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이미 여러 번 겪었으니 어찌 보면 안 오는 게 이상한 거였다. 남극 대륙과 가까운, 춥고 외진 섬에 인간이 발자취를 남기는 순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이 섬에만 살던 <앤탁틱디오스흡혈박쥐>는 펭귄보다 따뜻하고 맛있는 인간의 피에 환장하게 되었다. 수백 마리의 박쥐 떼가 두툼하게 가려진 방한복 사이에 드러난 인간의 얼굴 살을 쪼아대기 시작했다. 혼비백산한 촬영팀들은 서둘러, 타고 온 보트를 몰아 본선으로 도망갔다. 일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재앙은 지금부터였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도착한, 영국 BBC 다큐멘터리 팀은 2주간의 휴가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섬에서 돌아온 뒤 대략 90일쯤, 촬영팀 직원들이 하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고열과 복통, 피부 발진, 홍반, 괴사, 오심, 구토, 설사, 출혈까지, 바이러스 감염 질환의 모든 증상을 겪은 그들은 병원 입원 후 며칠 만에 모두 사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게 어느 정도의 재앙인지는.
아일랜드에서 시작한 전염병은 며칠 만에 영국 전역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불과 몇 달 뒤, <앤탁틱디오스흡혈박쥐>의 학명에서 이름 지어진, <디오스 바이러스>에 의해 전 세계 1억의 인구가 사라졌다. 통계에 의하면, 앞으로 1년 이내에 10억의 인구가 사망할 것으로 내다봤다. 각국의 모든 국경이 봉쇄되고, 도시에 사는 인간은 집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인간의 행위가 멈췄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시간문제였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무척 똑똑했다. 그리고 나는 대단히 성공한 사업가다. 나는 적은 수고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나는 영악하고 냉혈한이다. 나는 더러운 빈민가에서 자라, 아무리 울어도 내 입에 젖꼭지를 물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 깨우쳤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학교 폭력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깨달은 나는, 나의 자존심을 쓰레기통에 가차 없이 처박아 버리고, 녀석들이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갖다 바쳤다. 그들의 따까리가 되어 나만큼 비천하고 만만한 학우들을 쑤시고 다녔다. 그리고 깨달았다. 돈이 권력이라는 사실을.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그리고 보았다. 불법 온라인 음란사이트가 대단히 큰돈을 번다는 것을. 개발자를 끌어모으고 가출 여자들을 섭외하여 사이트를 개설했다. 물론 바지사장도 내세웠다. 돈이 쏟아졌다. 하지만 절대로 국내에서는 오래 할 수 없는 것. 서버를 외국으로 옮겼다. 그때 나는 루마니아를 알게 되었다. 연이어 불법 도박 사이트도 개설했다. 나는 루마니아와 한국을 오가며 떼돈을 벌었다. 학창 시절 나를 두드려 패던 녀석들이, 이제 모두 내 밑에서, 굽신거리며 내게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한국의 사법 시스템이 결코 나를 그냥 둘 리가 없다는 것을.
블라드 체페슈
나는 루마니아의 쓰러져가는 고성을, 현지인을 대리로 내세워 헐값으로 샀다. 그리고 그 주변, 산과 호수, 밭을 모두 사들였다. 그리고 성을 보수했다. 호텔과 카페테리아, 연회장을 만들고 테마파크도 집어넣었다. 그리고 <블라드 체페슈> 성으로 국내에 광고했다. 마치 그 유명한 드라큘라 백작의 성인 것처럼 포장하고 광고하여 한국 관광객들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루마니아를 왔다 갔다 하는 합법적인 사업가로 보이려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관광객 유치에는 다소 소극적이었다. 그보다는 더 중요하고 은밀한 돈벌이가 여기에 있었다. 나의 표적은, 돈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가진, 재벌 2세나 졸부들이었다. 그들의 일탈과 탐욕을 이용하기 위한 거였다.
그러려면 우선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어야 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은밀하고 안전한 곳을 본능적으로 선호한다. 나는 나의 성과 숲, 호수를 아우르는, 아주 높은 담을 쌓았다. 그리고 전류를 흘려보내 감히 누구도 담치기를 못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숲에는 다양한 짐승을, 호수에는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를 풀어놓았다. 그중에는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한마디로 사파리를 조성했다. 그리고 이곳 공무원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카지노 운영권을 따냈다.
성의 내부와 주변에도 다양한 시설을 마련했다. 카지노뿐만 아니라 오락실, 사우나, 수영장, 안마소, 실내 골프, 테니스장, 영화관, 레스토랑, 커피숍 그리고 드랴큐라를 주제로 한 공포 테마파크까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시설은 이 성의 지하에 있었다. 나는 이것을 기획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연히 다큐멘터리에서 본, 400년 만에 발견된 죽음의 동굴에서 착안하여, 나는 인간의 공포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행했다. 나는 깊은 동굴을 팠다. 그런데 구멍을 한 개만 판 게 아니었다. 입구에서 조금 가면 2개의 구멍이 나왔다. 파란 구멍, 빨간 구멍. 이것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진실을 알기 위한, 빨간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서 따왔다. 2개의 구멍 중 하나를 선택하여 십여 미터쯤 가면 다시 2개의 구멍이 나왔다. 역시 빨간 구멍, 파란 구멍. 해답은 둘 중 하나. 끝까지 틀리지 않고 제대로 답한 사람은 가장 빨리 출구를 나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동굴에서 좀 돌아야만 했다.
