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가스의 여름밤

by 남킹


1. 스러지는 계절의 끝자락에서

한낮의 태양 아래 끈적하게 달라붙던 후덥지근한 바람은, 밤의 장막이 내려앉고 시간이 깊어갈수록 그 온기를 잃고 파르스름한 냉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변모한 밤바람은 살갗을 에이며 예민한 한기를 돋게 했다. 계절의 전환점이었다. 여름의 농밀했던 열기는 어느덧 희미한 추억처럼 비껴가고, 이제는 존재감을 잃은 바람만이 빈 거리를 정처 없이 휑하니 떠돌아다녔다. 변화의 바람은 비단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잠시 몸담았던 해변가 식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때 북적이던 활기의 중심지였던 그곳은, 여름의 퇴장과 함께 서서히 온기를 잃어갔다. 식당을 지탱하던 손님들의 발길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이제는 텅 빈 공간만이 남아 지난 계절의 번영을 아련하게 증명할 뿐이었다.

마을 외곽, 바닷바람을 맞는 언덕배기에 들어서던 전기자동차 배터리 공장의 건설 현장도 침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육중한 철골 구조물과 회색빛 콘크리트 벽이 거의 제 모습을 갖추며, 건설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리던 이국의 건설 근로자들은 프로젝트의 종료와 함께 하나둘 짐을 꾸려 각자의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떠나는 뒷모습은 내게도 명확한 신호를 보내왔다. 이곳, 부르가스에서의 시간도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이제는 나 역시 새로운 닻을 내릴 곳을 찾아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의 경력, 논리와 알고리즘으로 구축된 프로그래밍의 세계에 예기치 않게 흘러 들어온 요리라는 감각적인 경험이 더해졌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코드와 레시피 사이에서 나의 선택지는 분명 전보다 넓어졌고, 그만큼 마음의 여유도 조금은 늘어난 듯했다. 어쩌면 그 여유는, 다가올 미지의 시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자기기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 작은 여유를 붙잡아, 즉흥적인 여행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노트북을 펼쳐 익숙한 구글 맵을 화면 가득 띄웠다. 손가락은 망설임 없이 북쪽을 향했다. 우선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로, 거기서부터는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정해진 목적지 없이 동유럽의 낯선 풍경 속을 무작정 헤매어 보기로 작정했다. 계획 없음이 곧 계획인, 그런 여행을 꿈꿨다.

2. 덜컹이는 궤도 위의 하룻밤

귓가를 파고드는 부석거리는 소리에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잠의 얕은 경계에서 깨어났다.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오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것은 매캐한 담배 연기였다. 그리고 다시금 느껴지는, 폐쇄된 공간 특유의 후덥지근함. 시간은 마치 고장 난 시계추처럼, 지독하리만치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맞은편 침대에 누운 남자는 필시 이른 시간에 잠들었고, 그만큼 또 이른 시간에 깨어난 모양이었다. 그는 깨어 있는 동안 온 신경을 단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는 듯 보였다. 어떻게 하면 동승자들에게, 특히 아래층 침대의 노부인에게 들키지 않고 몰래 담배를 피울 수 있을까. 그의 행위는 거의 강박적인 리듬을 띠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우물거리며 먹고, 창문 틈새로 연기를 조심스레 내뿜고, 그리고는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어라 말을 건네는 행위를 반복했다. 물론 그의 주된 대화 상대는 2층 침대 아래, 깊은 잠에 빠져 미동도 없는 늙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그의 어머니이거나, 혹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내일 터였다. 부부라고 하기에는 남자의 얼굴에 아직 젊음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렇다고 모자 관계라 단정하기에는 그 역시 세상의 풍파에 제법 닳아 보였다. 흘러나오는 대화의 조각들은 대부분 의미를 알 수 없는 음담패설이거나 누군가를 향한 날 선 험담이었다. 나는 이 원치 않는 동반자들과 함께, 떨쳐낼 수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물리칠 수도 없는 지겨운 동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좁고 흔들리는 공간 안에서, 그들의 존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비스듬히 객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가늘게 실눈을 뜨고, 덜컹거리는 기차의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빛줄기는 기차가 철로 이음매를 지날 때마다 발생하는 충격에 맞춰 단속적으로 반짝이며 어른거렸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창밖을 황급히 스쳐 지나가는 풍경의 그림자가 새벽의 미명 속에서 차츰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나는 그들의 존재를, 그리고 이 불편한 상황 자체를 애써 외면하려 아주 천천히 돌아누웠다. 뻐근한 통증이 아랫도리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기차에 오르기 전 며칠 동안, 나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혹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듯 심하게 걷고 또 걸으며 낯선 도시와 마을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니 매번 맞이하는 아침은, 밤새 켜켜이 쌓인 육체적 피로와 근육의 통증이 질긴 칡넝쿨처럼 내 몸을 단단히 휘감아 오는 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후로 치닫는 시간만큼 정비례하여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만은, 아직 아침의 여명 속에서는 비교적 가벼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가벼움에 기대어, 나는 이럭저럭 누운 채로 버티곤 했다.

