에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불가사의하며, 잠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닐지도 모르는 지적 도전 과제가 전 세계의 지성 앞에 던져진 것이다. 그리고 그 도전을 성공시키는 최초의 개인 또는 팀에게는, 익명의 후원 재단(실제로는 범태양계 행정처의 위장 기관)의 이름으로 미화 천만 달러라는, 학술 연구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상금이 공식적으로 내걸렸다.
지구 전체가, 그리고 화성과 달, 그리고 우주 정거장의 인류 거주 구역 전체가 이 미스터리한 기호의 열풍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암호 해독가, 고고학자, 비교 언어학자들은 물론이고, 아마추어 퍼즐 애호가, 수학 영재, 패턴 인식 알고리즘 개발자, 심지어는 외계 문명과의 텔레파시 교신을 주장하는 유사 과학 신봉자들과 고대 외계인 이론 추종자들, 오컬트 단체들까지 이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인 붉은 기호의 미궁 속으로 앞다투어 뛰어들었다. 인터넷 공간은 온갖 종류의 기발한 추측과 심오한 가설, 황당무계한 주장과 놀랍도록 그럴듯한 분석들이 뒤섞여 거대한 정보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수백만, 아니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밤낮으로 컴퓨터 화면과 출력된 이미지에 코를 박고 앉아 기호들의 배열 속에서 규칙을 찾고, 지구상의 알려진 모든 고대 문자와 기호 체계와 비교하며, 그 비밀을 풀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미미했다. 몇몇 흥미로운 패턴이나 통계적 특이점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기호의 의미 자체에 대한 실질적인 진전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붉은 기호들은 여전히 해독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침묵을 지켰고, 인류의 집단 지성은 마치 거대한 블랙홀 앞에서 빛을 잃는 것처럼, 깊은 좌절감과 함께 점증하는 불안감을 맛보아야 했다.
다시 석 달이라는 시간이, 초조함과 희미하게 타오르다 잦아드는 기대감이 뒤섞인 채 덧없이 흘러갔다. 지구의 북반구에는 겨울이 찾아왔고, 남극의 기지에는 또다시 몇 달간 지속될 기나긴 극야(極夜)의 어둠이 내려앉았다. 행정처 내부의 불안감과 위기감은 이제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999개의 거대한 미확인 물체는 여전히 빙하 아래에서 침묵하고 있었고, 그것들이 무엇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대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는 절박한 판단 아래, 2차 공개 조치가 더욱 과감하게 단행되었다. 이제 암호 관련 전문 매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대중 과학 잡지들(‘네이처’나 ‘사이언스’의 대중판 등), 주요 국제 뉴스 통신사, 심지어는 일부 영향력 있는 주류 언론 매체의 심층 보도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서까지 돔 원반의 사진과 해독 과제가 대대적으로, 그리고 더욱 노골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상금 액수는 이전의 다섯 배인, 무려 미화 오천만 달러로 증액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학술적 포상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 전체가 느끼는 절박함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 앞에서 느끼는 깊은 두려움의 크기를 가늠하는 공포의 척도였다. 돔의 존재 자체는 여전히 극비리에 부쳐졌지만, 그 표면에 새겨진 불가사의한 붉은 기호의 미스터리는 이제 전 지구적인 집단적 강박관념이자, 일상 속에 스며든 불안의 근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밤하늘을 보며 막연한 기대를 품는 대신, 발밑의 깊은 곳을 향해 불안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늦가을의 오후였다. 거대 도시의 번잡함에서 조금 벗어난, 낙엽들이 바람에 뒹굴고 저녁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조용한 주택가의 한 아담한 집 거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일종으로, 특정 분야에서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적인 능력 – 특히 패턴 인식, 암기, 계산, 그리고 기호 체계 이해 – 을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을 앓고 있는 열 살 남짓의 어린 소년, 사이먼이 낡고 푹신한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 있었다. 소년은 주변의 소란함이나 시간의 흐름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듯,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 채 무심하고 기계적인 표정으로 거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아버지가 구독하는 대중 과학 잡지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그의 세계는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패턴, 무한히 이어지는 듯한 숫자의 배열, 그리고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듯한 기호화된 시스템에 대해 그는 경이로울 정도의 집중력과 암기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직관적인 이해력을 지녔지만, 타인의 감정을 읽거나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는 데에는 현저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삶은 거대한 패턴과 기호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았다.
소년의 유난히 맑고 깊은,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초점이 없어 보이는 눈동자가 잡지의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바로 그 사진 – 이제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묘하고도 매혹적인 붉은 기호들이 검은 바탕 위에 정교한 나선형으로 배열된 원반의 고해상도 사진 – 에 정확히 고정되었다. 그 순간, 마치 스위치가 내려간 것처럼, 거실 안의 모든 소음 – 벽걸이 TV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던 만화 영화 소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의 달그락거리는 소리 – 이 소년의 의식 속에서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오직 칠흑 같은 배경 위에서 마치 살아있는 불꽃처럼, 혹은 고대의 경고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기호들의 복잡하고도 정교한 배열만이 그의 모든 정신을 남김없이 사로잡았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꿈속에서 보았던 친숙한 언어나 그림 문자를 다시 만난 사람과 같은 반응이었다. 소년은 한참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미동도 없이 그 이미지를 응시했다. 그의 작은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치 방금 눈앞의 그림 문자를 해독하여 그 내용을 읽어 내리듯, 너무나도 평온하고,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감정의 동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어조로, 그는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따스한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드는 조용한 거실의 공기 속으로, 그러나 섬뜩할 정도로 명료하게 울려 퍼졌다.
“우주 쓰레기 저장소… 제 546번 구역 지정 표식. 내용물 분류: 고(高)위험성 방사능 폐기물 및 불안정 상태의 이종(異種) 물질 복합체. 경고: 등급 알파-7 보안 구역. 허가된 관리 프로토콜 외 접근 절대 금지. 봉인 상태 임의 변경 및 해제 시도 엄금.”
그 짧고, 건조하며, 지극히 실무적인 내용의 문장이 소년의 입에서 발화된 바로 그 순간, 거실의 시간은 마치 영원처럼 정지된 듯했다. 소년의 무심하기 짝이 없는 속삭임은, 남극의 두껍고 영원할 것 같던 빙하 아래에서 80만 년이라는 아득한 세월 동안이나 깊이 잠들어 있던 태고의 침묵을 깨뜨리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명료한,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충격적인 해답이었다. 심연은 마침내 그 입을 열어 인류에게 속삭였고,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며 상상했던 장엄하고 심오한 우주적 지혜나 외계 문명의 장대한 메시지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이고 끔찍하며, 섬뜩할 정도로 명료한 경고문을 토해냈던 것이다. 인류는 우주의 비밀을 연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주의 가장 위험한 폐기물 처리장의 봉인을 건드렸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