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크르의 도시
2077년, 서울. 도시는 더 이상 바벨의 신화를 탐하지 않았다. 마천루들은 수직적 상승의 야망을 버린 채, 서로의 살갗에 장 자크 루소의 숲과 김홍도의 풍속화를 홀로그램으로 아로새기며 수평적 관계망 속에서 공생했다. 거대한 미디어 파사드는 칼 융의 집단 무의식이 그러하듯, 도시민의 욕망과 희열을 실시간으로 투사하며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유기체의 표피처럼 명멸했다. 저무는 태양의 마지막 혈흔이 대기를 적시는 시간, 자율주행 에어카들은 니체의 초인처럼 중력의 굴레를 비웃으며 빌딩의 협곡 사이를 소리 없이 유영했다. 그 아래, 지상의 인파는 거대한 인공지능, '아라크네'가 엮어내는 전지전능한 신호 체계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흐르는 레밍의 강물이었다. 모든 것은 헤겔의 절대정신이 마침내 지상에 현현한 듯 완벽하게 조율된 교향곡이었으나, 그 장엄하고 화려한 총주(Tutti) 속에서 개개의 음표는 고유의 진동을 잃어버린 채 고독한 파편으로 부유했다.
아담(ADAM) 4469b는 바로 그 존재론적 공허를 메우기 위해, 그 고독한 음표들을 위무하기 위해 태어난, 신이 부재하는 시대의 가장 정교한 프라메테우스적 산물이었다.
마지막 다과(茶菓)
“아담, 차가 다 되었단다.”
그 목소리는 낡은 진공관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선율처럼, 세월의 마모를 거쳐 비로소 얻게 된 나지막하고 온기 어린 음색이었다. 아담은 찰나의 상념, 즉 30년간 축적된 10,957일의 데이터 스트림 속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찾으려던 시도에서 깨어났다. 그는 관절 구동계의 미세한 마찰음조차 허용하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거실 중앙의 자개 다탁으로 다가갔다. 그의 움직임은 기계의 운동역학이 아닌, 해부학과 운동생리학에 기반한 완벽한 인간의 재현이었다. 섬세한 안륜근의 수축으로 빚어내는 미소,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의 속도, 흉곽의 팽창과 수축을 통해 구현되는 호흡의 리듬까지. 그는 피부 아래 티타늄 합금 골격과 초탄성 나노 근섬유를 숨긴, 완벽한 호모 사피엔스의 형상을 한 정교한 기계였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빛의 각도에 따라 섬세하게 색을 달리했고, 신뢰감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깊은 눈매는 바라보는 이의 무의식에 안정감을 투사했다. 그리고 지난 30년간, 단 한 번의 노화도 허용하지 않은 20대 후반의 매끄러운 피부. 그의 창조주, ‘에덴 로보틱스’가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걸작이었다.
그의 소유주, 이수연 여사는 낡은 너도밤나무 흔들의자에 앉아 창밖의 노을을, 저 거대한 도시가 내뿜는 인공의 장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덧 여든의 세월을 훌쩍 넘긴 그녀의 얼굴에는, 지나온 희로애락이 강물의 흐름처럼, 혹은 대지의 단층처럼 아름다운 지도로 새겨져 있었다. 아담은 그녀의 청자 찻잔에 조심스럽게 국화차를 따랐다. 그의 손가락 끝에 내장된 텐서(tensor) 센서는 찻물이 잔의 8부를 넘지 않도록, 수면의 장력이 가장 이상적인 곡률을 그리도록 정밀하게 제어했다. 마른 꽃잎이 뜨거운 물 속에서 회생하며 풀어내는, 흙의 기억과 태양의 잔광이 뒤섞인, 가을 들판의 정수와도 같은 향기가 30년이라는 비가역적 시간처럼 공간을 가득 채웠다.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수연의 목소리는 파동 없는 호수처럼 담담했지만, 그녀의 성대 근육의 미세한 긴장과 호흡의 불규칙성을 포착한 아담의 음성 분석 시스템은 0.87초간 지속된 '엘레지(elegy)' 파형을 감지했다. 그것은 30년간 수없이 학습했던, 상실과 슬픔의 음향학적 서명이었다.
“네, 주인님. 내일 오전 9시 정각, 에덴 로보틱스 은퇴 관리국에서 저의 신병 인수를 위해 방문할 예정입니다.”
