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그림자

by 남킹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자 (Wittgenstein's Shadow)

바엔(Baen) 역의 육중한 그림자가 서서히 플랫폼을 잠식해 들어올 때, 기차의 속도가 애처로울 정도로 느려지던 바로 그 순간, 냉정한 디지털 문자를 통해 형의 부고(訃告)가 당도했다. 자살. 짧지만 모든 것을 함축한 단어는 차창에 부딪혀 부서지는 빗방울처럼 나의 의식을 산산이 흩뜨려 놓았다. 그 무수한 파편 속에서, 오직 하나의 잔인한 사실만이 얼음 조각처럼 날카롭게 떠올라 심장을 찔렀다. 다섯 형제 모두, 이제 예외 없이 스스로 생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 마지막 남은 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만이 이 거대한 가문의 비극적 유산 위에 홀로 서게 되었다. 덜컹이는 차체 사이, 창문의 보이지 않는 틈새로 스며든 바람은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의 편린들을, 빛바랜 사진첩의 페이지처럼 속절없이 뒤섞어 놓는 무자비한 손길이었다. 찢겨나간 기억의 조각마다 서린 아픔이 희미한 환등기 영상처럼 의식의 표면을 부유했다.

기차가 마침내 멈춰 서고, 육중한 문이 열리자 역사(驛舍)의 차갑고 광택 나는 대리석 바닥이 발밑에서 느껴졌다. 그 냉기는 단순한 물질의 온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발가벗겨진 현실의 체온,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냉혹함이었다. 문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예상했지만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나를 덮쳤다. 기다렸다는 듯, 수십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 백색 섬광은 굶주린 맹수의 눈빛처럼 나의 얼굴을, 나의 슬픔을, 나의 존재 자체를 집요하게 사냥했다. 눈부심 속에서, 싸구려 향수와 야심의 냄새를 풍기는 한 기자가 무리에서 뛰쳐나와 마이크를 내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그의 첫 질문은 나의 마지막 남은 인내심마저 조롱하듯, 정확히 신경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 분노가 용암처럼 천천히, 그러나 뜨겁게 끓어올랐다.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지만, 가면 아래의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결국 소용없는 짓임을, 이 상황 자체가 거대한 부조리극임을 깨달았다.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유럽 최대 에너지 기업, '솔라리스'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비트겐슈타인 씨?"

나는 아주 천천히, 마치 시간을 늘리려는 듯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 속에는 직업적 호기심과 인간적인 냉소, 그리고 일말의 동정심마저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나는 내 안의 차가운 독기를 최대한 농축시켜 목소리에 실었다.

"지금 당장 당신을 구더기가 들끓는 오물통에 처넣고 싶은 심정이오."

