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그리는 당신

by 남킹


I. 기억의 서곡, 빗방울의 타악

회색빛 하늘 아래, 나는 조용히 우산을 펼쳐 듭니다. 살포시 퍼지는 검은 천 위로 톡, 토독,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 속에서 예기치 않은 생명력처럼 튕겨 나옵니다. 그것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마치 태고의 어린 주술사가 두드리는 북소리 같습니다. 작고, 투명하며, 그러나 끈질긴 리듬으로 잊었던 시간의 육중한 문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집요하게 두드려댑니다. 손잡이를 타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 그것은 신경 세포를 따라 희미한 전류처럼 흘러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번져나가며 잠자던 감정의 현들을 가만히 흔듭니다.

우산이라는 이 연약한 방패는 하늘과 나 사이에 일시적이고 투명한 막을 형성합니다. 그 막 너머로 익숙했던 세상의 풍경은 물기를 머금고 부드럽게 번져나가며 단단했던 윤곽을 서서히 잃어갑니다. 견고했던 현실은 희미한 인상주의 화폭처럼 변모하고, 나는 그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공기 중에는 물 분자들이 포화 상태로 떠다니고, 숨을 쉴 때마다 차갑고 축축한 기운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와 온몸의 세포를 서늘하게 깨웁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은 투명한 실처럼 공간을 잇고 끊기를 반복하며,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예고 없이 옷깃 속으로 파고들어와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궤적을 그립니다. 아, 그 감촉은 얼마나 당신의 손길을 닮았던가요. 늘 그렇게, 아무런 전조 없이 다가와 내 존재를 흔들어 놓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곤 했던 당신처럼.

성긴 짜임의 천으로 된 겉옷이 바람에 펄럭입니다. 빗물에 젖어 점점 무거워지는 옷감은 중력에 순응하며 살갗에 차갑게 달라붙었다가, 이내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가기를 반복합니다. 이 밀착과 분리의 반복적인 감각은 당신과 나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물리적으로 체현하는 듯합니다. 어떤 순간에는 숨결마저 느껴질 듯 피부처럼 가까이 밀착되어 하나인 듯 착각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심연의 간극으로 벌어져 서로를 낯설게 만들었던 우리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축축하고 무거운 옷의 무게는 단순한 물리적 불편함을 넘어, 마음속에 내려앉은 슬픔의 무게와 공명합니다.

당신은 종종 안경 너머, 길고 섬세한 속눈썹을 나비의 날갯짓처럼 느리게 끔뻑이며 나를 지긋이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 시선은 때로는 따스한 햇살 같았고, 때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같았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안경테 위로 영롱하게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렌즈를 통과하는 빛을 미묘하게 굴절시켜, 당신의 시선을 더욱 아득하고 깊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눈썹의 미세한 떨림 하나하나가 내 마음의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고, 한 번의 느린 깜빡임에도 내 존재의 뿌리는 속절없이 흔들렸습니다. 그 안경 너머, 맑고 깊은 눈동자 속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요? 나를 향한 온전한 애정이었을까요, 아니면 언젠가는 이렇게 사라질 모든 것들에 대한 체념 어린 연민이었을까요. 어쩌면 그 둘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감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와 당신의 부재 속에서, 그 온기를 필사적으로 되살려내려 애씁니다. 흩어진 추억의 조각들을 흐릿한 도시의 캔버스 위에 힘겹게 그려봅니다. 형체를 잃어가는 기억들은 물 번진 수채화처럼 도시의 잿빛 풍경 위로 속수무책으로 스며듭니다. 빗물에 씻겨 내려가며 번져가는 물감처럼, 당신과 함께했던 순간들의 색채 또한 그 선명함을 잃고 희미하게 바래져 갑니다. 그래서 더욱 절박하게,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를 잡듯 기억의 편린들을 붙잡아 보려 하지만, 그것들은 손가락 사이로 쉬이 빠져나가는 물처럼, 혹은 잡을 수 없는 안개처럼 속절없이 흩어져 갑니다. 붙잡으려 할수록 더 빠르게 멀어지는 기억의 잔인한 속성 앞에서 나는 무력합니다.