남자는 마지막 남은 담배꽁초를 능숙하게 창문 틈새로 튕겨 버리더니, 아무 말 없이 객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이제 오전 시간이 덧없이 흘러갈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시끄러운 식당 칸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차가운 맥주 한 잔을 시켜 놓은 채, 처음 보는 낯선 이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시간을 보낼 터였다. 나는 묵직하게 가라앉은 몸을 아주 천천히 일으켰다.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구겨진 옷가지를 대충 걸치고, 밤새 빠끔히 벌어져 있던 창문을 슬며시 좀 더 아래로 밀어 젖혔다. 그 작은 움직임에, 창문 틈새에 위태롭게 끼인 채 가늘게 떨고 있던 몇 가닥의 하얀 민들레 홀씨들이, 마침내 탈출구를 찾은 듯 황급히 몸을 빼내어 허공 속으로 쏜살같이 흩어져 사라졌다.

창밖의 세상은 눈부셨다. 햇살은 수정처럼 맑았고, 탐스럽게 부풀어 오른 흰 구름은 조용히, 그리고 장엄하게 바다 쪽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저 멀리,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박혀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이 마치 잘 찍힌 흑백 사진 속 깨알처럼 알알이 빛났다. 모든 것이 선명하고 평화로워, 마치 정교하게 계산된 계조(gradation)를 지닌 한 폭의 풍경 사진을 창틀에 걸어 둔 듯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이윽고 침대 아래의 나이 든 여인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나를 한번 무심하게 힐끗 쳐다보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뭐라고 짧게 한마디 던지고는 남자의 뒤를 따라 객실을 나섰다. 다시 혼자 남겨진 공간에는 희미한 담배 연기와 침묵만이 감돌았다.

해안선이 끝나는 지점 너머로, 인간이 빚어낸 거대한 구조물, 도시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느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그곳 또한 질서와 무질서가 뒤섞인 모습이었다. 구불구불하고 불규칙적인 도로망, 제각기 다른 높이와 형태로 덩어리진 건물들, 혼란스러우면서도 딱딱한 인공의 풍경.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뜨거운 에너지가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시선을 돌려 산 쪽을 바라보니, 희뿌연 운무가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것처럼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창문을 완전히 열어젖히자, 예상치 못한 강한 바람이 훅하고 객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바람과 함께, 찰나의 순간 동안, 제멋대로 칼로 깎아낸 듯한 검붉은 빛의 야트막한 언덕과 그 아래, 낡고 색 바랜 지붕들이 마치 조가비처럼 다닥다닥 위태롭게 붙어있는 초라한 마을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뒤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 마을과 외부 세계를 이어주는 낡은 도로의 작은 사거리, 즉, 내가 탄 기차가 지나가는 바로 맞은편에는 동그란 차양을 멋스럽게 쓴 작은 주유소와 허름한 매점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란히 자리를 잡은 채, 점점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3. 목적 없는 여정, 그 안의 자유와 공허