그의 얼굴 근육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주변의 웅성거림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송구합니다, 비트겐슈타인 박사님. 저는 그저… 독자들의 알 권리와 저널리즘의 요구에 충실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부디 저를 속물적인 인간으로만 치부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과 약간의 수치심, 그리고 미리 준비된 듯한 변명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길고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공기의 무게가 갑자기 몇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나도 노력 중이오. 이 지독한 세상과 어떻게든 소통해 보려고, 당신들의 그 '알 권리'라는 것을 이해해 보려고 말이오. 다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당신들의 호기심 충족이 아니라, 내 안의 질문들에 집중할 시간이오. 아주 절실하게."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나는 그들의 끈질긴 시선과 질문의 포화를 피해, 역장의 안내를 받아 다음 칸, 내가 예약한 침실 칸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기차의 복도는 생각보다 더 좁고 어두웠다. 벽에 드문드문 박힌 희미한 황색 조명은 공간을 더욱 밀실처럼, 압박적으로 만들었다. 늙은 역장은 나의 곤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는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체념과 연민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그는 나를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 외부와의 차단임을 직감했고, 나의 갑작스러운 특실 변경 요청을 기꺼이 수락해주었다. 특실 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창가 쪽 침대에 어떤 여인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 섬세하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실루엣이 두툼한 침대 시트 위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이 갑작스러운 고립의 공간에 예상치 못한 온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의 맞은편 침대에 조심스럽게 몸을 눕혔다. 차가운 시트의 감촉이 피부를 통해 스며들었다. 천장의 얼룩을 무심히 바라보며, 나는 형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려 애썼다. 기억 속, 빛바랜 사진 속에는 언제나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어려 있었는데… 과연 마지막 순간,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 자리했을까.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마침내 찾아온 해방감이었을까. 끝없는 질문의 파도가 밀려왔고, 나는 그 속에서 서서히, 그러나 깊이 의식의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늘 '향기'라고 명명했던,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마냥 즐겁게만 느껴지지 않는 익숙한 감각의 잔향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스며드는 햇살의 각도와 색깔로 미루어 보아, 시간은 이미 늦은 오후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기차는 여전히 느릿느릿, 그러나 꾸준히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맞은편 침대의 여인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는데, 이제는 누빈 이불을 고치처럼 돌돌 말아 그 안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그녀의 깊은 잠이 만들어내는 평온함과 나의 내면을 휘젓는 혼돈 사이의 간극이 묘한 불편함을 자아냈다. 나는 억지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차가운 유리창에 손을 괴고, 스쳐 지나가는 쓸쓸한 가을 풍경을 응시했다. 지상의 숲들은 마치 거대한 생명체처럼, 바람의 결에 따라 물결치듯 흔들렸다. 절정에 달했던 붉고 노란 단풍잎들이 힘없이 가지를 떠나 허공에 흩뿌려지고, 축축한 땅 위로 속절없이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애처롭고도 장엄한 풍경이었다.

그때, 예의 바르지만 분명한 노크 소리와 함께 역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내게 작은 쪽지 한 장을 건넸다. 형의 장례식 절차와 시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이전보다 더 깊어진 연민과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참석… 하실 겁니까? 아니, 이런 질문은 실례군요. 당연히 참석하시겠지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깊게 팬 주름 하나하나에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인간사를 목격하며 쌓아온 지혜와 체념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렇다면… 하르겐 역에서 하차하신 뒤, 미리 준비된 차량으로 이동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역 주변에는 당신을 기다리는 기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사막의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당신의 슬픔마저 한 조각 남김없이 먹이로 삼으려 들 것입니다."

내가 다시 한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갑자기 객실 문이 벌컥 열리며 예상치 못한 인물이 불쑥 들어섰다. 거대한 헤드폰으로 귀를 완전히 덮은 젊은이였다. 그의 헤드폰에서는 둔탁하고 반복적인 베이스의 진동이 새어 나와 객실의 공기를 미세하게 떨게 했다. 기계적인 비트에 맞춰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소리가 틈새로 흘러넘쳤다. 그는 마치 아프리카 어느 길거리 시장에서나 팔 법한, 얼룩지고 구겨진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불안한 듯 수시로 코를 킁킁거리며 문지르고, 얇고 신경질적인 입술을 끊임없이 달싹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소음의 장막 뒤에 스스로를 감춘 듯 보였다. 역장은 그 불청객을 향해 못마땅하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더 이상 말없이 객실을 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맞은편 침대의 여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깨어난 듯 약간은 몽롱하지만, 놀랍도록 깊고 차분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나와 마주쳤다. 그 눈동자는 깊고 검은 호수 같았고,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지혜와 이해가 담겨 있는 듯했다.

"비트겐슈타인 박사님이시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예상외로 부드럽고 낮았으며, 흔들림 없는 차분함이 배어 있었다. 이 갑작스럽고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나는 잠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를… 아십니까?"

"그럼요. 이 나라에서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딜 가나 당신 이야기가 끊이지 않아요. 신문 1면, 저녁 뉴스 헤드라인, 심야 라디오 토크쇼까지… 당신의 이름은 마치 현대의 신화나 전설처럼 모든 매체를 떠돌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투와 어휘 선택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 특유의 지성과 우아함이 묻어났다. 그녀의 차분한 시선은 나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바로 그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내 핸드폰에서 설정해 둔 알람이 날카롭게 울렸다.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 알람을 껐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메시지 앱을 열었다. 그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 오늘, 이 비극적인 여정을 떠나기 전, 꼭 한번 다시 읽고 싶었던 그 메시지들이었다.