II. 부재의 현현, 흔적의 각인

나의 단조롭고 무채색에 가까웠던 일상에 당신은 마치 잘 조제된 한약 속 감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밋밋하고 평면적인 시간의 흐름 위에 예기치 않게 솟아오른 입체적인 조각상처럼, 생기 없이 정체된 공간에 홀연히 드리운 한 줄기 영롱한 빛처럼, 당신은 언제나 내 삶에 예측 불가능한 깊이와 풍부한 농도를 더해주었습니다.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느닷없이 만나는,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그 독특한 풍미, 그것이 바로 당신이라는 존재가 내게 선사한 감각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눈에 보이는 당신의 형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때 당신과 함께 거닐었던, 그래서 푸른 상처처럼 아프게 남아있는 이 좁은 거리 속으로 당신의 존재는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숨 막히는 적막뿐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흔적은, 마치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쓰인 글씨처럼, 도시의 구석구석, 예상치 못한 곳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낡은 담벼락의 그늘진 곳에 자라난 푸른 이끼처럼, 오래되어 아물었지만 여전히 만지면 느껴지는 상처의 흉터처럼, 그 기억의 자국들은 결코 완벽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세찬 빗줄기가 끊임없이 씻어내려도, 무심한 시간이 켜켜이 먼지처럼 쌓여가도, 마치 피부 아래 깊숙이 각인된 문신처럼, 그 흔적들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나를 응시합니다. 당신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당신의 존재를 더욱 강렬하게 증명합니다. 적막은 더욱 짙푸르게 내려앉고, 이 고요한 도시의 심연 속에서 들리는 것은 오직 내 심장이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뿐입니다.

나는 여전히 미련하게, 그 마지막 날의 풍경을 꾹 끌어안고 있습니다. 당신의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그 투명한 액체를, 내 손으로 어떻게든 훔쳐내어 간직하려 했던 그 서툰 몸짓을 기억합니다. 그것이 차가운 빗물이었는지, 아니면 뜨거운 눈물이었는지, 이제 와서는 기억조차 희미하게 마모되었습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르지요. 내 손가락 끝으로 그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아내려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이미 흠뻑 젖어버린 내 손끝은 당신의 슬픔을 닦아내기는커녕 오히려 나의 물기마저 더할 뿐이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던 그 수많은 물방울들을 붙잡으려 했던 것은, 어쩌면 영원히 흘러가 버리는 그 찰나의 순간을, 당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든 붙잡아두려는 나의 서툴고 절박한 마지막 몸짓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무심히 흘러갔고, 당신 또한 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따라 아득히 멀어져 갔습니다. 내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III. 공항, 이별의 재현

시간이 얼마큼 흘렀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어느 날, 나는 다시 공항을 찾았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발걸음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 이곳으로 향했습니다. 삭막하게 느껴지는 넓은 터미널, 건조하다 못해 메마른 공기의 질감, 차갑고 단단한 금속 의자의 냉기. 이곳의 모든 요소들은 당신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날의 감각들을 신경 말단에서부터 생생하게 복원해냅니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로 이루어진 천장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지며, 굳게 닫혀 있던 기억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힙니다.