나는 지하 동굴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공포 소품 제작자로 유명한 사람을 고용하여 동굴 전체를 괴기스럽게 꾸몄다. 나의 왕궁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 운영 인력이 필요했다. 나의 성을 지켜줄 보안요원과 동유럽의 쭉쭉 빵빵 미녀들을 모집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돈만 거둬들이면 되었다. 나는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 세상 부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당신이 욕망하는 모든 것을, 오로지 선택받으신 분만, 이곳 블라드 체페슈 성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카지노 이용객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테마파크 등 모든 위락시설이 무료입니다.>
예상대로였다. 나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스스로 개척했다. 나는 늘 내가 냉정한 천재라고 느꼈다. 돈벌이에 관한 한 나를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항상 생각했다. 모든 호텔 객실이 고객들로 꽉 찼다. 그들은 근사한 아침을 먹고, 사우나에서 안마받고, 숲과 호수에서 사냥과 낚시를 즐기다가, 자신이 손수 잡은 신선한 고기로 배를 채운 뒤, 카지노에서 도박하고 미녀와 함께 테마파크에서 음탕한 공포를 체험하면서, 하루를 쾌락답게 보내는 거였다. 소문은 부자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졌다. 일 년 치 예약이 모두 찼다. 나는 스위스 비밀 계좌에 부지런히 돈을 갖다 날랐다. 적어도 <디오스 바이러스>가 세상을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 우리는 알고 있었다. 괴상하고 괴기한 바이러스가 하나씩 둘씩 나타나서, 툭하면 사람을 괴롭히며 우리 곁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나는 진작 알아봤고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나는 팬데믹 시대에도 큰돈을 버는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했다. 나는 나의 왕국 곳곳에 은밀하게 식품저장소를 설치하고, 오래 보관이 가능한 가공식품을 저장했다. 적어도 1년 동안은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그리고 각종 소독약과 항생제, 의료 장비, 방독면을 대량 구매하고 차단막을 모든 방에 설치하였다. 연료를 대량 확보하고 자가전기설비를 갖췄다. 그리고 유럽의 특수 용병 출신의 보안요원과 군사 장비, 폭탄을 곳곳에 배치했다. 게다가 최첨단 백신 개발 연구소에 막대한 후원금을 냈다. 이 연구소는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 있으므로, 완전히 고립된 곳이었다. 또 한 가지, 나는 우리 성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헬기장과 격납고를 만들고 헬기를 마련했다.
성의 중심, 대형 홀에는 초대형 TV를 설치했다. TV에서는 24시간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세상의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리고 내 비장의 무기. 나는 할리우드의 특수효과 전문 감독들을 끌어모아 영화를 대량 제작했다. 질보다는 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긴 영화를 요구했다. 그리고 영화 편집자들을 모집했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나온 영화 중 지구 멸종을 다룬 필름을 모아 짜깁기를 요구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나는 이제 귀를 쫑긋 세우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슬픈 소식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은 생각보다 무척 빨리 다가왔다. 바이러스는 인류를 멸종시킬 기세로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나는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 세상 부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당신이 바이러스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오로지 선택받으신 분만, 이곳 블라드 체페슈 성에서 1년간 안심하고 머물 수 있습니다. 모든 약과 의료 장비가 준비되었고, 모든 곳이 100% 완벽하게 살균되었습니다. 바이러스가 사라질 때까지 하루하루 즐거운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선착순 딱 100명만 받겠습니다. 서두르시기를 바랍니다. * 카지노 1년 VIP 정회원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테마파크 등 모든 위락시설이 무료입니다.>
불과 사흘 만에 100명의 회원을 채웠다. 전세계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부자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전 직원들에게 미리 알린 대로 명령했다. 동서남북, 성의 모든 문이 굳게 닫혔다. 담장의 전력을 최대치로 올리고 각 초소에는 24시간 비상 대기 체제로 들어갔다. 이제 나의 왕국에는 쥐새끼 한 마리 들어 올 수 없게 만들었다. 모든 시설은 매일 살균했다. 그리고 성내 모든 인원은 의무적으로 1주일에 1회 바이러스 검사를 받도록 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우리는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TV에서는 매일 아비규환으로 변해가는 세상의 소식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성의 입주민들은 그저 불구경하듯 쳐다볼 뿐이었다. 이곳 삶은 온갖 탐욕과 쾌락의 결정체였다. 홀에서는 매일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마음껏 사냥하고 먹고 마시며, 도박하고 남녀가 어울렸다. 그들에게 바깥은 단지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인간이 되기 위한 나의 마지막 계획을 실행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나는 드랴큐라 성주답게 그들의 피를 남김없이 쭉쭉 빨아 먹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싱싱한 생고기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한 달쯤 지나자, 숲과 호수에 풀어 놓은 야생동물이 거의 멸종상태였다. 그러니 모든 음식은 통조림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차츰차츰 가공식품에 질리기 시작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최고의 쉐프가 아무리 맛있게 통조림으로 요리를 해도, 신선한 생고기의 풍미를 잡을 수는 없는 법. 나는 이것도 이미 예상하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싱싱한 고기를 얻는 방법. 의외로 간단했다. 나의 성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소문이 이미 쫙 퍼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성 주변에는, 매일같이 바이러스의 공포를 피해 주위를 서성이는 이들이 차고 넘쳤다. 그중에 젊고 토실토실한 이들을 골라 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이러스 검사 명목으로 그들을 격리했다. 그곳은 모든 전파가 차단된 방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휴대전화기는 무용지물이었다. 대신 게임기와 TV가 그들의 무료함을 달랬다. 그리고 매일 풍성한 가공식품을 그들에게 먹였다. 그들은 만족한 돼지로 차츰차츰 변했다.