그녀: "당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주 가까이. 왠지 아세요?"

메시지를 읽는 순간, 심장이 따뜻하게 부풀어 오르는 동시에, 그만큼의 깊은 공허함이 나를 덮쳤다. 과거의 온기가 현재의 냉기를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나: "내가 어떻게 그걸 알겠어요?"

그녀: "나는 느껴요. 당신의 존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물론… 그냥 농담이에요. 하지만 가끔은 정말 그런 착각도 하곤 한답니다. 진심이에요."

메시지를 쓴 그녀의 목소리가, 실제로는 단 한 번도 직접 들어본 적 없는 그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맴도는 듯했다. 기억 속에서 재구성된 환청.

나: "당신 기분이 좋다는 뜻인가요?"

그녀: "물론이죠! 당신을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좋은걸요. 안 그런가요?"

나: "네. 저도 좋습니다. 다만 자가용이 없어서… 이렇게 비교적 짧은 거리를 세 번이나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는 현실이 조금 아쉬울 뿐입니다."

나는 스마트폰 화면 속의 과거 대화를 마치 현재 진행형처럼 느끼고 있었다.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그녀: "괜찮아요. 서두를 필요 없어요. 아직 우리 앞에는 무한한 시간이 놓여있으니까요."

나: "그건 그렇습니다. 당신은 저보다 훨씬, 아주 훨씬 젊으니까요."

…혹은,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살아 숨 쉬는 그 누구도 내 곁에 남아 나보다 젊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 "아,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냥… 오늘 하루 중에도 아직 오전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뜻이에요. 조급해하지 말아요."

나: "네. 알고 있습니다.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저는 늘 이렇게 실없는 말을 하곤 하죠. 오래전부터 그냥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내뱉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농담도 불쑥 나오는 겁니다."

나의 고질적인 불안함, 진지한 감정의 무게를 회피하려는 방어 기제였다.

그녀: "괜찮아요. 다 이해해요. 지금은 당신이 그저 제 주위로,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할래요. 생각만 해도 조금 들뜨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 "무슨 말인지 알아요. 저도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눈을 떴으니까요. 물론 회사에 휴가를 낸 어제부터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은 뭐랄까…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기대감이랄까… 아주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즐거움이랄까… 아무튼, 오후의 만남이 너무나 기다려져서 좀처럼 냉정함을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예요."

그때의 나는 얼마나 순진하고 어렸던가.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설레고 들떴던 그 감정들이 지금은 너무나 아득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엿보는 것처럼.

그녀: "맞아요. 우리는 비록 오늘 처음 만나지만, 마치 아주 오랜 친구처럼 서로의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잖아요. 신기하게도."

그녀: "하하하. 정말 멋진 하루가 될 거예요. 당신을 직접 만져본 적도 없는데, 당신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 말이에요."

픽션과 현실, 가상과 실제의 경계가 흐릿하게 녹아내리는 지점이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지만, 디지털 문자를 통해 나눈 교감은 이미 서로의 마음을 깊숙이 연결해 놓았었다.

나: "그건… 어쩌면 떨림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아요."

그녀: "네. 맞아요. 긴장이고, 희망이고, 기대죠. 동시에 어쩔 수 없는 걱정이기도 하고요. 아, 지금 저는 당신이 예전에 보내준 그 오래된 사진을 다시 보고 있어요. 볼 때마다 미소가 지어져요."

나: "오래된 사진? 아! 그 사진… 잠시만요."

나는 메시지 창을 잠시 내리고 갤러리를 열었다. 그녀에게 보냈던 사진을 찾아 화면에 꽉 채웠다. 까마득한 23년 전, 내가 아직 젊고, 세상에 대한 냉소보다는 희망이 더 많았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사진 속의 나는 세상의 무게를 아직 알지 못했고, 미래가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고 믿었던 때였다.

