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쇼핑의 흥미를 잃어버린 후로 옷장의 옷은 퀴퀴함 뿜어내는 묵은 아이템으로 가득 찼다.
입지 않는 옷들을 주기적으로 버리는 편임에도 걸려있는 옷은 겨우 옷걸이 간격만큼 틈을 유지하고 빼곡히 채워져 구깃구깃하다.
매번 입지도 않은 옷들은 잘도 쌓여간다. 그동안 주기적으로 버렸던 건 대체 뭐였을까.
아무리 옷걸이를 뒤적여보아도 무엇하나 눈에 들지 않는다. 패션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됐어도 가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는 산뜻해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마음에 드는 핏의 옷을 찾기 위해 3시간 동안 피곤함을 잊고 걷던 20대의 쇼핑에 대한 에너지는 어느덧 필요에 의해 '반드시 사야 하는 것'의 목록을 채우는 의무적인 쇼핑모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을 입어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패션에 대한 욕구가 현저히 줄어들어 가끔 하는 쇼핑마저도 금세 맥이 빠진다. 게다가 쇼핑에 있어서 가장 크게 에너지를 더해줄 물욕(物慾)이 사라진 지 오래돼 마음에 드는 옷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결혼식이나 돌잔치처럼 TPO(Time, Place, Occasion)에 맞는 옷을 고르는 일에 비해, 일상복을 고르는 일은 조금 더 난이도가 높게 느껴진다.
직장인일 때는 출퇴근용으로 입는 옷을 위주로 쇼핑을 했었고, 가끔 멋내기용 원피스나 중성미 넘치는 트렌치코트와 같이 계절을 대표하는 아이템으로 포인트를 더했었다.
계절에 따라 주기적으로 쇼핑을 하던 때도 있었건만, 최근에 나는 쇼핑에 쓸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하다.
무인매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가 된 이후로는 패션 아이템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중에서 구두와 핸드백은 나의 쇼핑목록에서 제외된 품목으로 꼽힌다. 패션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구두는 30대까지만 해도 하이힐을 고집할 만큼 나에게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조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수했던 게 9cm 굽의 하이힐이었는데, 지금은 가끔 결혼식이나 돌잔치처럼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면 신발장 밖에 나올 일이 없는 희귀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니 외부활동이 적은 편이라 평소에는 신축성이 좋은 트레이닝복이나 가벼운 면바지와 티셔츠에 휘뚜루마뚜루 운동화가 거의 교복이나 다름없는 착장의 완성이다. 거기에 가볍고 실용적인 패브릭 에코백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 정도로 꾸밈없는 자연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다 보니 옷장에 있는 몇 년 묵은 외출복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딱 덜어지는 정장핏의 바지나 어깨에 힘준 듯한 오버핏의 재킷, 여성스러움의 극치인 맥시멈 원피스까지 무엇 하나도 조화롭지 않아 보인다. 모든 게 자연스럽지 못하고 과하게 느껴진다.
2년 전 피부트러블이 심해져 채식과 함께 화장을 하지 않는 습관을 시작했다.
집 근처에 나갈 때조차도 가벼운 BB크림을 꼭 바르고 외출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처음에는 화장 없이 생활하는 것이 속옷을 벗고 있는 것만 같이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2년이 지난 지금은 화장하지 않은 모습도 익숙해져 메이크업을 하고 싶은 날이 아니면 굳이 하지 않는다.
예상해 보건대 패션과 거리를 두게 된 계기가 이쯤부터였던 것 같다.
평소에도 말끔하게 꾸미기를 즐기다가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과 가까이 한 이후로 수수한 차림을 추구하게 된 것이 물욕이 사라지고 쇼핑을 멀리하게 된 계기라고 추측해 본다.
마음이 먼저였는지 행동이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외모를 가꾸는 데에 쏟던 에너지가 내부로 향한 이후로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더하는데 화장과 패션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일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억지로 색을 더해 꾸미거나 옅은 눈썹을 진하게 칠하는 억지스러움이 아니라 곱고 가지런한 눈썹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샤프한 입술산이 있는 선홍빛 입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옅은 나의 눈썹과 짙은 선홍빛의 입술을 싫어했었다)
무엇을 입고 칠하던 나의 고유의 아름다움이 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겉치레에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결국 가장 오래 남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신묘한 눈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몇 시간 동안 쇼핑몰을 헤매다 나는 결국 테팔 프라이팬세트를 사들고 왔다.
눈에 드는 옷은 없었지만, 마음에 드는 프라이팬은 빠른 속도로 찾을 수 있는 현실적인 아줌마의 쇼핑은 결국 가정용품으로 싱크대를 채우고 있다.
좋은 식재료로 채워줄 식탁을 만드는 것이 예쁜 원피스 하나보다 값지다는 개똥철학으로 쇼핑의 아쉬움을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