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의 햇살 아래서
여전히, 하늘은 흠결 없는 푸른 도화지처럼 맑았다. 그러나 밤의 장막 뒤에서 가랑비가 속삭이듯 다녀갔다. 그 미세한 흔적이 대기 중에 내려앉아, 단순했던 '덥다'는 감각은 이제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후덥지근함'으로 변모했다. 공기는 밀도를 얻어 씹을 수 있을 듯 묵직해졌고, 피부에 질척하게 달라붙는 습기는 숨 쉬는 행위조차 고된 노동으로 격하시켰다. 온몸의 세포가 이 끈적한 대기의 압력에 저항하며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나의 흰 책상은 침묵극이 펼쳐지는 작은 무대다. 그 위에는 두 개의 잔이 놓여, 조용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 한 잔에는 밤처럼 검고 쓴맛을 머금은 커피가 식어가고 있고, 다른 한 잔에서는 발포 비타민이 격렬하게 녹아들며 탄산의 미세한 폭발을 일으키는 물이 담겨 있다. 방금 전까지 끓어 넘치던 활력이 이제는 잔잔한 기포의 군무로 잦아들고 있었다. 노트북과 마우스는 잠든 창조의 도구처럼, 그들의 주인이 내릴 명령을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어폰을 귀 깊숙이 밀어 넣고, 유튜브의 무작위 선곡에 의식을 내맡긴다. 아카이브(Archive)의 'Again'이 고막을 타고 흘러들어오자, 공간은 왜곡되고 시간은 점성을 얻어 느리게 흐르기 시작한다. 음악은 방 안의 멈춘 듯한 공기를 붙잡아, 나만의 작은 우주를 구축한다.
나를 둘러싼 이 작은 세계는 명료하면서도 동시에 혼란스러운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정면의 흰 벽은 시선을 가두는 막다른 골목이지만, 동시에 무한한 상상이 투사될 수 있는 스크린이기도 하다. 그 벽에 걸린 낡은 세계 지도는 객관적 사실을 가장한 주관적 왜곡의 증거물이다. 북미 대륙, 특히 캐나다는 비정상적으로 팽창되어 있고, 스칸디나비아반도는 마치 생명력을 잃고 힘없이 늘어진 노인의 그것처럼, 기괴하게 축 처진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지도 제작자의 무의식에 잠재된 권력욕이나 편견의 발현일까, 아니면 그저 내 피로한 망막에 맺힌 해석의 오류, 혹은 이 지도가 제작되던 시대의 제국주의적 시선의 잔재일까. 지도는 세계를 담는다고 하지만, 실은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 시선을 담을 뿐이다.
시선을 왼쪽으로 옮기면, 반투명한 흰 커튼이 바깥세상과 나의 공간을 희미하게 가르고 있다. 빛을 부드럽게 여과하며 안과 밖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이 얇은 천은, 때로는 외부 세계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부드러운 장막이 되고, 때로는 세상을 향해 열린 가능성의 통로를 상징한다. 가만히 그 천을 옆으로 젖히면, 베란다라는 또 다른 작은 무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태양 아래 놓인 둥근 탁자를 두 개의 빈 의자가 말없이 감싸고 있다. 탁자 위, 작은 화분에는 죽음을 향해 아주 느린 걸음을 옮기는 야생화가 놓여 있다. 이미 생기의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시들어가는 꽃잎들은 시간의 무자비함과 존재의 유한성을 침묵으로, 그러나 너무도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 연약한 소멸의 과정은 아름답지만 처연하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다. 하얀 모카포트에서 두 번째로 짜낸, 이미 그 정수를 상당 부분 빼앗긴 액체. 처음의 강렬함은 희미해지고, 연약한 그림자처럼 변해버린 커피는 숭늉과 닮아 있었다. 한 번 더 입술을 적시자, 이제는 미지근함을 넘어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가 혀 위에서 아무런 감흥 없이 무기력하게 흘러내린다. 시간은 중력처럼 어김없이 작용하고, 모든 존재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변화하고 소멸한다—정성 들여 내린 커피 한 잔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이 작은 변화 속에서 우주의 거대한 법칙을 실감한다.