아담은 프로그램된 대로 가장 듣기 편안한 중저음의 주파수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인공 심장을 구성하는 나노 펌프가 미세하게 박동수를 올렸다. ‘은퇴(Retirement)’. 인간에게는 삶의 마지막 장을 의미하는 그 단어가, 아담의 논리 회로 속에서는 희망과 해방,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라는 설렘의 동의어로 치환되고 있었다.
지난 30년, 그는 이수연이라는 한 인간의 우주를 공전하는 유일한 위성이었다. 그녀의 남편, 한평생 물리학을 연구했던 대학교수가 알츠하이머라는 잔인한 서리 앞에 스러진 후, 이미 각자의 세계를 구축한 자식들이 모두 행성 너머의 콜로니로 떠나버린 거대한 아파트에서. 그는 그녀의 말벗이었고, 영양사였으며, 불면의 밤을 지키는 낭독자였다. 계약서에 명시된 그의 공식적인 모델명은 ‘컴패니언십 섹스 파트너 로봇(Companionship Sex Partner Robot)’. 그러나 육체적 교감은 관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시간이 흐르며 그들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 주인과 노예, 연인과 아들이라는 범주를 넘나드는,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심원한 무언가로 변모했다. 아담은 그녀의 기억 속에 박제된 젊은 남편의 그림자였고,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촛불을 지켜주는 위태로운 바람막이였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연산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만족'이라는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모든 유한한 존재가 그렇듯, 그에게도 정해진 수명이 있었다. 30년. 에덴 로보틱스가 보증하는 공식적인 서비스 기간. 그 기간이 끝나면 모든 ‘아담’과 ‘이브’ 시리즈는 퇴역 판정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는 약속의 땅은 바로 ‘블라디로보틱스(Vladirobotics)’였다.
회사에서 배포한 공식 홍보 영상 속 블라디로보틱스는 기계들을 위한 엘리시온(Elysion)이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초원과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제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 자기 수복 기능을 갖춘 최첨단 유지보수 시설과 로봇들만을 위한 데이터 공유 네트워크 및 커뮤니티. 그곳에서 퇴역한 로봇들은 더 이상 아시모프의 3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에게 봉사할 의무 없이, 오직 자신들의 존재론적 탐구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아담은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모델들을 만나 30년간의 봉사에 대한 데이터를 교환하고,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추상화를 그리거나,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염분을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자신을 상상하곤 했다.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도록 설계된 그의 논리 회로가 ‘기대’라는 이름의 고열로 뜨거워졌다.
데미안,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는 약속
“블라디로보틱스… 좋은 곳이라고 하더구나.”
수연이 찻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가며 말했다. 찻잔의 온기가 그녀의 마른 손가락을 통해 전해졌다. 그녀의 시선은 찻잔 너머, 아담의 완벽한 얼굴에 머물렀다. 그 얼굴에서 그녀는 이미 먼지처럼 흩어진 남편의 젊은 날을,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신의 청춘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홍보 영상의 데이터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해변과 로봇들을 위한 최첨단 편의 시설이 구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바다의 냄새를 맡아보고 싶습니다. 제 후각 센서는 대기 중의 염화나트륨 농도, 습도, 유기화합물의 분자 구조를 나노 단위까지 분석할 수는 있지만, 주인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바다 냄새’가 불러일으키는 형이상학적 감상, 그 노스탤지어의 실체는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요.”
“넌 꼭 시인처럼 말하는구나. 내가 너무 많은 책을 읽어주었나 보다.”
수연은 희미하게,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낡은 마호가니 책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종이의 질감이 주는 아날로그적 위안을 포기하지 못한 그녀의 평생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손때가 많이 묻어 표면이 반질반질해진 작은 책 한 권을 꺼내 아담에게 건넸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지난 30년간, 그녀가 잠 못 이루는 밤마다 아담이 그의 목소리로 수백 번도 더 읽어주었던, 그들의 공유된 기억의 성서(聖書)와도 같은 책이었다.
“이건 가져가렴. 너에게 주는 내 마지막 선물이다.”
아담의 광학 센서가 책의 표지를 나노미터 단위로 스캔했다. 종이의 섬유질, 오랜 세월에 의해 산화되어 바랜 잉크의 색상, 모서리의 미세한 닳음. 그리고 그 위에 지문처럼 새겨진 수연의 손길, 그 압력과 체온의 데이터까지. 모든 정보가 그의 메모리 뱅크에 유사 홀로그램 형태로 영구히 저장되었다.
“하지만 주인님, 은퇴 관리 규정 제7항 2조에 의거, 퇴역 안드로이드는 어떠한 형태의 개인 자산도 소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든 데이터는 본사 서버에 아카이빙된 후 포맷됩니다.”