한편, 주방에서는 그날 필요로 하는 생고기 양을 산정해서 격리실 관장에게 전달한다. 그러면 관장은 필요한 수의 인간을 뽑아 가스실로 그들을 보냈다. 물론 그들에게는 격리기간이 끝났으니 이제 이 성에서 마음껏 살 수 있다는 담당자의 말에,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가스실로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보아온 장면이 나타난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히틀러의 멋진 유산. 홀로코스트의 백미. 가스실 명판은 당연히 <살균실>로 되어 있다. 그 방에 모인 이들은 우선 모든 옷을 벗어 세탁실 바구니에 담아둔다. 모든 귀중품은 자신의 이름을 적은 박스에 보관한다. 그렇게 나체가 된 그들은, 재스민 향이 가득한 가스실에서 행복을 느끼며 저세상으로 간다. 얼마 뒤, 환기가 끝난 가스실에 직원들이 나타나 죽은 이들을 캐리어에 담아 <해체실>로 보낸다.
그날 저녁, 신선한 생고기로 만든 향긋한 스테이크가 제공된다.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들은 서둘러 자신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멋진 말을 남긴다. 천국의 맛. 내 생애 최고의 스테이크. 고든 램지가 울고 갈 천생(天上)의 고기 맛. 비건이 아닌 게 천만다행. 이건 그냥 고기가 아냐! 신이 내린 축복이야!….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신선한 생 살코기에 고소한 참기름을 뿌려 만든 육회, 막 짜낸 피를 깨끗하게 굳히고 당면을 넣어 만든 아바이 순대, 남은 살코기를 갈아서 만든, 두툼한 수제 햄버거 패드, 대가리를 푹 삶아 압착기에 꾹 눌러 만든, 쫄깃한 머리 고기, 정력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상남자를 위해 제공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간 요리….
그렇게 사람들은 점점 인육에 미쳐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나의 성을 점점 괴기스럽게 꾸미기 시작했다. 내게는 뼈를 발라내고 남은 많은 찌꺼기가 있었다. 피, 머리, 해골, 손가락, 발가락, 머리카락, 껍질, 내장까지…. 그러므로 값싸고 손쉽게 공포스러운 장식을 추가할 수 있었다. 우선 피를 곳곳에 뿌려 사람들이 비린내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인육에 미친 그들은 손쉽게 비린내에 물들었다. 그리고 방부 처리한 각종 인간 부산물을 이용한 장식을 매일 조금씩 조금씩 설치해 나갔다. 점점 나의 성은 기괴한 뱀파이어로 변해갔다.
나는 나의 원대한 계획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무르익어 가는 현실에 깨춤을 출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점점 심하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학수고대했던 바로, 그 지하 동굴을 이제 저들에게 소개할 때가 된 거였다. 이 세상 최고의 사기꾼만이 할 수 있는, 내 생애 최고의 작품. 블라드 체페슈 지하 동굴을 공개합니다. 여러분에게…. 하지만 잠깐, 그에 앞서 나는 몇 가지 선행작업을 시작했다.