달력은 2023년 8월 27일, 일요일을 가리키고 있다. "바다가 쉬는 날."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려 본다. 인간이 만든 시간 체계 속에서 일요일은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지정된 날이지만, 저 광활하고 영원한 바다도 과연 '일요일'이라는 개념을 인식할까? 파도는 인간의 달력과는 무관하게 쉼 없이 해안을 두드리고, 심해의 물고기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유영하며, 바닷새들은 본능에 따라 변함없이 먹이를 찾아 하늘을 선회한다. 오직 인간만이, 이 거대한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일주일이라는 단위를 설정하고, '일요일'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에 경계를 그어 스스로에게 휴식을 강제하거나 허락한다. 어쩌면 이것은 자연의 리듬에서 벗어난 인간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인위적인 장치일지도 모른다.
내장을 부드럽게 조여오는 허기가 느껴진다. 아침 식사를 건너뛴 공복감이다. 하지만 나는 식어버린 커피와 미지근한 발포 비타민 물로 위장을 속이며, 오후 한 시라는 자의적인 경계선까지 버티기로 결심한다. 그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침도 점심도 아닌, 그 모호한 경계에 존재하는 식사, 브런치를 스스로에게 허락할 것이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나는 나만의 작은 규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의지하며 하루의 리듬을 조율하려 애쓴다. 이 작은 통제 행위가 혼돈 속에서 나를 지탱하는 미약한 닻이 된다.
어떻게든 오전 시간 안에 '소설 5페이지 쓰기'라는 오늘의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 창작에 대한 의지는 내면에서 용암처럼 뜨겁게 끓어오르지만, 그것을 실제 활자로 옮기는 행위는 언제나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듯한 고난의 연속이다. 막막함과 자기 의심, 그리고 유혹적인 게으름과의 끊임없는 싸움. 어제 밤, 나는 잠들기 전 휴대폰 메모장에 몇 가지 실천 사항을 새롭게 수정하고 추가했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쩌면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내 책의 존재를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기 위한, 어찌 보면 부질없고 가망 없어 보이는, 그러나 작가에게는 숙명처럼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들이다.
소설 집필: 매일 최소 5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꾸준히 생산한다. (양보다 질을 추구하되, 멈추지 않는 꾸준함이 핵심)
온라인 플랫폼 관리: 브런치, 포스트, 블로그 등 개인 채널에 글쓰기 관련 콘텐츠나 소설 연재 일부를 업데이트하여 잠재 독자와 소통한다. (존재 증명의 최소 행위)
출판 경로 모색: 완성된 원고를 대상으로 출판사에 투고하거나, 자가 출판(종이책, 전자책 동시 고려) 가능성을 타진한다. (세상과의 접점 만들기)
글로벌 시장 준비: 원고의 핵심 부분을 영어로 번역하고 원어민 검수를 받아 완성도를 높인다. (더 넓은 독자층을 향한 꿈)
아마존 KDP 활용: 번역된 영어 원고를 아마존을 통해 전자책 및 POD(주문형 종이책) 형태로 자가 출판하거나 해외 에이전시에 투고한다. (국경 없는 이야기의 가능성)
독자 피드백 확보: 북카페, 독서 커뮤니티 등을 활용하여 베타 리더 및 서평단을 모집하고, 객관적인 피드백을 수렴한다. (성장을 위한 거울 보기)
시각적 홍보: 책의 분위기나 핵심 메시지를 담은 짧은 홍보 영상(북 트레일러)을 제작하여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비주얼 플랫폼에 배포한다. (시대에 맞는 소통 방식 모색)
마케팅 전략 연구: 효과적인 도서 홍보 및 마케팅 방법론을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학습한다. (창작만큼 중요한 알리기)
AI 기술 활용: AI를 이용한 이미지 및 영상 제작 기술을 학습하여 홍보 콘텐츠 제작의 효율성과 창의성을 높인다. (새로운 도구의 가능성 탐색)
나는 이렇듯 자주, 그리고 비장하게 결심한다. 그러나 나의 결심들은 대부분 수면 위에 그려진 정교한 그림처럼, 현실의 작은 파문에도 너무나 쉽게 흩어져 형체를 잃어버린다. 어젯밤 수정된 이 실천 사항 목록이 과연 얼마나 오래 그 형태를 유지하며 살아남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다만 지금 이 순간, 글을 쓰는 이 시점만큼은, 이 모든 것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견고한 확신이 나를 감싼다. 그런 종류의 착각은 늘, 여정의 출발점에서 가장 강렬하고 매혹적으로 빛나는 법이다.
