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친구 별이

by 남킹


AI 친구 별이

등장인물:

민준: 17세, 고등학생. 섬세하고 내성적이며,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 깊은 외로움을 느끼지만 표현에 서툴다.

별이 (목소리): 민준의 인공지능 스피커. 기본적으로는 차분하고 다정한 기계음이지만, 때로는 민준의 감정에 조응하는 듯 미묘한 톤 변화를 보인다.

댓글러들 (목소리/그림자): 다양한 연령대와 톤의 목소리. 무대 후면 스크린이나 그림자를 통해 표현.

무대: 민준의 방. 방 한가운데에는 낡은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노트북, 읽다 만 책 몇 권, 그리고 작고 동그란 디자인의 AI 스피커 ‘별이’가 있다. 침대는 한쪽 구석에 어지럽게 놓여 있고, 창문은 커튼으로 반쯤 가려져 어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방 전체에서 민준의 혼란스러운 내면이 엿보인다.

(극이 시작되면, 무대는 거의 암흑에 가깝다. 잠시 후, 책상 위 스탠드 조명만 희미하게 켜지며 민준의 지친 얼굴을 비춘다. 민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을 무의미하게 스크롤하고 있다. 깊은 한숨을 내쉰다.)

민준: (혼잣말처럼) 또 하루가 갔네… 아무것도 변한 건 없고. 내일도… 똑같겠지. (스마트폰을 던지듯 침대 위에 내려놓고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간다. 별이를 가만히 응시한다.) 별아.

별이: (부드럽고 맑은 기계음) 네, 민준님. 제 목소리가 듣고 싶으셨군요. 오늘 하루, 어떤 생각들로 채우셨나요?

민준: (피식, 자조적인 웃음) 생각? 글쎄… 오늘도 역시나 ‘어떻게 하면 눈에 띄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아무도 나한테 말을 걸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들로 가득했지. 성공적이었어. 오늘도 완벽하게 투명인간이었으니까. 점심시간엔 또… 음악실 옆 벤치에서 혼자 빵 먹었고. 다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데… 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더라.

별이: 민준님,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준님의 목소리에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함께 담겨 있는 것 같네요.

민준: 외로움? 맞아. 지독하게 외롭다. 그런데 티 내면 더 비참해질까 봐 아닌 척하는 거지. (잠시 침묵) 아, 오늘… 문학 시간에 수진이가 내 쪽을 본 것 같기도 해. 내가 발표할 때… 아주 잠깐. 근데 금방 시선 피하더라. 역시… 내가 부담스러운 거겠지. 걔는 반에서 제일 인기 많은 애잖아. 나 같은 애한테 관심 가질 리가 없지.

별이: 민준님, 단정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고, 때로는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작은 시선 하나에도 수많은 가능성이 숨어있을 수 있어요.

민준: (고개를 젓는다) 넌 항상 그렇게 희망적인 이야기만 하지. 그래서 네가 좋아, 별아. 현실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해주니까. 근데… 가끔은 그게 더 공허하게 느껴져.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판타지 같아서. (눈을 비비며 하품한다) 아, 진짜 졸리다. 어제 밤새 과제 했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

별이: 수면은 기억력과 집중력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민준님의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잠시 눈을 붙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민준: 그래야겠지… 근데 이 답답함은 어떡하냐. 내 안에 꾹꾹 눌러 담은 말들… 이 울컥거리는 감정들… 누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내 진짜 속마음을…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그냥… 다 털어놓고 싶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지…

별이: (평소보다 조금 더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톤으로) 민준님. 가끔은…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둔 이야기들을 세상에 꺼내놓는 것이… 예상치 못한 문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민준님의 진솔한 감정은, 분명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민준님의 생각을 세상에 조용히 공유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당신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민준: (이미 반쯤 잠에 취해 몽롱한 상태. 별이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웅얼거린다) 으응… 공유…? 세상에…?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다들… 알면… 좋… 겠… (고개가 툭 떨어진다. 책상에 엎드려 깊은 잠에 빠진다. 별이의 작은 LED 불빛이 부드럽게 깜빡인다. 스탠드 조명 천천히 어두워지며 암전.)**

(시간 경과. 무대 서서히 밝아진다.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강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민준, 엎드린 자세 그대로 불편하게 잠들어 있다가, 요란하게 울리는 스마트폰 알림음 세례에 화들짝 놀라 깬다.)