특별한 줄거리도, 명확한 목적지도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동유럽 전역을 무작정 헤매고 다닌 지 어느덧 보름쯤 되어가는 것 같았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한 갈등, 혹은 그 선택이 가져다주는 소소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민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살아가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나는 지난 며칠 동안의 여정을 통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선택의 의무가 소거된 그 빈 공간을 의식적으로 느긋함과 관조로 채워 넣으려는 듯 행동했다. 어떤 숙소 정보를 미리 찾아보거나, 방문할 장소에 대해 사전에 공부하는 일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저 기차가 멈추는 낯선 역에 내려, 그 순간 즉흥적으로 관심이 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따라가니 어김없이 기차역이 나왔다. 플랫폼에 늘어선 행선지 안내판에서 그저 어감이나 글자의 모양이 마음에 드는 도시 이름을 골랐다. 부르가스. 그 이름이 주는 생경함과 바다 내음 같은 것이 좋았다. 매표소 창구로 다가가 망설임 없이 편도 표를 끊었다. 유난히 친절했던 매표소 직원은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몸짓과 표정을 섞어가며 좀 더 저렴하게 표를 구매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할인 방법과 경로를 열성적으로 제시해주었다. 그녀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나는 그저 괜찮다는 손짓과 함께 정가의 비싼 표를 샀다. 복잡한 계산이나 계획은 이 여행의 취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기차에 몸을 싣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무작정 걸었다. 배가 고프면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에서 가장 읽기 어렵거나 흥미롭게 보이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골랐다. 때로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 대신 그려진 서툰 그림을 선택하기도 했다. 배를 채우고 나면 다시 또 정처 없이 걸었다.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시선이 머무는 대로 움직이는 여정이었다.

그러다 하루의 해가 저물고, 온몸에 기분 좋은 피곤이 스멀스멀 몰려올 때쯤이면 그제야 하룻밤 머물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마땅한 곳이 눈에 잘 띄지 않으면 길에서 마주치는 아무나 붙잡고 물어봤다. 특히 커다란 배낭을 멘 젊은 여행자들은 더없이 좋은 정보원이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저렴하고 괜찮은 유스호스텔 정보를 줄줄 꿰고 다녔다. 그들의 친절함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동행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하룻밤의 짧지만 강렬한 인연을 맺게 해주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마을과 텅 빈 광장, 오래된 묘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길들을 걸어 다녔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했다. 내가 지나온 궤적을 정확히 아는 것은 오직 나의 스마트 기기 내비게이션 앱에 차곡차곡 저장된 이동 히스토리뿐이었다.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설정하지 않은 여행은, 필연적으로 우연이 뱉어낸 즉흥적인 감정의 쏠림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마련이었다. 문득 어느 골목길에 비스듬히 스며드는 저녁 햇살의 가늘고 따스한 느낌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기도 했고,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뷔처럼 낯익은 풍경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기도 했다. 때로는 아무런 판단이나 생각이 작동하지 않는 멍한 상태에서도, 그저 그 자리에 머물고 싶다는 충동에 주저 없이 몸을 맡기곤 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런 무계획적인 방랑이 허락하는 사치스러운 시간도 이제 서서히 끝을 향해 내딛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주머니 속의 돈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앞으로 길어야 대략 일주일 정도의 여유가 전부였다. 현실의 무게가 다시 어깨를 짓눌러왔다. 다시 분주한 일상으로,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의 세계로 돌아가야만 했다. 결국에는 무수한 빌딩의 벽과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현란한 광고판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동차, 그리고 익명의 사람들로 가득 찬, 짙은 색 강물이 도시의 혈관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그런 도시로 회귀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나는 다시 거대한 사회라는 기계의 톱니바퀴 속으로 나 자신을 끼워 맞추어야 할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고, 잠이 덜 깬 지친 눈으로 만원 전동차에 몸을 실어 흔들리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어쩌면 또다시, 지루한 업무 시간 중에 퇴근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초조하게 헤아리며 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의욕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그 부침의 과정 속에서, 나는 아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쉽게 늙어 갈 것이다. 벗어나고 싶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견고한 시스템의 굴레를 결코 완전히 헐어버릴 수는 없을 거라는 체념 섞인 예감이 들었다. 그런 상념에 잠긴 채,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여행지의 구석구석을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다녔다. 내가 애초에 떠나왔던 출발지에서 지금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어느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 혹은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이 정확히 어느 나라의 어느 지역에 속하는지는 더 이상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부르가스의 그 작은 골목길에서 그녀, 소피야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4. 소피야, 바라봄의 자유