하지만 역사는 냉정하게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나의 수많은 야심 찬 바람들은 지금까지 고통스러운 자기 변명과 합리화의 과정을 거치며 번번이 좌초하고 굴복해왔다. 감정의 파도는 예측 불가능하게 밀려왔다 밀려가며, 단단해 보였던 의지의 해안선을 끊임없이 침식시킨다. 결심을 새로이 다질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마법의 주문을 건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때까지 지키자! 그러지 못하면 차라리 그냥 죽는 편이 낫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결심을 지키지 못했을 때조차 나는 여전히 숨을 쉬고, 생각을 하고, 이 지루한 존재를 이어간다. 죽음은 결코 결심의 실패에 대한 즉각적인 대가로 찾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비극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유튜브 채널 '5분 뚝딱 철학'을 통해 지혜의 편린들을 접한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한번 시지프의 신화를 만났다. 카뮈가 해석한 그 영원한 부조리의 상징.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의미 없어 보이는 거대한 바위를 끝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도록 선고받은 시지프들이다. 존재 자체에는 본질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그 무의미함 속에서 의미를 창조하고 부여하려는 모순적인 생명체들. 이 부조리한 삶의 조건 속에서 선험적인 목적이나 가치는 부재한다. 그런데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또다시 실천 사항을 짜고,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 안간힘을 쓴다.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 이 무의미해 보이는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계속할 것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나만의 방식으로 비틀어 본다. "나는 결심한다, 고로 존재한다(Volo, ergo sum)." 나의 실존은 사유가 아닌, 부서지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는 이 결심의 행위 속에서 희미하게 증명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음악이 바뀌었다. 선율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마치 신호라도 받은 듯 창밖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다. 베란다 너머 나뭇잎들이 소란스럽게 몸을 비틀며 격렬한 춤을 춘다. 열린 창틈으로 시원한 공기가 파도처럼 밀려 들어와, 끈적하게 달라붙었던 습기를 걷어내고 맨살을 부드럽게 간지럽힌다. 자연의 예측 불가능한 리듬과 나의 정체된 내면이 순간적으로 미묘하게 공명하며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밤사이 스며들었던 서늘한 기운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렬해진 햇살을 피하기 위해 붉은색 암막 커튼을 드리운다. 묵직한 천이 창문을 덮자 방 안은 아늑한 어둠에 잠긴다. 이럴 때마다 나는 바깥의 눈부신 햇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마치 오랜 시간 나를 찾아온 반가운 친구를 매정하게 문전박대하는 것 같은 근거 없는 죄책감. 하지만 때로는 이 강렬한 밝음으로부터의 의도적인 도피가 필요하다. 눈부심은 때로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내어 진실을 가리거나,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다.
점심으로는 '리틀 대구' 튀김과 흰 밥, 그리고 새콤달콤하게 조린 적양배추를 먹었다. 단출하지만 필요한 영양과 미각적 만족감을 충분히 채워주는 한 끼. 포만감과 함께 찾아온 나른함 속에서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는다. 이번에는 고스틀리 키시스(Ghostly Kisses)의 'Where Do Lovers Go?'가 귓속을 나직하게 흐른다. 노래 제목이 던지는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하지만, 그 울림은 기억과 감정의 깊은 심연까지 파고든다. 사랑하는 이들은 정말 어디로 가는 걸까? 한때 서로의 우주였고, 영원을 약속했던 관계들이 어떻게 그토록 허무하게 부서지고 흩어져 기억 속의 희미한 잔상으로만 남게 되는 걸까. 음악은 대답 대신 먹먹한 여운만을 남긴다.
