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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름 Feb 19. 2023

태생이 미니멀리스트

통장 잔고를 보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 왜 이렇게 돈이 많지?'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의 저는 입사한 지 한 달이 채 안되어 첫 월급을 받지도 못한 샛병아리 회사원입니다.

아직 월급을 수령하지도 못했는데 왜 제 통장 잔고는 그득그득 차있냐 이 말이에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돈이 부족하다고 느낀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득하니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대학교 때는 알바를 하니까 제 용돈벌이를 충분히 할 수 있었고, 대학원생이 되었을 때는 대학원 월급으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할 만했거든요. 사실 제가 다녔던 대학원은 대학교 때처럼 장학금을 받을 수 없는 학교였습니다. 또 등록금이 대학의 1.5배 정도라서 맨 처음에는 부담스럽긴 했지만 막상 생활해 보니 오히려 돈이 남더라고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제가 돈이 남아도는 이유에 대해 분석 및 논의해 보겠습니다.

1.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

술자리 한 번에 약 5만 원, 담배 한 갑에 약 5천 원.

술을 일주일에 한 번 먹고 담배를 이틀에 한 갑 피운다고 가정하면, 20.0+7.5=27.5 만원

저는 매달 약 30만 원을 절약하고 있는 거라고요!

2. 대식가가 아니다.

맥도널드 기준 불고기버거가 아니면 세트를 다 먹기 조금 어려운 정도랄까요. 한 끼에 컵라면 소컵에 삼각김밥 하나 먹는 정도랄까요. 소식가까지는 아니고 중식가...?라고 하겠습니다.

3. 가성비 제품을 좋아한다.

저는 'ㅇㅇㅇ 저렴이'를 좋아해요. 에스티로더 파운데이션 저렴이, 크리니크 블러셔 저렴이, 슈에무라 하드포뮬러 저렴이 등... 심지어 지금은 화장도 안 해요... 회사 다니면 화장할 줄 알고 샀는데 점점 귀찮아져서...

4. 전자기기를 잘 모른다.

특히 고사양 제품 이런 거 관심이 아예 없습니다. 켜지기만 하면 돼요. 지금 쓰는 노트북도 충전기를 뽑으면 3초 후에 전원이 꺼지지만 충전기를 꽂아두면 잘 켜져서 유용하게 잘 쓰고 있습니다.

5. 돈 쓸 시간이 없다.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대학원에서는 12시간 근무를 해야 했거든요. 졸업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주말에도 공부만 한 것 같아요. 2년 동안 운동복 두벌 산 게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언젠가는 한 달에 쓴 돈이 26만 원인 거예요. 기숙사비가 21만 원 이거든요. 친구 생일이라 한 번 놀았을 때 3만 원, 편의점에서 2만 원, 나머지 식사는 전 달에 사둔 냉동 음식이랑 전 달에 결제했는데 덜 쓴 교내 식권으로 해결했더라고요. 왜 그렇게 대충 먹었는지 돌이켜보면 정말 너무너무 바빠서 밥 먹으러 1층 갈 여유가 없었다고 답하겠습니다. 물리적으로 바쁘기도 했지만 제 마음속이 더 분주해서 끼니를 거르거나 대충 때우기 일쑤였어요.


이 글은 동정심을 유발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싶지 않으므로 과거회상은 여기까지 하고! 그렇다면 퇴근 후의 삶이 있고 주말마다 놀러 다니는 지금은 왜 돈이 이렇게 많다고 생각하느냐! 이에 대해서도 정밀한 분석 및 논의를 진행해 볼까요?


1. 안 써 버릇해서 잘 쓰지를 못한다.

졸업했고! 취업했으니! 화끈하게 나를 위한 선물! 을 도저히 못하겠어요. 졸업한 것도 선물이고 취업한 것도 선물인데 또 선물을 해야 할까요? 물론 부모님과 이모, 이모부까지 핸드폰 다 최신 것으로 바꿔드리고 골프채 하나씩 사드렸습니다. 그래도 주변은 본인을 위해 수백만 원짜리 명품도 사고 50만 원짜리 파마도 하는데 저는 뭔가 아깝더라고요. 사실 명품백을 사려고 했는데 마음에 드는 가방이 없었어요. 아, 정정하자면 '그 돈을 내고 쓸 만한 마음이 드는' 가방이 없었습니다.

마법의 단어를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 그 돈에 그걸 한다고?

2. 공짜로 돈 버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저는 돈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바로 적금과 예금에 돈 넣어두기 일쑤입니다. 사실 주식도 하는데 지금 -40%라서 생각해 보면 저는 거지나 다름없네요. 아,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주식을 하면 매달 배당금을 주는데 이게 고등학교 때 용돈 받는 느낌이라 짜릿하면서 몽글해진달까요. 통장에 들어있는 돈은 제가 한 일에 대한 대가이지만 저는 공짜돈을 훨씬 좋아하기 때문에 이리저리 장난을 쳐보고 있습니다.

3. 돈이 많다는 것은 주관적이다.

사실 제 통장 잔고를 오픈하지 않았죠.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살짝 논란의 여지도 있기도 하니까 공개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우와!' 누군가에게는 '고작?' 할 금액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오늘 하고 싶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돈 때문에 정말 하고 싶은 경험을 못한 적도 없습니다. 추운 걸 싫어해서 저번 달(1월)에 치앙마이에서 2주 살고 오기도 했고, 제 은사님과 감사한 분들께 마음껏 선물과 식사대접을 하며 마음의 풍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 제 마음을 더 풍요롭게 할 방법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고뇌하고 있고, 이후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거면 된 것이에요. 저는 이거면 되었습니다. 


미니멀리스트는 자발적으로 불필요한 물건과 일을 줄여 본인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태도, 이를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태생이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는, 공백에서 피어오르는 여유에 황홀을 느끼는 미니멀리스트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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