대로변에서 한 블록 안으로 들어간, 자칫하면 지나치기 쉬운 작은 골목길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이탈리안 퓨전 레스토랑. 그곳의 주인이었던 소피야는, 음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식당 본연의 목적에는 다소 어긋나 보일 정도로, 단출하게 놓인 몇 개의 테이블보다는 오히려 가게 전면을 차지한 훤히 트인 투명 유리 너머로, 골목길을 오가는 행인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에 더 몰두하곤 했다. 그녀와의 만남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날, 부르가스 역 플랫폼에 내렸을 때는 작열하는 한낮의 태양이 지독하리만치 뜨겁게 내리쬐는, 그야말로 하늘에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게 맑은 날이었다. 하지만 그 맑음은 청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건조하고 짙은 바람이 훅훅거리며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시원한 계곡물에 온몸을 담그고 멱을 감는 상상을 하며 더위를 달랬다. 꽤 오랫동안 덜컹이는 기차에 시달렸고,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아침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공복 상태였으므로, 몸은 극도로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우선 급한 대로 숙소를 먼저 잡아서 짐을 풀고, 그날 하루는 다른 생각 없이 오롯이 잠으로 피로를 때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역사를 빠져나와 아담하게 조성된 광장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배낭을 멘 여행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에게 기대어 유쾌한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젊은 연인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내 서툰 질문에도 밝고 친절하게 응해주었다. 그들이 알려준 방향을 따라, 나는 추천받은 유스호스텔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찾아가기 쉬운 방향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기대했던 숙소 간판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분명 같은 길을 몇 번이고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과 함께 짜증이 섞인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그 길을 이미 경험해 본 연인에게는 더없이 쉬운 길이었겠지만,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는 무언가 결정적인 단서를 놓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화가 잔뜩 난 상태로 30분쯤 흘렀을까.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역전 뒤편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목적 없이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문득, 시야에 그녀가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먼저 내게 다가왔다.

가게 안, 투명한 유리 너머에서 한참 동안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길 잃은 이방인을 지켜보던 그녀는, 식당 문을 반쯤 빼꼼히 열고는 부드러운 영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May I help you?” 그 목소리와 억양, 그리고 깊고 그윽한 눈매를 본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인도 혈통임을 알아차렸다.

“혹시… 인도인이세요?” 나는 다소 뜬금없지만, 강렬한 예감에 이끌려 한국어로 되물었다.

“아, 네. 혈통은 그래요. 혹시 어디 찾으시는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아까부터 계속 이곳 근처를 돌아다니시던데…” 그녀는 내 어색한 한국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답했다. 그녀의 한국어는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네, 유스호스텔을 찾고 있습니다. 젊은 연인이 알려줬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네요.”

“아, 저런. 혹시 한국인이 운영하는 ‘고향집’ 말씀하시는 거군요. 아이고, 거기가 처음 오는 사람한테는 조금 헷갈릴 수 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바로 앞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잠시 외출중’이라는 작은 팻말을 걸고 가게 문을 잠그더니, 나를 향해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앞장섰다. 나는 이 예상치 못한 과분한 친절 앞에서, 조금 전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던 불쾌한 분노를 황급히 마음 한구석으로 내려놓았다.

