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2124, 영혼의 아리아타

by 남킹


현대라는 이름의 신기루, 그 안에서도 ‘취업’이라는 아슬아슬한 외줄 위를 곡예 하듯 살아가는 친구 마르코의 존재가 그림자처럼 내 의식을 잠식할 때면, 나는 값싼 증류주 한 잔으로라도 그의 메마른 영혼을 적셔줄 요량으로 통신을 걸곤 했다. 그의 음성은 홀로그램 너머에서도 늘 먼지처럼 부옇게 가라앉아 있었고, 목적지는 언제나 ‘아카데미아 루미나’(빛의 학당)였다. 본디 아카데미아란 고서의 향기와 지혜의 무게가 성스러운 기운처럼 켜켜이 쌓여,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지성의 전당이어야 할 터. 허나 마르코가 마치 망령처럼 배회하는 그곳은, 책의 물성은커녕 데이터 칩 한 장 찾아보기 힘겨운, 각자가 희망이라는 이름의 보따리를 싸 들고 와야 하는 텅 빈 열람실만이 황량한 사막처럼 펼쳐진 공간이었다. 차라리 ‘고행자의 수도원’이라 명명하는 편이, 이 첨단과 폐허가 공존하는 2124년 네오-나폴리의 기괴한 현실을 더욱 투명하게 반영할 수 있으리라.

나는 데이터 알고리즘의 변덕인지, 아니면 실낱같이 부여받은 재능의 발현인지, 유유자적 빈둥거리는 듯한 외양으로도 네오-나폴리 연합의 중추, 명망 높은 바이오-테크놀로지 기업 ‘아우로라 인더스트리’에 비교적 순탄히 안착했다. 만약 마르코가 나의 이러한, 어찌 보면 ‘불공평한’ 성공이라는 실체를 정면으로 목도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이미 적당한 규모의 중견기업에서 안정된 수입과 소박한 행복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때 자신보다 한참은 미욱해 보였던 내가, 거대한 시스템의 선택을 받아 그럴듯한 자리를 꿰찬 것이 그의 섬세한 자존심에 깊은 생채기를 냈고,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손에 쥘 뻔했던 소소한 기회들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는, 또다시 이 승자 없는 무한경쟁의 시험이라는 제단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마치 실존적 부조리극의 고독한 주인공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벽을 향해 끝없이 돌진하고 있었다.

마르코를 만나러 아카데미아의 음울한 문턱을 넘을 때마다 직감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이곳에서 용이 되어 승천할 영혼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것만큼이나 희박할 듯싶었다. 그들의 처절한 노력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으나, 실제로 열람실 내부에서 동공이 파열될 듯 학문에 정진하는 이를 발견하기보다는, 정보 과잉의 시대가 낳은 피로감에 짓눌려 데이터 패드 더미 속에 코를 박고 의식의 강 저편으로 침잠한 이들만이 시야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이곳은 지식의 성전이 아니라, 산산조각 난 꿈의 파편들이 안개처럼 떠도는 망각의 강변, 혹은 좌절된 야망들의 공동묘지와도 같았다.

열람실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남아 있는 성별 구분에 따라 – 이제는 거의 상징적인 의미만을 지닌 채 –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고, 그 중앙에는 반투명 플라즈마 유리창이 설치되어 서로의 존재를 흐릿한 실루엣으로나마 인지할 수 있게 했다. 여성 열람실이라고 해서 그 풍경이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그곳 역시 창백한 인공조명의 을씨년스러운 빛 아래, 젊은 여성들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수마(睡魔)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며 간헐적으로 고개를 떨구는 풍경은, 마치 복제된 절망처럼 매한가지였다. 인공지능이 관리하는 출입 통제 시스템은 초기에는 제법 엄격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나의 생체 데이터를 몇 번 등록하고 나자, 나의 잦은 출입에도 기계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보게, 마르코. 그렇게 잠의 신에게 간절히 제사를 올리면, 합격의 여신께서 자네 대신 시험이라도 치러주신단 말인가?”

마르코가 낡은 책 꾸러미를 제단 삼아 베개처럼 괴고, 마치 고대 야수처럼 드르렁 코를 골며 잠든 열람실 구석으로 다가가, 그의 축 처진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속삭였다. 그의 얼굴에는 가상현실의 미망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듯한 몽롱함과 깊은 피로가 역력했다.

“으음… 아름다운 니케 여신과 함께 이상향을 거닐던 참이었는데, 누구신가, 이 철학자 양반?” 그의 목소리는 잠에서 덜 깬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일어나게, 친구. 캄파니아 산(産) 포도주 향기라도 맡으러 가세. 어쩌면 그 향기가 자네의 꽉 막힌 영감을 조금이나마 뚫어줄지도 모르지.”

“자네였군, 마르첼로. 기다리다 지쳐 잠시 명상의 세계로 떠났었네.” 그의 변명은 언제나 그럴듯한 포장지를 두르고 있었다. 실은 절망으로부터의 도피였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미안하네. 아직 햇병아리 신세라, 해가 중천에 걸려 있을 때 퇴근하면 상관들의 눈총이 따가워서 말일세.” 나의 변명 역시 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위선이었다.

“오늘 밤 안주는 무엇으로 할 셈인가? 유전자 재조합 올리브라도 곁들일 건가, 아니면 그냥 맨송맨송한 술잔만 기울일 셈인가?” 그의 말투에는 가시 돋친 냉소가 배어 있었다.

“쩨쩨하게 굴기는. 아우로라 인더스트리의 연봉이 얼만데 그리 인색한 모습을 보이나?”

“이 사람아, 안주 종류까지 따지는 백수는 자네가 처음일세. 어서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세.”

내가 먼저 등을 돌려 낡은 복도를 나서는 시늉을 하자, 마르코도 마지못해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그는 마치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유령처럼, 낡은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가 순식간에 아래층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카데미아의 육중한 문을 밀고 나서면, 고가 모노레일 선로가 거대한 뱀처럼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그림자 아래에는 오래된 시간의 더께가 고고학적 유물처럼 쌓인 듯한 작은 트라토리아 ‘라 스페란차’(희망)가 희미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가끔 마르코의 황폐한 영혼을 위로할 겸 이곳을 찾는 이유는, 어쩌면 안젤라 아주머니의 곁을 지키는 소피아라는 이름의 아가씨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깊고 고요한 눈빛에는 마치 베수비오 화산처럼 뜨거운 열정과 나폴리 만(灣)의 심연처럼 깊은 슬픔이 동시에 담겨, 보는 이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뒤흔들었다.

“오, 마르첼로 아닌가! 우리 단골손님 오셨네!”

걸출하고도 유쾌한 입담으로 이 작은 가게 안을 온기로 가득 채우는 주인 아주머니, 안젤라와 달리, 소피아는 좀처럼 말을 꺼내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빈 접시를 정갈하게 치우거나, 해산물 스튜인 ‘추핀 디 페셰’나 부드럽게 구운 문어 ‘폴포 알라 루치아나’를 데워주는 소소한 잔심부름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은연중에 이 트라토리아가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번성하는 이유는, 그녀의 조용한 존재감 덕분임이 확실했다. 그녀의 침묵은 때로는 세상의 어떤 화려한 웅변보다 깊고 진실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안젤라 아주머니, 폴포 알라 루치아나와 햇올리브, 그리고 그라파 한 병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래. 젊은이들, 공부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은가. 요즘 젊은이들의 어깨는 천근만근일세.” 아주머니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연민이 묻어 있었다.