그날처럼, 오늘도 빗방울은 커다란 유리창에 톡톡 경쾌하게, 그러나 어딘가 처연하게 부딪히며 저마다의 속도로 빠르게 흘러내립니다. 유리창 표면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들은 중력의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립니다. 때로는 서로 합쳐져 굵은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속도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각자의 길을 가기도 하며, 마치 예측 불가능한 우리네 삶의 여정처럼 복잡하고 불규칙한 궤적을 끊임없이 그려냅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활주로는 자욱한 물안개에 싸여 그 끝이 보이지 않고 희미하게 번져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이륙하거나 착륙하는 비행기의 깜빡이는 불빛만이 짙은 안개 속에서 마치 꿈결처럼, 혹은 신기루처럼 아련하게 반짝이며 부유합니다.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온 마른 이파리 하나가 젖은 유리에 잠시 앙상한 제 몸을 의탁했다가, 이내 힘없이 미끄러져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그 모습이 마치 덧없이 스러져 간 당신과 나 같아서, 찰나와 같이 짧았던 우리의 만남, 잠시 서로에게 기댔다가 결국은 각자의 길로 떠밀려 흘러가야만 했던 우리의 인연을 닮아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립니다. 가을의 끝자락에 매달린 낙엽처럼 이미 생명의 온기를 잃고 앙상하게 말라버린 우리의 관계, 그것은 이미 회복 불가능하게 생명을 다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잠시의 고통스러운 휴면기였을까요? 이제 와 답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겠지요.

물방울이 어지럽게 맺히고 흘러내리는 창 너머로, 서글픈 그리움이 얼룩진 내 얼굴이 희미하게 반사됩니다. 어두운 창을 배경으로 짙은 황갈색으로 떠오른 얼굴. 굳게 다물려 일자를 그린 입술과 깊은 우수에 잠긴 표정. 물기 어린 창에 비친 내 모습은 평소의 나와는 너무도 달라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예전보다 더 깊어진 미간의 주름, 더 어둡게 내려앉은 눈매, 중력에 굴복한 듯 힘없이 처진 입꼬리. 그리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조각가가 내 얼굴의 지형도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창에 어른거리는 이 모습이 혹시 당신의 기억 속에 남겨진 마지막 내 모습은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잠깁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아니, 기억하고는 있을까요?

그날,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지만, 후들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옅은 미소를 입가에 담은 채 당신을 보냈습니다. 차가운 공항의 검색대를 지나 보안 구역 안으로 점점 작아지며 멀어져 가던 당신의 뒷모습.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며 희미하게 흔들던 당신의 손짓. 그 찰나의 모든 장면들을 필름처럼 눈에 새기며,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의연하게 지켜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꾸역꾸역, 마치 무거운 돌덩이를 들어 올리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내면의 처참한 붕괴를 가리기 위한 너무나도 허약하고 투명한 가면일 뿐이었습니다. 당신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알았습니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진심으로 미소 짓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IV. 후회의 늪, 젖은 자화상

그러므로, 회한(悔恨)과 아련함이 뒤섞인 안개 같은 감정으로 가득 찬 이런 날에는, 후회를 아주 천천히, 찬찬히 시작해도 괜찮습니다. 마치 섬세한 자수를 놓듯, 지나간 시간의 결을 하나하나 더듬어보는 것입니다. 흐린 하늘 아래, 흐려진 마음으로, 초점 잃은 시선으로 지나가 버린 날들을 다시 되짚어봅니다.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차마 보여주지 못했던 진심들, 어긋나버린 선택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와서는 거대한 후회의 파도가 되어 기억의 해안으로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이 후회는 격렬하게 시작되지 않습니다. 마치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다가 점차 거센 폭우로 변해가는 것처럼, 후회도 처음에는 아주 작고 미미한 물방울처럼 시작하여, 점차 그 부피와 무게를 늘려갑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슬픔을 음미할 시간은 아직 충분하니까요.

나는 젖어가는 옷매무시를 정성스럽게 다듬고 거리로 나섭니다. 축축하게 젖어 몸에 감기는 옷깃을 여미고, 비에 젖어 이마와 뺨에 달라붙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정돈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외양을 가다듬는 의식이 때로는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인지요. 겉모습을 아무리 단정하게 꾸민다 한들, 이미 폐허처럼 무너져 내린 마음까지 정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거리로 나섭니다. 어쩌면 당신이 남기고 간 미세한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헛된 기대로, 혹은 당신의 희미한 그림자라도 쫓을 수 있을까 하는 미련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당신이 부재하는 이 잔인한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도망치기 위해.