아마겟돈
어느 날, 나는 나의 궁전의 모든 전파를 차단했다. 이제 외부와의 어떤 통신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내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수많은 영화를 TV로 하나씩 하나씩 내보내기 시작했다. 모든 영화의 내용은 간단했다. 기자가 화면에 나와 마치 긴급 속보를 전달하는 것처럼, 긴박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뭔가에 쫓기듯이 카메라를 흔들며 뛰어다녔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지구의 종말. 아마겟돈이었다. 저 멀리서 번쩍이는 섬광과 굉음이 쏟아지고 사람들의 비명도 적절하게 집어넣었다. 차들은 뒤엉켜 불타오르고 건물은 멀쩡한 게 하나도 없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부서졌다.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는 통곡하고, 슈퍼마켓은 약탈자로 가득하고, 곳곳에서는 대포 소리 기관총 소리가 난무했다.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사람들이 모두 홀에 몰려들어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때쯤 나는 회심의 자막을 TV 화면에 흘려보냈다. <미국 주요 도시 피폭…. 원자폭탄으로 추정…. 미국과 유럽 연합 즉각 중국과 러시아에 선전포고…. 모든 통신 불능….>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황급히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모든 연락은 단절된 상태. 이제 그들의 눈과 귀는 오직 이 TV에만 의존할 뿐이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나는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켰다.
“친애하는 블라드 체페슈 성 입주민 여러분…. 저는 이 성의 성주입니다. 여러분이 방금 뉴스로 보시다시피, 세상은 팬데믹 이후 강대국 간의 반목과 불화로 인해 대재앙 수준의 전쟁에 직면했습니다. 세상은 파괴되고 종말로 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통신은 단절되었습니다. 그나마 TV 케이블 선은 아직 유지되고 있지만,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곳은 이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합니다. 핵전쟁에 대비한 지하 벙커 시설과 방독 시설, 약품과 식품저장 시설이 모두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안전한 이곳에서 평화가 올 때까지 편안히 계시며 일상생활을 즐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단상을 내려왔다. 몇몇 사람은 내게 다가와 고맙다며 악수를 청하였다. 나는 다정한 미소로 그들을 다독였다. 그리고 나는 내 속을 가득 채운, 더러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카지노의 기본 판돈을 대폭 올렸다. 그리고 모든 무료 서비스를 유료로 바꾸었다. 그리고 턱없이 비싼 값을 매겼다. 특히, 생고기의 값을 어마어마하게 올렸다. 인육에 중독된 입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주관하는 신이다. 내가 내 세우는 논리는 단 하나였다. 이거면 그들의 불만 섞인 입을 확실하게 막을 수 있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비축한 자원은 한정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최대한 버틸 수 있도록 아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 당장 나가도 된다. 다만 한번 나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입주민들의 원성은 당연하게도 쑥 줄어들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세상에는 불평불만 자들이나 뭐든지 삐딱하게 반응하는 놈, 선동을 부추기는 자들이 존재하는 법. 그들은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채, 피 같은 자기 돈이 턱없이 비싼 사용료로 빠져나가는 것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며, 노골적으로 항의를 하면서 동조자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예측하고 해결책을 진두지휘하는 능력자가 아니던가!
어느 날 나는 불만 세력 중 가장 목소리가 큰 녀석을 내 방에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알베르입니다.” 그는 약간 거만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당신은 성 외부의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가요?” 나는 차분하게 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보고 싶습니다. 사실 입주민 중에 의심하는 자들이 꽤 많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바람을 드러냈다.
“물론 그러시겠죠. 사람은 자신이 직접 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의심하는 버릇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일주일을 드리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셔서 직접 보고 체험한 내용을 제대로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마치 자애로운 아비가 된 것처럼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더한 나위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성주님.” 그는 마치 은혜를 받은 성도처럼 기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다만, 외부로 향하는 모든 문은 납으로 완전히 봉쇄되었고, 또 나가는 모습을 다른 분들이 보게 되면 동요가 심해질 수 있으므로, 은밀하게 외부로 통하는 지하통로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집사의 안내를 받기를 바랍니다.” 나는 간단하게 외부에서 주의해야 할 수칙을 알려주고 필요한 장비 및 촬영 도구가 든, 작은 배낭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꼭 날짜 안에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집사의 뒤를 따라갔다.
동굴
집사와 알베르는 동굴 입구에 다다랐다. 동굴에는 곳곳에 CCTV가 마이크와 함께 설치되어 있다. 카메라가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촬영 영상은 자동으로 메인 서버에 저장이 되었다. 나는 모니터실에서 그들은 지켜봤다. 집사는, 거의 여든이 다된 할아버지다. 그는 알베르를 지긋이 쳐다보며 천천히 말을 했다.
“이곳은 원래 공포 테마파크로 만든 인공 동굴입니다. 고객님도 잘 아시다시피 드랴큐라가 우리 성의 메인 테마이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알베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므로, 가시는 중간마다 무서운 장면이 연출될 것입니다. 놀라거나 당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인형일 뿐입니다.”
“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들은 소곤거리듯이 말을 했지만 내 귀에는 속속 들어왔다. 나는 마이크 성능에 만족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린다면, 이 동굴은 10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즉, 10단계입니다. 그리고 단계마다 2개의 구멍이 나타납니다. 빨간색과 파란색 구멍. 그냥 재미로 만든 거니 당황하지 마시고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가시면 되십니다.”
“어느 곳으로 들어가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건가요?” 알베르는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봤다.