“이 친구는 온종일 잠만 잡니다. 공부와는 아주 오래전에 담을 쌓은 놈이죠.” 나는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속에는 마르코에 대한 안타까움과 나 자신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도 그 아카데미아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역 아닌가. 우리 소피아도 제대로 된 공부를 좀 시켜볼까 싶다가도, 그 엄청난 비용을 생각하면 엄두가 나질 않아.”

“왜요? 따님을 대학이라도 진학시키시려구요? 이 시대에 대학 졸업장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쎄 말일세. 예전에는 고등교육 인증서 한 장만 있어도, 하다못해 공장 자동화 시스템 관리직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통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니. 세상이 어찌 이리 팍팍해졌는지.”

“워낙 경제 시스템 자체가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명문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고도, 더 나은 기회를 잡겠다며 이 아카데미아에서 재수, 삼수를 거듭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인걸요.” 이 미래 도시는 희망과 절망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매 순간 모순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소피아도 공부를 더 시켜야 하지 않나, 밤마다 그런 고민을 한다네. 그런데, 그 아카데미아만 다닌다고 해서 시험에 덜컥 붙을 수 있는 것인지… 개인 교습이나 특수 심화 프로그램 같은 것도 이수해야 한다면, 내 빠듯한 형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걸세.” 아주머니의 한숨 섞인 말에는 현실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것은 따님이 현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그리고 어떤 잠재력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고등교육 과정에서 기초를 충실히 닦아두었다면, 아카데미아에서 집중적으로 심화 학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생각해 일찌감치 학업의 꿈을 접었다면, 이제부터라도 체계적인 보충 학습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하나하나 채워나가야 할 테고요.” 나의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헌데, 이 철없는 아이가 내 고생하는 사정까지 헤아려가며 공부했을 리가 있겠나? 제 딴에는 그저 대학 같은 고리타분한 곳은 가기 싫었겠지.” 안젤라의 목소리에는 깊은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엄마, 저도 가슴속에 품은 꿈이 있단 말이에요! 만약 제가 부유한 명문가의 딸로 태어났다면, 지금 제가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진 않을 거예요!”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소피아가, 몇 번 안면을 익힌 나를 의식한 듯, 그러나 단호하고 강한 어조로 어머니의 말에 항변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억눌렸던 용암처럼 뜨겁게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녀의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서 나는 꺼지지 않는 불꽃, 마치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한 떨기 야생화 같은 강인한 생명력을 보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대학 진학을 간절히 염원하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우선 소피아 양의 현재 학문적 수준과 잠재력을 정확히 파악해야 앞으로의 학습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테니… 혹시 괜찮다면, 제가 며칠 동안 퇴근 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함께 공부해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제안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순수하고도 절박한 열망에 나도 모르게 감화된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 삭막한 도시에서 발견한 한 줄기 빛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이었을까.

“젊은이가, 그 귀한 시간을 우리 소피아에게 내줄 수 있겠는가?” 아주머니의 눈빛에 의구심과 희미한 기대감이 교차했다.

“저는 이미 직장에 몸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큰 부담은 되지 않을 겁니다. 퇴근 후 한 시간 정도만 할애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피아의 얼굴이 마치 새벽녘 동트는 하늘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항해자가 멀리서 깜빡이는 등대의 불빛을 발견한 듯한, 그런 경이로운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학업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던 그녀에게 어떤 금전적 대가도 바랄 수 없었다. 아니, 바래서는 안 되었다. 아직 회사에서는 신참이라 야근이 잦아 몸은 고단했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어 이 아이의 내면에 숨겨진 가능성을 가늠해보고 싶었다. 그녀가 더 높은 창공으로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지녔는지, 아니면 안타깝게도 현실의 무게에 굴복하여 그 꿈을 접어야 하는지, 그 갈림길에서 잠시나마 동반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이것은 값싼 동정심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순수한 경외감이었으며, 어쩌면 나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어서 들게, 젊은이.” 아주머니는 서비스라며 따끈한 조개탕을 푸짐하게 내주셨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탕 그릇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휴, 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대접받았는데요. 술도 거의 다 마셔가고요.”

“그래도 우리 말 못 할 속앓이 하던 딸아이의 공부를 선뜻 봐준다는데,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내 마음이 편하지.”

“결코 그런 대단한 의미는 아닙니다. 우선 며칠 동안 함께 대화하며 공부할 준비가 되었는지, 그 마음가짐과 기본적인 자세를 살펴보겠다는 것뿐입니다.” 나는 지나친 기대를 경계하며 신중하게 답했다.

“알았네, 알았어. 아무렴 어떤가. 그저 우리 가여운 딸애만 잘 이끌어주게나.”

“아주머니께서도 온종일 가게 일로 바쁘실 텐데, 따님이 공부에 매진하느라 일손을 돕지 못하면 더욱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돈이야 또 벌면 그만이지. 정 힘들면 인공지능 가사 도우미라도 하나 더 들이면 될 것을. 내 딸아이의 반짝이는 미래를 어찌 돈 몇 푼과 바꿀 수 있겠나?” 그녀의 단호한 말 속에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는 강인한 모성이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그럼, 약속대로 내일부터 저녁 식사 후에 한 시간씩 함께 해보겠습니다.”

“그래, 정말 고맙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여기로 와서, 소피아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가게나. 누추하지만 마음만은 편할 걸세.”

마르코와 나는 그라파 두 병을 깨끗이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트라토리아의 온기를 뒤로했다. 바깥 날씨는 한층 더 스산해져, 곧 디지털 입자로 정교하게 구현된 인공 눈이라도 흩날릴 것처럼 음산했다. 차가운 밤바람은 현실의 냉혹함처럼 살갗을 파고들며 점차 그 기세를 더해갔다.

“마르코, 술기운이 제법 상당한데, 설마 그 음침한 아카데미아로 다시 들어갈 건가?”

“당연하지. 이곳만이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전장이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광기 어린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온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할 텐데, 괜찮겠나?”

“관리실 소파에서 잠시 눈 좀 붙였다 일어나면 말끔해질 걸세. 원래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법이지 않나.” 그는 허세를 부렸지만, 그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관리인 비토 형씨가 자네 꼴을 보고 길길이 날뛰면 어쩌려고?”

“그 양반? 흥, 내게 단단히 약점 잡힌 게 좀 있지.” 마르코가 음흉하고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도대체 무슨 약점이길래?”

나는 마르코가 이끄는 대로, 마치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다시 아카데미아의 어둡고 축축한 복도로 들어섰다. 입구에 위치한 관리실은 현란한 홀로그램 광고만이 신경질적으로 번쩍일 뿐, 인기척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낡은 보일러에서 새어 나오는 미지근한 온기가 열람실의 냉기보다는 그나마 견딜 만했다. 마르코는 마치 오랫동안 비워둔 자신의 안식처에라도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자세로 낡고 해진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나는 그가 눕고 난 소파 귀퉁이에 불안하게 엉덩이만 걸친 채, 맞은편 벽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낡은 플라즈마 스크린의 공허한 화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뉴스를 기계적으로 반복 송출하고 있었다. 마치 이 시대의 자화상처럼.