차가운 칼날처럼 예리한 한 줄기 바람이 옷솔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살 속을 첨예하게 찌릅니다. 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온몸이 움츠러들며 떨립니다. 이 추위는 단순히 외부의 낮은 기온 때문만은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내면의 한기가 더해져, 뼈마디 사이사이까지 시리게 만듭니다. 당신이 떠나가며 내 안에 남겨놓고 간 그 거대한 빈자리가 만들어낸 냉기,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두꺼운 외투로도, 그 어떤 뜨거운 난로로도 결코 막아낼 수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지금 거울이 있다면, 나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추레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흠뻑 젖어 몸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는 옷을 입고, 비에 맞아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이마와 얼굴에 어지럽게 달라붙은 모습은 마치 주인에게 버려져 비에 젖은 채 길거리를 헤매는 개처럼, 혹은 낯선 땅에서 길을 잃고 지쳐버린 나그네처럼 보일 것입니다. 나는 이 거대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가장 고독하고 볼품없는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이 초라한 행색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습니다. 내 영혼이 이미 너무 많은 슬픔의 물을 머금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져 버렸으니까요.

이마와 얼굴, 그리고 지친 어깨 위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나는 속으로 되뇌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괜찮아, 이건 따스한 거야. 마치 그날 공항에서, 속절없이 당신을 떠나보내며 애써 웃음 지었던 것처럼. 얼어붙을 듯 차갑게 식어가는 손끝,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시야를 가리는 차가운 물줄기, 제멋대로 떨리는 입술, 내 몸의 모든 감각이 냉기에 포위되어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합니다. "괜찮아, 따뜻해." "아무렇지도 않아." 마치 그날, 당신의 뒷모습을 향해 속으로 외쳤던 "괜찮아, 나는 괜찮을 거야, 부디 행복해야 해"라는 말처럼. 때로는 이렇게 달콤한 자기기만이, 이 혹독한 현실을 견뎌내고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어기제이자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V. 불면의 밤, 기억의 가시

무거운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지만, 쉬이 닫지를 못합니다. 극심한 피로에 짓눌린 눈은 감기라는 안식을 완강히 거부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불면증이 아닙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잠을 허락하지 않는 것에 가깝습니다. 잠이 들면, 꿈속에서 당신이 예고 없이 나타나 나를 다시 흔들어 놓을까 두렵기도 하고, 혹독한 현실처럼 꿈에서조차 당신을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이 양가적이고 모순된 두려움 사이에서, 나는 속절없이 길고 어두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웁니다. 밤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깊고, 고요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무겁습니다.

눈을 감으면, 역설적이게도 당신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별이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당신은 내가 읽는 책의 행간마다 희미한 그림자처럼 흘러내리는 빗물 속에도 어른거리고, 창밖 밤하늘에 조촘조촘 머물다 가는 희미한 별빛 속에도 아련하게 묻어 있습니다. 마치 우주의 모든 미세한 입자들이 당신을 향한 나의 절절한 그리움으로 재배열되기라도 한 듯합니다. 당신은 이제 공기처럼, 빛처럼, 물처럼 자연의 일부가 되어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나는 당신을 온전히 만지거나 붙잡을 수 없습니다. 이 편재(遍在)하는 부재야말로 가장 잔인한 형벌입니다.