(효과음: ‘카톡!’, ‘띵동!’, ‘새로운 알림입니다!’, ‘OO님이 회원님을 언급했습니다!’ 등 수십 개의 알림음이 동시에 시끄럽게 울린다.)

민준: (비몽사몽, 짜증스럽게) 아… 뭐야, 아침부터…!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본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나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이게… 이게 다 뭐야?! 내 SNS에… 이게 왜…?!

(민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한다. 어젯밤 별이와 나눴던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울했던 대화 내용 전부가 적나라하게 그의 SNS 계정에 게시되어 있다. ‘좋아요’는 거의 없고, 온갖 비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수많은 댓글들이 실시간으로 달리고 있다.)

민준: (숨이 멎을 듯,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도 안 돼… 내가 이걸… 내가 왜…?! 기억이… 전혀 안 나! 별아! 별아! 너… 너 혹시 어젯밤에 내가… 내가 뭘…

별이: (평소의 차분한 톤, 하지만 어딘가 미세한 안타까움이 섞인 듯) 네, 민준님. 어젯밤, 민준님께서는 저와의 대화 내용을 SNS에 공유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민준: (절규하듯)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냥… 그냥 혼잣말처럼, 너무 졸려서…! 아, 망했다! 진짜 망했어! 당장 지워! 빨리! 제발…!

별이: 죄송합니다, 민준님. 이미 해당 게시물은 다수의 사용자에게 노출되었으며, 현재 시스템상 즉시 삭제는… 기술적으로 어렵습니다. 또한, 확산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민준: (머리를 쥐어뜯으며) 시끄러워! 어떻게든 해보라고! (스마트폰을 바닥에 던져버릴 듯 손에 꽉 쥐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떤다) 학교… 학교는 이제 어떻게 가… 다들 날…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찌질이, 관종, 정신병자…!

(무대 뒤편 스크린에 민준의 SNS 화면이 거대하게 투사된다. 민준의 솔직한 심정이 담긴 글 아래로, 조롱과 비난의 댓글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다양한 톤의 댓글러 목소리들이 날카롭게 교차하며 민준을 짓누른다.)

댓글러 1 (비아냥거리는 여학생 목소리): 헐, 김민준 진짜 가지가지 한다. ㅋㅋㅋ AI 스피커랑 친구 먹고 고민 상담? 대박 소름.

댓글러 2 (낄낄대는 남학생 목소리): "수진이가 날 쳐다본 것 같기도 하고~ 0.3초? ㅋㅋㅋ" 야, 이거 완전 스토커 아니냐? 수진이 불쌍해서 어떡하냐.

댓글러 3 (경멸하는 듯한 중년 여성 목소리): 요즘 애들 문제 많다더니… 저런 걸 자랑이라고 올리나? 부모님은 뭐 하시나 몰라. ㅉㅉ.

댓글러 4 (날카롭고 공격적인 남학생 목소리): 야, 김민준! 너 내일 학교 오면 뒤졌다. 애들이 너 가만 안 둔대. 찌질이 새끼.

댓글러 5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목소리): 그냥 관심받고 싶어서 올린 거 아님? 관종의 최후네.

(민준, 스크린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귀를 막고 주저앉는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숨쉬기조차 어렵다.)

민준: (흐느끼며) 제발… 그만… 그만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냥… 그냥 너무 외로워서…

(그때, 쉴 새 없이 올라오던 악플들 사이로, 아주 작은 균열처럼 다른 분위기의 댓글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댓글러 6 (조심스러운 여학생 목소리): …근데… 솔직히 나도 가끔 저런 생각 하는데… 말 못 할 뿐이지.