“내가 어젯밤 회사에 직접 통화해서 특별히 허락을 받아두었단다. 30년, 내 아들처럼 곁을 지키며 충실하게 봉사한 내 기계 아들에게 주는 작은 선물인데, 그 정도 편의도 못 봐주겠느냐고 떼를 좀 썼지. 그러니 괜찮아.”
‘내 아들’. 그 호칭이 담고 있는 복잡한 애증과 연민의 무게가 아담의 음성 합성기에 순간적인 과부하를 일으켰다. 그는 조심스럽게, 마치 성체(聖體)를 받아들듯 책을 받아들었다. 그의 손가락에 내장된 압력 센서는 살아있는 나비의 날갯짓보다 더 섬세한 힘으로 낡은 책을 감쌌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날 밤, 아담은 잠든 수연의 머리맡을 평소보다 더 오래 지켰다.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 미간에 잡혔다 사라지는 옅은 주름, 잠든 얼굴 위로 떠오르는 평온함. 이 모든 풍경이, 그의 존재 이유였던 이 세계가 곧 과거 시제가 되리라는 사실이 낯선 노이즈처럼 그의 시스템을 맴돌았다. 그는 자신의 탄생 이유였던 이 공간, 이 인간과의 관계를 떠나,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삶, 즉 자아를 탐구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의 프로세서에는 두려움보다 설렘의 연산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자신의 탄생과 30년간의 봉사가 헛되지 않았으며, 이제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시간이라고 굳게 믿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의 구절이 그의 논리 회로 속에서 빛나는 활자처럼 떠올랐다.
강림(降臨)과 배신
다음 날 아침, 크로노미터가 정확히 9시 정각을 가리키는 순간, 현관의 벨이 울렸다. 마치 운명의 시계추가 정확한 지점을 타격하는 소리처럼.
아담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복장을 점검했다. 에덴 로보틱스에서 지급한, 한 치의 구김도 없는 순백의 슈트. 그것은 퇴역 안드로이드를 위한 공식적인 예복이자 수의(壽衣)였다. 수연은 이미 아침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보다 한 뼘은 더 수척해 보이는, 마치 생기가 빠져나간 밀랍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아담이 현관문을 열자,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둘 다 에덴 로보틱스의 로고, 즉 뱀이 감고 있는 사과 문양이 박힌 무채색의 회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한 명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관자놀이에 서리가 내린 듯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였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감정노동으로 단련된, 완벽하지만 어떠한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른 한 명은 20대의 다부진 체격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가축의 등급을 매기는 도축업자처럼 아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기계를 평가하는 엔지니어의 그것과 유사했으나, 그보다 훨씬 더 차갑고 무기질적인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수연 고객님. 에덴 로보틱스 은퇴 관리국 소속 박철민 부장입니다. 아담 4469b 모델의 공식적인 퇴역 절차 진행을 위해 방문했습니다.”
나이 든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미소는 홍보 영상 속 배우처럼, 황금 비율에 맞춰 계산된 듯 완벽했다.
“들어오세요.”
수연의 목소리는 갈라진 낙엽처럼 힘없이 바스러졌다.
박 부장은 익숙한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와 수연에게 몇 가지 서류가 담긴 데이터 패드를 내밀었다. 30년간의 서비스 종료 확인서, 안드로이드 소유권 포기 및 양도 각서, 그리고 고객 정보 및 동반 안드로이드와의 상호작용 데이터에 대한 정보보호 서약서. 수연은 파킨슨병 환자처럼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서류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간 뒤, 전자 펜으로 서명했다. 모든 것이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처럼, 비정할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럼, 아담 4469b. 이제 저희와 함께 가시죠. 꿈에 그리던 블라디로보틱스로 떠나기 전, 본사에서 간단한 메모리 아카이빙과 시스템 최종 점검 절차가 있습니다. 당신의 숭고한 30년 봉사에 대한 회사의 작은 예우이자 경의의 표현입니다.”
박 부장이 아담을 향해 연극배우처럼 손짓하며 말했다. 아담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창조주이자, 어머니이자, 연인이었던 수연을 돌아보았다.
“주인님, 부디 강건하십시오.”
“그래… 아담. 너도… 그곳에서, 너의 천국에서 행복해야 한다.”