“어, 자네들 또 왔나?” 관리인 비토가 음습한 그림자처럼 관리실에 들어서며 우리를 맞았다. 그의 번들거리는 눈빛은 기름지고 탁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기운을 풍겼다.

마르코도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어색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두 젊은이, 어디서 한잔 걸치고 오는 길인가?”

“네, 바로 아래층 트라토리아에서 가볍게 한잔했습니다.”

“그래? 그 집 딸내미, 소피아도 가게에 있던가?” 그의 질문에는 노골적이고도 불쾌한 호기심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예,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아십니까?” 마르코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 애, 참… ‘맛’이 기가 막혔지.” 비토는 음험하고도 추잡한 미소를 지으며 저속하기 짝이 없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형씨가 그 아이의 ‘맛’을 봤단 말입니까?” 마르코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럼, 내가 누군가. 이 구역에서 저만한 물건, 아니 소피아를 맛보지 않은 사내가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나.” 그의 말은 맹독처럼 순식간에 관리실의 공기를 오염시켰다.

“설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소피아의 맑은 눈망울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마르코, 자네는 설마 아직도 그 아이를 못 먹어봤나?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푸히히, 우스운 녀석. 그 애가 얼마 전에 우리 아카데미아에 상담하러 왔었잖나. 월 이용료가 얼마냐, 하루 이용권은 또 얼마냐,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더군. 그래서 내가 그랬지. 바깥 날씨도 쌀쌀한데, 안으로 들어와서 따뜻한 차나 한잔하며 자세히 얘기하자고. 그랬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빼꼼 고개를 들이미는데, 어둠 속에서도 그 미모가 제법 반반해 보이더만.”

“그래서요? 그래서 그날 바로…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르코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함께 병적인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당연한 수순 아니겠나. 마침 방 안이 후끈하게 데워져 있었거든. 소파에 앉혀놓고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늘어놓다가, 슬그머니 무릎 위로 손을 얹었지. 별다른 반응이 없기에 과감하게 허벅지 안쪽까지 더듬어봤네. 그런데도 가만히 숨만 색색거리고 있는 걸 보니, 이 아이도 내심 생각이 있나 싶어서 그냥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덮쳐버렸지.”

“그 아이가… 아무런 저항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던가요?”

“소리? 저항? 흥, 좋아서 더 몸을 비틀며 안달하던데, 뭘.” 비토는 마치 무용담이라도 늘어놓듯 역겨운 자랑을 이어갔다.

“아무튼, 형씨는 본업인 관리 업무는 뒷전이고, 여자들한테만 너무 과도한 관심을 쏟으시는 것 같습니다.” 마르코의 말에는 질투와 선망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 사람아, 이깟 관리인 나부랭이 일이 뭐 대단한 희망이나 보람이 있는 일이겠나? 그나마 이렇게 순진한 여자애들 하나씩 건드리는 낙이라도 있으니 이 지루한 시간을 버티는 거지.”

나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티 없이 맑고 고결해 보였던 소피아의 얼굴이, 비토의 저 음험하고 탐욕스러운 얼굴과 겹쳐지며 잔혹한 환영처럼 떠오르자, 마르코가 비토에게 ‘약점을 잡혔다’고 했던 말의 추악한 전말을 굳이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마르코는 비토의 이러한 파렴치한 추행을 우연히 목격하고, 그 침묵을 대가로 아카데미아 내에서의 여러 편의를 제공받고 있는 것일까. 이 작은 공간 안에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타락이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형씨, 혹시… 다른 쓸만한 애는 없습니까?” 마르코의 다음 질문은 나를 더욱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뭐, 자네도 이 형님 덕 좀 봐서 한번 해보려고?”

“형씨께서 특별히 챙겨주신다면야, 제가 어찌 감히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알았네, 알았어. 내가 요즘 눈여겨보고 있는 애가 하나 있긴 한데, 아직 길이 덜 들어서… 며칠만 더 기다려보게. 작업 끝나면 자네에게도 기회를 주지.”

“정말 고맙습니다, 형씨.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구역질 나는 타락한 대화를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아, 겨우 걸치고 앉았던 소파에서 힘겹게 엉덩이를 떼며 일어섰다. 두 사람의 추악한 대화가 그저 현실성 없는 상상 속의 일을 실제처럼 떠벌리고 있는, 허풍에 불과한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비토에게 경멸을 담아 가볍게 목례를 하고, 아무 말 없이 아카데미아의 육중한 문을 밀고 나섰다. 바깥의 밤공기는 더욱 차갑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아까부터 세차게 불기 시작한 바람이 점점 체감온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무래도 지독한 영혼의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트라토리아 앞을 지나는데, 운명처럼 소피아와 마주쳤다. 방금 전 관리실에서 오갔던 추악한 대화의 잔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지만, 나를 발견하고 생긋 웃는 그녀의 해맑은 미소는 그 모든 오염된 기억들을 일순간에 정화하는 듯한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차마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퇴근하시는군요, 마르첼로 씨?”

“네, 그렇습니다. 친구 녀석은 다시 그 아카데미아라는 곳으로 들어갔고요. 저는 내일 또 새벽같이 출근하려면 이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마침 저도 이제 막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혹시 어느 방향으로 가시는지요?”

“저쪽, 고대 로마 유적지가 남아 있는 시장 길을 따라 똑바로 가다 보면 저희 집이 있는 구역입니다.”

“어머나, 세상에. 저도 바로 그 구역에 살고 있어요. 정말 우연이네요.”

“아, 그렇습니까? 이런 우연이… 그럼 날씨도 제법 쌀쌀한데, 어서 함께 가시지요.”

소피아와 나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저 트라토리아의 주인과 손님으로서 몇 번 얼굴을 마주친 것이 전부였을 뿐,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밤길을 함께 걷는 것은 오늘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내일부터 소피아의 공부를 돕겠다고 섣불리 약속한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는지, 스스로도 판단하기 어려운 혼란과 자기 회의를 겪은 터라, 굳이 먼저 말을 꺼내기도 멋쩍었다. 말없는 침묵 속에서, 우리는 네온사인과 홀로그램 광고판이 어지럽게 빛나는 도시의 인공적인 밤 풍경을 공유했다. 그 침묵은 불편하기보다는 오히려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실례지만, 마르첼로 씨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소피아가 먼저 조심스럽게 침묵의 장막을 걷었다.

“저는 스물여섯입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이죠.”

“와, 그럼 저보다 한참은 오빠시네요. 저는 이제 겨우 스물셋인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소녀다운 풋풋함이 묻어났다.