당신이 내 가슴 깊숙한 곳에 남기고 간 아픔, 그 날카로운 상처를 어떻게든 묻어버리려 애씁니다. 유폐시킨 기억의 관 위에 시간이라는 무거운 흙을 덮고, 망각이라는 단단한 돌로 짓눌러 봉인하려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깊이 파묻어도, 아무리 단단히 덮어보아도, 그 질긴 기억의 뿌리는 한 줄기 빛조차 없는 마음의 심연 속에서도 기어이 새록새록 싹을 틔웁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뚫고 자라나 나를 괴롭힙니다. 아무리 단단히 봉인하려 해도, 결국은 아주 작은 틈이라도 찾아 비집고 솟아오르는 끈질긴 생명력, 그것이 바로 당신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기억은 마치 살갗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 거스러미처럼 까칠하게 달라붙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힙니다. 때로는 너무 아파서 벽의 뭉툭한 모서리에 그 기억이 박힌 부위를 세게 비벼보기도 합니다. 문지르고 긁어내어 어떻게든 제거해 보려 하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고 더욱 깊이 파고드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 이 지독한 끌림. 이 고통스러운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다른 것에 집중하려 애쓰기도 합니다. 절에서 들려오는 듯한 단조로운 목어 소리에 억지로 박자를 맞추며 의미 없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려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세상의 모든 소리는 당신의 목소리로 변환되어 내 귀에 되돌아오고, 모든 풍경은 당신의 얼굴로 수렴됩니다.

그러나 문득, 기억 속 당신의 얼굴 위로 시선이 머뭅니다. 슬픔에 젖어 웅크린 당신의 모습, 그리고 그 눈가에 맺혔던 투명한 눈물. 그 눈물만이 이제는 쓸쓸하게, 저물어가는 하늘의 자몽 빛 같은 노을 속으로 천천히 증발하며 말라가는 듯 보입니다. 황혼이 물드는 하늘, 붉은색과 주황색, 노란색이 뒤섞인 구름 사이로 당신의 눈물이 수증기가 되어 사라지는 그 이미지는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동시에 극심한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마치 잘 익은 자몽의 달콤함과 쌉싸름한 쓴맛이 공존하는 것처럼, 지극한 아름다움과 견딜 수 없는 슬픔이 함께하는 찰나의 순간입니다. 당신의 눈물이 노을에 스며들어 함께 저물어 가는 그 모습은 슬프도록 찬란하며, 그 비극적인 아름다움은 내 안에 더욱 깊고 근원적인 상실감을 불러일으킵니다.

VI. 시간의 메아리, 젖은 발걸음

문득, 아주 아득한 곳에서부터 그날의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합니다. 시간의 여러 갈래를 거슬러 올라와 도착한 당신의 목소리, 그날 당신이 내뱉었던 그 언어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혹은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이즈 섞인 음성처럼, 희미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분명하게 인식되는 그 소리들. 작별을 고하던 당신의 말들, 어쩌면 변명이었을지도 모를 그 단어들. 그것들은 이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무게와 의미로 해석되어 현재의 내 마음에 서늘하게 내려앉습니다. 당시에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말들의 숨겨진 의미가 시간이라는 필터를 거쳐 이제야 서서히, 그러나 아프게 깨달아집니다.

불연속적으로, 마치 변덕스러운 아이처럼 비가 흩날립니다. 잠시 잦아드는가 싶다가도 이내 다시 세차게 내리붓기를 반복합니다. 마치 불규칙하게 뛰는 내 심장 박동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리듬으로 도시는 끊임없이 젖어갑니다. 이 예측 불가능한 불규칙함이 나를 더욱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듭니다. 잠시 멈췄다가 다시 거세게 시작하는 비처럼, 당신에 대한 기억과 슬픔 또한 잠잠해지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불현듯 폭우처럼 쏟아져 내려 나를 속수무책으로 잠식합니다.

나의 헐렁한 파란색 바지는 이미 빗물에 흠뻑 젖어 무겁게 늘어져 있습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짓단이 부품하게 해진 슬픈 물방울들을 필사적으로 털어내려는 듯 버둥거립니다. 그 미약하고 부질없는 몸짓이 마치 내 안에 고인 슬픔을 어떻게든 털어내려는 나의 필사적인, 그러나 헛된 노력처럼 보여 애처롭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털어내려 애써도, 하늘에서는 새로운 빗방울들이 끊임없이 내려와 다시 바지를 적십니다. 털어낼수록 더 많은 물방울이 맺히는 이 아이러니처럼, 잊으려 발버둥 칠수록 더 많은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덮칩니다.