나: "벌써 23년이나 지난 일이죠. 그러니 오래된 사진이 당연합니다. 그때 나는 겨우 스물여덟이었으니까요. 그때 말입니다. 지금 보니 정말이지 풋풋함과 어설픈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모습 아닙니까? 이것 좀 보세요. 지금은 누가 공짜로 줘도 절대 쓰지 않을, 이렇게 검고 크고 우스꽝스러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있잖아요. 하지만 저 때만 해도 저런 안경이 최첨단 유행이었어요. 그 시절 영화들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당대의 멋쟁이 주인공들이 어떤 안경을 끼고 다녔는지. 저는 마치 그 시절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항상 잔뜩 멋을 부리고 다니길 좋아했거든요. 물론 거울 속 제 모습은 잘 알고 있었어요. 키는 평균 이하였고, 생김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함 그 자체였으며, 운동과는 담을 쌓아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죠. 누가 봐도 영락없는 샌님이었잖아요."

나는 과거의 나,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몰랐던 젊은 날의 나를 바라보며 자조적인 쓴웃음을 지었다. 흘러가 버린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이 납덩이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나: "그리고 저기, 저 구석에서 심문받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초라하고, 왜소하고, 혼란에 가득 찬 표정인지. 물론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애송이였으니 그럴 만도 했죠. 다들 그렇잖아요. 저 시절에는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정립된 것이 없이, 그저 시간의 흐름 속에 내맡겨져 자신의 의지나 가치관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이상하고 구불구불한 길로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다 길을 잃고 헤매곤 하잖아요. 제가 딱 그랬죠. 그래서 결국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만 말입니다."

그 사진 속의 나는 어둡고 차가운 경찰서 취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텅 빈 눈동자에는 공포와 혼란,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배신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날은 내 인생의 항로를 완전히 뒤틀어 놓은, 결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날이었다.

그녀: "그럼… 후회하는 건가요? 그때의 선택들을."

메시지 속 그녀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예리한 칼날처럼 가슴 깊숙한 곳을 찔렀다.

나: "후회요? 물론이죠. 당연히, 아주 오랫동안 뼛속 깊이 후회했죠. 솔직히 말해서 단 한순간이라도 그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어야 할 젊음의 한복판을 송두리째 강탈당한 거잖아요. 너무나도 억울하고 후회스럽죠.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이미 다 흘러가 버린 일이고, 시간이라는 무심한 의사 덕분에 모든 상처 위에는 두꺼운 딱지가 앉았고, 그 딱지를 떼어내고 다시 피 흘리기를 수십 번도 더 반복한 뒤의 긴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바보 같았어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너무 바보 멍청이 같았어요. 내가 '사랑'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감정의 실체를 의심하지 않고, 그녀가 건넨 달콤한 독 사과를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덥석 받아먹어 버린 거예요. 정확히 그거에요. 동화 속 백설 공주처럼, 마녀의 교활한 계략에 완전히 놀아난 거죠. 절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땐 정말 몰랐어요. 세상을 너무 몰랐던 거죠.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복잡하고 때로는 악의적일 수 있는지, 그 깊은 심연을 정말이지 몰랐던 겁니다."

그때의 나는 눈이 멀어 있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그 시절, 나는 교묘하게 위장된 악의와 이기심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은 독배를 기꺼이, 심지어 감사하며 들이켰던 것이다.

그녀: "그날의 진실이… 더욱 궁금해지는군요. 하지만 행여 당신 마음을 불편하게 할까 봐, 그동안 선뜻 자세히 물어볼 수는 없었어요."

스마트폰 액정 위로 흐르는 그녀의 메시지를 읽으며, 나는 그녀가 얼마나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왔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는 항상 나의 상처 입은 감정을 먼저 배려했다.

나: "그날의 진실요? 네. 알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날의 진실을 궁금해하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당신 역시 제 입을 통해 그날 그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어떤 극적이고 충격적인 고백을 듣기를 기대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어요. 그렇겠죠.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날의 진짜 진실은 현재까지 오직 그녀와 나, 그리고… 어쩌면 저 높은 곳에 계실지도 모르는 하느님밖에는 모르겠죠."

진실. 이제 와서는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나조차도 가끔 헷갈리기 시작했다. 수없이 반복해서 되뇌고 재구성한 이야기가 어느덧 원래의 기억을 대체해 버리는 순간이 있다. 기억의 왜곡과 자기 합리화가 만들어낸 서사가 어느새 나만의 '진실'이 되어버리는 순간.