“어머니 가게 일 돕는 거, 보기보다 많이 힘들지 않으세요?”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좋아하는 일인걸요. 다만, 엄마께서 언제까지 이런 고된 허드렛일만 하면서 젊은 날을 다 보낼 거냐고 안타까워하실 뿐이에요.”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가슴 뛰는 꿈이 있어야 하고, 그 꿈은 부모 세대가 넘지 못했던 한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와 준비가 되어야 하겠죠.”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부쩍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더 늦기 전에요.”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아직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니, 우리 함께 최선을 다해 봅시다.” 나의 말에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통해 나 자신의 잊혀진 꿈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피아네 집은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 블록 전에 위치해 있었다. 이렇게 서로 지척에 살면서도, 각자의 삶의 궤적이 너무나 달랐기에 그동안 단 한 번도 동네에서 우연히라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이 될지 모르지만 소피아네 집을 드나들며 그녀의 공부를 도와야 할 터라, 그녀가 차 한잔하고 가시라는 정중한 제안을 굳이 뿌리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소피아가 이끄는 대로,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운명처럼 그녀의 집 문 안으로 들어섰다.

“저희 엄마는 겉보기엔 좀… 왈패처럼 거칠어 보이시죠? 어쩌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까지 혼자 다 채우시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강인한 모습으로 변하신 거겠지만요.”

“아, 아버님께서는 일찍 여의셨군요.”

“네, 제가 아주 어릴 때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저희 엄마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혼자서 아버지 몫까지, 아니 그 이상을 거뜬히 해내시거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애정이 묻어났다.

“혹시 다른 형제자매는 없으신가요?”

“위로 오빠가 하나 있는데, 학교를 마치고 지금은 머나먼 외행성 개척지의 우주 방위군으로 복무 중이에요. 가끔 통신이 연결될 때마다 엄마 걱정뿐이죠.”

“음, 듣고 보니 어머님께서 정말 대단한 의지를 지닌 분이시군요. 아무리 생활이 어렵고 고단해도, 자식들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서라면 어떤 헌신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는, 그런 엄마의 고생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고 죄송스러워서 제 꿈을 접고 공부를 포기했던 건데…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로 엄마를 위하는 길은 제가 보란 듯이 학문적으로 성공해서 번듯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소피아 양이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여 어머니의 가업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굴레를 스스로에게 씌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어릴 때는 그저 엄마 곁에서 고생을 덜어드리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지만, 이젠 아니에요. 하루빨리 엄마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번듯한 직업도 갖고, 좋은 사람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소피아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럽고도 밝아졌다. 내 앞에 놓여 있던, 이름 모를 허브차는 어느새 마지막 한 방울까지 감쪽같이 내 목구멍을 통과하여 사라지고 없었다. 그 은은하고도 신비로운 향기는 혼란과 번민으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평온하게 진정시켜 주는 듯했다.

“혹시… 한 잔 더 드릴까요?”

“아, 네. 정말 좋습니다. 이 차, 향기가 아주 독특하고 매력적이네요.”

소피아가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차를 우리는 동안, 나는 조용히 집안을 둘러보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살림살이란 것이 대체로 그저 그렇고 그런 풍경이겠지만, 바깥에서는 그토록 억척스럽고 호탕해 보이던 안젤라 아주머니도, 집 안에서는 낡았지만 정갈한 세간이며 모든 소품들이 반듯하게 정돈되고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모습에서,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그녀의 깊은 속내와 삶에 대한 진지한 존엄성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 강인하고도 섬세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보고 자란 소피아가, 비토 그 추악한 자의 말처럼 아무에게나 함부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어주는 그런 천박한 존재일 리가 없다고, 나는 굳게 믿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믿어야만 했다. 그것이 무너진다면,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저, 소피아 양. 혹시… 한 가지 더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어떤 것이든 편하게 물어보세요.”

“혹시… 현재 교제하고 있는 분이… 있나요?”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을 던졌다.

“아니요, 전혀 없는데요.” 그녀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단호했다.

“아, 그렇군요… 다름이 아니라, 그 아카데미아의 비토라는 관리인, 혹시 잘 아시는지요?”

“아, 그 늘 음침한 표정으로 사람 불쾌하게 만드는, 밥맛 떨어지게 생긴 사람이요?” 그녀의 예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표정에서 나는 진실을 읽었다.

“네,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소피아 양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심지어는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얘기를 하더군요.”

“호호, 정말 우습네요. 그 사람은 가끔 저희 트라토리아에 혼자 와서는, 안주도 없이 독한 그라파만 연거푸 마시면서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해요. 기분 나쁘게.”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에는 경멸과 조소가 섞여 있었다.

“혹시… 그 사람이 소피아 양에게 어떤 불순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나요?”

나는 무언가 이야기가 아주 심각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지만, 이참에 이 문제의 본질을 확실하게 파헤쳐 놓지 않으면,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여자’라는 근거 없는 뜬소문에 휘말려 나의 소중한 시간과 감정이 무참히 낭비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에 차마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세상의 절반은 남자, 또 다른 절반은 여자. 공공연하게 여자를 단순한 성적 대상으로 삼고 그 경험을 마치 무용담처럼 떠벌리며 희희낙락하는 남자들과,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도 혹여 더러운 소문이라도 날까 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하는 여자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분명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못하다. 더구나 그 추악한 소문의 한가운데에 이토록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소피아가 있다면, 그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는… 워낙 엄격하신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인지 몰라도,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

“그럼… 단 한 번도 누군가와 뜨거운 입맞춤조차 나눠본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입맞춤이요? 호호, 저는 아직 수줍어서 남자와 손목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는걸요.”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 순수하고 티 없어서, 오히려 이 각박한 현실 세계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들릴 정도였다.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다 소피아 양처럼 그런가요?”

“음… 글쎄요. 벌써 결혼해서 아이 엄마가 된 친구도 있고, 어떤 친구는 부유한 유부남의 정부 노릇을 하며 화려하지만 위태로운 삶을 사는 아이도 있어요.”

“겨우 스물셋의 나이에 벌써부터 그렇게 극과 극의 삶을 살고 있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결국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경로가 그렇게 달라지는 거 아닐까요?” 그녀의 담담한 반문 속에는, 어린 나이답지 않은 세상의 냉혹함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다.

“그럼, 소피아 양은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 그 본질에 대해서는 대략 알고 있는 거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제 친구 중에는 소위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재수한다며 아카데미아에 다니다가 거기서 만난 불량한 남자아이와 어울려서 결국 임신까지 하고 모든 꿈을 접은 애도 있고, 또 어떤 애는 학원 강사와 눈이 맞아 한창 해야 할 공부는 때려치우고 그의 숨겨진 여자로 전락해서 살아가는 애도 있는걸요.”

나는 어쩌면 소피아가 세상 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순진무구한 소녀이기를 마음속 깊이 바랐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잘못된 만남과 선택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더욱 모질고 험난한 가시밭길로 빠져들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쯤은 전혀 모르기를 은연중에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피아는 이미 주변 친구들의 다양한 경험과 불행을 통해, 남녀 관계의 복잡함과 그 속에 숨겨진 위험성을 누구보다 명확히 꿰뚫고 있었다.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꽃다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상의 온갖 험난하고 추악한 일들로부터 애써 귀를 막거나 눈을 가리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여린 가슴속에는 친구들의 안타까운 삶으로부터 얻은 지혜와 함께, 깊은 상처의 앙금이 함께 남아 있었다.