힘겹게 내딛는 나의 걸음은, 발치에 질척하게 쌓여가는 미련의 늪을 좀처럼 떨쳐내지 못합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의식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발밑에는 여전히 당신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진흙처럼 쌓여 발목을 붙잡습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여 있던 물웅덩이가 첨벙거리며 튀어 올라 발목과 바지를 더욱 차갑게 적시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와 과거에 머무르려는 미련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그래서 나의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 속절없이 멈춰 서기도 합니다.

문득, 기억 속 당신의 젖은 속눈썹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길고 검은 속눈썹 위에 영롱하게 맺혀 있던 작은 물방울들. 그것은 정말 빗물이었을까요, 아니면 슬픔이 응결된 눈물이었을까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그 질문, 그 희미한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나의 코끝은 시큰거리며 시려옵니다. 마치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급하게 들이마신 것처럼, 가슴이 조여들고 순간적으로 호흡이 가빠집니다. 아, 그리움이란 것은 때로 이렇게 예고 없이, 날카로운 물리적 고통으로 전환되어 나를 엄습합니다.

VII. 봉인된 그리움, 마르지 않는 비

떨어져 나가기를 거부하는 끈질긴 그리움은 이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몸 안 어딘가에 자리를 잡습니다. 마치 길 잃은 작은 짐승처럼, 옆구리 어디쯤에 위태롭게 쭈그리고 앉아, 내 속 깊은 곳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당신의 형상에게 닿을락 말락,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뻗고 있는 듯합니다. 이 닿을 듯 말 듯 한,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불안정한 거리감이 나를 더욱 초조하고 애타게 만듭니다. 그 존재는 때로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내 가슴을 할퀴고, 때로는 차가운 손으로 목을 조이며, 이제는 옆구리에 웅크린 채 조용히 나를 잠식해갑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온전히 보낼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계절이 수없이 바뀌어도, 당신을 향한 이 지독한 마음은 여전히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이별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아직 그 어떤 작별의 의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남긴 무수한 흔적들을 차마 지우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지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이야말로 내가 가진, 당신이라는 존재의 유일한 증거이자 흔적이기에, 그것마저 사라지면 당신이 정말로 내 삶에서 완전히 소멸해버릴 것만 같아서 두렵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무심하게 비를 쏟아냅니다. 비는 아직 그칠 줄을 모릅니다.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이어지는 저 굵은 물줄기는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씻어내고 잠식할 것처럼 끝없이 이어집니다. 저 하늘의 모습은 어쩌면 내 안의 풍경과도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언제 마를지 기약할 수 없는 내면의 슬픔의 비, 언제 그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폭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끝내 삼켜버린 수많은 말들이 혓바닥 위에서 버석거리며 마릅니다. 당신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고백들, 차마 꺼내지 못했던 진심들, 그리고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위로의 말들. 그 모든 미완의 언어들은 이제 내 안에서 제대로 발화되지 못한 채 썩어가며 희미한 악취를 풍기는 듯합니다. 말하지 못한 사랑의 절절한 고백, 듣지 못한 이별의 따뜻한 위로, 그 모든 불완전하고 옹이진 언어들이 마치 무거운 추처럼 혀를 짓누르며 나를 침묵 속으로 더욱 깊이 밀어 넣습니다.

VIII. 푸른 물무늬, 보랏빛 설움

하늘을 흠뻑 적셨던 물이 이제는 텅 빈 거리를 온통 푸른 물무늬로 일렁이게 합니다. 비에 젖어 검게 빛나는 아스팔트 위로, 역설적이게도 비구름 사이로 간신히 드러난 푸른 하늘의 조각들이 어른거리며 반사됩니다. 마치 땅과 하늘이 서로 뒤바뀌어 버린 듯한 초현실적인 착각에 잠시 빠져듭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푸른 물웅덩이가 튀어 오르는 이 감각은, 마치 내가 신성한 하늘 위를 함부로 밟고 지나가는 듯한 불경스러운 느낌마저 줍니다. 이 텅 빈 거리에는 비에 젖은 나와 내 그림자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증발해버린 것만 같은, 지독하고 서늘한 고독감이 온몸을 휘감습니다.