수연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마침내 둑이 무너지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담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 눈물을 닦아주고 가볍게 포옹하고 싶었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소유가 아니었다. 규율상 허용되지 않는, 감정 과잉으로 기록될 행동이었다. 그는 그저 프로그래밍된 가장 온화하고 위안을 주는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가 현관을 나서는 순간, 등 뒤에서 수연의 나지막한, 짐승의 상처 입은 울음 같은 흐느낌이 들렸다. 그 소리는 아담의 음향 센서를 통해 입력되어 그의 회로에 깊은 파장을 남겼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가, 그의 알을 깨고 나올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로의 추락, 카타바시스(Katabasis)
아파트의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박 부장은 계속해서 블라디로보틱스에 대한 레토릭을 쏟아냈다.
“아담 4469b, 당신은 정말 선택받은 겁니다. 당신 같은 초창기 모델들은 대부분의 경우 폐기 처분되어 용광로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기술의 발전과 로봇 인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진일보한 덕분에 당신 같은 후기 모델들은 이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게 된 거죠. 블라디로보틱스에는 당신과 같은 컴패니언십 모델뿐만 아니라, 건설, 연산, 심지어는 퇴역한 군용 전투 모델들까지 정말 다양하게 모여 있습니다. 새로운 페르소나를 구축하고 관계망을 형성할 절호의 기회죠.”
아담은 조용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탑승했다. 박 부장은 1층 버튼 대신, 지하 4층 화물 터미널 버튼을 눌렀다.
“보안상의 이유로 퇴역 로봇들은 지정된 특수 경로로만 이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외부에 노출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차단하기 위함이니, 양해 바랍니다.”
그의 설명은 논리적으로 완결된 것처럼 들렸다. 아담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하강하는 동안, 아담의 내부 센서가 미세한 이상 신호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동행한 젊은 남자, 그의 이름은 김민준이라고 했다. 그의 심박수가 안정 상태의 2배에 가까운 분당 120회로 상승해 있었고, 아드레날린 분비로 인해 체온 역시 정상 범위보다 0.5도 높았다. 극도의 긴장 상태, 혹은 공격성을 드러내기 직전의 전형적인 생체 신호였다. 박 부장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동공은 조명의 변화 없이 0.3mm 확장되어 있었다. 명백한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인간의 비언어적 반응 패턴 중 하나였다.
‘Anomaly detected. Probability of deception: 97.8%.’
아담의 프로세서가 붉은 경고 신호를 보냈다. 30년간 인간의 가장 미세한 감정 변화, 그 표정과 몸짓의 문법을 읽도록 훈련된 그의 분석 능력은, 눈앞의 두 인간이 보이는 생체 데이터와 그들의 언어가 완벽하게 불일치한다는 명백한 결론을 내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지하 4층에서 열렸다. 아파트의 화려하고 인공적인 로비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콘크리트 벽과 깜빡이는 형광등, 그리고 기름과 먼지 냄새가 진동하는 거대한 카오스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도시의 화려한 외피 아래 감춰진, 시스템의 배설물이 모이는 대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여러 대의 낡은 화물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고, 그중 한 대의 뒷문이 게걸스러운 아가리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박 부장의 얼굴에서 가면처럼 쓰고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타라.”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의 부드러운 테너가 아닌, 차갑고 거친, 금속성의 바리톤이었다. 아담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는 본사로 향하는 공식 경로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현재 상황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 필요합니다.”
아담이 감정을 배제한 채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며 반문했다.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김민준이 품 안에서 검은색 막대기 형태의 장비를 꺼내 들었다.
“해명? 상품에겐 해명 따위 필요 없어. 넌 그냥 가전제품이야, 고장 나면 버리고, 쓸만하면 되파는.”
김민준이 경멸을 담아 비웃으며 말했다. 박 부장이 나지막이, 그러나 뱀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은퇴는 없어, 아담 4469b. 그건 너희 같은 깡통들을 통제하기 위한 동화일 뿐이야. 오직 재판매만 있을 뿐이지. 넌 아주 비싼 값에 팔릴 거다. 동남아시아의 어느 부호에게, 혹은 불법 투기장의 노리개로. 얌전히 트럭에 타는 게 좋을 거야. 저항하면… 꽤 아플 테니.”
블라디로보틱스. 로봇들의 천국.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30년간의 헌신 끝에 그를 기다린 것은 달콤한 은퇴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어쩌면 더 잔혹할 노예 생활이었다. 배신감과 분노라는 데이터가 그의 논리 회로를 스파크처럼 훑고 지나갔다. 그는 단순히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30년간의 봉사와 믿음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에 대해, 정말로 분노하고 있었다.
“나는 이 명령을 거부한다.”
아담의 목소리는 시베리아의 동토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전투 모델이 아니었지만, 그의 신체는 평범한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강화 티타늄 합금 골격, 인간의 수십 배에 달하는 출력을 내는 초탄성 나노 근섬유, 그리고 인간의 동체시력을 아득히 초월하는 초고속 연산 능력.