문득 아주 오래전, 철없던 시절, 군 입대를 하루 앞둔 그 불안한 밤, 친구들과 주점의 선배들이 ‘사나이라면 총각 딱지 정도는 시원하게 떼고 가야 한다’며 반강제로 나를 어떤 퇴폐적인 유흥가 골목으로 밀어 넣었던 치기 어리고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어둠 속에서 만났던, 이름 모를 여인은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며 기계적이고도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공허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깊은 곳에는 자신을 무참히 짓밟고 지나간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 대한 깊은 증오와 복수심, 그리고 인간적인 슬픔이 복잡하게 어려 있었다. 그날 밤, 내가 흘렸던 땀방울 속에는, 여성의 성(性)에 마치 정복자처럼 승리의 깃발을 힘차게 꽂았다는 천박한 우월감과 자기기만이 가려져 있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승리는 어쩌면 그 어두운 사창가 골방에 속박된 채 살아가던 그녀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하게 된다. 그 순간, 불현듯 그 이름 모를 여인의 슬픈 눈망울과 함께, 그녀가 마지막 자존심처럼 지키려 했던 그 무엇인가가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아무튼,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할 텐데, 혹시 특별히 어렵다고 느끼거나 자신 없는 과목이 있나요?” 나는 애써 무거운 상념을 떨쳐내고 화제를 돌렸다.

“수학이랑… 물리학이요.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거의 모든 과목에 자신이 없어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그동안 혼자서라도 공부해왔던 교재나 참고서 같은 것들은 좀 있나요?”

“네, 예전에 큰맘 먹고 몇 권 사두었는데, 책장에 그대로 꽂혀만 있어요. 우선 이것들로 시작하면 될까요?” 소피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방 한쪽 구석의 낡은 책꽂이에 제법 많은 종류의 수험 교재들이 가지런히, 그러나 먼지를 뒤집어쓴 채 꽂혀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잊혀진 꿈의 무덤처럼 보였다.

“네, 그럼 충분합니다. 그것들이면 우선 시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네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고 내일 저녁 식사 후에 다시 트라토리아로 가겠습니다.”

나는 잠시 가빠진 호흡을 고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과거 군 복무 시절, 부대 내의 한 명뿐인 여군 하사를 두고 동료들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추잡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희희낙락하던 그 역겨운 모습들이 불현듯 떠올라 속이 울컥 메스꺼워졌다.

“저는 내일 새벽 일찍 시립 디지털 도서관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마르첼로 씨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녁 아홉 시부터 밤 열 시까지, 딱 한 시간만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물론입니다. 저야말로 영광이죠. 우리 한번 함께 최선을 다해 봅시다.”

첫날의 만남은 그렇게, 소피아가 현관문 앞까지 나와 수줍게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는 모습을 등 뒤로 한 채, 나는 총총히 어둠 속으로 그녀의 집을 나섰다. 그녀의 맑은 눈빛 속에서 나는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의 빛줄기를 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빛은 이상하게도 내 가슴까지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지난밤 내린 이슬처럼 이상하리만치 가볍고 상쾌했다.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가득 차 숨 막히는 자기부상열차 안에서도, 나도 모르게 싱글벙글 바보 같은 미소가 입가에 떠나지 않았다. 까다로운 직장 상사들의 여러 가지 지시사항이나 내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야 할 산더미 같은 업무들도 그날따라 유난히 명쾌하고 단순하게 보였다. 내 마음은 이미 저녁노을이 질 무렵의 퇴근 시간과 소피아와의 약속에 온통 맞추어져 있었다.

“안젤라 아주머니, 저 왔습니다.”

“어이쿠, 우리 마르첼로 선생님 오셨는가! 그래, 소피아야, 어서 선생님 편히 모시고 안으로 들어가거라.”

트라토리아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흘깃 한쪽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무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제 그 관리인 비토가 마침 혼자 구석 자리에 앉아 멍하니 소피아의 분주한 뒷모습을 불쾌한 시선으로 훑으며 그라파를 마시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억지 반가움을 표시했다.

“어이쿠, 마르첼로 아닌가? 여긴 어쩐 일로 또?”

“비토 형씨, 또 혼자서 술 드십니까?”

“응, 뭐… 이게 내 유일한 낙이니까. 이 맛에 살지.” 그의 대답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렇게 빈속에 독한 깡술만 계속 드시면 몸 버리십니다.”

“흥, 난 이게 제일 좋더라. 남이사 뭘 마시든 무슨 상관인가.”

“혹시… 마르코는 못 보셨습니까?”

“그놈? 아마 지금쯤 아카데미아 구석에서 늘어지게 퍼질러 자고 있겠지, 뭘.”

“그 친구, 정말 정신 좀 차리도록 형씨께서 따끔하게 야단이라도 좀 치십시오. 그래 가지고 어디 번듯한 직장에 취직이나 하겠습니까?”

“쯧쯧, 거기 있는 놈들 대부분이 다 그런 부류들이야. 그런 곳에서 어디 제대로 된 용이 나오겠나?”

“하긴, 어떻게 보면 매일같이 그 답답한 관리실에 처박혀 계셔야 하는 비토 형씨만 제일 불쌍하죠.”

“그래서 내가 가끔 이렇게 바깥바람이라도 쐬면서 한잔하는 거 아닌가.”

“저는 그럼 이만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 어이, 마르첼로! 그냥 가지 말고 이리 와서 나랑 술이나 한잔하고 가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소피아 양의 개인 교사거든요.” 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면전에 대고 또렷하게 강조했다.

그 순간, 비토의 기름진 얼굴이 마치 삶은 게딱지처럼 울그락불그락 흉하게 변하고 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만약 어제 그가 우리 앞에서 떠벌렸던 그 추잡하고 더러운 농담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속으로 통쾌한 미소를 지으며 안젤라 아주머니께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소피아와 함께 트라토리아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비토의 악의에 찬 시선이 마치 독침처럼 날아와 박히는 것을 똑똑히 느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 남자, 아까 소피아 양을 쳐다보는 눈빛이 정말 예사롭지 않던데요?” 집으로 향하는 길에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흥, 그래 봤자죠, 뭐. 저런 부류의 인간들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어요.” 소피아는 경멸을 담아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맑고 단단한 목소리에는 경멸과 함께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자존감이 깃들어 있었다.

소피아는 그날 아카데미아에서 종일 혼자 끙끙대며 공부하다가 도저히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만 골라서 내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녀의 학습 태도는 진지했고, 눈빛은 지적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기초적인 개념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진도를 나가는 걸로 보아, 그녀가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한다면 올가을에 있을 중요한 시험에서는 분명히 만족할 만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새로운 지식들을 빠르게 흡수했다. 복잡하게 얽힌 2차원 위상기하학 문제는 아직 그녀의 수준에는 조금 버거웠지만, 슬쩍 고급 과정인 미적분의 기본 개념을 응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적인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어차피 앞으로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라면, 미리 그 정상의 풍경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주는 것이 문제 해결 능력과 학문적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리타분하고 실용성 없는 고전적인 영어 문법 교육 방식 대신, 실생활에서 바로 활용 가능한 영어 회화 패턴들을 반복적으로 소리 내어 익히고,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법적인 원리를 스스로 터득하여 체화하도록 지도했다. 소피아는 자신이 그동안 고수해왔던 비효율적인 공부 방법과는 전혀 다른 나의 새롭고 혁신적인 접근 방식에 점차 매료되고 동화되며, 공부 자체에 대한 순수한 흥미와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지친 얼굴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고, 눈빛은 지식의 빛으로 환하게 반짝였다.