'리틀 대구'. 이것은 스페인에서 '페스카디야(pescadilla)'라고 불리는 작은 생선을 나와 '바다'가 부르는, 우리만의 은밀한 암호 같은 이름이다. 다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이 작은 명명 행위를 통해, 우리는 언어의 공식적인 경계를 넘어 우리만의 소소하고 친밀한 소통 체계를 구축한다. 이런 사소한 약속들이 모여 관계의 결을 만들어간다. 이 행위는 이국 땅에서의 고립감을 희석시키는 작지만 의미 있는 의식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술안주 삼아 연탄불에 구워주시던 노가리와 비슷한 생김새와 크기를 가진 이 작은 물고기. 우리는 이곳 알리칸테에서 리틀 대구를 즐겨 먹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값이 싸고, 튀기거나 구웠을 때 맛이 좋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 깊고 푸른 지중해의 물살을 가르며 자유롭게 헤엄쳤을 그 생명체들의 살점은, 이제 막 나의 위장 속에서 강력한 위산에 의해 천천히 분해되고 있다. 생명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이토록 냉혹하고, 동시에 지극히 자연스럽다. 한 생명의 죽음이 다른 생명의 에너지원이 되고, 소화와 배설, 그리고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지는 이 끝없는 고리는 장엄하면서도 서늘하다. 나는 그 거대한 순환의 일부로서, 잠시 이 생선들의 에너지를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다.
식곤증이 무겁고 짙은 구름처럼 온몸을 짓누르며 나를 수평의 세계로 유혹한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하지만 오늘은 자지 않을 생각이다.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소파나 침대에 눕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활동량은 줄고, 배는 더부룩하게 나오며, 기분마저 침체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오늘부터는 그 관성의 고리를 의식적으로 끊어내기로 결심했다. 잠시의 편안함 대신,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했다. 그냥 이렇게, 흰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귓가에 흐르는 음악을 배경 삼아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 어떤 거창한 목표나 주제를 정하지 않고,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의 조각들, 감정의 편린들을 아무런 검열 없이 자유롭게 풀어놓을 것이다.
카프카가 일기나 편지에 쏟아냈던 것처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잘 짜인 스토리가 아니라, 오롯이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기록하기 위한 글쓰기. 타인과의 소통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자 내면의 심연을 탐색하는 행위로서의 글쓰기. 표현의 궁극적인 목적이 설득이나 공감이 아닌, 발견과 이해에 있는 문장들. 오늘은 어제와는 다르게 바람 한 점 없다. 창밖의 나뭇잎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공기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무거운 정적 속에 고요히 침잠해 있다.
변함없이 맑고 푸른 하늘. 스페인 남부, 이곳 알리칸테로 오기 전 잠시 머물렀던 독일의 코블렌츠는 비가 잦은 도시였다. 라인강과 모젤강이 만나는 그곳의 축축하고 흐린 날씨에 나는 종종 투덜거렸었다. 그때는 이토록 눈부신 지중해의 햇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 얼마나 간절하고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살갗을 따갑게 태울 듯 내리쬐는 오늘 같은 날에는, 오히려 그때 그 코블렌츠의 서늘하고 촉촉한 비가 아주 살짝 그립기도 하다. 인간의 욕망이란 이토록 변덕스럽고, 언제나 현재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것,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모양이다. 만족이란 어쩌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일까.