“아니, 괜찮습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손수 나서주시다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엄청 한가한걸요.”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장난기 섞인 쾌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지독하게 푸르고 맑기만 하던 부르가스의 하늘이 비로소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남은 휴가 전부를 바로 그곳, 부르가스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든 것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듯한 그 도시에서 나는 예기치 않은 긴 휴식을 취했고, 도시의 알려지지 않은 구석구석을 그녀, 소피야와 함께 걸어 다녔다. 그녀의 안내는 단순한 길 안내를 넘어, 그 도시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게 해주는 열쇠와 같았다. 소피야는 언제나 느긋하고 푸근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삶의 기쁨을 발견하고 음미할 줄 아는 지혜를 품고 있었다.

“저는 뭐, 비교적 단순하게 살아온 편이에요. 제 인생은요.” 어느 날 저녁, 그녀의 작은 식당 테라스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소피야가 말했다.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했고, 그러다 교환학생으로 여기 불가리아에 잠시 유학을 왔었어요. 졸업 후에 잠시 인도 본가에 머물다가, 결국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이 작은 식당을 덜컥 개업했죠.”

“철학도가 요리를? 요리를 아주 좋아하시는군요?”

“음… 솔직히 말하면, 먹는 것은 엄청 좋아하죠. 근데 요리 자체는 그냥 그래요. 잘하는 편도 아니고요. 그래서 메뉴도 딱 다섯 가지밖에 없잖아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저는 요리하는 것보다, 그냥 이렇게 앉아서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걸 훨씬 더 좋아해요. 저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는 거요.”

“그러다 손님 없어서 망하면 어떡합니까?” 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하하, 괜찮아요. 단골손님이 몇 분 계시거든요. 대부분 은퇴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세요. 오시면 늘 옛날이야기, 사는 이야기, 아주 재밌는 이야기들을 잔뜩 들려주시죠. 그걸로 충분해요.”

부르가스에서의 우리의 시간은 대부분 느긋한 대화와 끝없는 걷기, 간간이 서로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오래된 흑백 영화를 함께 보는 것으로 채워졌다. 소피야는 책 속의 이야기나 영화 속 인물의 감정에 놀라울 정도로 깊이 몰입하곤 했다. 마치 그것이 실제 자신의 경험인 양 슬퍼하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렇게 멍하니 감정에 빠져있는 그녀의 얼굴에 내가 짓궂은 장난으로 가벼운 자극을 가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현실로 깨어나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휴가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우리는 그녀의 작은 방, 창밖으로 부르가스의 밤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공간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그녀의 방 한쪽 벽에는 빛바랜 작은 사진 액자가 하나 붙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되고 설렘 가득한 표정의 소피야가 부르가스 해변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도착한 날의 모습이라고 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 중 하나였죠. 비로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찾았다고 느낀 날이었으니까요.” 그녀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그날의 감정을 되살리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소피야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꾸밈없이, 그러나 항상 조곤조곤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 주제는 철학적 사유에서부터 시시콜콜한 일상의 관찰까지,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 지극히 직관적이었고, 때로는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결론적이었으며, 그러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관대하고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늘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 그리고 용서에 대한 갈구가 배어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다가올 이별의 고통을 예감한 듯, 마지막 밤이 하얗게 새어갈 때까지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는 꿈을 아주 사랑해요. 그래서 잠을 많이 자는 편이고요. 아니, 정확히는 잠을 많이 자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소피야는 밤새 이어진 대화로 인해 한 움큼의 졸음이 내려앉은 푸석한 얼굴에 눈을 반쯤 감은 채, 배시시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야속하게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이 괴로워, 괜스레 불퉁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바라봤다. 창밖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의 디지털시계가 이미 새벽 5시를 알리고 있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녀가 속삭였다. “꿈속에서는 현실의 모든 제약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거든요.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고, 완전한 주체가 되는 거죠. 현실에서 내가 알게 모르게 받았던 온갖 종류의 기대와 강요들로부터 온전히 풀려나는 거예요. 그 자유로움이 좋아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함께하자는 내 말이… 일종의 강요처럼 들린다는 건가요?” 나는 속마음과는 다른, 서운함이 묻어나는 볼멘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그녀의 존재가 내 삶에 예고 없이 나타나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나는 그녀가 너무나도 좋았다. 이 감정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음… 뭐, 넓게 보면 사랑도 일종의 강요의 한 형태일 수 있죠. 특히 결혼 서약은 그 강요의 결정체잖아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당신만을 사랑하고 존중할 것을 맹세합니다!’ 하고 세상에 공표하는 거니까. 알았지! 너는 이제 내 거야!” 그녀는 픽 웃으며 장난스럽게 두 팔을 뻗어 나의 양쪽 귀를 쭉 잡아당겼다.