그녀: "어? 당신은 무신론자가 아니었어요?"

나: "네. 맞아요. 여전히 확고한 무신론자입니다. 신의 존재 같은 건 믿지 않아요. 하지만 그때는, 절박했기에 믿는 척이라도 해야 했죠. 나의 억울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심각하게, 그리고 경건하게 들어줄 청중들이 필요했으니까요. 아시잖아요. 저는 그 차가운 감옥에 갇힌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말을 바꾸지 않고 줄곧 나의 결백을 주장하며 일관된 목소리를 내왔다는 사실을요. 저를 도울 수 있는, 혹은 도울 의지가 있어 보이는 모든 영향력 있는 개인과 단체를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죠. 그 과정에서 '기독교 알림 연합회' 같은 종교 단체와도 연을 맺게 된 거고요."

나는 살아남기 위해, 나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때로는 거짓말도 했고,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며, 가식적인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것들이 당시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결백을 증명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깊은 도덕적 죄악에 빠져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 "알겠어요. 당신의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아무튼…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이 기차가 조금만 더 빨리 달려서 당신을 내게 데려다주기를 간절히 바랄게요. 그럼 이만…."

나: "네. 사랑해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마지막 말이 텅 빈 객실 안에 공허하게 울렸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상은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이미 사라져버린 기억 속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었다.

그녀: "저도요. 정말 많이 사랑해요. 저의 어두운 과거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다 보고도 여전히 곁에 있어 주는 당신에게. 하하하"

나: "네. 그럼 조금 뒤에 뵙겠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웃음소리가 마치 객실 창문에 부딪혀 희미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듯했다. 바로 그때, 아까 그 역장이 아닌 다른 차장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서둘러 스마트폰 화면을 전환하여 디지털 티켓을 찾아 그에게 내보였다.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단말기를 가져다 대었고, 끼익- 하는 짧고 기계적인 소리와 함께 확인 완료 표시가 화면에 떠올랐다. 객실 맞은편, 창가 자리에 앉아 뜨개질을 하던 백발의 할머니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봐요, 젊은 양반! 도대체 이놈의 기차는 왜 이렇게 연착이 밥 먹듯 하는 거야? 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꼴을 못 봤어, 원."

그녀의 깊게 팬 주름진 얼굴에는 수십 년간 쌓여온 인내와 세상사에 대한 냉소적인 고단함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차장은 이미 수백 번은 들었을 법한 불평에 난처하면서도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님. 죄송하지만 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런 근본적이고 곤란한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이 모든 지연 사태의 책임자라도 되는 것처럼 멋쩍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니, 당신이 모르면 도대체 누가 안다는 거야? 답답하기는!"

할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평생 동안 느껴왔을 법한 무력감과 좌절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글쎄요… 아마 저 중앙 관제실의 컴퓨터는 알겠죠. 무슨 문제가 발생했는지. 다만 그 빌어먹을 시스템이라는 놈이 우리 같은 현장 직원들에게는 그저 명령만 내릴 뿐입니다. 기다려! 또 기다려! 라고 말이죠."

차장의 자조적인 말에 나는 문득 이 시대, 2044년의 기술적 아이러니를 느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고도의 시스템이 이제는 역으로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그저 시스템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하는 부속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이니까요. 인간은 그저 따라갈 뿐이죠."

나는 나지막이 그들의 대화에 한마디 거들었다. 순간, 객실 안에 있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침묵을 깨고, 아까 그 헤드폰을 낀 젊은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헤드폰을 목으로 내리며 말했다.

"맞아요.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안 그러면 다 같이 골로 가는 수가 있거든요. 시스템에 반항하면 끝장이에요."

그의 번뜩이는 눈에는 기묘한 열정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거대한 음모론의 실체라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도대체 어떤 놈인데 그놈이 우리를 좌지우지한다는 거야?"

할머니의 근본적인 질문에 젊은이는 대답 대신 의미심장하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객실 안에는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게 있어요, 할머니. 그냥…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어요."