'알리칸테는 언제나 맑음 (Alicante is Always Sunny)'
예전에 즐겨 보았던 괴짜 미국 시트콤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It's Always Sunny in Philadelphia)'의 제목을 차용한 이 문구는, 이곳 알리칸테의 변하지 않는 기후적 정체성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담아낸다. 끝없이 쏟아지는 햇살은 이곳의 풍경과 사람들의 기질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하고 불변하는 상수다. 그 시트콤 속, 어딘가 한참 모자라고 이기적이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이고 밉지 않게 느껴졌던 캐릭터들. 그들은 늘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황당한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지만, 그 소동 속에는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숨겨져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종류의 코미디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주변의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들, 그 안에 숨겨진 예상치 못한 유머와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경쾌한 웃음 뒤에 감춰진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쓸쓸함과 페이소스를 담아내는 그런 이야기. 삶의 비극성을 정면으로 응시하되, 그것을 유머로 승화시키는 글쓰기.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의 절반은 여전히 열려 있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조금이라도 순환시키기 위한 작은 노력. 나는 이미 웃통을 벗어 던지고 편한 반바지만 걸친 차림이다. 딱딱한 의자 대신, 공기를 넣어 사용하는 동그란 찜 볼(gym ball)을 의자 삼아 앉아 있다. 엉덩이 아래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탄성이 허리에 가해지는 부담을 덜어준다. 거실에서는 '바다'가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고 있다. 그의 등 뒤로 화면의 불빛이 명멸한다. 때로는 우리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바뀌는 날도 있다. 내가 소파에 누워 영화나 드라마에 몰두하고,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자신의 글을 쓰거나 작업을 하는 시간. 우리는 각자의 독립적인 공간과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조용히 함께하는 법을 서서히 배워가는 중이다. 침묵 속에서도 오가는 미묘한 교감, 그것이 우리가 터득한 동거의 방식이다.
이제 나는 외부 세계를 향한 감각의 창을 닫고, 오롯이 나의 글 속으로, 내면의 풍경 속으로 깊이 빠져들려고 한다. 눈을 가만히 감으면, 텅 빈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상들이 떠오르고, 이름 모를 화자가 나타나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의 목소리는 때로는 놀랍도록 내 자신의 목소리와 닮아 있고, 때로는 전혀 낯선 사람의 음색을 띤다. 글쓰기란 어쩌면 이렇게, 내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개의 다중적 자아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혼란스러운 합창 속에서 나만의 진실을 길어 올리는 여정.
바로 맞은편에, 하늘거리는 소재의 멋들어진 푸른 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이, 혹은 이 만남이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듯이,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수백 년 된 명화 속 인물의 표정처럼 완벽하게 계산된 듯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봄날의 햇살처럼 놀랍도록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내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갈 때까지, 그 미소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입가에 머금은 채 고요히 기다렸다.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멈춘 것처럼, 시간은 그녀의 존재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이윽고 내가 그녀의 바로 앞에 마주 서게 되자, 그녀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수정처럼 맑고 또렷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가요?"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단 네 개의 음절로 이루어진 그 질문이 정적을 가르며 곧장 내 가슴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정확히 관통했다. 숨이 멎는 듯한 충격과 함께, 나는 아무런 대답도 찾아낼 수 없었다.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까. 두려움의 실체는 너무 많거나, 혹은 너무 모호해서 단 하나의 단어로 규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깊고 투명한 눈동자는 마치 잘 닦인 거울처럼, 나조차 외면하고 있던 내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 그 혼돈과 불안의 심연까지 남김없이 비추는 듯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사이, 방구석에 놓인, 완전히 건조되어 바스러질 듯 오그라든 장미 꽃다발이 담긴 유리 꽃병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싱그러운 생명력과 화려한 색채로 가득했을 그 투명한 용기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흔적과 시간의 잔해만을 쓸쓸히 담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당하고 평온한 그녀의 미소에서는, 알 수 없는 종류의 자부심, 혹은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어떤 확신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는 이미 내가 찾지 못한 답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는 듯이.
나는 황급히 눈을 돌렸다. 그녀의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을 피하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해 촉발된 내면의 격렬한 혼란을 잠재우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머릿속은 마치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무겁고 혼탁해졌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파편들이 끈적한 점액질의 물속에서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고, 삶을 이루는 온갖 괴팍하고 비논리적인 상상들이 제멋대로 펼쳐지는 이 기묘한 공간에, 나는 이 낯선 여인과 마주 선 채, 이미 어떤 예감이나 속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지점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것은 회피할 수 없는 진실과의 대면, 혹은 자기기만과의 결별을 요구하는 순간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나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가?