“네, 한 곳은 다음 단계로, 나머지 한 곳은 빙글빙글 돌아 다시 원위치로 나옵니다. 그러니 잘못된 구멍으로 들어가셔도, 어차피 나와서 처음에 선택하지 않은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시면 다음 단계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쉽죠?”
“아,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혹시 해답지 같은 거 있지 않나요? 각 단계에 무슨 색 동굴로 들어가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알베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노인에게 물었다.
“해답은 없습니다. 알베르 님이 구멍 입구에 멈추는 순간, 바닥에 설치된 발판이 시스템에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메인 작동 프로그램이 무작위로 빨간색과 파란색을 순간적으로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게 정답인지 모릅니다. 그 순간 컴퓨터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꽤 신경을 쓴 부분이었다. 나의 멋진 동굴 시스템. 나는 이제 내가 설계하고 만든 이것이 내 생각대로 진행되는지를 설레는 가슴으로 지켜보고 있다.
“네, 알겠습니다.” 알베르는 마지 못한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각 구멍의 입구에는 알약이 놓여 있습니다. 그 약은 설탕에다가 약간의 진정제 성분을 추가했습니다. 동굴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여러 가지 기괴한 형태를 연출하다 보니 일부 관람객들이 본의 아니게 극심한 공포를 느껴 뜻하지 않은 사고를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약을 준비했으니 혹시 불안감이 커지거나 공포를 제어할 수 없다고 느끼시면 약을 드시기를 추천합니다.” 내 비장의 무기. 그건 진정제가 아니라 환각제였다. 공포를 더욱 두렵게 느낄 수 있는….
집사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 그리고 이 동굴에 한 번 들어가게 되면, 출구는 딱 하나입니다. 즉, 뒤돌아 나올 수는 없습니다.” 집사의 말에 알베르는 당혹스러운 듯 그의 얄팍한 입술을 말아서 입술로 자근자근 씹기 시작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잘못되어도 1시간 내에는 출구를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행운을….” 집사는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알베르를 쳐다봤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믿고….” 알베르는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듯이 결심을 하며 대답했다.
집사는 나가고 이제 알베르 혼자 동굴 입구에 남았다. 그 순간, 동굴 입구의 문이 쇳소리를 심하게 내며 열렸다. 그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발을 옮겼다. 그가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쾅' 하고 닫혔다. 그는 놀란 듯 주춤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때, 안내 방송이 울렸다.
“블라드 체페슈 지하 동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60초 뒤에 당신 앞에 빨간 구멍과 파란 구멍이 나타날 것입니다. 당신의 현명한 선택이 당신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동굴 내의 그의 행동은 모두 녹화가 되고 있었다. 나는 느긋이 앉아 내 첫 고객의 반응을 살펴봤다. 알베르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의 기대에 꼭 들어맞는 인간이었다.
이윽고 빨간 구멍과 파란 구멍에 조명이 들어왔다. 작지만 그 끝을 알 수 없어 보이는 구멍 속을 알베르는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빨간 구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성인 어른이 수그려서 겨우 들어갈 정도의 높이를 그는 끙끙거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점점 깊게 들어갈수록 높이는 올라갔으나 폭은 좁아지고 조명은 더욱 검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상한 짐승의 울부짖음과 바람 소리가 흘렀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옆에서 튀어나와 그를 옭아맬 듯한 분위기였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완전히 겁에 질려 넋이 나간 듯 보였다. 나는 그를 지켜보며 참을 수 없을 만큼 웃음이 나왔다. 나의 완벽한 늪에 그는 완전히 빠진 듯 보였다.
나는 이제 그를 슬슬 골탕 먹이며 갖고 놀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패널에 있는 <블러드>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동굴 천장에서 핏방울이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100% 순수 사람 피였다. 흔한 게 사람 피인데 굳이 값비싼 가짜 피를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피는 알베르의 머리와 어깨를 적시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붉은 조명 속이라 물방울로 생각했다가 냄새를 맡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의 얼굴을 줌으로 당겨 확대된 화면을 보았다. 혼자 보기 너무 아까운 장면이었다. 악마에게 혼이 다 뺏긴 표정이었다. 그는 몇 번 더 주춤하며 비실거리다가 뭔가 작정을 했는지 갑자기 속도를 내어 뛰기 시작했다. 어둡고 좁고 울퉁불퉁한 동굴 속에서, 그는 부딪히고 넘어지고 괴성을 지르다 울먹이기까지 하면서 필사적으로 동굴을 빠져나왔다. 나는 이 모든 영상이 고스란히 촬영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백마 탄 왕자처럼 훌훌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그가 겨우 빠져나온 동굴은 바로 그의 출발지였다. 그는 빙글빙글 돌아 원위치에 다시 섰다. 그의 옷과 살갗은 군데군데 찢기고, 다리는 서 있기조차 힘들게 부들거렸다. 그는 동굴 입구에 놓여 있는 알약을 보자마자 대번에 삼켰다. 그리고는 파란 구멍으로 비실거리며 들어갔다. 그가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푸른 조명은 서서히 검푸르게 변하였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그는 이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어기적어기적 나아갔다.