차장은 더 이상 이 불편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듯, 큰 머리를 좌우로 한번 흔들었다. 때마침 바람이 객실 문틈을 타고 슬그머니 들어와 잠시 맴돌다 사라졌다. 창밖의 햇살은 어느새 빛의 각도를 바꾸어, 비어있는 맞은편 의자 위에 길고 선명한 금빛 사각형 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르겐 역에는… 곧 도착하는 겁니까?"

나의 질문에 차장은 습관처럼 천장의 안내 표시등을 한번 올려다보더니, 마치 그곳에서 희미한 답이라도 읽어낸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곧 안내 방송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워낙 연착이 심해서 정차 시간이 매우 짧을 수 있으니, 미리 준비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나는 그의 경고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짧은 여정 동안 쌓인 자잘한 쓰레기들 – 구겨진 간식 포장지, 자투리 비닐 – 을 모아 좌석 아래의 작은 쓰레기통에 넣었다. 반쯤 마시다 남은 미지근한 음료수 캔의 내용물을 화장실에 버리고, 시큰거리는 이를 잠시 달래기 위해 가방에서 껌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짐을 챙기는 동안, 차장이 막 지나간 복도 저편에서 쏜살같이 달려가는 어린아이 하나가 보였다. 까르르 터지는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잠시 삭막한 객실의 공기를 환하게 밝혔다가, 이내 다음 칸으로 넘어가며 사라졌다.

나는 다시 한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 속,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 기록을 천천히 다시 훑어보았다. 우리의 조심스러웠던 첫 만남의 기억,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서서히 깊어졌던 감정의 교류…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손에 잡히지 않는 아득한 과거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생각하며 마지막 남은 외투를 챙겨 입고, 가방 지퍼를 단단히 잠갔다. 객실 문을 나서기 전, 혹시 두고 가는 물건은 없는지 한번 더 둘러보았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여전히 눈부셨지만, 더 이상 따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깊은 심호흡을 한번 시도해 보았지만, 가슴 속을 짓누르는 무거운 돌덩이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기차가 마침내 속도를 현저히 줄이며 끼익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하르겐 역의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육중한 문이 열리고, 플랫폼으로 내려서는 계단을 밟자 차갑고 습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바깥 날씨는 그새 변해 있었다.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었고, 보슬보슬 가늘게 내리던 비는 어느새 제법 굵은 빗줄기로 변해 얼굴과 옷깃을 차갑게 적셨다. 텅 빈 듯한 플랫폼 주변의 풍경은 온통 잿빛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나무들은 윤곽선이 더욱 짙어져 검게 빛났고, 땅바닥에는 떨어진 낙엽들이 젖어 질척거렸다. 역 앞 광장으로 나서자, 비에 젖은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안개와 비에 희미하게 가려진 채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빌딩들, 그 사이를 현란하게 수놓는 번쩍이는 네온사인 간판들, 그리고 도로 위에 길게 늘어서 꼼짝도 하지 않는 차량들의 행렬… 그 모든 것이 거대한 욕망의 응집체처럼 보였다.

서기 2044년의 어느 쓸쓸한 가을날, 먹구름이 하늘을 빈틈없이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잿빛 하늘 아래, 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마지막 남은 형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유럽 최대 에너지 기업의 유일한 상속자가 된 나는, 이제 명목상으로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막대한 부와 사회적 명성은 얻었을지언정, 온기를 나누던 가족과 진실된 마음을 나눴다고 믿었던 사랑마저 모두 잃어버렸다. 내 손안의 차가운 스마트폰 액정에는 더 이상 답장이 오지 않을 그녀의 메시지가 수십 개, 아니 수백 개가 먼지처럼 쌓여 있었다. 그녀 역시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었으니까.

빗줄기는 점점 더 세차게 변해 세상을 뿌옇게 지워가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검은색 장우산을 꺼내 펴들고, 터벅터벅,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등 뒤에서 누군가 희미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지만, 나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더 이상 과거의 망령에 발목 잡혀 있을 수는 없기에. 오직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비록 그 앞길이 지금보다 더 깊고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피할 수 없다면, 그저 걸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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