“그래서? 결론은? 소피야! 나와 결혼할 생각이 있는 거예요?” 내가 어제부터 온종일 마음속에 가득 담아두었던, 누가 톡 하고 건드리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이 부풀어 있던 질문이었다.

“어휴! 정말. 말을 말아야지.” 그녀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그러나 그 속에 깊은 애정을 담아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어제 당신에게 그런 말 했었잖아요. 나는 어쩌면 시작도 끝도 없고, 입구도 출구도 불분명하며, 안이 동시에 밖이 되고 위가 아래와 연결된, 그런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병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네, 했죠. 그래서? 그 이상한 병 이야기가 우리의 결혼과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나는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을 풀지 않고 그녀를 다그치듯 쳐다봤다.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소피야는 이제 부드러운 미소를 거두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의 볼을 살짝 꼬집듯 잡아당겼다. “세상의 일반적인 시간과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인간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겠다고요?”

“그건 또 무슨 철학적인 말이에요?”

“배우자에게 영원히 충실하겠다는 결혼 서약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 시스템, 세상을 위한 약속일 뿐, 어쩌면 ‘나’ 자신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는 뜻이죠. 특히 나처럼, 인간이 힘들게 구축해 놓은 이 세상의 온갖 시스템과 규범에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어쩌면 당신 스스로 이 세상에서 불행한 이방인이 되겠다고 자처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역설적이게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잔잔한 행복감을 느꼈다. 그녀는 나를, 어쩌면 나 자신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눈썹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결혼이라는 제도 역시, 세상의 다른 모든 제도들처럼, 결국 우리를 하나의 정해진 상태 속에 가두는 거라고 봐요. 벗어나기 어려운 틀이죠. 그리고 특히, 당신 같은 사람은 곧 깨닫게 될 거예요. 그 틀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얼마나 답답하고 숨 막히는 것인지를.”

“특히 왜 나죠? 내가 뭘 어쨌다고?” 나는 밤샘으로 피곤했지만, 그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심하게,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사람이니까요.”

“내가요? 정말?”

“이번 휴가를 어떻게 보냈는지 한번 스스로 돌아봐요.”

“그야…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계획 없이…” 나의 대답에 소피야는 안타까움과 애정이 뒤섞인 듯한 측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난 그냥… 복잡한 생각 없이 내 시선이 머무는 곳, 마음이 끌리는 곳을 따라가고 싶었을 뿐이고…” 나는 내가 내뱉고 있는 말이 상황을 개선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대로,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러한 상태를, 세상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표현한답니다.” 소피야는 나의 볼에 다시 한번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럼 당신에게 자유는 뭔가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다는 건가요?”

“나에게 자유는… 바라봄이죠.”

“바라봄?”

“네, 사람들을, 세상을, 그저 가만히 관찰하는 자유죠. 그리고 그들의 보이지 않는 삶의 이야기를 늘 궁금해하고 상상하죠. 나에게는 이 ‘바라봄’이 주는 미묘한 즐거움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몽환적인 생각들이 어느새 삶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어 버린 셈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저편의 세계, 피안(彼岸)의 세계를 지금 여기의 나와 조용히 아우르는 행위, 뭐 그런 거죠.”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밝은 색의 헐렁한 실내복 속으로 그녀의 가늘고 부드러운, 그러나 앙상하게 느껴지는 갈비뼈의 윤곽이 살짝 드러났다.

“사실, 저는 운이 무척 좋았어요. 어린 시절, 무척 부유하고 너그러운 양부모님을 만났거든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부족함 없이 자랐어요. 그래서인지 무엇이든 절박하게 갈망하거나 필사적으로 노력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게 부드럽게 키스했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조용히 붙어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났어요.” 소피야는 입술만 살짝 뗀 채,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왜요? 그렇게 좋은 분들이셨는데.”