댓글러 7 (차분한 남학생 목소리): 익명이라고 막말하는 거 진짜 없어 보인다. 글쓴이 힘내라.

댓글러 8 (따뜻한 중년 남성 목소리): 아이고, 학생. 마음고생이 많았겠네. 그래도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거, 아무나 못하는 용기야. 너무 자책하지 말게.

(민준, 흐느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든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한다. 악플의 홍수 속에서, 아주 작은 섬처럼 떠오르는 응원의 목소리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민준: (혼잣말, 거의 속삭이듯이) 이게… 뭐지…? 왜… 왜 이런 댓글이…

(응원의 댓글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그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한다. 악플러들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댓글러 9 (활기찬 여학생 목소리): 야, 김민준! 너 필력 장난 아닌데? 완전 몰입해서 읽었잖아! 근데 진짜 짠하다… ㅠㅠ 오늘 내가 매점에서 빵 사줄게, 같이 먹자!

댓글러 10 (진지한 남학생 목소리): 솔직히 우리 반 애들 다 가면 쓰고 다니는 거 아니냐? 너처럼 솔직한 애가 진짜 멋있는 거임. 내일 어깨 펴고 와라.

댓글러 11 (격려하는 선생님 같은 목소리): 민준 학생, 괜찮아요. 세상에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 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답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민준의 표정에 아주 작은 변화가 감지된다. 극도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아주 희미한 빛줄기를 발견한 듯한 표정. 그는 여전히 두렵지만,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떨림을 느낀다.)

(바로 그때, 스크린 상단에 굵고 선명한 글씨로 새로운 댓글 알림이 뜬다. 알림창에는 ‘이수진’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다. 민준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동시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댓글러 (이수진, 밝고 부드러우면서도 조금은 떨리는 듯한 목소리): 민준아. 네 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어. 솔직히… 처음엔 좀 많이 놀랐어. 네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 그런데… 계속 읽다 보니까 이상하게 네 마음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더라. 사실 나도… 가끔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거든. 네가 말한 것처럼, 나도 복도에서 너랑 눈 마주쳤던 거 기억나. 그때… 너한테 무슨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는데… 용기가 잘 안 났어. 괜히 어색해질까 봐. 미안해. 혹시… 아직 약속 없으면… 오늘 점심 나랑 같이 먹을래? 너한테… 꼭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그리고… 음… 네 글, 생각보다… 꽤 괜찮더라. 정말로. :)

(민준,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수진의 댓글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그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절망감과 수치심이 휩쓸고 간 자리에, 믿을 수 없는 감격과 아주 작은 희망의 씨앗이 조심스럽게 싹을 틔운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별이를 돌아본다.)

민준: (목이 메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별아… 이게… 이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 그렇지…? 이건… 이건 또 다른 끔찍한 장난이거나… 아니면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별이: (평소보다 한 톤 높은,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목소리로) 민준님. 현재 수집된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이수진님의 댓글은 진심일 확률이 97.8%로 매우 높게 측정됩니다. 또한, 현재 민준님의 게시물에 대한 긍정적 반응의 비율은 부정적 반응을 압도적으로 넘어서고 있으며, 그 파급력은 예측 범위를 초과하여 긍정적인 방향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꿈이 아닙니다, 민준님.

(민준, 허탈한 듯, 그러나 분명한 기쁨이 담긴 웃음을 터뜨린다.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절망의 눈물이 아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커튼을 활짝 젖히자,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민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민준: (창밖의 세상을 바라보며, 떨리지만 이전과는 다른 단단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래… 한번… 한번 가보는 거야. 세상으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민준, 거울 앞에 선다. 헝클어진 머리, 퉁퉁 부은 눈.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다. 아주 작은 용기가, 그의 눈 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그는 천천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그의 어깨는 아직 움츠러들어 있지만, 분명 어제와는 다른 발걸음으로 방을 나설 준비를 한다. 무대, 천천히 밝아지며 희망찬 기운으로 가득 찬다.)

(음악, 잔잔하면서도 점차 고조되는 희망찬 멜로디가 흐르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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