나는 이때, <아이스>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동굴의 바닥에 핏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질퍽질퍽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닥의 핏물은 얼어붙기 시작했다. 쩍쩍 발이 달라붙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알베르의 입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나는 <미끄럼> 버튼을 눌렀다. 동굴의 바닥이 서서히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이 동굴을 이렇게 훌륭하게 꾸민 할리우드 특수 제작팀에게 깊은 감사를 드렸다. 알베르는 잠시 버둥거리다 속절없이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부정하고 모난 동굴을 그는 수십 차례 받혀가면서 튕기듯이 동굴을 빠져나갔다. 그는 바닥에 나 뒹굴어진 채로 한동안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 이런 방송이 들려왔다.
“고객님, 축하드립니다. 1단계를 무사히 건너셨습니다. 2단계도 변함없이 빨간 구멍과 파란 구멍이 60초 뒤에 나타났습니다. 당신의 현명한 선택이 당신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알베르는 악을 쓰며 겨우 일어났다. 그는 또 일어나자마자, 구멍 입구에 놓인 알약을 꼴딱 삼켰다. 아무리 약한 환각제라고 하지만 벌써 2알을 삼킨 그는, 허공에 뭔가가 나타났는지 팔을 휘우 적 휘우 적 저으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파란 구멍으로 먼저 들어갔다. 나는 그를 보면서 물에 빠진 생쥐가 불현듯 생각났다.
어릴 적 나는 저지대 빈민촌에 살았다. 낡은 집과 집 사이에 아주 좁은 도랑이 흘렀는데 그곳은 쥐의 천국이었다. 나는 집안 어디를 가든지 쥐와 마주쳤다. 변소에도, 부엌에도, 안방에도, 다락방에도 내 시선이 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쥐들이 몰려다녔다. 하릴없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았던 아버지는, 유난히 쥐를 무서워하는 어머니를 위해 매일 쥐덫을 놓았다. 철사로 엮어 만든 길쭉한 직육면체의 쥐덫 안에 미끼를 달아 놓고 문을 열어 두면 어김없이 다음날, 까만 눈동자에 겁에 잔뜩 질린 쥐가 걸려들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녀석을 곱게 죽이지 않았다. 빨간 대야에 물을 절반쯤 받아 놓고는 쥐덫을 거기에 담가 두었다. 그리고 꼭 나를 불렀다. 우리 부자는 다정하게 앉아, 좁은 우리 안에서 숨을 쉬려고 코끝을 하늘로 향한 채, 발버둥 치며 수영하는 쥐를 재밌게 감상하곤 하였다. 그러다 결국, 쥐가 죽으면 아버지는 가죽을 벗기고 손질을 한 다음, 연탄불에 쥐 고기를 구웠다. 그 향긋한 향기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고기가 빨리 익기를 학수고대했다. 특히, 나는 쥐의 대가리를 아주 좋아했다.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셨던 나의 아버지는 모든 쥐의 대가리는 나에게 양보하셨다. 나는 쥐 대가리를 꾹꾹 씹으며 아버지의 사랑에 감복하곤 하였다. 그리고 공장에서 어머니가 퇴근해서 오기 전까지 우리는 말끔히 모든 증거를 없앴다. 어머니는 그 집을 끔찍이 싫어하셨지만, 아버지와 나에게는 사실 천국 같은 곳이었다. 나는 잠들기 전, 항상 내일이 빨리 오기를 빌었다. 그러면서 마치 쥐 대가리를 씹듯이 쩝쩝거렸다.
나는 지금, 처량하기 그지없는 몰골로 구멍에서 비실거리고 있는 알베르를 보면서 그때처럼 입을 쩝쩝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쉐프를 호출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나는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저기 저 화면에 보이는 녀석이 죽으면, 몸뚱이는 떼고 대가리만 장작불에 구워 오늘 저녁 메인 요리로 제게 올려주세요.” 그러자 쉐프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나는 다시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이번에는 <워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동굴이 급격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발악하면서 잠시 버티는가 싶더니, 거의 다이빙하듯이 밑으로 떨어졌다. 좁고 깊은 물웅덩이였다. 마치 우물과 비슷한 크기였다. 그는 허우적거리며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 장면을 지켜봤다. 어릴 적, 나를 행복의 도가니로 집어넣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물에 빠진 생쥐. 나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짜릿한 쾌감에 오줌까지 지릴뻔하였다.