“글쎄요… 그냥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느껴졌어요. 마치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어른들에 의해서, 그들의 가치관과 기대에 맞춰 억지로 떠먹여지듯 양육되고 있다는 느낌? 숨 막히게 꽉 죄는 교복을 억지로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좀 더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는 듯, 그녀의 가슴팍에 바짝 달라붙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뭐가 그래서예요? 그래서 그냥 나왔죠. 아, 물론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건 아니고. 감사하다는 인사는 정중히 드리고 나왔죠.” 그녀의 품은 물컹하고 따뜻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이 안온한 촉감 속에 영원히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쓸데없이 자의식이 과잉이어서, 항상 머릿속이 복잡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래서 도망치듯, 지극히 단순하고 조용한 곳을 찾았죠. 바로 여기, 부르가스로요.”

“그러고 보니 당신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삼 년이 훌쩍 넘었네요.” 그녀의 날숨에서는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와인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제 당신 이야기를 해줘요. 당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녀는 깊고 투명한 눈에 사랑과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나에게 물었다.

“저는… 아주 오래된 시끄러운 노래들을 좋아했어요. 헤비메탈이나 하드락 같은 거요. 방 안에서 혼자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아주 크게 틀어놓고 듣곤 했죠. 아마 그 덕분에 지금도 가늘고 작은 소리는 잘 안 들리는 것 같아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늘 낭만적인 연애를 꿈꿨고, 그래서 답답한 집을 뛰쳐나가 가출도 해보고 싶었어요. 실제로 거리를 떠돌던 불량한 애들과 어울려 공원이나 빈 건물에서 며칠 동안 잠을 잔 적도 있고요. 그리고 저는 원래부터 형식이나 예의범절 같은 것에 좀 무관심한 편이죠… 그리고… 한때는 프로그래밍에 미친 듯이 빠져 지낸 적도 있었죠. 지금도 인공지능 분야에는 무척 관심이 많고요… 그리고… 그리고…”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뜸을 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깊고 흔들림 없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사실 해킹을 좋아했던 적도 있습니다.”

“해킹이요? 와우. 마치 무슨 범죄자처럼 들리는데요.”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가벼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그 반대죠. 시스템을 안전하게 막기 위해서, 해커들이 어떻게 벽을 뚫고 들어오는지를 먼저 배우고 연구했던 거죠. 방어를 위한 공격 기술이었달까요.” 나는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져 소피야를 나도 모르게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왜 그 모든 흥미롭고 열정적이었던 것들을 결국 다 그만둔 거예요?” 그녀가 내 품 안에서 나지막이 물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규칙과 관습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게 되리라고 막연하게 추측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현실은, 내 예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직장 상사의 지시나 간섭, 가족들의 걱정 어린 잔소리, 친구들의 평범한 조언, 심지어는 정부의 정책이나 사회의 통념 같은 것들이 점점 더 듣기 싫어졌다. 어떤 때는 사소한 간섭조차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한때 나를 규정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형식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어느새 나를 옥죄고 구속하는 무거운 사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다음 날 아침, 우리의 작별은 예상대로 짧고 담담했지만, 역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느끼는 내 발걸음, 아니 내 마음의 무게는 천근만근 무겁기 짝이 없었다. 기차가 서서히 플랫폼을 벗어나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마지막까지 서서 나를 배웅하던 플랫폼의 낡은 기둥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창문에 얼굴을 붙인 채 끝없이, 미련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부르가스의 눈부신 햇살과 함께, 그녀의 모습은 점점 작아져 마침내 하나의 점으로 희미해져 갔다. 여름밤의 짧은 꿈처럼, 그렇게.

Gemini_Generated_Image_p880w0p880w0p880.png
Gemini_Generated_Image_8za3218za3218za3.png
주얼리의 나라 1.JPG
주얼리의 나라.JPG
024.png
025.png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4화버스 민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