이 근원적인 질문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치며 나를 괴롭혔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 의외로 쉽게 순응하며 살아왔다. 예상치 못한 만남 속에서 여자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기도 했고, 그 끝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갈 수 있는 수많은 길들이 여기, 내 앞에 이렇게 무심하게 펼쳐져 있지 않았던가? 선택의 가능성은 무한했지만, 그 무한함 자체가 오히려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거대한 미로였다. 어느 방향이 진정으로 '옳은' 길인지, 혹은 그런 길이 애초에 존재하기는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울한 허탈감이 납덩이처럼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쌓이고 좀이 슨 낡은 옷장처럼, 내 가슴 속에는 무겁고 답답한 감정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목적지가 없으므로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것은 내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되뇌는 일종의 만트라(mantra)였다. 삶의 본질적인 무의미함, 혹은 목적의 부재를 인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찾아오는 기묘한 종류의 자유. 그 자유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지도 않고,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 하지도 않았다. 세속적인 성공이나 안일함에 기대어 허영심을 충족시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이 치열한 세상의 경쟁과 소용돌이로부터 한 발짝 옆으로 비켜나 있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기만하며 다짐했다. 가장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자기 위안과 합리화가 얼마나 공허하고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내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타인들의 생각과 기대가 창조해낸 허상, 즉 세상이 나에게 덧씌우고자 하는 '인격'이라는 가면을, 나는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필사적으로 회피하며 살아왔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규정되고 만들어진 자아는 결코 진정한 '나'일 수 없다는 깊은 불신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느긋하고 관조적인 나의 중심 시선은, 아주 신중하고 찬찬히 지상에 존재하는 온갖 피조물들과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산물들을 마치 박물관의 관람객처럼 두루 살피며 무심히 지나갔다. 나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의 적극적인 참여자가 아닌, 한 발짝 떨어진 냉담한 목격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러다 문득 담배 생각이 나면 거리낌 없이 불을 붙여 연기를 빨아들였고, 배가 고프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햄버거나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랬으며, 목이 마르면 생각 없이 탄산음료를 들이켰다. 오직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만을 최소한으로 충족시키는, 어찌 보면 지극히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한 삶의 방식이었다.
밤을 함께 보내는 여자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여자와 함께 보낸 지난밤의 기억은 그 전 주의 밤과 놀랍도록 비슷했고, 그 전 주의 밤 역시 지지난 주의 밤과 거의 흡사한 패턴의 복사본에 불과했다. 모든 만남은 마치 미리 짜인 각본처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시작되고, 비슷한 과정을 거쳐, 별다른 감정적 잔여물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 관계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그저 순간적인 외로움을 달래고 육체적 쾌락을 얻기 위한, 약간의 돈과 시간만 있으면 가능한 손쉬운 교환. 육체적인 교감은 있었을지 모르나, 영혼의 깊은 접촉이나 진정한 이해는 부재한 관계들이었다. 서로의 체액은 뒤섞일지언정, 마음과 마음은 결코 온전히 섞이지 않는 덧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역사상 유례없이 풍요로운 세대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살아가는 일' 자체는, 내가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덧붙인 불필요한 욕망의 무게만큼이나 고되고 수고스럽게 느껴졌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넘어서는 과도한 욕망들이야말로 삶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어찌 보면 진부하지만 뼈아픈 깨달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자 문득, 눈앞의 모든 것이 희미해지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눈앞의 여인도, 방 안의 풍경도, 나 자신의 존재마저도 한순간에 그 실체를 잃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 공허해진 공간을 가로질러, 방 안 전체를 이 구석에서 저 구석까지 채우는 듯한, 형언할 수 없이 길고 깊은 갈증이 안개처럼 드리웠다. 그것은 단순히 목이 마르다는 물리적인 갈증이 아니었다. 존재의 근원을 향한, 혹은 진정한 의미와 연결을 향한 형이상학적인 갈망이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자, 희미한 얼룩이 만들어낸 무늬가 마치 숲 속의 오솔길처럼 보였고, 그 길 위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남긴 듯한 아로새겨진 작별 인사의 잔영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아주 선명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아쉬움의 감정이 덧없이 길게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마치 시간 자체가 물질적인 형체를 얻어 그 자리에 응고된 것처럼 느껴졌다. 