알베르는 웅덩이 벽면을 손끝으로 잡고 올라오려고 하였지만 미끄러운지 계속해서 빠져들기만 하였다. 나는 그가 힘들게 올라오다 결국 미끄러질 때마다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그를 여기서 익사시킬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겨우 2단계였다. 적어도 5단계 정도는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나의 멋지고 훌륭한 동영상 작품을 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쉽지만, 이쯤에서 <밧줄>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동굴 천장에서 밧줄이 천천히 웅덩이 한가운데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알베르는 마치 생쥐처럼 두려움에 가득한 눈동자로 힘들게 뭍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한동안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전지전능한 신의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허망한 인생이 곧 종료될 줄도 모른 채 그는 그저 헛된 희망을 품고 저렇게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알베르는 비실거리며 다시 동굴 입구에 섰다. 그곳은 2단계 입구. 그는 이번에도 한 바퀴 빙글 돌아 원위치로 온 것이다. 그는 다시 알약을 하나 집어삼키고는 빨간 구멍으로 천천히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들어갔다. 나는 이쯤에서 내가 고안한 이 멋진 동굴의 비밀을 하나 정도는 살짝 흘리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빨간 구멍이던 파란 구멍이던 어디를 선택해서 들어가더라도 첫 선택은 항상 빙글빙글 돌아서 원위치로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10단계를 모두 통과한다면, 당신은 모두 20번의 구멍을 무조건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만든 이유는 곧 알게 될 것이다.
게임
알베르는 결국, 4단계도 마치지 못하고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를 살균실에 데려가서 가스로 죽였다. 나는 맛있게 구운 그의 대가리 요리를 기대하며, 녹화한 동영상을 비디오 에디터에게 넘겼다. 그리고 지시했다. 모든 TV에 그의 영상을 송출하고 준비한 자막을 내보내라고….
잠시 후, 카지노에 있는 모든 TV 화면에 동굴 영상이 떴다. 알베르가 동굴 입구에 서 있고 그의 앞에는 파란 구멍과 빨간 구멍이 놓였다. 그리고 자막이 흘렀다.
<블라드 체페슈 실시간 서바이벌 1 + 1 동굴 게임. 파란 구멍이냐? 빨간 구멍이냐? 과연 그는 어느 구멍을 선택할 것인가? 당신이 맞추면, 베팅한 금액만큼을 추가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은 단 60초. 서둘러 선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직원들을 시켜 준비한 <휴대용 베팅 리모컨>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리모컨에는 자신의 방 호실과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인증 과정을 거친 후, 베팅 금액 입력란과 빨간색 버튼과 파란색 버튼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표시가 나타났다. 그리고 밑에는 60초의 시간이 1초씩 줄어들고 있는 액정 화면이 보였다. 0초가 되기 전에 모든 입력을 마쳐야만 게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베팅 금액은 최소 10,000달러로 책정하였다.
처음에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새 게임에 어리둥절하면서 수군대기만 하였다. 당연히 참여한 사람도 극소수였다. 물론 나는 이것을 예상하였다. 아무튼 나는 처음 베팅한 결과를 신속하게 보고 받았다.
<1단계 참가자 수 : 13명, 빨간 구멍 : 9명 (110,000달러), 파란 구멍 : 4명 (40,000달러)>
나는 비디오 컨트롤 실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알베르가 빨간 구멍으로 들어가는 영상을 내보내라고. 그래, 이건 미끼였다. 처음에는 당첨자가 더 많아야 했다. 그래야 입소문이 삽시간에 퍼질 것이고 그들을 따라 수많은 물고기가 미끼를 덥석덥석 물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지노에 모인 몇몇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인간은 영악하다. 특히 부자들은 더 영악하다. 그들은 대번에 이 간단한 게임을 이해하고 베팅을 하기 시작했다. 곧 2번째 결과가 나왔다.
<2단계 참가자 수 : 66명, 빨간 구멍 : 44명 (890,000달러), 파란 구멍 : 22명 (440,000달러)>
2단계도 당연히 빨간 구멍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자 카지노에 함성이 떠나갈 듯이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순간, 나의 뛰어난 지략과 비상하기 짝이 없는 능력에 감개무량하여 눈물까지 흘렸다. 나는 서둘러 나의 멋진 동굴을 탐방할 2번째 후보자를 뽑았다. 이번에는 좀 더 튼실하여 최소 5단계 이상은 버틸 수 있는 인간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차츰차츰 그리고 아주 신중하게 적은 사람이 선택한 구멍이 당선될 수 있도록 조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게임의 참가자는 입주자 대부분이 참가하는 인기 게임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통장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빈털터리 입주민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꼬드겨 동굴로 차례로 내보냈다. 그렇게 그들은 내게 모든 돈을 바치고, 결국에는 자기 몸도 고기로 바쳤다. 사람들은 자기 이웃이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게임에 열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 장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주민들도 눈과 귀가 있는데 차츰차츰 줄어드는 주위의 이웃들에 대하여 의심을 안 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나는 언제나 꿰고 있었다. 시작할 줄도 알면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을 끝낼 마지막을 위하여 모든 것을 조금씩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입주민이 절반쯤 줄어들었을 때 나의 마지막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뱀파이어
나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피를 곳곳에 뿌리고 음식에는 환각제의 양을 늘려나갔다. 그리고 한 번씩 사람의 절단한 다리나 팔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이미 인육과 피 냄새에 길든 그들은 초기의 거부 반응에서 돌아서서 점점 노골적으로 환영을 표시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나는 목욕탕과 샤워실, 각종 생활용수, 식수에도 피를 섞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가공식품을 줄여 나갔다. 뭐 이유는 간단하게 둘러댔다.
