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vu letar Mar 10. 2023

그 남자의 BGM (3)

사람의 실제 삶에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복선이 있다고 믿는다. 이번에 다시 그것을 느낀 것은, 주성의 양팔에 있는 타투 때문이었다. 재작년에 같은자리에 비슷한 의미의 타투가 있는 남자를 만났었다. 왼팔에는 자신의 이름을 필기체로, 오른팔에는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영구적인 방법으로 팔에 자신의 이름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 사람은 자의식의 과잉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팔에 쓰인 자신의 이름을 읽어보아야만 오늘도 자신인 것을 알았다. 둘 중 무엇이든, 그것은 결핍의 증거다.






주성은 코끝의 송골송골한 땀을 닦으며 푸른 리넨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필기체로 휘갈겨진 그의 이름이 보였다. 그가 맥주잔에 얼음 두 개를 넣고 맥주를 따랐다. 얼음과 거품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부풀어 올랐다.


 나 사실 2년 전에 파산했어. 아버지가 신도시에 투자를 좀 했는데 그게 잘못됐거든. 아빠 입장에선 장사는 계속해야겠지 묶여있는 건 많지 그러다 보니 그걸 내가 도맡게 됐어. 그날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울었어. 내 몸에 이렇게 많은 수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이. 콧물이건 침이건 눈물이건 뭐가 뭔지 구분도 안되게 운 거야. 그때부터 이상한 습관이 생긴 것 같아. 네가 싫다는 그런 영상이나 사진들. 아니면 누가 내 몸을 만져줘야만 잠이 왔어. 네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 뭐가 어쨌든 벌써 2년이 지났고 예전에 갖고 있던 차들은 다 팔았지만 어쨌든 지금도 외제차 타잖아. 이 정도만 돼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생긴 거야. 난 이제 모든 걸 털어놨어. 너도 네 뜻을 솔직하게 말해줘.


네가 생긴 거야. 앞에 어떤 말이 있었는지에 따라 그 문장은 때로 감동을 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따로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다.

재작년에 만난 남자는 회생이었고, 이번에는 파산. 회생이 가고 파산이 왔다. 어떤 부분에선 우스꽝스러운데,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웃어야 할까.


정 과장은 끼고 있던 은테 안경을 코 위에서 들었다 놓았다 하며, 당시에 울었던 울음을 흉내 내고 있었다. 나는 무남독녀 외동딸로 예쁨을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혼자인 아들과 딸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잘 알고 있다. 물론 모든 가정은 비슷하고도 다르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무녀독남인 정 과장을 과연 그의 아버지는 파산자로 만들고 싶었을까. 나이 40도 안 된 창창한 아들을. 남의 귀한 자식으로 입에 금칠을 하려는 그 귀한 아들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신용을 외제차와 맞바꾸었다. 이 개연성 떨어지는 영화를 보며 나는 어느 부분에서 울고 웃어야 할까. 여전히 정 과장은 자기 손을 코 주변에서 둥글리며 그 비통한 기분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 주변에서 흐르는 가식적인 기운이 내 코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잔을 들었다. 유난히 향이 진한 맥주였다. 그걸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다. 이제 해가 제법 길어져 창밖은 아직 환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잎들이 저마다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햇빛과 바람과 뿌리, 잎사귀가 숨 쉬는 숨. 이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일반적 은총'이라 부른다. 신께서 그가 사랑하는 인간들을 위해 모두가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내려준 것들을. 연녹색의 빛을 보고 있으니 어제보다 눈이 밝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이 다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빛이 비치어야만 눈에 보이는 부유하는 먼지들, 카페 1층 마당에 떨어져 있는 겨울 꽃잎, 그 한 잎 한 잎이 바람에 날려 깡총 뛰는 모습. 지난 계절이 남긴 흔적들. 나는 이제 그것들이 모두 보였다.


 생각해 볼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 사랑한다.



주말 내내 밤마다 울적한 기분으로 선잠에 들었고, 그 기분은 월요일까지 이어졌다. 출근해 거의 미끄러질 것 같은 자세로 의자 안에 기대앉아 천장을 봤다. 옆자리에 앉은 성 대리가 말을 걸었다.


 연애가 잘 안 돼가요? 사내연애? 표정이 별로네요?


 ······.


 내 여자친구가 그러던데. 사내연애는 절대 안 되는 게 국룰이라고.


 나한테 관심 있니?


 예?


 난 네 연애에 1도 관심이 안 가는데. 네 여자친구 생각에도 관심 없고. 실적 별로라며. 일 하세요.






나는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탕비실에서 아이스 코코아를 타고 있는 서 총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를 똑똑 두드린 후 낮은 소리로 물었다.


 총무님, 혹시······. 정 과장 수입이 어떻게 돼요?


 네?


 알잖아요. 이 나이에 그런 것도 모르면서 계속 연애하는 거. 불안한 거. 하하. 되게 웃겨. 나한테 자기 수입 공갤 안 해. 이상한 거 아니에요?


 아, 네. 그렇긴 한데, 그걸 제가 직접 공개하긴 좀 그래서요.


나는 탕비실 문쪽을 쳐다보았다.


 기본 급여는 다 비슷하니까 알아요. 실적만 좀 알려줘요. 어차피 지사 사람인데, 뭐 어때요. 입 꾹 다물게요.


서 총무도 탕비실 문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알려드리는 건 좀 그래요. 근데 이렇게만 말씀드리자면, 저······. 별로예요.


 별로예요?


 네······. 별로.


 하위라는. 말씀이시죠? 하위 몇 프로쯤 돼요?



BGM이 OO인 남자 (4)에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남자의 BGM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