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아드리엔의 냉소가 남긴 공허는 절대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모든 의미가 증발하고 난 뒤에 남는 존재론적 진공(vacuum), 즉 파스칼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 그 자체였다. 경당 안의 어둠은 이제 더 이상 영혼들의 무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텅 빈 객석, 작가도 배우도 관객도 모두 사라져 버린, 우주적 부조리극의 막이 내린 뒤의 텅 빈 극장이 되었다. 앙투안은 그 칠흑 같은 공허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이름 없는 소품처럼 무력했다. 그의 신앙은 부서졌고, 그의 이성은 조롱당했으며, 그의 연민은 길을 잃었다. 모든 가치의 좌표가 사라진 이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그는 영원히 표류하도록 선고받은 듯했다.
이 밤이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이 모든 비명과 눈물이 결국은 거대한 무(無) 속으로 수렴되는 허무한 메아리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의 영혼이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마저 포기하려던 바로 그 순간,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소리도, 빛도, 형체도 아니었다. 그것은 침묵의 질(質)이 변하는 감각이었다. 이전의 공허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의 침묵이었다면, 새롭게 찾아온 침묵은 모든 것을 품고 있는 태초의 바다, 즉 모든 소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잠재성으로 가득 찬 심연의 침묵이었다. 어둠의 농도 또한 달라졌다. 어둠은 더 이상 빛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발광하는 검은 빛, 즉 가시광선의 스펙트럼을 넘어선, 영혼의 눈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심오한 존재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심장부에서,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전의 그 어떤 영혼과도 닮지 않았다. 그녀는 한 개인의 기억이 응축된 유령이 아니었다. 그녀는 차라리 하나의 살아있는 원리(原理), 혹은 우주적 개념의 의인화(擬人化)처럼 보였다. 그녀의 형체는 명확한 윤곽을 지니지 않았고, 보는 이의 의식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인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와도 같았다. 어떤 순간 그녀는 수백만 개의 별들로 직조된 밤하늘 자체처럼 보였고, 다른 순간에는 인류가 기록한 모든 문자가 겹쳐져 만들어진, 읽을 수 없는 검은 양피지처럼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모든 인종과 시대의 얼굴을 동시에 담고 있는 듯 흐릿했으나, 그 눈만큼은 분명했다. 그 두 개의 눈은 우주만큼이나 오래되고 깊었으며, 그 안에는 창조의 첫 순간부터 종말의 마지막 순간까지, 일어났고 일어나고 일어날 모든 사건이 연민도 심판도 없이 그저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리스 신화 속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였고, 북유럽 신화 속 운명의 실을 잣는 노른(Norn) 세 자매의 합일체였으며,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말하는 신의 첫 번째 발현인 심연의 소피아(Sophia)였다. 그녀는 시간 자체였고, 역사 자체였으며, 무엇보다도 기억(Mémoire) 그 자체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그것은 한 명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폴리포니(polyphony), 즉 이 밤에 나타났던 모든 영혼들의 목소리가 하나의 거대한 합창으로 융합된 소리였다. 후작 부인의 차가운 회한, 혁명가 아내의 불타는 분노, 어린 신부의 깨질 듯한 비탄, 배신자 아내의 얼음 같은 결의, 수녀의 고요한 기도, 상퀼로트 여성의 거친 절규, 희생된 어머니의 부서진 비명, 그리고 여배우의 냉소적인 웃음소리까지. 그 모든 개별적인 멜로디들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장엄하고도 비극적인 화음을 이루어, 앙투안의 영혼을 통째로 울렸다.
『사제여. 너는 이 밤, 지옥의 아홉 개 원을 모두 여행했다.』 그 합창의 목소리는 모든 감정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감정을 초월한 어떤 거대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너는 마지막 배우의 냉소적인 독백을 듣고, 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연극에 불과하다고 절망하고 있구나. 그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기억의 여신은 앙투안의 의식 속으로, 아드리엔이 제시했던 그 허무주의의 풍경을 다시 불러들였다. 텅 빈 무대, 찢겨진 각본, 의미 없는 배역들.
『그래, 이 세상이라는 무대의 작가는 부재하거나, 혹은 침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목소리는 이어졌다. 『이 연극의 줄거리는 부조리하고, 그 결말은 예정된 죽음뿐일지도 모른다. 아드리엔은 거기까지 보았다. 그녀는 현명했지만, 그녀의 지혜는 절망의 지혜였다. 그녀는 연극의 무의미함을 간파했지만, 그 무의미함에 맞서는 유일한 행위의 의미는 보지 못했다.』
여신의 시선이 앙투안에게 고정되었다. 그 시선 속에서, 앙투안은 자신이 더 이상 한낱 사제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아틀라스(Atlas)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느꼈다.