골똘히 문제의 해법을 찾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중에, 언제부터인가 내 오른쪽 어깨 위에는 소피아의 작고 동그란 머리가 새처럼 가만히 기대져 있었다. 마치 봄날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싱그럽고도 풋풋한 풀 내음 같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은하고도 달콤한 향기가 내 코끝을 간지럽히며 맴돌았다. 무심결에 어깨 끝에 가볍게 걸린 소피아의 앞가슴이, 그녀가 의식하지 못한 채 문제에 집중할수록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넋을 잃을 정도로 공부에 깊이 몰두하며 온 신경을 책과 연습장에 집중시키면서, 그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쏠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뻔히 알면서도, 내 안의 어떤 원초적이고도 본능적인 감각들이 예민하게 꿈틀거리며 아랫도리 쪽으로 뜨거운 기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저… 소피아 양, 어깨에 너무 그렇게 기대지는 말아주세요. 계속 누르니까 자세가 불편해서 좀 힘드네요.”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최대한 태연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너무 문제에만 정신이 팔려서… 한참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나 봐요.” 그녀는 마치 비밀스러운 잘못이라도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이 낮은 탁자보다는 제대로 된 책상에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 놓고 공부하는 게 좋겠어요. 이렇게 바닥에 앉아 밥상머리에서 하려니까, 자세가 영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네요.”

“네, 알겠어요. 내일 당장 엄마한테 말씀드려서 의자 하나 더 사달라고 할게요.”

소피아는 민망한 듯 황급히 내 어깨에서 벗어나며, 길게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올린 채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 순간, 얇은 면 티셔츠 너머로 드러난 그녀의 희고 가는 목덜미와 함께, 봉긋하게 솟아오른 풍만한 가슴의 부드러운 윤곽, 그리고 여성 특유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갸름한 허리선이 마치 한 폭의 살아있는 명화처럼 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순간, 나는 소피아의 저 가느다란 허리를 강렬하게 힘껏 감싸 안아주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의 저 잘록한 허리께를 부드럽게 잡아당기면, 저 풍만하고 탐스러운 가슴이 내 뜨거운 가슴에 가득 안길 것만 같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이성의 위태로운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잠시 쉬었다가… 혹시 괜찮으시면 간단하게 저녁 식사라도 함께 하실래요?”

“어, 저야 좋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금방 맛있는 파스타라도 만들어 드릴게요. 정말 아주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 그럴래요? 그럼 신세 좀 질게요. 다음부터는 저녁을 아주 든든하게 많이 먹고 와야겠어요.”

“왜요? 제가 해드리는 음식이 맛이 없을까 봐 그러세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밤늦게 뭘 먹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공부 시간을 늘리는 게 더 효율적이고 좋잖아요.”

“호호, 괜찮아요. 저는 요리하는 거 좋아해요. 금방 물 올려놓고 올게요.”

소피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부엌의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리고 물을 붓는다. 살짝 뒤돌아선 그녀의 모습 속에서, 청바지 위로 당당하고도 매력적으로 솟구친 엉덩이의 곡선을 보니, 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설레며 요동치는 것이 여간 아니었다. 저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동안만이라도,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뒤돌아선 소피아의 아름다운 엉덩이를 살며시 어루만져보고 싶었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두 팔을 감고, 저 도톰하고 탄력 있는 엉덩이에 내 뜨거운 중심을 가만히 문대보고 싶었다. 마치 잘 익은 앵두처럼 붉고 도톰한, 명랑한 노랫말을 끊임없이 풀어놓을 듯한 저 매혹적인 입술에, 내 거친 입술을 깊고 부드럽게 포개고 싶었다. 나는 가슴 깊이 심호흡을 내쉬며, 그런 비이성적이고도 위험한 욕망의 불길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저희 엄마는 보통 새벽 한 시나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지친 몸으로 들어오세요.”

“정말… 보통 힘든 일이 아니시겠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런 엄마의 고생하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싫고 죄송스러워서, 제 모든 꿈을 접고 공부를 포기했었는데…”

“진정으로 엄마를 생각한다면, 이제부터라도 그 깊고 따뜻한 엄마의 그늘을 용기 있게 벗어나, 자기 자신의 힘으로 당당하게 홀로 서려고 노력해야 해요.”

“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저희 엄마께서 제게 정말로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세상의 어떤 부모도, 사랑하는 자식이 자신이 걸어왔던 그 고되고 험난한 길을 똑같이 따라오기를 원하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그 지긋지긋한 고생만큼은 자신의 대에서 끝내고 싶을 테니까요.”

“사실… 오늘 하루 종일 선생님 생각을 했어요.” 그녀가 불쑥, 그러나 진지하게 말했다.

“네? 제 생각을요? 왜요?”

“혹시라도 제 실력이 너무 형편없고 부족하다고 생각하셔서, 저를 가르치는 일을 중간에 포기해버리시면 어쩌나… 온종일 그 걱정만 돼서 공부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처음에는 소피아 양이 아무런 학업적 준비도,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채 그저 막연하게 공부만 가르쳐달라고 떼를 쓰면, 단호하게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달랐어요. 당신의 눈빛 속에서 저는 진심을 보았어요.”

“정말요? 그럼 제가 잘한 거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종일 혼자 예습하고 복습하다가, 정 모르는 것들만 선생님께 질문하면 되는 거죠?”

“물론이죠. 그게 바로 공부를 가장 효율적으로, 그리고 제대로 잘하는 비결이에요. 그리고… 혹시 괜찮다면, 앞으로는 저를 ‘선생님’이라고 딱딱하게 부르지 말고, 그냥 편하게 ‘마르첼로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요?”

“어머나… 세상에… 제가 감히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놀라움과 수줍음으로 더욱 커졌다.

“네, 물론이죠. 제 이름은 마르첼로, 김명철입니다. 편하게 불러주세요.”

“저는… 이명자, 아니 소피아예요. 돌아가신 아빠께서 마지막으로 지어주신 소중한 이름이죠.”

약간 덜 익은 듯 쫄깃한 식감의 파스타 면에, 소박하지만 신선한 토마토소스와 향긋한 바질 잎을 곁들여 먹으니, 그 어떤 산해진미 부럽지 않은 일품요리였다. 오늘 맛본 이 단순하지만 정성 가득한 파스타보다, 언젠가 그녀가 어머니의 정겨운 트라토리아 일을 도우며 오랜 시간 갈고닦은 숨겨진 음식 솜씨를 내 앞에서 멋지게 뽐내며 보여줄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그저 아련한 상상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며 즐거워졌다.

“소피아, 우리 당분간 공부 시간은 하루에 딱 한 시간으로 엄격하게 제한했으면 좋겠어요.”

“네, 처음부터 그렇게 약속했었잖아요.”