아까보다 한결 미세해진 바람이 이제는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집니다. 그 감촉은 놀랍도록 당신의 숨결을 닮았습니다. 한없이 순수하고 티 없이 맑았던, 그래서 더 아프게 기억되는 당신의 순일(純一)한 마음결이 바람을 타고 내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습니다. 그 연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내 살갗에 와 닿을 때마다, 나는 마치 당신의 따스한 손길이 내 곁에 머무는 듯한 달콤한 착각에 잠시 빠져듭니다.

이 온기는 내 속에서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핏기 없이 쇠잔했던 그리움에 스며들어 그것을 서서히 아늑하고 부드러운 노란빛으로 물들입니다. 처음에는 날카로운 통증으로 다가왔던, 앙상하고 창백했던 그리움이 이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포근하고 익숙한 온기를 지닌 감정으로 변모해가는 과정. 그것은 마치 깊은 상처가 천천히 아물면서 피부 위에 영원히 남게 되는 희미한 흉터와도 같습니다. 여전히 아프지만,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내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흔적.

차갑게 얼어붙어 단단하게 굳어진 줄만 알았던 기억의 빙하 사이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미세한 틈을 비집고 실핏줄처럼 스며듭니다. 그리고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 가팔라지는 해거름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럽게 넘어옵니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힘없이 스러져가는 이 시간, 세상의 모든 빛이 소멸해가는 이 순간에는, 이유 모를 서러움 또한 그 그림자처럼 함께 길어지고 깊어집니다. 희망보다는 체념이 어울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또 하루만큼 당신과 나는 물리적으로 더 멀어졌습니다. 그 명백한 사실 앞에서, 나는 여전히 미욱하게도, 해 질 녘 하늘을 물들이는 깊고 고고한 보라색 설움 속에 잠겨듭니다. 보랏빛, 그것은 붉은 열정과 푸른 슬픔이 뒤섞인, 가장 깊고 복합적인 비애의 색채입니다. 내 마음 또한 저물어가는 하늘처럼 짙은 보라빛으로 속절없이 물들어갑니다. 이 슬픔에서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뾰족한 바늘잎을 가진 침엽수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깊은 숲속, 그 아슴푸레한 그늘 아래로 떨어지는 막연한 눈물 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숨어들기도 합니다. 날카로운 바늘잎들 사이로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방울, 그것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만의 은밀하고 고독한 슬픔입니다. 그 짙고 축축한 슬픔 속으로 더욱 깊이 몸을 웅크리고, 세상의 모든 소음과 시선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킨 채, 나만의 어둠을 위태롭게 껴안습니다.

이 비틀거리는 걸음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허우적거립니다. 그리고 입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옹색하고 파편화된 문장들이 나직하게 읊조려집니다. 온전한 문장을 이루지 못하는 중얼거림, 맥락 없이 터져 나오는 단어들. 그것은 내 안에 소용돌이치는 혼란과 슬픔을 그대로 반영하는 언어의 잔해입니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너무나도 많지만, 그것들을 온전히 담아낼 적절한 그릇, 즉 언어를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의 언어는 점점 더 옹색해지고, 나의 걸음은 더욱 위태롭게 비틀거립니다.

하지만 이제 내게 다른 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색들은 의미를 잃었습니다. 오직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지고 선명해지는 당신의 색채, 그 농도 짙은 당신의 채도만이 내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효합니다. 나의 세상은 이제 온전히 당신이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인식되고 채색됩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당신은 여전히 내 안에 있습니다. 아마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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