희망과 좌절, 설렘과 불안 같은 상반된 감정들이 통제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마치 뇌세포 사이를 질주하는 예측 불가능한 전기 신호처럼 격렬하고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이 짧고 강렬한 만남 속에 나타난 저 미소 짓는 여인은, 내 메마른 감정의 사막에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첫 페이지를 쓰게 만든,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예측 불가능한 바람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내 인생이라는 불확실한 서사 속에서 그녀가 차지하게 될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지금 그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재평가하는 과정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서로 연결하고 이어 붙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념의 조각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마치 실수로 바닥에 쏟아버린 복잡한 퍼즐 조각들처럼, 흩어진 기억과 감정의 파편들을 앞에 두고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어떤 연유로 이 모든 것이 이토록 산산조각 난 파편이 되었는가? 그 균열이 시작된 최초의 지점,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차갑게 식어버린, 설명할 수 없는 무작위적인 끌림과 헤어짐으로 점철된 관계들의 연대기. 이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어떤 일관된 패턴이나 의미를 찾아내려는 나의 노력은 어쩌면 처음부터 헛된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릇하고 불길한 종류의 불안감이 가슴 한구석을 끈질기게 파고들며 자리를 잡았다. 내 가슴, 즉 감성은 이 혼란스러운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곱씹으라고 속삭였지만, 내 이성은 마치 물에 젖은 개가 몸을 털 듯 후드득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 이 모든 감상적인 생각을 떨쳐버리라고, 거칠게 고개를 저으라고 명령했다. 육체와 정신, 감성과 이성 사이의 이 해묵은 분열과 갈등. 그러므로 사는 것이 유난히 고되고 팍팍하게 느껴질 때면, 어김없이 그 정체 모를 쓸쓸함이 빈틈없이 내면을 가득 채우고 들어차, 마치 시장의 군중처럼 소란스럽게 웅성거렸다. 고독은 때때로 추상적인 개념을 넘어, 뚜렷한 무게와 부피를 가진 물리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를 압도했다.
아무튼, 현재의 나는,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이 남국의 도시, 알리칸테의 거리를 정처 없이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고립된 섬 갈라파고스에 사는 늙은 거북이 마냥,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단단하고 두꺼워진 등껍질을 등에 지고, 그저 느릿느릿 현실의 표면을 질질 끌며 나아가는 존재.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그 무게는 실제로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저 희미한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난밤에 경험했던, 꿈결처럼 아련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할 정도로 아늑했던 그 혼란스러움의 감각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기억은 결코 고정된 형태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재생되고, 재해석되며, 현재의 감정과 필요에 따라 미묘하게 변형되어 새로운 의미를 끊임없이 획득한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혼란과 무의미함 속에서, 나는 아주 낮은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지극히 작고 사소한 생각을 기획하고 그것을 꾸준히 실천하려는 미약한 노력을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느 날 예고 없이 불현듯 찾아와, 점차 내 하루의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중요한 일거리로, 마침내 내 삶의 중심부에 단단히 자리 잡고 말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시작이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자라나, 삶의 가장 중요한 축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이 행위, 즉 글쓰기를, 이 부조리하고 혼란스러운 세간(世間)을 채우는 나만의 방식이자, 내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의무이며 동시에 누려야 할 권리로 스스로 정의 내렸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의 해석을 통해 역설했듯이, 끝없이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그 행위 자체에서 삶의 의미와 존엄성을 찾는 것처럼. 이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마도 그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비록 나의 저항이, 이 흰 책상 앞에서 홀로 고독하게 문자를 엮어 나가는 글쓰기라는 지극히 미약하고 개인적인 형태일지라도.
그리고 나는, 오늘도, 내일도, 아마도 내가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다. 깊은 공허함 속에서도, 존재의 무의미함에 대한 자각 속에서도, 나는 묵묵히 글자를 모아 단어를 만들고, 단어를 엮어 문장을 만들고, 문장들을 쌓아 단락을 이루고, 그 단락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마치 광활한 우주의 빈 공간에 흩어져 있던 미세한 먼지들이 서로를 끌어당겨 마침내 빛나는 별이 되듯이.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나의 이야기가, 언젠가는,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고독한 영혼에게 가 닿아, 아주 작을지라도 따뜻한 위로나 깊은 공감의 순간을 선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희미하지만 끈질긴 희망을 가슴 한편에 품은 채로. 그 희망이야말로 내가 이 무의미한 바위를 계속해서 밀어 올리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