“네, 맞아요. 그런데 앞으로 그 약속을 정말 칼같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 같아요.”

“네? 왜요? 혹시 제가 너무 귀찮게 해 드렸나요?”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아니요, 그런 게 절대 아니에요. 다만… 공부에 열중하는 소피아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시간 가는 줄을 전혀 모르겠어요. 보세요, 벌써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었잖아요.”

“어머나, 세상에! 정말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됐어요? 믿어지지 않아요.”

“네, 그렇죠? 그러니 이제 아쉽지만 제가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아이, 정말… 너무 시간이 야속하게 빨리만 가네요.” 그녀의 아쉬움 가득한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다.

소피아는 파스타를 먹었던 빈 그릇들을 말끔히 치우고, 나와 함께 공부하던 낮은 탁자 위에 어지럽게 펼쳐져 있던 책들을 차분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살짝 앞으로 허리를 굽힌 그녀의 유연한 상체를 통해, 얇은 면 셔츠 안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가슴골의 깊은 음영이 아찔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마치 잘 익은 복숭아처럼 뽀얗고, 아니 그 어떤 단어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부드럽고 탐스러운 속살들이 어지럽게 눈에 들어와 내 심장을 마구 뒤흔들었다. 붉은 듯 푸른 듯, 아직은 작고 앳된 젖몽우리가 그녀가 허리를 굽힌 자세 때문에 느슨해진 브래지어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살포시, 아주 부드럽게 만져보고 싶었다. 어쩌면 솜사탕처럼 달콤할지도 모르는 그곳을 깊고 뜨겁게 빨아주고 싶었다. 살짝 위로 올라간 그녀의 엉덩이를 타고 흐르는 아찔한 허리선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던 옷가지도 자세 때문에 약간 위로 들려져 있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꿀처럼 차지고 탄력 넘치는 속살들이 어찌나 강렬하게 내 눈에 들어오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휴, 갑자기 방 안이 후끈하게 덥네요.” 나는 어색한 침묵을 깨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혹시… 커피라도 한 잔 더 타 드릴까요?”

“음…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한 잔만 더 마시고 갈까요?”

“네, 좋아요! 금방이면 돼요. 잠시만 기다려요.”

소피아가 또다시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리러 간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뒤돌아선 모습이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보인다. 분주하지만 침착한 손놀림으로 커피 잔에 인스턴트커피 가루를 넣고, 하얀 설탕을 넣고, 부드러운 분말 크림을 넣는 그 일련의 모습 속에서, 마치 아련한 어린 시절 소꿉장난하던 순수한 각시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대체 왜일까?

“사람들은 밤늦게 마시는 커피는 몸에 안 좋다고들 하던데요.”

“음… 어제 마셨던 그 신비로운 허브차도 아주 맛있었는데, 오늘 이 커피 맛은 또 어떨지 궁금하네요.”

“분명 아주 맛있을 거예요. 제가 특별히 정성을 담아 탈 거니까요. 그래도 매일 밤 이렇게 커피를 마시면 건강에 안 좋을 텐데, 다음부터는 다른 종류의 차를 미리 준비해둬야겠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원래 커피 향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특히 소피아 양이 타주는 커피는 더더욱요.”

소피아는 공부할 때보다는 조금 더 내게서 떨어진 곳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잔에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대며 천천히 마셨다. 아, 간절히, 저 탐스러운 입술이 부드럽게 닿는 저 투박한 커피 잔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의 저 희고 고운 손가락들을 마치 연인의 손처럼 따뜻하게 붙들어 맬 수 있는 저 커피 잔의 단단한 손잡이가 되고 싶었다. 나는 코끝을 간질이는 은은하고도 향긋한 커피 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온통 내 머릿속과 가슴속을 가득 채운,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안에 깊이 들어와 자리 잡은 소피아 생각에, 다른 어떤 외부의 감각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르첼로 오빠는… 혹시 공부하는 게 좋아요?”

“아니요, 전혀요. 오히려 너무 싫어서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벗어나려고 얼른 취직한 거잖아요.”

“어머, 그럼 취직하려고 그 어렵고 힘든 공부를 억지로 한 거예요?”

“아니요, 그저…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먹고살려고요.”

“호호호, 오빠도 참. 그런 싱거운 대답이 어디 있어요?”

“때로는 가장 쉽고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 바로 변하지 않는 진리일 때가 많거든요.”

“저는 나중에 커서 꼭 훌륭한 선생님이 될 거예요.”

“네, 아주 좋은 꿈이네요. 특히 소피아 양처럼 지혜롭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에게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직업이죠.”

“제가 선생님이 되면, 저처럼 길을 잃고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많이 심어주고 싶어요.”

그 순간, 소피아의 맑고 깊은 눈빛이 순간적으로 희미하게 흐려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마도 지독한 가난과 힘겨운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씨름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어두운 진로를 밝혀주기는커녕 무관심과 냉소로 일관했던 과거 현실 속의 선생님들에 대한 깊은 원망과 슬픔이 그 여린 눈가에 안개처럼 서려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커서 장차 이 사회에서 원하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씨앗을 키워주고 격려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이 시대의 교육자들이, 그저 자신의 안위와 철밥통만을 소중히 챙기면서,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마저 부모가 건네는 촌지 봉투의 두께에 따라 차별하고 평가하는 일부 몰지각한 선생들의 이기적이고도 부도덕한 행동은 결코 옳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스스로의 진로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개척해야 한다는 냉정한 현실을 그저 못 본 척 외면해 줄 수는 없겠지만, 아직은 여리고 채 아물지 않은 미숙한 마음들에게, 적어도 막막한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론적인 지혜와 따뜻한 용기 정도는 건네줄 수 있어야, 비로소 ‘선생님’이라는 존경과 감사가 담긴 호칭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소피아의 슬픔 어린 눈가에 방울방울 맺힌 투명한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줘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티슈를 한 장 조용히 꺼내어, 소피아가 앉은 자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촉촉한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금방이라도 또르르 굴러떨어질 것 같은 눈물방울들을 가만히 닦아주려고 티슈를 내밀었지만, 소피아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멍하니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고도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에 티슈를 살짝 대고,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을 가만히 찍어냈다. 그 순간, 소피아는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진 듯 풀썩 쓰러지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여린 아이처럼 매달렸다. 나는 당황했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소피아의 그런 가냘프고 떨리는 어깨를 넓은 품으로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며, 한참 동안이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다독거렸다. 낮게 흐느끼던 소피아의 애처로운 울음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모르고, 어느새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런 소피아를 차마 이 차가운 방바닥에 혼자 내버려 두고 매정하게 일어서기엔 내 마음이 너무나 아프고 무거웠다. 아주 작은 감동이나 진심 어린 위로만으로도 사람의 섬세한 인성은 때로 크게 변화하고 성숙하는 법인데, 오늘 소피아는 과연 어떤 내면의 격렬한 폭풍을 겪었기에 이토록 크게 마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저 안타깝고도 애틋한 마음에 나는 그녀를 조금 더 바짝 내 품으로 끌어안았다. 내 한쪽 손은 어느새 그녀의 등을 지나 잘록한 허리께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나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 사이로 두 팔을 깊숙이 넣어 그녀를 더욱 힘껏 바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소피아의 여리고 가벼운 몸이 살짝 공중으로 들려지며, 내 단단한 무릎 위에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가 자연스럽게 올라와 앉혀졌다. 나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비단결처럼 고운 머릿결을 따라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소피아의 가느다란 두 팔이 마치 구원을 갈망하듯 내 두꺼운 목을 힘껏 끌어안는다.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그렇게 서로에게 간절히 매달리던 그 형상 그대로를 조심스럽게 유지하며, 그녀를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방바닥에 아주 천천히 눕혔다. 어둠 속에서도 가쁘게 할딱이는 그녀의 뜨거운 숨소리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감히 내가 그녀의 몸 어디를 어떻게 더 손대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망설일 틈도 없이,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눕혀진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타고, 얇은 브래지어 사이로 내 뜨거운 손길을 조심스럽게 넣어 보았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마치 잘 익은 과일 같은 부드러운 젖무덤이 내 손안에 가득 잡혔다. 마치 용광로처럼 뜨거워 할딱이던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에, 나는 아주 부드럽고도 경건하게 내 입술을 대어보았다. 그녀의 작은 귓불 아래로 내 손을 넣어 섬세하고도 부드럽게 매만졌다. 온 세상이 아득하게 멀어지며, 마치 깊고 어두운 우주 속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가는 듯한 강렬한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온몸으로 소피아의 부드럽고 향기로운 몸 위에 살며시 포개어보았다. 어느새 살짝 들어 올려진 그녀의 옷 사이로, 달빛처럼 희고 매끄러운 속살이 수줍게 드러났다. 나는 그 눈부신 속살 위로 내 손을 가만히 얹으며, 아주 천천히,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내 온몸으로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녀의 깊은 목구멍을 통해 터져 나온, 억눌린 듯한 깊고 뜨거운 숨소리는 이미 온 방 안을 관능적이고도 성스러운 긴장감으로 진탕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피아… 나의 소피아… 괜찮다면, 이 답답한 옷들을… 모두 벗어줄 수 있겠니?”

