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1.
아내에게 간단하게 전화로 야근을 알렸다. 그녀의 반응은 더 간단하다.
“응.”
늘 있는 일이라 서로가 개의치 않는다. 대략 일주일에 절반쯤은 회사에서 아침을 맞는 것 같다. 특히 요즈음 같이 대형 프로젝트의 마무리 시점이 되면 날을 새는 빈도는 잦아진다. 곳곳에 버그들이 넘쳐나고 PM(프로젝트 매니저)의 신경질은 날로 거세지고 프로그래머들의 맥주 캔에는 담배꽁초가 수도 없이 채워진다.
바야흐로 고객과 물고 물리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라도 더 트집을 잡아 페널티를 물리려는 측과 하나라도 더 숨겨 교묘히 빠져나가려는 측의 숨 막히는 시간 전쟁.
항상 개발 시간에 쫓겨 다니는 나로선 그저 묵묵히 책상에 앉아 PC 모니터에 다양한 색상으로 펼쳐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코딩들을 쳐다보기만 한다. 항상 볼 때마다, 나는 형형색색의 실들이 둥글게 뭉쳐진 실타래를 생각한다. 처음엔 그저 혼란스럽고 막막하다.
하지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각 실의 끝이 보인다. 그러면 그 끝을 잡고 끈기 있게 살살 잡아당기면 된다.
아무리 시간에 쫓기더라도 조급하게 확 잡아당기면 안 된다. 맹세하건대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러면 버그가 내 앞에 나타난다. 누가 애초에 명명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버그>라는 용어는 참 적절하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벌레가 기어 나온다.
어릴 적 내 방이 그랬다. 낡은 시장 아파트 3층. 저녁이면 향긋한 곰장어 타는 냄새가 1층 식당에서 솔솔 올라왔고 여름이면 시장 한쪽 구석진 곳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쓰레기 더미에서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벌레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인 셈이다. 오히려 우리 집에 터를 잡은 바퀴벌레가 불쌍해 보였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변덕스럽고, 쓸데없이 깔끔하기까지 한 누나는, 집안 어디에서든, 언제던 비명을 질렀고 그러면 나는 어떤 자세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총알같이 달려가 바퀴벌레를 잡아야 했다.
벌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릴 적 나는 수수깡처럼 비쩍 말라 민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학습능력도 뛰어났다. 나의 눈에 띈 바퀴벌레는 대부분 그날로 삶을 마감해야 했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 벌레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생사를 오가는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인간처럼, 불행하게도 어제를 기억한다면, 그들의 하루는 침울하고 내일은 서글픔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버그와 악연을 맺었고 그 맺음은 사십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하다. 그리고 변함없이 민첩하게 버그를 잘 잡아낸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긴장과 스트레스는 이제 내가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늙을수록 그 강도는 더 세지고 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긴 뭐 내가 내 발로 찾아서 한 것이니 누구에게 원망도 못 하는 것이다. 부모님 말씀대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 대기업 연구소에 자랑스럽게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좋은 짝 만나 장가도 가고 자식도 둘이나 두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이 순풍에 돛 단 듯 술술 풀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광명을 상쇄할 불경한 운명이, 저 멀리 미국 국방성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인간 삶의 패턴을 바꿔버린 통신 프로토콜. 인터넷이라는 녀석 말이다.
나는 운 나쁘게도 인터넷을 너무 일찍 만났다. 내 인생의 봄날이 그때부터 저물기 시작하였다. 서른 중반이었다.
2.
좀 더 정확히, 나는 웹 프로그래밍에 빠진 것이다. 재미있었다. 아주 아주 재미가 있었다. 나는 퇴근과 동시에 저녁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제 막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웹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며 학습하기 시작하였다.
웹에 빠져들수록, 당연하게도 수면시간이 줄어들었다. 어떤 날은 꼴딱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날이 늘어났다. 그러자 회사 생활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꾸벅꾸벅 졸고 시간과 계획에 따라 정교하게 돌아가는 실험을 망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연구소가 이제는 끔찍하게 싫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한 이런 상태로는 몇 달은커녕 며칠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아내를 설득하고 적금을 깨고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미리 봐 둔 인터넷 전문가 과정에 등록했다. 주위의 걱정 섞인 시선이 돌아왔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미래는 인터넷 세상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학원을 수료했지만 갈 곳은 없었다. 하긴, 아무리 인터넷 초창기라지만, 학원에서 고작 6개월 배운 비전공 초짜를 받아 줄 회사는 없었다. 경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경력을 쌓는단 말인가?
다행히 학원 수료생 중엔 나와 비슷한 처지가 많았다. 미래를 예감하고 뛰어들었지만, 막상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 상황. 그래서 우리는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모두 10명의 갈 곳 없는 학원 수료생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자본금을 마련하고, 시내 외곽의 허름한 사무실을 빌려 회사를 차렸다. 직급은 나이순대로 정하였다. 최고 연장자는 대표이사, 가장 어린 사람은 대리가 되었다. 딱 중간인 나는 과장이 되었다. 명함도 파고 회사 차도 빌렸다. 사명도 짓고 명판도 입구에 달았다.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이제 우리는 인터넷 전문 회사답게 당사 홈페이지를 정성을 다해 만들기 시작했다. 회사의 얼굴이자 사업의 기반이므로 회사원 모두 똘똘 뭉쳐서 늦은 밤까지 최선을 다했다. 웹 프로그래밍 기술이 남들보다 앞섰던 나는 게시판과 방명록을 담당했다. 그렇게 나의 프로그래밍 경력이 시작되었다.
2년을 창립 멤버들과 함께했다.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었다. 처음 일 년은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버텼다. 2년째로 접어들자 인터넷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각 업체가 앞다투어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초창기라 가격도 정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때그때 회사 규모에 맞추어 받아들일 만한 가격을 제시했다. 제법 수주가 늘어났다. 직원도 20명으로 늘어났다. 나는 개발 팀장이 되었고 10명의 웹 개발자를 관리했다. 근무시간이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런대로 행복했다. 예전보다 턱도 없이 작은 급여지만 아무튼 제날짜에 들어왔다.
아내도 전공 – 사범대 출신 –을 살려, 집 근처 학원에서 시간제 강사를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아파트 구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던 가계부채가 다시 줄어들었다.
이제 나의 선택에 확신이 생겼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늘어났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어려운 시간 속에 어렴풋하고 모호하던 잔재 같은 것이, 안정과 확신의 시간으로 바뀌자, 서서히 수면 위로, 마치 환등의 짙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자극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이 문제였다.
사실 사업 초기부터 최고 연장자인 대표이사와 부장 간의 갈등은 있었다. 그리고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올라서자 그들의 간격은 심각하게 벌어졌다. 그들은 이제 대놓고 편을 가르고 서로를 비방하고 그들의 지분을 챙기려고 달려들었다. 결국, 갈등은 분열로 이어졌다.
어느 틈에도 끼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자연스레 퇴사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