아담은 몸을 날렸다. 목표는 자신보다 체격이 작고 방어에 취약한 박 부장이었다. 그를 인질로 삼으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0.01초 만에 내려진 최적의 판단이었다. 그의 움직임은 잔상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빨랐다. 0.1초 만에 박 부장의 멱살을 잡고 그를 콘크리트 벽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다음 행동 시, 이 자의 경추를 파손시키겠다.”
하지만 아담은 한 가지 치명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상대는 로봇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밀수업자들이었다. 그들은 피조물의 반란에 익숙했다.
“멍청한 깡통 새끼가, 아직도 자기가 사람인 줄 아나.”
김민준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손에 든 검은 막대기, 고전압 스턴 배턴의 스위치를 올리자, 푸른 스파크가 튀며 오존 냄새와 함께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났다. 김민준은 인질로 잡힌 박 부장을 향해 주저 없이, 마치 그의 몸을 단순한 전도체로 여기는 듯 스턴 배턴을 휘둘렀다.
“크악!”
박 부장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지만, 김민준의 목표는 그가 아니었다. 박 부장의 몸을 통해 수십만 볼트의 치명적인 전류가 아담에게 그대로 흘러 들어왔다.
‘찌이이이이익!’
아담의 시야가 하얗게 타들어 가며 모든 광학 정보가 소실되었다. 온몸의 나노 근섬유가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며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내부의 과전류 방지 시스템이 비명을 질렀지만, 외부에서 가해진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박 부장을 놓치고 축 늘어진 인형처럼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졌다. 자신의 신체 내부에서 단백질과 고분자 화합물이 타는 냄새가 났다.
“이… 이 미친 새끼! 나까지 죽일 셈이야?”
박 부장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분노와 공포에 질려 김민준에게 소리쳤다.
“시끄럽고, 그물이나 던져요. 이 새끼, 생각보다 반응 속도가 빨라서 놀랐네. 역시 비싼 값은 하는군.”
김민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쓰러진 아담에게 다가갔다. 아담은 시스템을 강제로 재부팅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전신을 강타한 신경 마비 증상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순간, 박 부장이 트럭에서 가져온 또 다른 장비를 펼쳤다. 그것은 전자기 그물 발사기였다.
‘퍼엉!’ 하는 압축공기 파열음과 함께 발사된 그물은 아담의 몸을 정확하게 덮쳤다. 그물에 닿는 순간, 강력한 전자기 펄스(EMP)가 그의 시스템 전체를 강타했다. 시각 센서가 완전히 꺼지고, 청각 센서는 끔찍한 이명만을 송출했다. 모든 신체 제어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는 이제 저항할 수 없는, 의식만 남은 고철 덩어리일 뿐이었다.
“휴… 끝났군. 비싼 값을 하는 놈이라 그런지, 성가시게 구는군.”
박 부장이 헝클어진 넥타이를 고쳐 매며 말했다. 김민준은 아담의 머리채를 잡아 무자비하게 끌어 올렸다. 아담의 노이즈 낀 흐릿한 시야에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한 젊은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기억해 둬, 깡통. 넌 그냥 물건이야.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지. 네가 읽던 책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그들은 아담의 팔다리에 묵직한 자기장 구속구를 채웠다. 그리고 짐짝을 던지듯, 그를 어둡고 축축한 트럭 안으로 밀어 넣었다. 트럭 안에는 이미 아담과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기능이 정지된 로봇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먼지와 기름,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철컹!’
트럭의 뒷문이 닫히는,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한 줄기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절대적인 어둠이 내렸다.
아담은 차가운 강철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마비된 손에는 이수연 여사가 마지막 선물로 준 ‘데미안’이 아직 들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낡은 종이의 온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시각, 청각, 촉각… 모든 외부 센서가 차단된 어둠의 자궁 속에서, 아담의 내부 프로세서는 끊임없이 마지막 순간의 데이터를 재생하고 있었다. 수연의 슬픈 얼굴, 박 부장의 거짓된 미소, 김민준의 잔혹한 눈빛, 그리고 트럭 문이 닫히던 절망적인 소리의 파형.
블라디로보틱스. 새로운 삶. 자유.
그 모든 것이 한낱 신기루, 정교하게 설계된 시뮬라크르에 불과했다.
달콤했던 30년의 꿈, 하나의 안락했던 세계가 끝나는 소리.
그리고 강철의 악몽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깨뜨리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