나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갈망하듯, 그녀의 몸을 덮고 있는 마지막 청바지를 벗기려는 조심스러운 시도를 잠시 포기한 채, 소피아에게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려 달라고 나직이 부탁했다. 만약 소피아가 부끄러움에 엉덩이를 반짝 들어 올려 바지를 편히 내려주지 않는다면, 이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색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피아는 말없이 촉촉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살짝 몸을 들어 올려주었다. 반쯤 흘러내린 청바지를 마저 부드럽게 내리고, 하얀 목련 꽃무늬가 청초하게 수놓아진 연분홍색 팬티를 마저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 순간, 마치 성스러운 제단처럼, 밤의 장막같이 검고 윤기 흐르는 수풀이 신비롭게 우거져 있었고, 그 은밀한 중심에는 새벽의 여명처럼 연분홍빛으로 도톰하게 솟아오른, 생명의 근원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흥건하게 젖어 촉촉한 물기가 질펀해지며, 그 아래로 은밀하고도 투명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경이롭고도 성스러운 곳을 마치 순례자처럼 경건하게 쓸어내리듯 내 뜨거운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만지며, 살짝 가운데 손가락을 그 신비롭고도 축축한 입구 속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아흑… 하아…”

그녀의 허리가 마치 활처럼 극적으로 휘어지며 파드득 전율하는 소피아의 여린 몸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내 몸을 덮고 있던 마지막 남은 바지를 벗어 던지고, 그런 소피아의 황홀한 몸부림에 내 뜨겁고 단단한 몸을 그대로 실었다. 마치 뜨거운 불덩이에 온몸이 덴 듯, 부드럽고도 미끌미끌한 애액이 강물처럼 넘실거리며 흐르는 그 비밀스러운 입구에 마침내 도달했을 때,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러나 분명하고도 단단한 막힘을 느껴야 했다.

“소피아… 너는… 아직… 단 한 번도 경험이 없는… 순결한 처녀였던 거야?”

“응… 나는… 한 번도… 다른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는… 깨끗한 숯처녀예요…” 그녀는 수줍음과 떨림 속에서도 단호하게 속삭였다.

“정말… 단 한 번도… 남자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단 말이야?”

“응… 어쩌면… 나는… 마르첼로 씨, 바로 당신에게… 나의 이 모든 것을 처음으로 드리기 위해… 그동안 이렇게 소중히 참고 기다렸나 봐요…” 그녀의 말은 마치 천사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고도 성스러웠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이 순간, 나와 함께 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거야?”

“응… 제발…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어서 빨리… 나를 안아줘요… 나를…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가져줘요…”

나는 그런 소피아의 간절하고도 순수한 갈망이, 결코 순간적인 충동이나 외로움 때문에 경솔하게 결정된 것은 아닐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싶었다. 과거, 수많은 남자들이 마치 전리품처럼 탐욕스럽게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며 함부로 지껄여대던 그 이름, 소피아. 그러나 이제 그녀의 그 누구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 성역에, 바로 나의 뜨거운 존재가 깊이 각인된다는 것은, 그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한 경외감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동시에 내 어깨 위에 안겨주었다. 적어도 다른 속물들처럼 그저 음흉한 상상 속에서만 그녀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진정으로 서로를 원하고, 서로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순수하고도 절실한 마음으로, 그녀가 스스로 열어주는 그 최초의 문을 통과하는 첫 번째 남자가 된다는 숭고하고도 성스러운 우월감에, 내 아랫도리가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게, 그러나 더욱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아아아악~~~~!”

소피아의 크고도 짧은, 그러나 분명한 비명은, 마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장엄한 통과제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그 신호와 함께, 내 몸의 가장 단단하고도 뜨거운 거대한 기둥은, 그녀의 짧은 고통과 곧이어 밀려올 지고한 환희 속으로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부드럽고도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이 세상 그 어떤 강력한 침입도 용감히 막아낼 것처럼, 그녀의 가장 깊고도 은밀한 곳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던 마지막 장애물이 마침내 터져버리자, 그녀의 몸은 잠시 허탈한 듯, 그러나 이내 완전한 이완과 함께 그 어떤 저항이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과거, 내가 철없던 시절 숱하게 몸을 섞었던 세속적이고 타락한 창녀들과는 질적으로 달리, 그녀는 마음속으로만 격렬하고도 폭풍 같은 환희를 느끼고 있을 뿐, 몸의 움직임은 그저 고요하고도 평화로운 터널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처럼, 아주 미미하고도 섬세한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깊은 침묵과 미세한 떨림 속에는, 이 광활한 우주 전체보다도 더욱 깊고 순수하며 강렬한 감정의 교류가 용암처럼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 순간, 단순한 육체의 원초적인 결합을 넘어서, 서로의 영혼의 가장 깊고도 내밀한 곳에서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 어둡고도 작은 방 안에서, 그동안 각자의 길을 걸어왔던 두 개의 외롭고 고독했던 영혼은, 마침내 하나의 완전한 존재가 되어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네오-나폴리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그렇게 두 영혼이 함께 부르는 새로운 아리아가 장엄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바티칸의 최종 병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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