<비축해둔 식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블라드 체페슈 성은 피 냄새가 진동하는, 진정한 의미의 드랴큐라 성이 되었다. 나는 조명을 점점 더 붉고 어둡게 만들었다. 그리고 좀 더 기괴한 장식품들을 진열했다. 마지막으로 음식값을 매일 매일 올리기 시작했다. 환각과 피 냄새에 취한 성의 주민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뱀파이어처럼 변해갔다. 나는 그들의 피를 남은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먹기 위해, 매일 피의 축제를 열었다. 그들은 점점 미쳐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인성을 내려놓은 듯,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쓰러진 녀석의 피는 아낌없이 쭉쭉 빨렸다. 그들은 이제 진정한 뱀파이어가 되었다.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보며, 드디어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어느 날 나는 집사, 헬기 조종사와 함께 조용히 성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가까이에 마련한 헬리콥터 격납고로 향했다. 우리는 중요 서류가 든 돈 가방을 싣고 출발했다. 그리고 나의 블라드 체페슈 성 상공을 천천히 돌면서 비행했다. 나는 발아래에 펼쳐진 멋진 나의 성을 감회에 젖은 채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가방에서 리모컨을 꺼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성 곳곳에 설치해둔 폭탄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화염은 기대보다 훨씬 크고 장엄했다. 나는 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열기를 느꼈다.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나의 성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기수를 바닷가로 돌리도록 명령했다.
무인도
조그마한 항구에 도착한 나는 조종사와 작별하고 집사와 함께 준비해둔 요트에 올라탔다. 그리고 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으로 향했다. 바로 내가 후원한다는 백신 연구소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연구소는 그냥 간판만 있을 뿐, 실상은 나의 별장이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 무인도를 사들여 고급 저택을 짓고 필요한 물품과 관리원을 마련해 두었다. 나는 이곳에서 바이러스가 잠잠해질 때까지 은둔하며 나의 자그마한 왕국을 통치할 생각이었다.
따스한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어느 날 나는 마침내 나의 섬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관리원은 집사만큼 나이가 든 할머니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젊고 날씬한 여인이 긴 생머리를 날리며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 가방을 선뜻 들고 앞서 나갔다. 나는 그녀의 섹시한 엉덩이를 바라보며 나의 왕궁으로 걸어서 갔다.
별장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산뜻했다. 그동안 꾸준히 돈을 투자한 보람이 느껴졌다. 나는 전면에 난 유리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상쾌한 바닷바람이 쉴 새 없이 나의 뺨을 매만졌다. 나는 나의 시선이 닿는 곳 끝까지, 에메랄드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감탄으로 맞이했다. 나는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날이 되고 보니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 밀려왔다. 더럽기 짝이 없는 빈민가의 자식이 이제는 셀 수도 없는 엄청난 돈을, 유명한 은행 비밀 금고마다 꽉꽉 채웠으니 어찌 놀랍지 않을 수 있으리오!
곧이어 집사가 저녁이 준비되었음을 알려왔다. 그들이 준비한 요리는 다시 한번 나를 감동하게 했다. 크고 싱싱한 해산물과 열대 과일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게 했다. 나는 돈의 놀라운 능력에 흠뻑 젖은 채, 음탕한 눈초리를 젊은 여성에게 보내며 어기적어기적 음식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지고 있었다. 식탁 주위로 붉은빛이 찬연하게 몰려왔다. 나는 그 빛 속에 생글생글 웃고 있는 맞은 편 여인을 바라보며 주책없이 많은 음식을 뱃속에 집어넣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 이어진 선상 생활의 여독 때문이었을 까? 나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심하게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서 짧게 샤워를 하고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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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왠지 이상한 게, 목과 발목이 따끔따끔함을 느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시커멓게 생긴 뭔가가 퍼덕거리며 마치 목을 할퀴는 듯이 내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방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수백 마리의 박쥐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전면 유리문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유리 조각 하나가 나의 목, 동맥을 찌르고 말았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얼마 가지 못하고 달려드는 박쥐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졌다. 피가 얼굴 전체를 삽시간에 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이 점점 굳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손가락질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의식이 점점 떠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 최고의 천재이지 않은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어찌 보면 안 오는 게 이상한 거였다. 숱하게 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니, 언젠가 심판받을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앤탁틱디오스흡혈박쥐>는 물개보다 시원하고 맛있는 나의 피에 환장하고 있었다. 나는 단지 그날이 생각보다 일찍 온 것에 미련이 남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