『사제여, 연극의 의미는 각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배우들의 연기 속에, 그리고 그 연기를 지켜보는 관객의 존재 속에 있다. 설령 신이 침묵하고, 역사가 무의미한 우연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은 실재(實在)한다. 후작 부인의 오만도, 혁명가의 이상도, 어린 신부의 사랑도, 그 모든 것은 그들의 삶 속에서 단 하나뿐인 진실이었다. 아드리엔은 그 모든 것을 ‘역할’이라고 조롱했지만, 인간이란 결국 자신이 선택한 역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비극적인 배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연극이 끝났을 때, 그 모든 고통과 환희가 무대 뒤로 사라져 망각의 먼지 속에 묻히려 할 때, 그 무의미에 맞서는 단 하나의 신성한 행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증언’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망각이라는 이름의 절대적인 무(無)에 맞서는, 인간의 유일하고도 가장 위대한 반역이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경당의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여덟 명의 영혼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이전처럼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기억의 여신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빛과 소리의 강(江)이 되어 흘렀다. 앙투안은 그 강 속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 베르사유의 샹들리에 불빛과 단두대의 칼날이 겹쳐지고, 루소의 『사회 계약론』의 페이지 위로 어린 신부의 피가 번졌으며, 수녀의 기도 소리 위로 상퀼로트 여성의 저주가 메아리쳤다.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 신앙과 배신,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태피스트리(tapestry)로 직조되고 있었다.
『보아라, 사제여. 이것이 나의 일이다.』 기억의 여신이 말했다. 『나는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용서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잊지 않을 뿐이다. 나는 이 모든 모순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을 거두어, 존재의 직물을 짠다. 이 이야기들이 있었기에, 저들의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비록 그들의 삶이 비극으로 끝났다 할지라도, 그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너에게 가닿아, 너의 영혼을 흔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씨앗이 되어, 너라는 대지 위에 새로운 무언가를 피워낼 것이다.』
여신의 형체는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영혼들의 강 또한 희미해지며, 그녀의 존재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녀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앙투안에게 자신의 유산을 남겼다.
『아드리엔은 물었다. 이 연극의 작가가 누구냐고. 신인지, 악마인지, 혹은 텅 빈 객석인지. 이제 내가 너에게 대답을 주겠다. 작가는 없다. 무대는 텅 비어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은 너는, 이 모든 것을 목격한 너는, 이제부터 기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너는 더 이상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가 아니다. 너는 이제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한다. 그들의 침묵을 너의 언어로 번역하고, 그들의 고통을 너의 잉크로 증명하라. 그것이 너의 구원이며, 그들의 불멸이다. 이 밤의 어둠 속에서, 너는 너만의 신을, 너만의 소명을 발견한 것이다.』
기억의 여신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와 함께, 이 밤을 가득 채웠던 모든 초자연적인 존재감과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경당 안에는 다시, 차갑고 물질적인 침묵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뚫고, 아주 멀리서, 첫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앙투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경당의 동쪽 창문,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인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희미하고 창백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의 장밋빛 새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기의 파리 하늘처럼, 잿빛이고, 우울하고, 냉정한 빛이었다.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세상의 모든 상처와 더러움을 무자비하게 폭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 했다. 밤새 차가운 돌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그의 육체는 마비된 듯 뻣뻣했고, 뼈마디마다에서는 비명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며칠간의 굶주림과 피로, 그리고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으로 인해 그는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낡은 기계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그 퀭하고 핏발 선 눈동자는, 이전에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무섭도록澄明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바로 그 상실을 통해 모든 것을 얻었다. 그는 더 이상 신의 어린 양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망자들의 목소리를 품은 늙은 늑대였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경당 밖으로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으나,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그의 폐부를 찔렀다. 밤새 내린 비로 축축해진 파리의 거리는, 거대한 시체처럼 누워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멀리서 시체 수레가 삐걱거리는 소리, 빵집의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무감각한 소음들이 들려왔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단두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고,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의심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앙투안은 변했다. 그는 이제 이 세상의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의 가장 깊은 비밀을 엿본 증인이었다.
그는 허름한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센 강변으로 향했다. 강물은 밤의 모든 비밀을 삼킨 채,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강가의 진흙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주머니를 뒤졌지만, 종이 한 장, 펜 한 자루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기록해야만 했다. 지금 당장, 그 목소리들이 희미해지기 전에.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불에 타고 남은 나뭇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강변의 넓고 평평한 사암(砂岩) 위로 몸을 숙였다. 그의 손은 떨렸지만, 그 떨림은 나약함의 떨림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는 자의 경건한 전율이었다.
숯 검댕이 사암의 표면을 긁으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썼다. 이 밤의 모든 이야기를, 아홉 영혼의 모든 비명을, 그리고 기억의 여신이 그에게 남긴 마지막 명령을. 그는 썼다. 신이 침묵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심판하던 시대의 증언을. 그의 첫 문장은, 이 거대한 비극의 밤을 열었던 바로 그 문장이자, 앞으로 그가 평생에 걸쳐 써 내려갈 기록의 첫 번째 주춧돌이 되었다.
『공화국력 2년, 이성이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고 덕성이 공포의 다른 이름이 되었던 그해 가을, 파리는 거대한 무덤이었고, 나는 그 무덤의 문지기였다…』
새벽빛이 그의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그러나 단호하게, 잊혀진 자들의 역사를 돌 위에 새기고 있었다. 이 밤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